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69화. 땅 아래의 땅 (4)
“감히, 가암히이……!”
플루토가 벌벌 떨며 소리쳤다.
그래 봐야 무섭지 않다. 이미 보지 않았던가?
그와 나의 상성은 극과 극. 아무리 영혼을 휘몰아쳐 공격한다 한들, 내게 통할 리가 없다.
흥- 콧방귀를 뀌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죽기 싫다면 당장 비너스의 영혼을 내놓아라!”
“아프로디테의 영혼? 흐흐, 흐흐흐… 네 능력, 영혼을 포식하는 그 능력이라면…….”
플루토의 눈이 독을 연상케 하는 녹빛으로 번뜩였다.
약간은 맛이 간 것 같은 모습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가 죽었다니, 안타깝기야 하지만……. 그래도 저건 정상이 아니다.
“프로세르피나가 지금 네 꼴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버럭 소리쳤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광기에 빠진 이들에겐 잘 통하는 외침이다. 하지만 과연 강력한 신이라는 걸까? 플루토는 내 외침에도 미친 듯 키득거릴 따름이었다.
“날 미워하겠지. 날 말리려 할 테고. 그래, 그러겠지. 페르세포네는 그렇게 부드럽고 따스한 여인이었으니까……. 나는 그 잔소리가 듣고 싶다. 파릇파릇한 새싹이 움트는 것처럼 귀여운 투덜거림이 듣고 싶다. 아아! 영원토록 원망 받아도 좋다!”
제대로 미쳤다.
꿀꺽 침을 삼킬 때, 플루토가 소리 질렀다.
“영혼, 다른 영혼을 삼키는 그 강렬한 영혼을 내놓아라! 페르세포네가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그게 필요하니까!”
콰과광!
굉음과 함께 플루토의 몸에서 희뿌연 영혼들이 쏘아졌다.
-아아아아아!
-산 자, 산 자의 온기다!
마치 혹한의 눈보라처럼 눈앞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끔찍한 공격이다.
“프, 프시케!”
“여보!”
큐피드와 프시케가 부둥켜안았다. 큐피드가 제 아내를 품에 넣고 그 영혼의 눈보라에 맞서려 했다. 이라호드 역시 순백의 창을 꽉 움켜쥔 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럴 필요는 없다.
“모두, 내 뒤로 오라!”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여보! 얼른 어머님의 신성을……!”
“하지만……!”
“다시 떼어 달라 하면 되잖아요!”
프시케가 큐피드를 닦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전에 내가 떼어 준 비너스의 신성을 돌려줘라? 보통이라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때로는 힘센 장정 10명보다 그 열 명의 힘이 합쳐진 장사 하나가 더 효율적으로 힘을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
“괜찮다. 비너스의 신성을 되돌려 받을 필요는 없다.”
큐피드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지만, 그가 말을 뱉는 것보다 내가 축복을 일으키는 게 더 빨랐다.
“오라, 영혼을 먹는 늑대여. 다시 그대를 위한 만찬이 준비되었도다.”
-아우우우우우우!
사람뿐만 아니라 영혼의 등골조차도 서늘하게 만드는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몰아치는 영혼의 군세 앞에 검은 신성이 늑대 머리를 이뤘다.
늑대의 머리는 입을 쩍 벌렸다.
“한계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플루토? 안타깝지만…….”
콰자작!
“프레키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군.”
-아우우우우!
입맛을 다시던 늑대 머리가 재차 울부짖고, 사라졌다.
그나저나 꽤 인사성 바른 축복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늑대 울음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겠지만…….
내게는 저 포효가 지닌 뜻이 선명히 전해졌다.
잘 먹었습니다, 라니.
어울리지 않는 예의범절이다.
“크으으…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조차 없는 것인가…….”
플루토는 아까보다 더 초췌해진 꼴로 나를 노려보았다.
섬뜩한 녹색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어깨를 으쓱였다.
“영혼을 집어삼키는 내게, 영혼을 들이밀어 싸움을 걸다니……. 바보인가? 마지막 경고다, 플루토. 당장 비너스의 영혼을 데려와라. 그렇지 않는다면…….”
“크흐흐,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네 영혼을 가져야겠다. 한계를 모르고 영혼을 받아들이는 힘! 그 힘이 있다면… 페르세포네를 되살릴 수 있을 터!”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눈썹을 찌푸렸다.
“승패가 선명한 싸움을 계속하겠다? 어리석군.”
“승패가 선명해? 웃기지 마라! 영혼을 계속 집어삼킬 수 있다고,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명계의 왕! 이 지하 세계가 모두 나의 것이다!”
