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하늘 위의 하늘 (3)
이후, 시간은 쏜살처럼 흘렀다. 며칠이라는 준비 기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만 같았다. 사실, 그럴 법도 했다.
“…지독한 훈련이었다.”
매일 아침 식사 이후 시작해 끔찍한 단련의 시간을 견디다 보면, 해가 질 시간이 되었다. 그사이에 먹은 식사는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훈련을 다 마치고 씻고 침대에 눕는 순간, 밤이 사라졌다.
그런 식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그렇게 힘들었어요?”
“…시킨 사람이 할 말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라호드를 노려보자,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분화구에서도 말했지만, 오디슨의 적들은 점점 강해질 거예요. 오디슨이 강해진 만큼… 그 적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고된 훈련이라도 더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다.
이라호드는 조금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내가 강해지는 것’에 열중했다. 뭐가 그리 불안한 걸까?
비너스의 신성을 얻어 대신(大神)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데.
후우- 한숨을 내쉬며, 이라호드를 부드럽게 안았다.
“난 강해졌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하진 못하죠, 아직.”
그거야 그렇지.
머쓱하게 웃었다.
“오딘이나, 토르, 펜리르가 직접 날 죽이려고 하지 않는 이상… 날 어떻게 할 수 있는 적은 극소수일걸?”
안심하라고 한 말에 이라호드가 눈썹을 찌푸렸다.
가장 강력한 아군 셋을 꼽으며 말한 탓인가? 불쾌할 수도 있겠다.
크흠- 괜히 헛기침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다.”
“…난 오디슨이 가장 강했으면 좋겠어요.”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불평불만을 토하려던 계획을 백지화했다.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라호드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투기장 관리인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찰싹 붙어 있는 우리를 본 관리인이 움찔 몸을 떨었다.
…조금 부끄럽구만.
황급히 떨어졌다.
“…곧 시작해요. 준비하세요.”
“으음, 알겠소.”
“나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인이 황급히 대기실을 벗어났다.
머쓱한 분위기가 감돌 때, 뿌우- 하고 나팔 소리가 울렸다.
이라호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기고 오겠다.”
“…다치지 말구요.”
씩 웃으며 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로 들어섰다.
이라호드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전, 당신이 오딘보다 더 강하면 좋겠어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무언가 기도하는 듯했다.
이라호드가 뭘 걱정하고, 뭘 기원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날 믿는 자들을 배신할 수는 없지.
“믿어라.”
한마디를 남기고, 어두컴컴한 통로를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라호드가 날 보는 게 느껴졌다.
동굴 같은 통로를 지나, 햇볕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곳으로 발을 디뎠다.
오랜만에 보는 경기장이다.
“변한 게 없구만.”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귀가 찢어질 듯한 함성도.
[이야, 인기가 대단하네요!]
[하하하, 큰 걱정거리를 해결해 준 영웅이니까요. 그럴 법도 하죠.]
장내 해설 방송도 바뀌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촐싹거리는 아나운서와 진중하지만 헛짚는 해설자가 함께했다. 징집되어 수르트의 마수에 불의 정령이 되었으면 어쩌나- 했건만, 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해설 위원님. 오디슨 선수가 수르트를 무찌르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야 저도 모르죠. 솔직한 말로, 제가 아는 오디슨 선수라면 재앙이 된 수르트를 이기긴 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도 전쟁 참모실에 있었지 않습니까? 그간 대외비였지만, 지금 와서는 말할 수 있는 게……. 사실상 재앙이 된 수르트를 이기려면 대신(大神)이 서넛은 필요하다고 봤거든요.]
[허…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그야, 오디슨 선수만의 무언가가 있겠죠. 오늘 경기에서 그걸 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해설자의 바람은 이뤄 줄 수가 없으리라.
수르트를 이기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레바테인이니까. 그리고 그 재앙을 먹는 가지는 재앙이 아니라면 그저 부러지지 않는 나뭇가지일 따름이다.
