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159화. 천재지변 (1)
수르트는 기분이 아주 나빴다. 토르가 스륌손이 머물고 있던 스륌헤임에 묠니르를 던져 그 충격으로 인해 흩날린 먼지가 버섯구름이 되었을 때. 그때 이후로 가장 기분이 나빴다.
수르트는 거인일 때도 그랬지만, 거인을 초월한 재앙이 되어서도 한 가지를 아주 싫어했다.
바로 거짓말이다. 기만, 혹은 사기 등 다양한 식의 거짓말을 모두 싫어했다. 그리고 수르트는 지금 자신이 속았다고 여겼다.
-토르 놈…….
까드득! 수르트가 이를 갈았다.
먹을 필요가 없음에도 어째서인지 입이 있었고, 이가 있었다. 구멍이 숭숭 난 화산탄으로 된 이다.
분명 수르트는 대규모의 정령 소실을 느꼈다.
모든 불의 정령은 수르트 휘하에 있으니, 그를 못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수르트는 생각했다.
-토르가 아니면 로키나 오딘일 거라 생각했건만…….
후우-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막에 사는 동물들도 순식간에 익어 버릴 열풍이었다.
수르트는 불길을 통해 느꼈다.
-오디슨, 그 비겁한 놈이라니……. 날, 날 얼마나 무시하는 것이냐!
화르륵! 수르트의 몸이 펄펄 끓어올랐다.
아스가르드 놈들은 자신을 엄청나게 무시하는 게 틀림없다. 아니라면, 상대도 되지 않을 게 뻔한 오디슨을 이리로 보낼 리가 없으니까.
-으윽!
수르트는 분노를 토해 내다 격통을 느꼈다. 가슴팍 깊숙한 곳, 심장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분노의 근원이었다.
이 통증을 빌미로 재앙이 되었건만, 왜 여전히 이곳이 아픈 걸까.
수르트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불의 정령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수르트 님! 흐,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쉬르트세이를 지으시느라 너무 무리하신 겁니다요!
무리? 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리라고? 재앙인 내가 이까짓 것을 짓는데 무리했다고?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말실수를 한 정령이 화들짝 놀랐다.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그것이…….
불똥을 뚝뚝 흘리는 게 아주 당황한 모양이었다.
수르트는 눈을 부릅뜨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불의 정령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적당한 변명을 찾아냈다.
-마, 맞습니다! 무리하셨습니다! 수르트 님은 세상을 파괴할 재앙, 그 자체이십니다요! 재앙은 부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 재앙이 뭔가를 만들던가요? 아닙니다요, 아니에요!
수르트는 불의 정령이 내뱉은 말이 꽤 그럴듯하다 여겼다.
-흐음…….
-그 뭐냐, 원래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면 탈이 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헤헤… 워낙 강대하신 분이라, 파괴 외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요, 네!
불의 정령은 뭔가 익숙하게 수르트의 비위를 맞췄다.
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방진 말이라 생각했으나, 녀석의 말이 맞다.
생각해 보라. 왕이 직접 궁전을 청소한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격에 맞는 일을 해야 하건만, 수르트는 너무 서둘렀다.
‘조급했던가.’
아스가르드의 신들.
그들에게 겁먹었던가? 생각하니, 괜히 또 열이 뻗쳤다. 하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수그리고 있던 불의 정령이 헤헤-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화산 깊숙한 곳에서 좀 쉬시지요, 수르트 님. 강대하신 분이시니, 조금만 쉬셔도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요.
-하지만 오디슨 그놈은…….
-아이고, 그런 날파리 같은 놈까지 수르트 님이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저희들이 있잖습니까요?
수르트는 커다란 공동에 모여 있는 불의 정령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혹여 토르가 올까 싶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함정이다. 끔찍한 함정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거기다가 불의 정령들. 재앙의 부하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믿을 만하리라.
-그렇다면, 한번 해 보거라. 저깟 놈 정도라면… 너희들로 충분하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신이 온다면 알려라. 나는 불의 기운을 보충하고 있을 테니.
-넵! 푹 쉬십시오!
불의 정령들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수르트가 천천히 화산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불의 기운으로 가득한 곳에 들어가면, 불의 정령들과는 연결이 희미해진다.
상자 속에 금화 하나가 덜렁 있다면 찾기 쉽지만, 금화로 가득 찬 금고 속에서 작은 흠집을 내놓은 금화만을 찾는다는 건 어렵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된다.
분명 불안한 일이지만…….
‘이전에도 도망친 오디슨 같은 놈이라면야, 걱정 없다.’
그리고 새로운 신이 오면 깨우라 일렀다.
수르트는 천천히 뜨거운 열기 속에서 눈을 감았다.
