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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오브 발할라-171화 (171/208)

# 171

171화. 누더기 (2)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겠지.”

오딘의 회색 눈동자에 어린 현기가 천천히 침잠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저 먼 곳, 폐허가 된 올림포스 정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제우스가 오만한 표정으로 휘하 병력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게 전부인가?

지지직- 노이즈 낀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을 들은 찌꺼기가 흠칫 놀라 고개를 숙였다. 언제고 간에 제쳐 버릴 장애물로 생각하던 신이다. 하지만 그 신이 타락하여 찌꺼기가 되었다.

찌꺼기의 권력 구도가 재편되었다.

올림포스의 찌꺼기, 그 맨 위에 제우스가 자리했다.

-묻지 않느냐.

“…아직 모두 모이진 못했습니다.”

-늦군.

제우스가 툭 내뱉는 말에 찌꺼기가 고개를 조아렸다.

“도망친 신들을 잡는 일을 하느라…….”

-…쯧, 아무래도 아스가르드를 기습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군.

“네? 그게 무슨……. 조금 늦게 시작한다 해도…….”

제우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전기가 파직파직 들끓는 얼굴을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아스가르드는 어지간해서는 기습할 수 없는 곳이다.

“어째서……?”

-오딘이 있으니까.

제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딘. 바로 곁에 있는 신계의 주인. 올림포스의 영역이던 제국이 이제는 아스가르드의 영역이 되었다.

쓸모를 다해 던져 줬다고는 하나, 썩어도 준치. 타락하며 이성이 옅어지고 본능이 강해진 제우스는 쓸모없는 곳을 놓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딘의 옥좌, 흘리드스캴프는 그 어느 곳이라도 살필 수 있는 신물이다. 빠르게 병력을 모으라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지.

오딘은 기습을 눈치챌 수 있지만, 아스가르드의 병력이 방어를 준비하는 것과는 별개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다면, 방어선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전에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스가르드 공격 계획을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시간제한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온 세상 중에서 굳이 이곳을…….”

-쯧쯧, 바로 옆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그 옆집을 살피지 않는다? 우스운 소리군.

찌꺼기는 할 말이 없었다.

제 생각에도 그랬으니까. 제우스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병력을 살폈다.

그 얼굴에는 오만이 가득했다.

-곧, 곧이다.

수천, 수만이 될 것 같은 병력.

평범한 인간의 병력도 아니다. 기가스와 마찬가지로 끔찍한 괴물들. 제각기 어떤 능력을 지닌 찌꺼기들이다.

인간 병력으로 이들을 막아서려 한다면? 적어도 두 배, 세 배의 병력이 필요하리라.

-곧, 이 세계가 내 손에 들어온다.

올림포스를 잃었지만, 상관없다.

올림포스와는 비교도 안 될 너비를 지닌 세계.

그 세계의 왕이 될 생각이니까.

제우스의 탐욕이 넘실거렸다.

-어떤가, 오딘. 준비는 잘되어 가는가?

흐흐흐-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며 허공에 말을 거는 제우스.

그는 오딘이 제 말을 들었을 거라 확신했다.

신계의 왕과 타락한 신계의 왕.

두 신왕이 이끄는 전쟁이 머지않았다.

* * *

치이익.

불판 위의 고기는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고 있었지만, 차마 거기에 손댈 생각이 들지 않았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오딘께서 제우스의 침공이 머지않았다고 하신 만큼, 발할라에는 다시 강제 징집령이 떨어졌으며…….]

어쩐지 장사가 늘 잘되던 이 고깃집이 허전하더니.

이런 이유였던가?

“으음…….”

눈살을 찌푸렸다.

타락한 유피테르의 힘을 보았으니,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금 간 신성으로 어떻게든 발버둥 치려 하던 유피테르가 떠올랐다.

그의 벼락에 스러져 간 비너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녀는 알고 있었나.”

그녀가 말한 누더기.

내가 아는 가장 역겨운 누더기가 이 땅을 침공하려 한다니.

주먹을 꽉 쥐었다.

“복수의 기회로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에로스와 프시케. 지쳐 쓰러진 두 사람에게 가서 비너스의 신성을 다시 받아야겠다.

그러고 보니…….

“퀴에네라고 했던가?”

빈 의자 위에 덩그러니 올려둔 투구.

얻고 난 뒤, 딱히 살펴볼 생각을 안 했다.