[크흠, 그런데 말이죠. 제가 사실 아나운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모든 투사를 알지는 못하거든요? 분명, 이 선수도 제가 경기 진행에 멘트를 던진 기억은 있는데……. 잘 떠오르지가 않아요. 울르 선수, 어떤 선수입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놀랍다.
아나운서가 본 경기건만, 그 경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울르에 대한 기억이 없다? 대부분의 관중들도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미간을 찌푸린 채다.
저 표정은 익숙하다.
건망증을 앓던 주술사 영감이 때때로 짓곤 하던 표정이니까.
-뭔가 할 일이 있었던 건 기억하겠는데……. 왜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지……. 끄응, 늙으면 죽어야지.
그리 말하던 주술사 영감의 표정과 똑같다.
해설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기한 일이죠. 사실 저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꼭 흐릿하게 말입니다.]
[허… 해설위원님도요?]
[예,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권능의 일종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경기를 보면 알겠지요.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죠. 울르 선수, 대부분의 관객분들에게도 생소한 선수지만……. 무려 T100에서 11연승을 이뤄 낸 강잡니다!]
11연승? 그렇게나 많이 이겼다고?
경기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상황. 나는 울르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신기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어디 한 군데 모난 데도 없이 잘생긴 청년 신이건만, 뒤로 돌아서면 그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관중들 역시 그런지,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신기하네……. 진짜, 지금 보고 있는데도 눈 감고 떠올리면 어떤 얼굴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평범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분명 잘생겼는데 말이야.”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아스가르드에서 아름답기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시프 님의 아들이니까… 잘생겼을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신기한 거지. 분명 잘생겼는데 우르라는 저 신, 기억이 잘 안 나는 얼굴이야.”
“우르가 아니라 우디르야.”
“어… 그런가?”
심지어 이름까지도 틀리고 있었다.
나만 관중들의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닌지, 울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눈을 흘기는 게, 여기가 투기장만 아니었으면 당장 뛰쳐나가 멱살을 잡아챘을 것 같다.
저놈한테는 다행이다.
“내 멱살을 잡아채면 될 테니까 말이야.”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히죽 웃을 때, 뿌우우- 나팔 소리가 들렸다.
[아! 경기 시작됩니다!]
[대체 어떤 싸움이 벌어질지, 기대됩니다!]
창을 들고 울르를 향해 달렸다.
활과 스키를 관장하는 신이라고? 그렇다면 거리를 벌릴 틈을 안 줘야 한다. 이번 목표는 아주 간단하다.
압도. 괜히 덤비는 놈들이 없도록 완벽한 승리를 해내야만 한다.
그런데…….
“…뭐지?”
눈을 끔뻑였다.
울르가 있던 방향이 기억나지 않았다.
피잉!
시위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창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거기냐!”
버럭 외치고 바닥을 박차려는데, 역시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로 방금 날아온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다.
[뭐, 뭐죠? 울르 선수…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아, 아아아……! 울르 선수가 가진 고유의 권능이 발휘된 겁니다! 이제 알겠어요! 울라 선수가 왜, 기억나지 않았는지!]
[어… 울르 선수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울르 선수가 왜 기억나지 않느냐! 그것은 바로…….]
장내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다시 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집중하여 방향을 틀었다.
“잔재주를!”
부웅- 퍽!
창을 휘둘러 다시 화살을 떨쳐 냈다. 짜증이 쌓이기 시작했다.
직후, 짜증이 당혹으로 바뀌었다.
푹!
“…하.”
배에 박힌 화살을 보고 이를 갈았다.
내가 소리로 화살을 쳐 낸다는 걸 알고, 화살을 연이어 두 발 쏜 거다. 한 발을 튕겨 내도, 뒤따르는 한 발마저 막아 낼 수는 없으니까.
욱신거리는 느낌이 불쾌하다.
압도하려던 내 계획이 완전히 뒤틀렸다.
[혹시… 투명해지는 권능입니까?]
