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67화. 땅 아래의 땅 (2)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신이라 해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텐데…….”
이라호드의 눈빛이 바뀐다.
질린 듯한 기색이 약간은 슬픈 듯, 약간은 아픈 듯. 복잡하게 변했다.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양이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쓰게 웃었다.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모두 내가 원해서 한 일들이니까.”
“…하지만.”
이라호드의 얼굴만 봐도 그녀의 물음을 알아챌 수 있다.
하계에서 부하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이들이 수도 없이 지은 표정이다.
그들은 항상 물음을 던졌다.
-그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리하기가 너무 괴로운걸. 그 고통을 어떻게 참아 낼 수 있어?
아주 쉬운 일이다.
“해야 하는 걸 하지 않았을 때 느끼는 찝찝함이 단순한 고통보다 훨씬 껄끄럽다면… 누가 해야 하는 걸 하지 않겠는가.”
“아.”
이라호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됐을까? 예기치 않게 큐피드와 프시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이런 기분을 느낄 줄 알았더라면, 권능에 저항했을 겁니다. 고통스러웠을 테지만 지금 이 고통보다는 나았을지도.”
“여보…….”
큐피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라.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삶을 비너스가 지켜 준 것이니까.”
“…후우.”
큐피드가 한숨 지었다.
아무래도 내 위로가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너는 비너스를 부활시킬 생각이 아닌가?”
“…그렇죠.”
그럼 됐다.
“사과는 부활한 비너스에게 하면 되겠군.”
“그게… 후우. 감사합니다.”
꾸벅, 큐피드가 내게 고개 숙였다.
이전에는 건방지게 틱틱거리던 놈이었건만, 어머니를 잃었다는 게 그를 성장시킨 걸까? 태도가 훨씬 어른스러워졌다.
어쨌거나, 내 고통이나 삶의 방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비너스를 부활시키겠다 했지? 그게 쉽게 되는 건 아닐 테고…….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아, 그건…….”
큐피드가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피난길에서의 피로와 비너스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해소되진 않았는지 파리한 얼굴이었다. 식은땀을 송골송골 이마에 매단 채로 설명을 이어 갔다.
프시케는 그런 큐피드가 걱정되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를 돌보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큐피드를 막진 않았다.
잠깐 쉬고 합시다- 하면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차라리 빨리 털어 내고 쉬는 게 낫겠지.
“흠.”
턱을 긁적였다.
비너스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일을 해야만 했다.
첫 번째로, 비너스가 죽지 않았노라- 그녀의 신도를 속여야 한다. 죽은 신을 섬기는 신도가 있을까? 있다 한들 ‘죽은 신’이라는 믿음은 위험하다.
그건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저는 본래 어머니의 신전에서 덤으로 섬겨지는 신입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 요양 중이시며, 금방 털고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 신탁을 내리면 됩니다. 다만…….”
“다른 신들을 모시는 이들이 내뱉는 말이 문제라는 건가?”
큐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올림포스는 거의 박살 난 상태. 내 외사촌 동생에게 비너스가 죽지 않았노라 알려 주면 그만이다.”
“…외사촌 동생이라면?”
“여왕, 시그니료드.”
큐피드가 혀를 내둘렀고, 프시케가 깜짝 놀랐다.
몰랐던가? 고개를 갸웃했다.
프시케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굉장히 젊은 신이셨죠? 하계에 친척이 살아남아 있을 정도로…….”
아, 이들은 오래된 신이다.
젊어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지만, 그건 이들의 속성 탓. 본래 어느 왕국의 공주라고 하는 프시케도 자신의 모국이 멸망한 지 오래라 한다.
내가 특이한 건가? 묻자, 모두가 쓴웃음을 흘렸다.
이라호드가 쿡- 내 옆구리를 찔렀다.
“몇 년 단위로 신성을 획득한다는 건 보통 있을 수 없을 일이에요. 하계의 영웅들도 10년 이상 시련을 버티고 반신이 되는 게 보통인데, 오디슨은…….”
그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어쨌든, 비너스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비너스의 죽음에 대한 위장막을 치고 난 다음은? 죽음을 관장하는 신에게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데스 님께 허가를 받는 건 힘들 겁니다. 그 아폴론 님조차 허가를 받지 못했으니까요.”
에로스가 걱정스레 덧붙였다.
아폴로, 그 뺀질이. 아들인 아클레- 어쩌고가 의술의 대가라 했던가? 죽을 사람마저 살려 내는 탓에 신계의 균형이 어그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탓에 유피테르의 번개를 맞아 죽었다고.
