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화. 천재지변 (2)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불의 정령 역사책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던 이그나르. 그 입 모양이 점점 변했다. O자가 U자가 되었다. 인중을 쭉 늘린 그가 크흐흐- 하고 웃었다.
최대한 억누르던 웃음이 결국, 빵 터졌다.
“크하하하! 부자다, 부자! 우리는 부자라고!”
온몸을 덜덜 떨며 말하는 이그나르의 곁, 토르손이 눈을 끔뻑였다. 그걸로는 모자랐는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껌뻑!
토르손이 말했다.
“이거… 진짜예요?”
그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눈을 깜빡였다.
꿈이 아닐까? 그 의심은 길지 않았다.
“크헤헤헤! 그럼 가짜겠냐! 짜식아!”
팡팡팡!
이그나르가 껄껄 웃어젖히며 토르손의 등짝을 두들겼다.
토르손은 그 손이 은근히 매워, 인상을 와락 구기다가 웃었다.
꿈에서 아프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으아아아! 이게 다 얼마야?”
“크흐, 제일 작은 화정도 기본적으로 1 공적… 그러니까, 그걸 환전하면 100크로나… 크흐, 크흐흐…….”
“세상에나!”
이그나르와 토르손이 호들갑을 떨어 댔다.
곰 같은 두 녀석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최소한도로 잡아도 이 자리에 있는 화정은 10억 단위! 잘하면 100억 크로나에 달하는 공적치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이토록 기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발키리 아가씨는 짜증을 부렸다.
“조용해요!”
“거, 좀 웃을 수도 있지, 뭘…….”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요? 수르트가 직접 판 함정이라고요!”
이라호드가 화를 내면서도 조곤조곤 말했다.
이그나르와 토르손은 그제야 입을 텁 다물었다.
이라호드의 표정은 꼭 엄한 할아버지가 아끼는 도자기를 깨트린 꼬마와 같았다. 얼굴에 불안과 걱정이 가득했다.
오디슨이 이라호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뭘 그리 걱정하는 거지?”
화정=공적=돈, 이 단계가 와닿지 않은 오디슨은 침착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라호드의 걱정은 과하다 생각했다.
이라호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디슨, 수르트는 거인 왕국의 국경을 지키는 최강의 장군이었어요.”
“그건 나도 아는 일이지만…….”
이라호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오디슨은 아직 잘 몰라요. 수백 년간 국경을 지킨다는 건, 그저 혼자의 힘이 어마어마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후우- 이라호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르트는 맹장(猛將)이다. 홀로 토르에 비견될 힘을 가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듣자 하니 그 무서운 멸망의 늑대, 펜리르조차도 압도했다지 않은가? 물론, 상성의 문제가 컸다지만.
하지만 지킨다는 게 그저 강하다고 다 되는 일일까?
절대 아니다.
“…그저 맹장이라고 다 지켜 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숱한 역사 속 맹장들이 오히려 패배했죠. 그런데, 수백 년간 국경을 책임졌다는 건…….”
이쯤 되자, 오디슨도 이라호드의 걱정을 알 수 있었다.
수르트는 맹장이지만, 동시에 지장(知將)이었다. 그는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 잘 알았고, 책략도 때로는 채택했다.
우트가르다-로키. 그게 만일 로키가 잠입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과연, 아스가르드는 거인 왕국을 쉽게 이길 수 있었을까?
“으음…….”
오디슨이 침음을 흘렸다.
이라호드가 주위를 경계하며 속삭였다.
“지금 이 졸전도 수르트의 계획 중 하나일지 몰라요.”
호들갑을 떨던 이그나르와 토르손, 두 곰탱이도 더 이상 기뻐할 수 없었다. 슬쩍 움츠린 채 제 무기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공동에는 불길한 예상만이 떠돌 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이라호드가 쓰게 웃었다.
“…뭐가 어떻게 됐든……. 상대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위를 경계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나르와 토르손은 화정을 회수하면서도 무기를 손에서 떼지 않았고, 크레네는 혹시나 모를 기습을 대비해 지팡이를 꼭 쥐고 있었다. 이라호드는 청동 날개로 날아올라 주변을 살폈다.
오디슨 역시 권능을 사용해 주위를 경계하려 애썼다.
“…잘 안 되는군.”
이 함정에는 무슨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는지, 멀리 내다보는 종류의 권능이 모두 막혀 있었다. 아마, 오딘을 경계한 것이 아닐까?
몇 가지 권능을 더 써 보고서 오디슨은 이라호드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환상 계열이 모두 막혔고, 번개도…….”
파지직!
오디슨의 손에서 번개 한 줄기가 쏘아졌다. 사용한 신성에 비해서 아주 미약한 줄기였다.
“억제되는군.”
오디슨이 번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건 너무 약해졌다.
수르트는 정말 이 함정을 공들여 지은 게 틀림없다.
