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화. 천재지변 (3)
뜨겁다.
수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독한 열기가 온몸을 태운다. 그 열기는 몸을 태우고 녹이는 것에 지나지 않고, 영혼마저도 태운다.
욱신- 가끔은 끔찍한 고통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느껴진다. 심장, 그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
하지만 그 통증이 싫지는 않다.
-비열한 놈이 다시 음모를 꾸미는구나!
분노가 치솟았다.
분노는 몸을 달궜고, 끓어오른 용암 몸체는 영혼을 불태웠다. 끔찍한 고통에 다시 또 분노가 치솟는다.
끝없는 분노의 연쇄.
하지만 수르트는 그게 이상하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스가르드 놈들! 비겁한 놈들!’
그가 품고 있는 분노는 거대한 화약고와 같아, 어떻게든 간에 불이 붙으면 맹렬히 타오르는 게 당연했다.
지독한 화인(火印)이 그의 본질에 박혀 있다.
오래간만에 꾼 단꿈을 방해 받았기 때문일까? 오늘, 수르트의 분노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거웠다.
-죽어라!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공기가 타들어 가면서 굉음을 흘렸지만, 그 공격은 오디슨에게 닿지 않았다. 오디슨은 부드럽게 거대한 재앙을 피했다.
“죽는 건 너다!”
-쥐새끼 같은 놈!
쾅쾅쾅!
오디슨과 수르트가 부딪혔다.
레바테인이 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창에 부딪힐 때마다 수르트는 분노했다. 레바테인에서 튀는 불똥을 볼 때마다 아내가 떠올랐다.
신마라(Sinmara).
그녀는 언제나 수르트와 함께했다. 평범한 거인족 여성들처럼, 수르트에게 늘상 잔소리를 해 댔다.
‘또 술 마셨어요? 내가 못살아, 정말! 이번 달 녹봉을 죄다? 어이구, 이 화상아! 결혼할 때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한다더니!’
‘휴일이라고 그렇게 늘어져 있을 거예요? 좀 청소도 하고 그래요!’
‘여보! 양말 뒤집어 내놨죠? 이럼 새로 빨아야 한다고요!’
수르트는 그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짜증이 치솟았다.
가끔은 신마라에게 마구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신마라는 몰래 눈물을 훌쩍였다.
그러면 수르트는 괜히 헛기침하면서, 신마라가 수집하는 새의 깃털을 구해다 주곤 했다. 그녀가 언제나 가지고 싶어 하던 영험한 수탉, 비도프니르(Vidofnir)의 꽁지깃을 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수르트가 무심코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었다.
오디슨이 눈살을 구겼다.
“싸움 도중에 한눈을 팔다니! 아직도 내가 그리 약해 보이던가!”
저 혼자 생각에 잠긴 수르트는 오디슨의 공격을 허용했다.
검은 창이 붉은 용암을 휘저었다. 별 같잖은 공격이라 허허 웃어넘겨야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크으윽! 이, 이 무슨……!
모든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기던 용암의 몸. 하지만 오디슨의 공격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가진 고유한 권능 탓이다.
<변치 않는 자>.
지독한 불길에도 녹아내리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 내 상대가 어쨌든, 내 공격은 변함없구나!”
오디슨이 방긋 웃었다.
저 괴물을 어떻게 죽이지? 하는 고민이 싹 사라졌다.
그저 잘 싸우기만 하면 죽일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수르트는 당황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몸의 아픔에 흠칫 떨었다.
-레바테인! 저놈에게 재앙을 내려라!
화르륵!
레바테인의 끝에 매달린 망치 머리가 공기를 불살라 먹으며 덩치를 키웠다. 어마어마한 힘이 담겼다.
그 힘에 놀란 오디슨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보다 레바테인이 그를 후려치는 게 더 빨랐다.
“크윽!”
콰아아앙!
-치잇……!
수르트는 혀를 찼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린다는 레바테인이지만, 그의 생각보다 위력이 크지 못했다. 이전까지는 그 위력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까 하던 생각에 신마라의 말이 덧씌워졌다.
‘왜 하필 비도프니르의 꽁지깃이냐고요? 그게 있어야, 레바테인을 지키는 무녀 자리에서 벗어나니까요. 그럼 당신 말처럼 집안에 소홀할 일도 없을 거고, 우리도 애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수르트는 그 말에 퍽 감격해, 반드시 비도프니르의 꽁지깃을 구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리였다.
비도프니르의 꽁지깃이 있어야 레바테인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비도프니르의 꽁지깃을 얻으려면? 레바테인이 있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통을 터트리는 수르트에게 신마라는 조곤조곤 말했다.
레바테인의 무녀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아는 게 많았다.