정말이지 쪼잔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수명이 좀 늘었다 한들, 혼자 몸으로 모든 사람을 살릴 수도 없건만.
“아폴로가 수없이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던가?”
“예, 인계에 간섭하지 않는 조건도… 거절당했습니다.”
“쪼잔하기 그지없군.”
툭 내뱉는 말에 큐피드가 한숨을 흘렸다.
“그렇게까지 규칙을 고수하는 하데스 님이시니, 이 문제는…….”
“페르세포네 언니께 부탁해도 안 될까요?”
프시케가 말했다.
프로세르피나. 플루토의 아내를 말하는 건가?
그녀와 친분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플루토도 못 이긴 척 부탁을 들어줄 확률이…….
“아니, 페르세포네 님께서 나서신다고 해도 규칙은 규칙이니까. 아마 나서시기 어려울 거다.”
“…후우.”
큐피드와 프시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게 제일 고난이라는 건가? 눈썹을 찌푸리다 툭 말했다.
“그 허가라는 것 말인데…….”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헬에게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신성은 이미 이곳에 있고, 비너스가 죽은 지금 그녀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는 아들도 여기에 있다.
그럼, 비너스가 꼭 올림포스의 신일 이유가 있는가?
내 말에 큐피드가 눈을 끔뻑였다.
“헬이라면… 이곳의 명왕(冥王)? 그녀와 아는 사이십니까?”
알다마다.
“내 약혼녀다.”
큐피드와 프시케가 입을 쩍 벌렸다.
뭐가 그리 놀라운 거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헬은 차갑고 도도해 유명한 바람둥이 신들이 치근덕대다가 아주 호되게 당한 바가 있다고.
* * *
헬은 지난 예언 이후, 쓸 수 있는 모든 수를 썼다.
그럼에도 불안감은 가실 줄 몰랐다. 오딘이 토사구팽을 계획하고 있다면, 오딘과의 정면승부도 상정해야 할 터.
하지만…….
“…과연, 이라고 해야 하나?”
오딘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흔들기 좋은 요소들은 모조리 막혀 있었다. 오딘이 가진 가장 껄끄러운 능력은 마법. 신성으로 권능을 사용하는 다른 신들에 비해 가진바 신성이 많다는 것도 문제지만……. 신성과 다른 방식으로 권능에 가까운 일을 벌이는 마법은 껄끄럽기 그지없다.
그 마법의 매개? 황금이다.
하지만 황금을 어떻게든 모으려 애써도, 오딘의 주머니는 마를 줄 몰랐다. 진작 오딘은 알고 있었으리라.
“황금이 돌아가는 판을 짜 버리면, 누구도 오딘에게서 황금을 빼앗을 수 없다는걸…….”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딘의 수익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 세금으로 붙는 것들?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황금에 관련된 일차 산업이 모조리 오딘의 것이었다. 금광맥, 금 정련 시설 등등.
그야말로 황금의 지배자.
아무리 헬이 애를 써도 오딘의 목줄을 잡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힘을 길러야 해.”
권능과 닮은, 어쩌면 권능보다 강력할지도 모르는 마법을 막아 낼 힘! 신성을 늘려야 하고, 오딘에게 대항할 아군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런데 누구를?
헬의 고민이 짙어졌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강글로트입니다, 여왕님.”
“들어와.”
강글로트가 왜?
헬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할 일이 더 있던가? 딱히 생각나는 건 없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오딘이 헬의 행동을 눈치채고 어떤 술수를 부려, 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정도? 헬의 인상이 구겨졌다.
강글로트가 찌푸린 헬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렇게 찌푸리시면 안 돼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오디슨 님이 오셨거든요.”
흠칫- 헬이 놀랐다.
황급히 손거울을 꺼내 보니, 최근 너무 찌푸린 탓일까? 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힌 것만 같았다.
헬이 당황했다.
“어, 어쩌지!”
게다가 옷차림도 영 아닌 거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속옷도…….
‘짝짝이야!’
예쁘고 야릇한 걸로 입어도 불안하건만, 짝짝이라니! 일이 많아 편한 걸 찾다 보니, 예쁘기는커녕 곧 버려야 할 속옷들을 챙겨 입었다.
헬이 버럭 소리쳤다.
“강글로트! 일, 일단… 오디슨을 응접실… 아니, 식당으로! 나는 빨리 준비할게!”
“쿡쿡, 네. 알겠어요! 그럼 시간을 끌고 있을게요.”
“그래, 부탁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외치는 헬.
