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화. 누더기 (1)
올림포스, 명계의 왕. 플루토.
그 거창한 이름에 비하면 끝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 누구나 끝은 허무하기 마련인가?
씁쓸한 눈으로 무너져 내리는 플루토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 몸에서 플루토의 영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을 너무 과신한 걸까? 집어삼킨 영혼의 파도에 플루토의 영혼이 휩쓸렸다.
무너진 몸을 휘도는 영혼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아, 아아아… 삶이여…….
-죽고 싶지 않아…….
프로세르피나를 외치는 목소리는 없다.
씁쓸한 일이다. 그저 아내를 다시 보고 싶다 외치던 그를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쓰라리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마음을 느껴 본 탓일까?
하계에서 무모한 전쟁을 벌였던 것도 그 탓이었다. 부하를 잃고, 부족을 잃었다. 삶의 큰 덩어리가 붕괴하였을 때, 내 삶은 의미가 없어졌다.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다.”
그 자리에 삼촌은 없겠지만.
후- 한숨을 내쉬고 창을 다시 등에 짊어졌다.
그런데…….
뎅그렁!
“음?”
투구 하나가 데구루루 굴러왔다.
아까 플루토가 쓰고 있던 그 투구다. 죽은 이의 투구라는 게 껄끄럽다. 그런데… 음, 보통 투구가 아니다.
“오… 이 영롱한 광채!”
탄성이 절로 나오는 명품이다.
은색 투구는 언뜻 보기에는 제국식 투구를 닮았다.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하되, 얼굴에는 추가로 판을 덧댔다. 코와 볼을 가리는 M자 철판. 하지만 그게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다.
“…대체 뭘로 만든 거지?”
닭 볏을 닮은 투구 장식.
언제나 제국 놈들과 싸울 때, 투구에 시뻘건 털을 단 꼴이 우스웠다. 하지만 이건 그렇지 않다.
영혼인 듯, 불길인 듯 휘날리는 회색 연기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흐음…….”
투구를 만지작거릴 때, 우르릉-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힐끔 위를 쳐다보니 천장에서 흙먼지가 푸스스 날린다.
…젠장, 전리품을 확인할 때가 아니었군.
“비너스, 비너스의 영혼을 찾아라!”
아무래도 이 궁전에는 주인의 무덤이 되어 주는 기능까지 포함된 모양이었다.
* * *
영혼을 찾는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산 사람이라고 해도 작은 변화로 인상이 바뀌기 마련이다. 긴 머리를 짧게 자른다든가, 평소에 입지 않는 옷을 입는다든가, 안경을 낀다든가. 심하면 목욕만 하고 나와도 누군지 몰라볼 때가 있다.
그런데 희끄무레한 영혼이라면?
당연히 찾기 어렵다.
특히나, 영혼은 가장 인상 깊은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생전 마지막 모습과는 꽤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프로디테의 영혼은 금방 발견되었다.
“어, 어머니! 엄마!”
에로스가 버럭 소리쳤다.
체면 따위는 뒤로 미룰 정도로 급한 상황이었다.
쿠구궁! 궁전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으니까.
-…에로스, 내 아들.
“아, 아아! 엄마!”
에로스가 눈물을 흩뿌리며 아프로디테에게 달려들었다. 반가움을 가득 담아 와락- 껴안았다.
하지만, 영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
스쳐 지나가듯 관통한 에로스가 탄식을 흘렸다.
아프로디테가 정말로 죽었다는 걸 재차 확인한 느낌이다. 비수로 심장을 찌르는 게 이렇듯 아플까?
눈물만이 뚝뚝 흘렀다.
“여보! 어서요! 어서, 신성을 어머님께 드리세요!”
“아! 마, 맞다!”
에로스가 화들짝 놀랐다.
하데스가 죽어 버린 지금, 명계의 영혼들은 자유로워졌다. 신성이 있고, 아프로디테가 살아 있다는 신앙이 있다. 영혼과 신성이 합쳐지는 즉시, 부활할 수 있는 상황!
에로스가 품에서 신성을 꺼내 들었다.
-아… 내 신성.
아프로디테가 감탄했다.