‘알아요, 여보? 신들이 사라지는 새벽을 알리는 것은 결국 수탉들이라는 걸? 각 세계에는 영험한 수탉들이 하나씩은 있어요. 아스가르드의 황금 수탉 굴린칼비, 니플헤임에 있는 이름 모를 핏빛 수탉. 그리고 우리 거인 왕국의 붉은 수탉 퍌라르. 그리고 비도프니르는 그 퍌라르와 동복형제인 수탉이에요. 신들이 사라지는 새벽을 알리는 중책을 부여 받진 못했지만…….’
그 정도로 영험한 수탉이라면?
말도 안 되는 조건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비도프니르는 ‘거인이 돌아올 날’을 알리는 역할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때가 되면… 저 역시, 레바테인의 무녀라는 무거운 중책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수르트는 그게 싫었다.
분명 신마라는 제 아내건만, ‘수르트의 아내’보다 ‘레바테인의 무녀’가 더 무거워 보였으니까.
그래서 레바테인을 가지고 출전했다. 아내가 잠든 시간에.
아내는 레바테인이 사라진 걸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화냈을까? 울었을까? 아니면… 홀가분하다 생각했을까……?
모두 틀렸다.
수르트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 정답을 머릿속으로나마 생각하고 싶지 않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황하고 화를 내고, 울먹였겠지만… 결국 그녀는.
-…걱정했으리라.
수르트를 사랑했다.
재앙이 우뚝 멈췄다.
“퉷!”
오디슨이 피를 뱉고서 분화구 벽에서 몸을 뽑아냈다.
창을 움켜쥐고, 멍하니 있는 수르트를 보았다.
‘영혼을 너무 뽑아다 써, 미친 건가? 싸우는 도중에 왜 자꾸 저러는 거지?’
눈살을 찌푸렸다.
영혼을 갉아먹는 고통은 쉬이 넘길 것이 아니다.
오디슨 역시 과하게 그 힘을 끌어다 쓴다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으니까. 오디슨이 흥- 콧방귀를 뀌고 창을 쥐었다.
“너 역시 최후를 맞이할 때가 되었구나!”
오디슨의 외침에 수르트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신들이 사라지는 새벽이 오면, 수탉들이 목청 높여 그를 알리리라.
그리고 거인족이 돌아오는 날. 거인족이 다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오면, 비도프니르가…….
-하, 하하하…….
수르트는 갑자기 웃었다.
오디슨은 눈을 끔뻑였다.
"뭐지, 정말로 미쳐 버린 건가?"
-그랬던가, 그랬던가. 그랬던가! 세상이여! 너희들은…….
수르트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독한 용암은 검붉은 빛에서 눈을 태울 정도로 새빨간 빛으로 변했다. 수르트가 느끼는 지독한 분노 탓이었다.
거인족의 번영을 이끌 레바테인을 ‘정식’으로 얻기 위해서는 비도프니르의 꽁지깃이 필요하다. 그런데 비도프니르의 꽁지깃을 얻기 위해서는 레바테인이 필요했다.
말도 안 되는 조건.
워낙 대단한 것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세상은 우리를 버렸구나.
애당초 거인족이 세상을 다시 지배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수르트는 지독한 분노를 느꼈다.
신마라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언제고 거인족이 다시 재기하는 날을 기다려온 그녀. 그녀는 속았다.
세상은 그녀를 배신했다.
-그렇다면…….
수르트는 신마라 다음으로 여러 거인족을 떠올렸다.
여자를 밝히던 유쾌한 스륌. 거인의 왕이던 그는 왕답지 않게 소탈했다. 그 소탈한 성격 탓에 묠니르를 훔쳐 프레이야를 내놓으라 소리치다 죽었다. 어이없는 죽음이라 한숨에 슬픔을 담아 뱉었다.
스륌의 오른팔이 자신이라면, 그 왼팔을 자처하던 현명한 바프스루드니르. 오딘과의 지혜 대결에서 패한 뒤, 오딘 욕을 한참이나 하며 술을 마시던 친구다. 그리고 그와 함께 스륌의 아들, 스륌손을 키워냈다.
작은 왕, 스륌손.
후사가 없는 수르트는 그를 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들처럼 여겼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이들은, 모두 죽었다.
-나는 이 잘못된 세상을 부수겠다!
수르트가 가진 ‘희망’이… 아니, 그가 가진 ‘원망’이 덩치를 키웠다.
그 원망이 수르트의 영혼을 완전히 갉아먹고, 자라났다.
‘수르트’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별명으로서의 재앙이 아니었다.
* * *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정신이 나갔는지, 싸움 도중에 자꾸만 헛소리를 뱉어 대던 수르트가 완전히 미쳐 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리라.
“뭐, 뭐야……. 저, 저건…….”
“……. 아……!”
“오, 오디슨! 후, 후퇴해요! 후퇴!”