강글로트는 제 여왕님이 귀여워 어쩔 줄 몰랐다.
다만, 한마디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여왕님.”
“나중에! 나중에 말해! 시간 없어!”
“어, 그게…….”
강글로트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헬이 후다닥 제 방으로 달려갔다.
강글로트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높은 하이힐을 신고 저렇게 달릴 수가 있던가?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한숨 쉬었다.
“…아무리 봐도, 뭔가 급한 일이 있어서 오신 것 같았는데…….”
하지 못한 말을 헬이 없는 자리에서 내뱉어 본다.
그 소리는 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강글로트는 어깨를 으쓱이고, 오디슨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일단 식사 대접을 하고 있으면, 나머지는 헬이 알아서 할 일이다.
강글로트는 집사이지, 헬의 엄마가 아니니까.
* * *
“어… 뭐?”
언제나처럼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서야 헬을 볼 수 있었다. 바쁘다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오늘도 아름다운 헬을 보고 조금 마음이 동하긴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크흠-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비너스를 되살릴 예정이다.”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시무룩.
헬의 얼굴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실망감을 보여 줬다.
쓰게 웃으며 말했다.
“급한 일이니까.”
유피테르가 언제 아스가르드를 침공할지 모른다. 더불어 비너스에게는 확실한 빚을 지게 됐다. 빚을 갚으러 갔다 빚을 추가로 진 느낌.
비너스처럼 강한 신이 하나 더 늘면, 아스가르드가 한층 더 강해질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여러 가지로 비너스의 부활은 필요한 일이다.
“도와줄 수 없는 건가?”
“…올림포스 소속이잖아. 아무래도 그쪽은 하데스에게…….”
“비너스의 신성이 이곳에 있고, 비너스의 대리자도 이곳에 있다. 그런데도 올림포스 소속인가? 게다가 올림포스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흐음?”
헬이 눈썹을 씰룩였다.
실망감으로 가득한 얼굴에 반짝 빛이 났다.
“부활한 비너스가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큐피드가 도와주기로 했다.”
“오호.”
큐피드의 도움이라는 게 마음에 든 걸까?
헬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아프로디테 정도 되는 대신격이라면 확실히… 숨겨 둔 비수가 될 수 있겠지. 문제는…….”
슬쩍 헬이 나를 본다.
쓰게 웃었다.
“아마,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납 화살로 인한 증오가 가장 문제였지만, 비너스는 분명 죽기 전 말했다.
-납 화살은 안 맞을 걸 그랬어.
되살아난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면? 날 적대할 리 없다.
무조건적인 증오가 끓어오르는 와중에도 그런 말을 할 정도니까.
납 화살의 효과를 거두기만 하면, 예전처럼 맹목적인 사랑이 없어도 되리라. 그저 친한 친구 정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헬이 한참을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하긴 하지만… 알았어. 하데스도 거절할 명분이 없을 거야. 게다가 뭐… 올림포스가 끝장났고, 신계 연맹이 유명무실해졌지. 명협에서도 날 막을 수 없을 테고…….”
헬이 씩 웃으며 말했다.
“보상만 약속한다면야,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보상이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힘 좀 써 보지. 아침에 못 일어날 정도로.”
“…바보 같으니.”
헬이 볼을 붉히며 날 욕했다. 하지만 거절 의사는 없었다.
이라호드가 나와 헬을 빤히 쳐다봤다.
큼큼, 헬이 헛기침했다.
“일단… 빨리 할 일부터 마무리 짓는 게 낫겠지.”
“힘든 일인가?”
헬이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면 끝나. 어차피 양도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데스로서도 이제 나와 대적하는 게 껄끄러울 테니까.”
헬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고 어쩐지 오한이 들었다.
그녀가 덧붙였다.
“예전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면서 협상하려고 했었던 놈이니까, 이번에 제대로 엿 먹여 줘야지.”
툭 내뱉는 말에는 한기가 가득했다.
식당의 온도가 뚝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쩌적- 컵 안의 물이 얼어붙은 걸로 봐서, 실제로 온도가 떨어졌다.
헬은 스마트폰을 꺼내 이리저리 만지고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걸 귀에 댔다. 전화다.
나도 써 본 적 있다. 편리한 마법이었지.
음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전화해 봤다고 뿌듯해하는 거 아니죠?”
이라호드의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이 발키리, 정말 내 생각을 읽는 건 아니겠지? 오래된 생각이다.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
“뭐? 감히 그런 개 같은 소리를!”
헬의 고함이 들렸다.
뭔가 일이 틀어졌다. 눈썹을 구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전화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