[아뇨! 모르시겠습니까? 저건 눈에 안 보이는 게 아니에요!]
맞다. 안 보이는 건 아니다.
분명 보인다. 문제는…….
[망각입니다. 망각! 잊히는 권능이에요! 하… 스카디 님과 같은 영역? 아닙니다. 저건…….]
그래, 잊어먹는다는 것이다.
핑핑핑- 활시위 당기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리고 울르의 목소리도 들렸다.
“나는 눈보라다.”
붕붕붕- 창을 마구 휘둘렀다.
도대체 몇 발이 날아오는지 몰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화살을 막아 내진 못했다.
푹푹푹!
“…하늘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눈보라라는 거냐?”
짜증을 담아 물었다.
울르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냐. 어디서 웃고 있냐? 귀를 쫑긋 세우고 두리번거렸다.
울르가 말했다.
“온 세상을 새하얗게 지워 버리는 눈보라.”
핑핑핑, 다시 화살이 날아들었다.
흐흐흐- 울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를 악물었다.
“길을 잃어버린 자가 어찌 제대로 된 곳으로 가겠느냐?”
울르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퍽퍽- 화살이 내 몸에 박혔다.
* * *
객관적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경기였다.
관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도대체가 어디에서 날아오는지 모를 화살들이 날아드는 것이었다. 오디슨이 실체 없는 바람과 싸우듯 마구 손발을 휘두르는 모습밖에는 인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경기를 지루하다 말하지 않았다.
섬뜩한 소름이 돋았다.
“기억할 수 없는 곳에서 계속해서 날아오는 화살.”
울르가 11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최고의 전략이다. 다만, 잊힌 신답게 그의 경기를 보고 느낀 섬뜩함마저 금방 잊히는 게 문제였다.
발리가 씩 웃었다.
“역시, 강하다.”
그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발리의 곁에 있는 뇨르드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도대체 저놈을 왜 밀어주는 것이오?”
누구에도 보이지 않을 어둠을 두른 곳에서 뇨르드가 말했다. 오딘의 시선조차 닿을 수 없는 장막 속이다.
회드르의 권능으로 이뤄진 어둠.
발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에 말했지요? 아버지는 분명 후계자를 세울 생각이 없다고.”
“…그거야 들었지만…….”
뇨르드가 오딘을 끌어내리기 위해 애쓰는 것도 모두 그 때문 아니던가?
프레이가 죄를 지어 ‘일정 기간’ 수감되는 거야, 충분히 참을 수 있다. 뇨르드는 이상한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발리의 말에 따르면, 오딘이 이상한 억지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 건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다.
아비로서, 아들이 부당한 처벌을 받는데 가만히 있을쏘냐.
발리가 말을 이었다.
“동시에 아버지가 미치광이라는 걸 알아 두셔야 합니다.”
“…미치광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니던가?
발리가 쯧- 혀를 찼다.
“만약에 후계자를 정말 앉힌다면 어쩔 거요? 미치광이의 생각을 누가 예측할 수 있냔 말이오.”
“…으음.”
그렇게 되면 딱히 오딘에게 대항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뇨르드가 눈을 끔벅였다.
“울르, 저 녀석은 그렇게 됐을 때 가장 훌륭한 왕이 될 거요.”
“…훌륭한 왕?”
발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존재감이 극도로 희미한 저놈에게 지금 은혜를 베풀어 두고, 나중에 한자리를 차지한다면?”
“허…….”
뇨르드가 혀를 내둘렀다.
분명, 울르가 신왕이 된다면 강력한 힘이 있을지라도, 정치적으로는 최악에 가까우리라.
악명 높은 정치인보다, 있는지도 모를 정치인이 더 안 좋은 정치인이니까.
뇨르드에게도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발리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약속을 안 지켜도, 우리가 나서기 편해지지.”
“…명분이 있으니까?”
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어떻게 되든 최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일이 어떻게 되든 울르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겠지만……. 뭐, 어떤가? 본래 이용당하는 자들은 모두 그런 꼴인 것을.