불의 정령들을 단숨에 죽여 버린 이의 방문을 기다리며 수르트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수르트가 사라진 공동은 온도가 확 떨어졌다. 불의 정령 수천을 모아야 엇비슷한 온도가 될까 말까 한 수르트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함이 있었다.
-크흠! 자, 그럼 모두 모여 봐! 저 오디슨이라는 놈을 작살내야지?
능숙하게 말실수를 정리한 불의 정령, 아부쟁이가 으스대며 말했다.
가장 강한 불의 정령, 대전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네가 나서는 것이지?
-어허! 수르트 님 말씀 못 들었나? 너희들로 충분하다셨잖아?
-그런데 왜…….
-그야, 그 이야기를 누가 유도했겠어? 바로 나잖아!
아부쟁이의 말에 대전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약한 주제에 이런저런 소리를 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전사가 입을 열려는 찰나.
-수르트 님을 깨워 물어볼까?
아부쟁이가 무서운 소리를 내뱉었다.
대전사가 입을 벙긋거렸다. 저기에 할 말은 한마디뿐이다.
-…아니다.
-크흠, 그럼 내가 임시 대장을 맡는 데에는 아무도 불만 없지? 불만 있으면 말해. 수르트 님을 깨워서 물어볼 테니.
모든 불의 정령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불만이야 가득했다. 이 자리에 모인 불만큼이나 가득했다.
하지만 수르트를 깨워서 묻는다? 미친 짓이다.
언짢은 수르트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
불의 정령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부쟁이가 히죽 웃었다.
권력의 맛이란!
-크흐! 그럼 함정을 한번 시험해 볼까? 흐흐흐, 내 지시로 오디슨을 무찔러 보이겠다!
아부쟁이의 권한이 점점 커지리라.
일이 잘 풀린다면, 수르트가 아부쟁이를 제 오른팔로 선포할지도 모른다.
불의 정령들은 아부쟁이의 말을 따르기 싫었다.
-농땡이 부리기만 해 봐! 수르트 님한테 일러바칠 테니까!
불의 정령들은 외통수에 걸렸다는 걸 알아챘다.
아부쟁이의 비열한 권력욕에 차마 반발할 수도 없었다.
수르트에게 ‘쟤가 영 말을 안 들어서 놓쳤어요!’ 한마디만 한다면, 그 정령은 그날로 끝장이다.
-그럼 시작하자!
아부쟁이만이 낄낄 웃었다.
끔찍한 함정의 절반 이상을 수르트가 직접 만들었지만, 그 함정을 작동시켜 오디슨을 죽인다면? 그 공은 모두 아부쟁이의 것이 된다.
아부쟁이는 달콤한 권력에 취해 외쳤다.
-첫 번째 함정 가동!
무수한 함정 중 첫 번째 것은 나름 평범한 것이다.
좁은 통로 좌우에서 용암이 흘러나오는 방식! 평범하지만 위력은 어마어마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어……? 뭐야, 쉽게 통과했는데?
-함정 작동 타이밍이 잘못된 게 아닌가?
대전사가 슬쩍 아부쟁이를 견제했다.
아부쟁이는 흥- 콧방귀를 뀌고 그 말을 무시했다.
-오디슨이라는 놈은 수르트 님과 싸울 때도 하늘을 날아 달아났다고 했지? 용암이 좌우에서 흐른다고 해도,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이니…….
아부쟁이가 오디슨이 어찌 벗어났을지 예상하며 쯧쯧 혀를 찼다.
그리고 버럭 소리쳤다.
-첫 번째 함정 만든 새끼들, 누구야!
잔소리를 시작했다.
묵직한 용암이 아니라 불꽃으로 통로를 수놓아야 했다. 묵직한 용암을 쓸 거라면 차라리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가 더 좋지 않으냐.
그런 잔소리가 이어졌다.
한 번뿐? 아니다. 함정이 격파될 때마다 연이어졌다.
-불꽃 칼날? 미친 새끼! 불에 형태가 어딨다고 칼날을 만들어!
-구멍 함정? 야! 여기 오는 놈들이 불의 정령 수십을 단숨에 지웠다는데, 구멍 함저엉? 정신이 있냐 없냐!
-구르는 돌? 무슨 돌을 썼는데? 신들이 돌덩이를 치즈처럼 푹푹 뭉개는 거 알아 몰라?
그렇게 잔소리가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20개의 함정이 파훼되었다.
그리고 21번째 함정, 방을 닫은 뒤 용암으로 가득 채우는 끔찍한 곳에 오디슨 일행이 들어섰다.
-여기라면 요행도 통하지 않을… 어?