본인이 품고 키워 온 신성이지만, 이렇게 정제된 신성은 정말 아름다웠다. 가장 최고급의 진주도 따라잡을 수 없을 분홍빛 광채. 매혹적인 그 모습은 눈이 달린 모든 사람이 탐낼 만한 것이었다.
외형이 그러한데, 실제 기능은? 신이 될 수 있는 것.
누가 그걸 탐내지 않겠는가?
아프로디테 역시 잠깐 홀렸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걸 오디슨에게 줬어.
“엄마! 무슨 소리야? 오디슨이 다시 내준 거야! 부활하라고!”
-…오디슨 당신은 대체…….
아프로디테가 한숨을 흘렸다.
이 신성을 우습게 볼 수 있을 위치에 있는 강력한 신들도 감히 이걸 거절하진 않으리라. 에로스가 괜히 오디슨을 보자마자 엎드려 빌었겠는가?
탐욕.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욕심을 알기에 한 일이었다.
잠깐 빌려준 것도 돌려주기 싫어하는 이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오디슨은 잠깐 빌려준 것도 아닌 아예 내어 준 것을 되돌려주었다.
보통의 절제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난 부활하지 않겠다.
“어, 엄마! 대체, 왜……?”
“어머님! 부활하지 않으시겠다니… 왜 그러세요? 네?”
아프로디테의 선언에 에로스와 프시케가 당황했다.
다시 한번 살아나겠다며 끔찍한 귀곡성을 내지르는 영혼들이 주변에 그득한데, 살아날 기회를 걷어차겠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자 상봉을 보고 있던 오디슨이 툭 뱉었다.
“…거, 유언이랍시고 남긴 게 부끄러워 그러시오? 난 신경 쓰지 않소.”
틱틱거리는 말투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따스했다.
아프로디테가 나지막이 웃었다.
-부끄러울 게 뭐 있겠어요? 알몸까지 보여 준 사낸데. 아니, 그보다 한 꺼풀 더 벗은 걸 보여 줬나?
킥킥-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에로스와 프시케가 눈을 끔뻑였고, 이라호드가 눈썹을 찌푸렸다.
오디슨이 당황했다. 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아니, 그래도…….’
반박하기 애매하다.
벼락에 맞아 피부가 녹아내린 꼴을 보여 줘 놓고서는…….
오디슨은 그저 입을 닫았다. 괜히 그녀가 죽을 때의 모습을 상상할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아프로디테가 피식 웃었다.
-다정하신 분.
중얼거리는 소리에 오디슨이 시선을 피했다.
에로스와 프시케는 뭐가 어찌 된 건지 잘 몰랐다. 하지만 당장 아프로디테를 부활시키고 싶었다.
오디슨이 새 아버지가 되든 말든, 일단은 살아서 반항도 해 보는 게 낫지 않나? 죽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투덜거리는 것보다 말이다.
“엄마, 대체 왜! 왜 그러는 거야? 응?”
에로스가 눈물로 호소했다.
순수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아프로디테는 자애롭지만 슬픈 미소를 띤 채, 에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저 시늉일 따름이다. 실제로 만질 수는 없었으니까.
-내 사랑스러운 아들, 에로스. 부서진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단다. 그게 신의 힘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몰라, 모르니까… 엄마, 제발…….”
-완벽한 수리는 사실, 새로 만드는 것보다 어려울지 몰라. 깨진 그릇을 원래대로 만든다고 그게 깨진 사실마저 없어질까?
“접착제 약간이 무슨 흠이 된다 그래! 어떤 새끼가 그걸 흠잡겠어! 그런 놈이 있다면 내가…….”
-…접착제 약간……. 안타깝게도, 그 정도가 아니란다.
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라호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당신… 사념(思念)인가요?”
사념.
어떤 강렬한 집착이 흔적으로 남는 것이다. 그건 원한일 수도 있고, 걱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영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명품과 같은 포장을 한다고, 그게 명품이 되는 건 아니니까.
아프로디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지금 분명 영혼이야.
“그럼 왜!”
에로스가 울부짖듯 물었다.
아프로디테가 쓰게 웃었다.
-절반 이상이 소멸된 영혼이 영혼이라 할 수 있다면… 나는 분명 영혼이지.