회드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결국 저놈이 후계자 자리에 못 오른다면? 본인이 원치는 않았겠지만, 대단한 권능임은 틀림없다. 허나… 저걸 깰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뇨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눈이 보이지도 않아서 깰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솔직한 말로, 뇨르드가 오디슨을 대신해 저 자리에 선다 해도…….
‘뾰족한 수는 없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놈이다. 한 대 때리고 도망치고 한 대 때리고 도망치고 한다면, 도저히 잡을 수가 없으리라.
그래서 뇨르드는 회드르의 말이 그저 보지 못하는 자의 오판이라 여겼다.
다만 발리는 달랐다.
“깰 방법이야 있지요.”
“뭐……?”
뇨르드가 눈을 끔벅였다.
발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했다.
“후계자를 뽑는 게 투기장 경기라는 걸 잊으셨군요.”
“아… 그렇군.”
뇨르드도 이제야 울르가 가진 망각의 권능을 깨트리는 법을 알아챘다.
회드르의 걱정도 그럴듯한 소리였다.
“투기장 전체를 채울 수 있는, 피할 곳이 없는 권능을 쓰면 그만이라 이거지?”
“그렇죠. 하지만…….”
발리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 권능을 가진 이들은 모두 후계자 자리에 관심이 없노라 말했죠. 토르나 펜리르 같은 이들 말이에요.”
그렇다면?
울르는 투기장에서 무적이나 다름없다.
뇨르드는 발리가 왜 스스로 후계자 자리에 올라갈 생각을 안 하는지 알아챘다. 원 역사에서 복수의 대상이던 회드르가 이 자리에 있는 것과 똑같은 이유였다.
발리는 명예를 주고, 실익을 얻어 낼 생각이었다.
뇨르드가 씩 웃었다.
“적어도 저 재수 없는 놈이 지는 건 볼 수 있겠군.”
뇨르드는 당연히 오디슨을 싫어했다.
발리 역시 그랬다. 이 일행 중 오디슨을 싫어하지 않는 이는 회드르 뿐이었다. 다만, 회드르도 오디슨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당연히 울르의 승리에 걸었다.
* * *
그 약점을 눈치챈 건, 발리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좀 똑똑하다 싶은 관중들은 모두 눈치챘다.
숱한 싸움을 봐 온 아나운서나 해설자 역시 그 점을 눈치챘다. 하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입에 담는 순간, 이 경기는 싸늘하게 식을 테니까.
그들은 오디슨의 패배를 입에 담기보다, 오디슨을 응원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다.
[아! 오디슨 선수…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할 텐데요?]
[…오디슨 선수는 생각보다 훨씬 지능적인 싸움을 하는 선수죠. 분명, 어떤 수를 쓸 겁니다. 그 수가 통하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요.]
해설위원은 그리 말하고 물을 들이켰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 싸움의 결과가 선명히 보였다.
‘…오디슨의 패배다. 울르의 권능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물량으로 마구 퍼붓는 수밖에 없지만… 오디슨이 그리 큰 신성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해설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오디슨의 정확한 힘을 모른다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그럴듯한 예측이었다.
해설자가 피곤한 눈길로 투기장을 내려다봤다. 승리가 정해진 싸움만큼 재미없는 싸움이 또 있을까?
해설자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어떻게든 흥미진진하게 포장해야겠지만… 자신이 없었다.
‘…저런 걸 어떻게 포장해?’
울르가 대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기가 없는 이유가 다 있었다.
그런 것도 모른 채 울르는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항복해라, 오디슨! 하늘 위의 하늘이 있음을 인정해라!”
오만하기 그지없는 외침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오디슨은 몸 여기저기에 화살을 매달고 있었고,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와 비교해 울르는? 단 한 방도 맞지 않았다.
오디슨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젠장할.”
짜증을 부렸다.
오디슨도 울르에 대한 공략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을 따름이었다.