토르손이 덜덜 떨었고, 크레네가 외우던 주문이 뚝 끊어졌다.
이라호드가 꽥 소리를 질렀다.
분화구 위에서 보는 그들이 그런 상황인데, 눈앞에서 마주한 나는 어떨까? 덜덜 떨린다.
“…이런 한 수를 숨기고 있었나?”
-크아아아아악! 크악! 크아악!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내지르는 지독한 포효만이 있을 뿐.
이를 악물었다.
“…희망의 끝은… 저런 꼴인가.”
희망이라는 이름은 유피테르가 인간을 현혹하기 위해 붙인 이름임이 틀림없다. 나는 스스로 그를 ‘광신’이라 여겼지만, 어쩌면 그것도 틀린 건지 모른다.
세상을 뒤틀어 버리는 끔찍한 힘.
도대체 이게 뭘까. 언제나 궁금하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리라.
“일단은 눈앞에 있는 이 괴물을 막아야겠군.”
허, 참.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을까?
크레네와 이라호드가 호들갑을 떨고, 토르손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말소리는 화르륵- 공기가 타들어 가는 소리에 삼켜졌다. 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망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나는 눈이 유독 좋다. 어떻게 보면 천재라는 종류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그저 그렇구나- 생각했지만, 요즘은 좀 다르다.
“할 수 있는 일은 미룰 필요는 없겠지.”
창을 들어 올렸다.
수르트가 광신에 삼켜지는 걸 봤다. 나 역시 저 꼴이 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하면서, 광신은 쓰지 않는다.
이제까지 갈고 닦은 신성과 몸, 그리고 싸움 기술을 믿는다.
-크아아아악!
수르트는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하지만 레바테인에는 그다지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크아아아아아악!
붕붕붕!
허공을 가로지르는 레바테인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창을 움켜쥐고, 레바테인이 날아드는 궤적에 창을 휘둘렀다.
-크륵!
카아아앙!
굉음과 함께 레바테인이 재앙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수르트가 쥐고 흔들 때는 무슨 수를 써도 떨쳐 내지 못한 무기다. 하지만 수르트가 아닌 재앙이 된 지금. 레바테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 손아귀를 벗어났다.
수르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올랐다.
“세상이 너희를 버렸다고 했던가?”
아니다.
나는 손을 뻗었다.
“네가 거인족을 저버린 것이다.”
거인을 뒤로한 채, 재앙이 되어 버린 수르트다. 그런 그가 거인족의 신물을 사용한다? 우스운 일이다.
텁.
마치 원래 이 자리였다는 듯, 레바테인이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세상을 불태우는 끔찍한 무기.
흉흉한 별명을 지닌 나뭇가지를 쥐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재앙의 가지.
재앙이 맺히는 가지가 아니다.
“재앙을 찔러 죽이는 검이었군.”
그 끝에 맺힌 커다란 불덩어리, 망치 머리는 재앙이 맺힌 것이었다.
-크아아아악!
광분해 날뛰는 재앙이 눈앞에 있었다.
레바테인을 쥐고 휘둘렀다. 수르트가 휘두를 때처럼 끔찍한 열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뭇가지였다.
하지만 그 나뭇가지가 남긴 여파는 엄청났다.
-크어어엉!
서걱!
재앙의 일부가 잘려 나갔다.
절대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던 재앙의 불길은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듯 사라졌다.
* * *
영험한 수탉, 비도프니르는 흙바닥을 콕콕 쪼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시뻘건 무스펠헤임의 하늘이다.
하지만 비도프니르의 눈에는 무언가 다른 게 보였다.
-꼬끼오오오오!
목 놓아 울부짖었다.
거인이 모두 사라진 스륌헤임의 폐허 속에서 비도프니르는 연이어 목청 높였다.
축하하듯, 위로하듯.
닭의 울부짖음은 한동안이나 계속 이어졌다.
레바테인이 놓여 있던 금고 앞에 적혀 있던 비문처럼.
<거인이 돌아올 날, 비도프니르가 울 것이다. 그 울음을 기다리지 못하겠노라면, 비도프니르의 꽁지깃을 바쳐라. 그럼 레바테인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리라.>
여러 가지 해석이 필요한 비문이었다. 쉬운 말로 작성되었지만, 그 의미는 깊고 짙었다.
그날, 하루의 길이가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몰랐다.
새벽이란, 그저 시작을 알리는 것일 뿐. 그 끝이 언제 날지 누가 알랴? 몇 날 며칠이고 백야(白夜)가 지속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이 뒤집히고 나서야 비도프니르가 말하리라.
‘오늘 하루도 참 길었다.’
그 마침표를 기다리며, 비도프니르는 그저 꼬꼬- 울며 흙바닥을 뒤졌다.
진흙 속에서 피어날 연꽃을 기다리듯.
오랜 기다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