에로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프로디테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겨우 벼락을 떨어뜨리는 걸로 제우스가 올림포스의 왕이 되었다고 생각했니? 아스트라페의 벼락은 보통의 벼락과는 다르단다. 영혼을 찢어 내는 벼락이지.
“아…….”
에로스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아프로디테는 안쓰럽다는 듯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누더기가 되고 싶지 않단다. 죽었다 한들, 내가 미의 여신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 그것이 바로 나, 아프로디테였지. 이제는 그리될 수 없을 뿐이란다. 그러니, 에로스.
아프로디테가 에로스의 손아귀에 있는 신성을 가리켰다.
-그 신성은 주인에게 돌려주거라.
“이건 엄마의…….”
-내가 결정한 일이란다.
에로스의 표정은 차마 필설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픈 듯, 슬플 듯, 온갖 복잡한 마음이 뒤엉켜 그의 심장을 얇게 저몄다. 에로스는 입술을 꾹 깨물고 덜덜 떨었다.
아프로디테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고맙다, 아들.
천천히 아프로디테의 영혼이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보고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엄마… 엄마, 엄마……!”
버둥버둥, 허공을 잡으려 애쓰는 에로스.
아프로디테는 그런 에로스를 빤히 보다 오디슨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 아이를 잘 부탁해요, 오디슨.
“…걱정 마시오.”
빙긋, 아프로디테가 웃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에로스가 꺽꺽 울었고, 프시케가 그런 에로스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오디슨이 허공을 멍하니 보다가 물었다.
“…어디로 간 거지?”
“글쎄요.”
이라호드가 말했다.
“명계를 벗어난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쩌면, 신들의 신이 있을지도 모르죠.”
“…언젠가 그녀의 영혼이 되살아날까?”
부활이 아니다. 윤회.
오디슨이 입에 담은 것은 그런 질문이었다.
이라호드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각 신계에서 영혼을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취급하는 이유는, 영혼이 신계에 속해 있다면 다시금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계가 망하고, 소속된 곳이 없어진 영혼은?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모른다.
신마저도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모두 알 수는 없었다.
오디슨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한 맛이 남는 원정이었다.
“…일단은, 빠져나가자.”
쿠르릉- 진동이 거세졌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말이야.”
정신을 놓은 듯 엉엉 울어 젖히는 에로스와 프시케를 바라보았다.
프시케가 에로스를 부축했고, 일행은 서둘러 하데스의 궁전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다시 위그드라실로 가는 여정에 올랐을 때.
쾅쾅쾅! 우르르!
하데스의 궁전이 무너졌다.
올림포스의 멸망, 그 마침표가 찍혔다.
신계의 가장 큰 축 중 하나인 명계가 끝장난 것이다.
“…누더기가 되기 싫다.”
아프로디테의 말을 되새기며 오디슨은 전리품을 쓰다듬었다.
하데스의 투구, 그리고 울다 지쳐 쓰러진 에로스를 대신해 프시케가 건넨 아프로디테의 신성.
마지막으로…….
-아우우.
배부른 <프레키>의 울음소리.
씁쓸하지만 얻은 게 많은 원정이었다.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가득했지만.
그 느낌의 정체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뭐?”
돌아온 뒤, 이그나르의 식당.
그곳에서 오디슨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프로디테가 말한 누더기.
그 누더기의 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우스가 찌꺼기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던데? 어디에서 뭘 하느라 특보로 하루 죙일 떠드는 걸 못 들었대?”
이그나르가 불판 위에 고기를 얹으며 말했다.
* * *
“오는군. 세 번째 멸망의 줄기.”
오딘이 흘리드스캴프에 앉아 중얼거렸다.
그의 외눈은 올림포스에 있는 제우스를 향해 있었다.
찌꺼기들을 이끌고, 진군하는 모습은 멸망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피뢰침은 이미 완성되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한 발짝 더 앞서나간다는 것.
세 번째 멸망의 줄기, ‘번개 폭풍’은 오딘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를 위한 피뢰침은 ‘희망’을 품고 있으니까.
번개가 희망을 탐할 때, 오딘은 번개를 따르는 먹구름을 처치한다. 그리고 찌릿찌릿한 번개가 피뢰침에 머무를 때.
“목줄은 교수대가 되리라.”
명을 따르든, 아니든.
의미 없는 발버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