오딘이나 로키, 토르가 왔다면 가진바 힘의 절반도 사용하지 못했으리라.
오디슨 일행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경계하며 움직였다.
어디에서든 수르트가 나타나거나 함정이 발동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뒀다. 긴장한 채로 움직이는 것은 과한 피로를 안겨 줬지만 방심하다 죽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그것도 수르트의 기운이 짙게 느껴지는 거대한 분화구 앞까지였다.
“허.”
거대한 분화구.
시뻘건 용암으로 가득한 분화구에서는 검은 연기가 풀풀 솟아올랐다. 분화구의 크기만 해도, 니플헤임에 있는 헬의 궁전-엘류드니르가 통째로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그 장대한 분화구 때문에? 아니다.
-드르렁, 드르렁.
“…자는데?”
이그나르가 말했다.
이라호드는 당황했다.
이제까지 걱정한 게 뭐였던가! 짜증이 치밀었다.
사주경계 상태로 오느라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확 풀렸다. 맥이 빠졌다.
‘…거인족 최고의 장군은 개뿔…….’
이라호드는 당장 숨고 싶었다.
오디슨은 턱을 긁적였다. 다른 일행들은 이라호드를 보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잘됐군.”
오디슨은 그저 잘됐다고 생각했다.
경계를 굳히고 온 일? 방심하다 두들겨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다.
오디슨의 혼잣말에 이라호드가 반응했다.
“잘됐다고요?”
살짝 불퉁한 게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오디슨이 쓰게 웃었다.
“고생한 게 잘됐다는 게 아니다. 그저…….”
저렇게 수르트가 꿀잠에 빠져 있다면?
“우리가 기습할 수 있으니, 잘되었다는 거지.”
오디슨이 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늘어나라. 오디슨의 키만 하던 창이 그 두 배, 세 배로 늘어났다.
이라호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알아챘군요.”
오디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될 수 있으면 남 보는 앞에서는 안 썼다.”
“…그럼 됐어요.”
괜히 남들 보는 데서 그걸 썼다가는? 곤륜에 여의봉의 소재가 알려지고, 오디슨이 손오공과 ‘공범’이었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 수가 있다.
게다가 상황이 심각해지면 곤륜과 아스가르드 사이에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은 미약하지만.
“저놈에게 좋은 걸 알려 줘야겠군.”
“…좋은 거요?”
오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죽 웃으며 창을 들어 올렸다.
오디슨의 키, 다섯 배는 될 법한 길이에 오디슨의 팔뚝만큼이나 두꺼운 두께를 지닌 창이다.
쩌적- 아누비스의 낫으로 만든 창날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복종하라.”
오디슨의 말 한마디에 소리가 사라졌다.
공간을 잘라 내는 기물이 겨우 조금 늘어난다고 괴성을 내지르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특별한 능력을 쓰기 위해서는 주인의 허가가 필요한 물건일 뿐이다.
그 허가를 내리는 게 녹록지는 않지만…….
까드득.
“별로, 맛은, 없군.”
와작, 와작.
화정을 씹으면 괜찮다. 화정이란 불의 정령이 가진 정수. 그리고 불의 정령은 수르트에게 희생된 이들이니까.
즉, 화정은 불의 기운을 담은 영혼이다.
후끈한 느낌과 함께 상처 난 영혼이 금방 메꿔진다.
“후우.”
오디슨이 숨을 고르며 신성을 끌어올렸다.
아프로디테 덕에 커진 신성은 쓸 때마다 씁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부터 할 일은 그녀의 복수를 위한 것.
밖에서 덤벼올 제우스를 대비하기 위해, 내부의 적을 처리하는 일이다.
그리 생각하니 한층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우우우웅!
신성이 묘한 울림과 함께 점점 뿜어져 나왔다.
그 신성이 이루는 것은 오디슨에게 있어서 가장 익숙한 권능이었다.
<변치 않는 것>.
불의 정령에게 내린 축복이며, 일행에게 내린 축복이며, 오디슨이 신으로서 남에게 배운 것이 아닌 스스로의 명성으로 얻어 낸 것이다.
‘그마저도 이라호드의 도움과 세상의 오해가 뒤섞인 것이지만…….’
다수가 믿으면 진실이 되는 법.
검은색의 권능이 창에 스며들었다.
변치 않으리라.
상대를 찔러도, 상대가 저항해도.
심지어 세상이 말리려 해도 말이다.
“…세상에.”
이라호드가 거대한 신성에 탄식했다.
이그나르가 침을 꼴깍 삼켰고, 토르손이 홀린 듯 바라보았다. 크레네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으, 으응?
너무 거대한 신의 행차였던가?
용암에 몸을 묻고 단잠에 빠져 있던 수르트가 고개를 천천히 틀었다.
하지만 늦었다.
“수- 르- 트, 내- 가 빚- 을 받- 으- 러 왔- 다!”