이 역시 내 힘이 되어 줄 수 있을까? 투구를 들어 올려 쓰다듬었다.

“안 먹고 뭐 해요?”

이라호드가 입술을 삐죽이며 내 앞에 있는 접시에 고기를 얹어 주었다.

쓰게 웃었다.

“유피테르가 쳐들어온다니, 밥맛이 뚝 떨어져서 말이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먹어야 힘을 쓰죠.”

맞는 말이다.

전쟁에 있어서 보급이 중요한 이유가 뭐던가? 제대로 먹지 못한 병사가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를 생각하면 싸움 시작 전, 많이 먹고 힘을 길러 놔야 한다.

우걱우걱, 고기를 입에 밀어 넣었다.

“언제나처럼 맛있군.”

“크흐, 내가 한 거니까 당연하지!”

이그나르가 히죽 웃으며 가슴팍을 탕탕 쳤다.

단순한 놈이다. 피식 웃어 주고, 이라호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투구, 무슨 능력이 있는 거지?”

퀴에네.

나도 아는 물건이다.

플루토의 신물. 사용자를 투명해지게 해 주는 투구라던가? 단지 투명해질 뿐이라면 별 의미 없다. 예전 판도라와 만날 때에 투명 망토, 타른카페를 빌리기도 했으니까.

플루토가 싸움 도중에 투명해졌다고 한들 크게 강해졌을까? 글쎄다. 신성을 얻고 몸이 좋아질수록 눈에만 의존하는 싸움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오감을 모조리 이용하는 데다, 오감을 뛰어넘은 무언가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런 와중에 투명이라니.

별 의미 없다.

“타른카페나 다를 바 없다면…….”

“에이, 완전히 다른 물건이에요.”

이라호드가 말했다.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눈썹을 씰룩였다.

“그건 눈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에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투명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 이 차원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물건이죠.”

차원에서 벗어난다?

잘 이해가 안 된다.

“음. 그림자라고 생각해 봐요. 그림자를 때려 부술 수 있던가요?”

“그림자는 때려서 부술 수 있는 게 아니지.”

“네, 그런 상태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그림자.”

그 자리에 있지만 때릴 수 없는 그림자.

그에 반해 그 자리에도 없고, 때릴 수도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왜 플루토는 이걸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지?”

내 물음에 이라호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써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

“…그것도 그렇군.”

차원에서 벗어나니 뭐니 한 것도 사실 대단한 이야기다. 그런 걸 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어쨌건, 당장 써 보는 게 좋겠지.

투구를 들어 올리자 이라호드가 흠칫 놀랐다.

“뭐하는 거예요!”

“뭐하냐니, 한번 써 보려고 하는데…….”

이라호드가 질색했다.

“저주라도 걸려 있으면 어쩌려고요!”

저주? 플루토가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이 쓰면 발동하는 저주를 걸어 뒀을 가능성은 있다. 내가 이걸 얻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물건이니까.

하지만…….

“딱히 없군.”

신성의 흐름을 살펴본 결과, 저주 따위는 없었다.

투구를 뒤집어썼다. 그와 동시에 투구의 기능을 알게 되었다.

이 투구, 내 신성을 연결해야 쓸 수 있는 물건이다.

“…이렇게 발동하는 건가?”

신성을 밀어 넣자, 복잡하기 그지없는 권능이 발동되었다. 독특한 성질과 흐름을 가진 권능이라, 차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누비스의 낫으로 차원을 가를 때와 비슷하다.

“허.”

헛숨을 들이켰다.

한순간 주변이 회색으로 변했다.

이라호드가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그녀의 손이 내 가슴팍을 휘젓는다. 하지만 그 손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그녀는 서로 간섭할 수 없는 곳에 있다.

마치, 책의 페이지를 넘긴 것 같다. 한쪽에 글을 쓰고 넘긴다고, 그 글이 다음 장에 번져 있다? 그건 책이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다.

“…차원에서 벗어난다는 게 이런 의미였군.”

차원이라는 게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한 것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투구에 쏟고 있던 신성을 회수했다.

이라호드의 손을 피해 빈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방금, 퀴에네를 쓴 거예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물건이네요!”

그렇다. 하지만…….

“싸울 때 써먹을 수 있는 건 아니군.”

상대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고 신성을 회수해서 공격하는 식으로 운용할 수는 없었다.