스스스- 음습한 소리와 함께 영혼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악- 그야말로 영혼을 쥐어짜는 소리였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귀곡성은 모두 플루토를 향하고 있었다.
“흐흐, 흐흐흐…….”
그의 손아귀에 영혼이 뭉치기 시작했다.
큐피드가 흠칫 놀라 외쳤다.
“어, 어리석은! 디스 파테르! 당신… 설마! 금기를 깰 셈인가!”
“금기? 올림포스가 망한 지금, 금기가 어디에 있지? 그저 나는…….”
우직, 우지직!
플루토의 손아귀에 뭉친 영혼이 점점 찌그러진다. 커다란 돌덩이만 하던 영혼 덩어리가 사람 머리통만 하게 변했으며, 그것이 다시 주먹만 한 크기가 되었다. 이윽고 도토리 정도 되는 크기가 되었을 때, 플루토가 웃었다.
“페르세포네를 다시 보고 싶을 뿐이다. 단 1초라도.”
플루토가 압축된 영혼을 입안으로 던져넣었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꿀꺽, 침을 삼켰다.
“…이거, 쉬운 일이 아니겠는데?”
다가올 싸움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 * *
이라호드는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건 탄식과 탄성의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이라호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디슨에 대한 감탄과 동시에 오딘에 대한 복잡 미묘한 마음이 가득한 것이었으니까.
‘…역시, 오디슨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야.’
사람이 아니라, 신이 된 지 오래지만……. 이라호드는 오디슨이 처음으로 발할라에 발을 딛던 때부터 그를 지켜봤다.
다른 사람과 달리 발할라의 평화에 휩쓸리지 않는 기묘한 모습. 그 당당함이 신경 쓰였고, 신경을 쓰다 보니 어느새 그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다.
그 호감이 짙어지다 애정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라호드는 곤란해졌다.
‘오딘께서는 어찌하여.’
신을 탓하는 듯한 생각.
그 대상이 아스가르드의 신왕이라면 불경하다 하기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라호드는 예전과 달라졌다. 오딘을 열렬히 추종하던 예전이었다면 스스로의 생각에 깜짝 놀랐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디슨.’
눈앞에서 껄껄 웃으며 싸우는 남자의 존재 탓이다.
“그 어마어마한 힘을 겨우 그따위로 쓰는 것인가! 그러고도 영혼을 관리하는 자라고?”
“크아아악! 이 날파리 같은 자식!”
오디슨은 하데스의 공격을 쉽사리 피했다.
영혼을 잔뜩 삼킨 탓에 어마어마한 힘을 뿜어내는 하데스지만, 엉성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과한 힘을 얻은 탓에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있었다.
오디슨이 그런 어정쩡한 공격에 당할 리가 없었다.
“흐읍!”
쾅! 창대로 하데스를 후려쳤다.
하데스는 그 공격을 버텼지만, 차라리 맞아 날아가는 게 나았으리라.
쾅쾅쾅! 공격을 버티느라 움찔움찔 굳어 버리는 탓에 오디슨은 신명 나게 연타를 날렸다. 창대가 허공을 가르고 하데스를 때렸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격이 연이어졌다.
에로스와 프시케가 감탄했다.
“어떻게…….”
그 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성의 크기는 하데스가 압도적이다. 당연한 일이다. 신이 된 지 얼마 안 된 오디슨이 아득한 예전부터 명계의 왕이었던 하데스보다 신성이 클 리가 없다. 오디슨이 아프로디테의 신성을 가진 채였다고 한들,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리라.
아프로디테 신앙이 한창 성행할 때도 하데스의 신성은 아프로디테보다 훨씬 컸으니까. 죽음 이후를 다스리는 신은 어느 신계든 간에 강렬하다.
에로스가 미간을 좁혔다.
영혼 때문인가?
“삼킨 영혼들이 오디슨의 힘이 되는 것인가……?”
“아뇨, 아니에요.”
이라호드가 에로스의 추측을 부정했다.
“하지만 디스 파테르도 영혼을 삼키고 저렇게 강대해졌는데…….”
“오디슨이 사용한 <프레키>는 오디슨의 힘이 아니에요. 오딘의 축복이죠. 게다가 그 영혼을 모조리 흡수하는 것도 아니구요.”
“아니라고?”
에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라호드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런 식의 축복이었다면, 저는 쓰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어째서지?”
“그야, 저걸 보면 알겠죠.”
이라호드가 슬쩍 하데스를 눈짓했다.
에로스가 하데스를 쳐다보고 흠칫 놀랐다.
“저건…….”
이제까지의 하데스는 어딘가 뒤틀린 채였지만, 분명 하데스였다. 다른 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하데스 본인.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크아아… 페, 페르세포네! 너, 너너… 날 죽이려고 하는구나! 나, 나는 죽을 수 없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빌어먹을! 내가 쉽게 죽을 것 같아?”