고함과 함께 오디슨이 분화구로 뛰어들었다.
수르트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무, 무슨……!
거대한 신성을 느낀 수르트가 몸을 움직이지만, 이제 막 잠에서 깬 참이다. 날쌘 움직임은 불가능했다.
“죽- 어- 라!”
콰과가가각!
돌덩어리를 깎아 내는 소음과 함께, 오디슨이 수르트를 찔렀다.
수르트가 우뚝 멈췄다. 오디슨이 우뚝 멈췄다.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아.”
크레네가 나지막이 탄성을 뱉었다.
신화를 그림으로 그리면 꼭 이러한 광경이 아닐까?
잠깐의 감상이 끝나고.
-끄아아아아아악!
수르트의 비명이 무스펠헤임을 뒤흔들었다.
* * *
비너스의 신성을 얻은 뒤, 전력을 다하는 것은 처음이다.
어마어마한 신성은 그야말로 끔찍한 위력을 품고 창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창을 가지고 수르트를 찔렀다.
휘어지지도, 밀려나지도 않는 창격.
모든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는 일격을 견뎌 낼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그리 생각했다.
“…제기랄!”
욕을 토했다.
-끄, 끄아아악! 이 벌레 같은 놈!
화르륵! 수르트의 몸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정확하게 그의 가슴팍을 꿰뚫었으나, 그걸로는 모자랐다.
이 거대한 용암 덩어리 같은 꼴에는 심장이 없단 말인가? 머리를 날려 버렸어야 했나? 이런저런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보다…….
“공격해! 공격!”
버럭 소리쳤다.
뭐가 어찌 됐든 이 괴물을 죽여야 한다.
변치 않는 창으로는 무리였던가? 그렇다면 다른 권능을 이용해서…….
-꺼져라!
화르륵!
수르트가 거대한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이전의 레바테인도 큼직한 망치였지만, 지금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마치 첨탑을 들고 휘두르는 듯했다.
“줄어들어라!”
소리쳤다.
내 창은 순식간에 보통 크기로 돌아왔고, 나는 그 창을 세로로 세웠다.
그 덕에 살았다.
콰아아아앙!
“크윽!”
레바테인에 얻어맞고, 그대로 분화구 벽에 처박혔다.
등이 저릿저릿했지만, 제대로 맞았다면 한 줌 잿더미가 되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하고 화들짝 놀랐다.
나는 ‘지옥 불에서도 변치 않은 자’다. 내 몸에는 당연히 열기에 대한 면역이 서려 있건만…….
“꺄아아악! 오디슨!”
“공격, 공격해요!”
크레네의 비명과 이라호드의 외침이 내 귓가를 때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보 같은 목소리가 있었다.
“크하하하! 내게 불은 통하지 않는다, 이 멍청한 괴물아!”
“어엇! 형님!”
이그나르가 도끼를 앞세우고 훌쩍 뛰어내렸고, 토르손의 당황한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저 바보 같은 놈이……!
-불이 통하지 않는다고……?
수르트가 눈살을 좁혔다.
날아들며 이그나르가 외쳤다.
“얼음도끼 나가신다! 녹지 않는 얼음은 불 따위 무섭지 않아!”
-녹지 않는 얼음……?
우아아아- 고함을 내지르는 꼴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이그나르! 안 된다! 안 돼!”
-멍청한 놈! 나는 불을 초월했다!
수르트가 레바테인을 움켜쥐었다.
-너는 단지 ‘불’에 녹지 않을 뿐이다. 난 ‘불’마저 태우는 ‘용암’이다! 제 무덤인지도 모르고 덤비는 멍청한 놈, 죽어라! 새까맣게 태워 주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용암이 불을 어떻게…….”
이그나르가 어이없다는 듯 외쳤지만, 레바테인의 위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커억!”
퍼억! 소리와 함께 이그나르의 몸이 시뻘건 레바테인의 망치 머리에 얻어맞고 허공을 날았다.
“끄아아악!”
화르륵! 그 몸에는 용암이 달라붙어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혀, 형님!”
“어떻게? 분명 불 면역 축복이 있을 텐데……!”
토르손이 깜짝 놀라 외쳤고, 이라호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했다.
크레네가 황급히 주문을 외웠다.
나는 이를 갈았다.
“이 개자식!”
불을 태우는 용암 같은 건 없다.
용암은 엄연히 지독한 열기에 돌이 녹은 것이다. 불이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수르트의 용암이 ‘불’보다 뜨거울까?
법칙이 일그러진 탓이다.
익숙하다. 나도 가지고 있으니까.
수르트가 가진 저것은, ‘희망’이라는 이름의 ‘광신’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걸 저놈이 가지고 있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결- 투- 다!”
창을 꽉 쥐고서 벽을 박찼다.
수르트에게 날듯이 덤벼들었다.
지금 당장, 저놈을 쥐어 패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