“왜요?”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쓰게 웃으며 그녀에게 설명했다.

“시간이 너무 걸려.”

내가 권능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지라, 그 시간을 줄일 수도 없다. 발동에 대략 5초 정도가 들고, 취소에도 그 정도가 든다.

싸움 도중 모습을 감췄다 드러냈다 반복하기엔 긴 시간이다.

“아… 그래요?”

“플루토가 싸울 때 안 쓴 것도 이해가 간다.”

신성을 쏟으며 5초? 한창 격전을 펼칠 때 그 시간은 너무 치명적이다.

회수하는 데도 5초. 그 회수 시간에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면야…….

“내가 다시 나타날 때, 보이던가?”

최초의 일격으로 기습을 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 반투명하게 보이더라구요.”

퀴에네라는 이 투구는 잠입할 때 외엔 별달리 쓸 수가 없다.

잠입해서 무언가를 훔쳐 내기엔 최고겠지만…….

도둑질은 영 취미에 맞지 않는다. 차라리 적을 죽이고 전리품으로 얻어 내는 게 낫다.

“밥이나 먹어야겠군.”

투구를 대충 벗어 던지고, 고기를 집어 올렸다.

많이 먹어 두자.

“음.”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과일이 나왔다.

이라호드는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보는 중 인상이 구겨지는 게, 별로 유쾌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계에서는 과일을 먹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새삼 하계 일을 떠올리며 달콤한 맛을 즐겼다.

가끔 과일 맛을 본다 쳐도, 제국 도시를 치고서 포도주를 얻는 정도일까? 과일은 추운 곳에서는 꽤나 귀한 물건이었다.

추운 곳하니 생각나는 건데, 니플헤임에 있는 부족민들을 그냥 저리 두어야 하나? 무스펠헤임에 내 땅을 떼어 주니 마니 하더니…….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군.

이라호드에게 물어봐야겠다.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이라호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디슨.”

“음?”

“소집이에요. 회의에 참여하라는데요?”

회의? 무슨?

고개를 갸웃하자, 이라호드가 설명했다.

“제우스가 쳐들어온다잖아요? 방어를 준비해야죠.”

“…내가 가도 되는 건가?”

수르트와의 싸움을 앞두고 쉬라는 소리를 들었던 일을 되새겼다.

아직도 부족할 것 같지는 않지만…….

“네, 물론이죠. 오디슨을 빼놓으면 대체 누굴 부르겠어요?”

확답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지금 바로 회의를 시작한다던가?”

“아, 1시간 후래요.”

1시간…….

에로스와 프시케를 만나고 가도 될 시간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지원 요청은?”

“지금 당장 지원할 수 있는 곳은 이집트 신계뿐입니다. 곤륜이나 야마토 같은 곳은 바로 움직인다고 해도, 늦을 겁니다.”

발키리의 말에 펜리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늦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발키리가 슬쩍 펜리르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신계 연맹이 그리되고 난 뒤, 대규모 이동을 빠르게 할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제길- 펜리르가 눈살을 구겼다.

먼 동방의 신계에서 오는 데에 얼마나 걸릴까? 빠른 배를 타고 온다 해도 몇 달은 걸리지 않을까? 지원 병력을 이끌고 온다면, 몇 달은 무슨. 1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른다.

“후우, 그럼 이집트 쪽이라도 연락해 봐.”

“그게…….”

발키리가 눈치를 살폈다.

펜리르가 미간을 좁히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연락이 안 닿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

펜리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가 무너지면 지들 차례라는 것도 모르나…….”

쯧- 펜리르가 혀를 찼다.

제우스의 공격은 온전히 아스가르드의 힘으로 막아 내야 한다.

게다가, 문제는 외부에만 있지 않았다. 사실 내부의 문제가 더 골치 아팠다.

회의가 시작된 뒤, 펜리르는 속으로 토르를 욕했다.

‘제기랄! 어디로 갔는데 연락이 안 돼? 수련이니 뭐니 다 좋지만, 급한 연락은 받아야 할 거 아냐?’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 펜리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흠, 그러니까 방어전에 있어서 책임자는 대대로 근해를 수비하던 해신(海神)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겠소?”

뇨르드가 자리를 탐냈다.

방어 준비를 위한 회의였건만, 시작부터 엉망진창이다.

펜리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토르… 이 아저씨, 오기만 해 봐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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