‘…투기장 전체를 쓸어버리는 것? 나쁘지 않다. 하지만 너무 많이 보여 줄 필요는 없지.’
오디슨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지만, 치명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울르는 분명 까다로운 적이지만, 공격력이 센 적은 아니었다.
“항복해!”
핑핑핑- 퍽퍽!
“큭!”
화살 둘을 튕겨 내고, 화살 하나를 더 맞았다.
오디슨은 본능적으로 적을 찾았다. 하지만 역시나 어디에서 쐈는지 알 길은 없었다.
신성을 엮어 만드는 권능보다 스스로 가진 권능이 훨씬 강할 수밖에 없다. 그건 신성 자체가 그 권능을 이루는 모양을 하고 있단 의미니까.
결국, 오디슨은 ‘망각’을 방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찾아야… 음?’
오디슨이 멈칫거렸다.
적을 찾아서 적에게 창을 찔러 넣는 것.
아주 단순한 승리의 공식이다. 오디슨은 그에 의문을 가졌다.
‘왜 적을 찾아야 하지?’
맞추기 위해서.
그렇다면…….
“하, 하하하하!”
“…뭐지? 미친 건가?”
울르가 당황했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다니.
답답함과 짜증, 그리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미쳐 버렸나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디슨은 자신만만했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내가 못 맞출 것 같은가?”
“…무슨 미친 소리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맞춰?”
“그야… 이렇게 맞추지.”
오디슨의 창은 이상한 쪽을 천천히 찔렀다.
울르가 있는 곳과는 전혀 상관없는 쪽이었다.
하지만…….
“어……?”
푸욱!
울르의 손바닥에 창이 박혔다.
“어, 어어어어……?”
울르가 당황했고, 오디슨이 웃었다.
“찾았다.”
오디슨은 환희에 차 부르르 떨었다.
창을 찔렀고, 살을 뚫었다. 피가 흘렀다.
울르는 잊히지만, 피는 잊히지 않는다. 피라는 건 아주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 어어어……?”
“죽어라, 귀찮은 놈.”
오디슨이 창을 번쩍 들었다.
울르가 멍하니 물었다.
“어떻게? 네, 네 창이 궁니르라도 된단 말인가……?”
오딘이 가졌다는 필중(必仲)의 창.
반드시 상대를 맞추는 창.
오디슨이 손에 든 창이 그런 신기(神器)다? 분명 엄청난 물건이긴 하다. 창 자루는 여의봉이오, 창촉은 아누비스가 쓰던 낫이며, 창대에 그려진 문양은 레바테인이 서린 것이니까.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필중’이라는 속성은 없었다.
오디슨이 피식 웃었다.
“이름을 붙이자면, ‘암사마귀’ 정도 되겠군.”
울르는 교미가 끝나면 잡아먹힐 것을 알면서도 달려드는 수사마귀와 다를 바 없었다.
스스로 뛰어 들어와 공격당한 것이니 말이다.
“죽기 전 소원은 그걸로 끝인가?”
“…매혹, 매혹이구나! 매혹의 권능을 썼어! 어, 어떻게……? 매혹의 권능은 분명…….”
울르가 바락바락 외쳤다.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그럴 법도 하다.
분명 매혹의 권능은 그 어떤 신이라도 쓸 수 있다. 모든 신은 인간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신에게 통하는 매혹은 별개 문제다.
타고난 성질이 그러해야 한다.
“자비의 신이 어찌…….”
울르는 경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디슨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오디슨은 친절을 베풀 만큼 베풀었다 여겼다.
더 이상의 말은 친절이 아닌 자랑에 지나지 않을 터.
게다가 유혹에 이끌린 수사마귀의 운명은 언제나 같다. 암사마귀의 먹이가 되는 것뿐. 미룰 이유는 없다.
창이 게걸스레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푸욱!
섬찟한 소리가 투기장을 가득 메웠다.
오디슨이 투덜댔다.
“…사내에게 매혹을 쓰는 게 유쾌하진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