이상하다.
하데스라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가 섞인 느낌이다.
분명 하데스가 큰 축을 차지하고 있지만, 어딘가 기괴하게 섞였다.
말투가 계속해서 바뀌었고, 목소리가 여러 겹으로 엉켜 한 번에 여러 말을 내뱉고 있었다.
“…저게 무슨……!”
이라호드가 쓰게 웃었다.
“영혼을 삼키는 게 왜 모든 신계의 금기인 줄 알겠어요? 영혼은 모든 신계의 전략 자원이지만… 사실상, 싸우는 데에는 쓰이지 않죠.”
이라호드가 씁쓸하게 되새기며 말했다.
오디슨이 품은 ‘희망’이 끔찍한 것인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던가? 영혼을 갉아먹으며 힘을 쓰는 것이라니.
세계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훼손시키는 짓이다. 세계가 내지르는 비명이 힘이 되는 셈이다.
그걸 그나마 ‘온건’한 방식으로 쓰는 게 ‘희망’이다. 그런데 하데스가 한 짓은? 무식하게 집어삼킨 것이다.
유리를 깨트리는 소리가 좋다며 유리를 마구 깨트린다?
언젠가 유리 파편이 튈 게 뻔하다. 하물며 그 유리가 수십, 수백 장이라면? 아니, 수천 장이라면?
하데스와 같은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아아, 아아아… 페, 페르세포네…….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기, 기다려, 여보! 내가 돌아갈 테니…….
-원통하다, 원통해!
하데스의 몸이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라호드가 말했다.
“영혼을 훼손한 자는 세계의 추방을 받게 돼요. 그러니까… 오디슨이 영혼의 힘을 마구 쓰는 걸 좋아할 수 없는 거고요.”
“…허.”
에로스가 멍하니 분열하는 하데스를 바라보았다.
추위를 쫓기 위해 알코올을 들이켠 사람은 잠깐의 후끈함을 얻을 수 있다. 그게 과해진다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고 말 터.
하데스는 바로 그 꼴이었다.
“…추하군.”
오디슨이 중얼거렸다. 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무수한 영혼들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내뱉을 뿐.
-페르세포네, 페르세포네…….
-저주한다! 날 죽인 너희들을 모두 저주한다!
-브루투스, 너마저……!
하데스는 몸서리치다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치 바싹 마른 모래성이 무너지듯, 하데스의 몸이 뚝뚝 떨어져 나갔다.
이라호드는 꺼림칙한 광경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데스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을 터.
문득, 이라호드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데 왜 오디슨은 멀쩡하지?”
‘희망’이 온건한 방식으로 영혼을 쓴다 해도, 그 본질은 무식한 방식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오디슨은 다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다른 영혼을 집어삼키기도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개중에는 찌꺼기도 있었다.
영혼이 원한에 먹혀 끔찍하게 뒤틀린 찌꺼기.
그런 ‘오염물’을 받아들이고도 멀쩡하다?
‘이상해.’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라호드는 걱정스레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디슨은 그저 인상을 구긴 채, 무너져내리는 하데스에게 혀를 찰 뿐. 붕괴될 징조 따위는 없었다.
‘…설마.’
이라호드는 소름이 돋았다.
오딘이 오디슨을 경계하는 이유.
그 일면을 보았다.
‘오디슨의 영혼은 오염되지 않아!’
그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거대한 신성과 무수한 황금의 힘으로 권능과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오딘을 능가할 정도로.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채 제 영혼을 갉아먹으며 무한한 힘을 쓸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채우다 보면 본래의 영혼이 흐릿해지는 게 당연하지만…….
오디슨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영혼 흡수의 부작용을 내색한 적이 없다. 아니, 내색은커녕 은연중에도 그런 티를 낸 적이 없다.
취향이 바뀐다든가, 말투가 바뀐다든가. 그런 일은 없었다.
오디슨은 언제나 전사다움을 피력했고, 언제나 편하고 싸우기 좋은 옷을 선호했으며, 언제고 고기를 고집했다.
‘숨겨야 해!’
이라호드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혹여라도 말실수를 하는 순간, 오딘은 오디슨을 찍어내고야 말리라.
아니, 아니다.
“그분께서 이 일을 모르실까, 정말?”
문득 튀어나온 의문. 의문은 걱정이 되어 이라호드를 덮쳤다.
그 걱정을 받는 당사자?
“오! 이 영롱한 광채!”
오디슨은 찝찝한 기분을 털어 내고 방긋 웃었다.
무너져 내린 하데스의 시신을 뒤적여 전리품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