오디슨 일행은 용암이 쏟아지기도 전에 그 방을 빠져나갔다.
아부쟁이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리고 눈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쳤다.
-어떤 새끼가 이렇게 연약한 함정을 만들었어!
그 외침에 이제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정령들이 허- 하고 헛숨을 흘렸다. 아부쟁이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뭐! 뭐!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꼬투리를 잘못 잡았다.
-수르트 님이 직접 만드신 거다.
-어…….
아부쟁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오디슨 일행은 함정을 돌파했다.
불의 정령들은 오디슨 일행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저 새끼들은 소풍 왔나? 뭘 저리 처먹어?’
‘허, 이거… 어쩌지? 함정이 벌써 절반 넘게 박살 났는데…….’
‘…수르트 님께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
다들 눈치를 살폈다.
아부쟁이는 입을 꾹 다물고 덜덜 몸을 떨었다. 불꽃이 화려하게 일렁였지만, 그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뭐야, 약하다며? 젠장할…….’
약속된 승리를 위해 억지를 부리며 책임자 자리에 앉았건만.
승리는커녕, 다 부서질 지경이다.
아부쟁이가 저도 모르게 손톱도 없는 손을 물어뜯었다. 인간일 적의 버릇일 따름이다.
대전사가 힐끔 아부쟁이를 보고 말했다.
-…수르트 님을 깨워야 하는 거 아닌가?
아부쟁이가 펄쩍 뛰었다.
-뭐, 뭐? 수, 수르트 님을 깨우자고?
대전사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을 모조리 쏟아부었지만, 오디슨 일행의 발을 잠깐씩 잡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 정말로 정령들을 싹 쓸어버린 신이 등장한다면? 발조차 묶지 못하고 다 뚫리리라.
그런 예상을 찬찬히 풀어놓았다.
-으음, 대전사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맞아. 이대로 가다가는…….
아부쟁이가 황급히 일어나 손을 휘휘 저었다.
-미쳤구나, 미쳤어! 수르트 님께서 하신 명령을 어길 셈인가!
-수르트 님께서 하신 명령?
대전사를 비롯한 정령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아부쟁이 놈이 이제 헛소리까지 하는구나- 생각하고 얼굴을 구기는 정령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부쟁이는 뒷감당 못 할 일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 놈이다.
수르트의 명령을 거짓말로 꾸며 낸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부쟁이가 잽싸게 말했다.
-수르트 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셨다! 새로운 신이 오면 깨우라고! 그런데 오디슨한테 다 뚫렸다고 하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를 믿고 맡기신 일이다! 우리가 무능하다면?
아부쟁이가 부르르 몸을 떨고 말을 이었다.
-수르트 님께서는 우리를 모조리 흡수하여 힘으로 삼고자 하실지도 모른다…….
무서운 이야기다.
불의 정령이라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온몸이 뜨겁고 시원한 맥주는커녕 맹물도 못 마시며, 불길에 휩싸여 도대체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소멸하는 것보다는 낫다.
모든 정령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가장 충성스러운 정령이자, 가장 강인한 정령인 대전사마저도 ‘소멸’을 떠올리면 진저리가 났다.
대전사가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그야…….
아부쟁이가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이렇게 앉아서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우리의 생각이 짧았다!
아부쟁이 혼자의 생각이 어느새 모두의 생각으로 탈바꿈했다.
누군가 그 점을 지적하기도 전에 아부쟁이가 말을 이었다.
-수르트 님은 우리를 믿으셨다. 이 함정이 아니라!
아부쟁이가 벌떡 일어났다.
이 실책을 어떻게든 채우려면, 위험해 보여도 달려들 필요가 있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계속 로우 리스크에 걸었으니, 돌아오는 것도 적을 수밖에.
아부쟁이가 나섰다.
-직접 움직일 때다!
물론, 혼자 나서지는 않았다.
불의 정령을 모조리 이끌고 오디슨에게로 향했다.
* * *
“정말, 끔찍한 곳이구만! 축복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겠어.”
이그나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함정 하나하나가 보통이 아니었다. 지독한 열기와 끔찍한 악의가 가득한 함정들이었다. 만에 하나 축복이 없었더라면?
이그나르가 혀를 내둘렀다.
“축복이 있는 지금도 이렇게나 더운데… 어후.”
“축복이 없었으면 첫 번째 함정에서 곧장 웰던으로 익었을걸요.”
“…그렇지? 이제까지 고기 굽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고기들한테 좀 미안해졌어.”
이그나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크레네는 어깨를 으쓱이며 모두에게 물을 나눠줬다.
그리고 이라호드는…….
“…오디슨, 열기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그 누구보다 빠르게 위험을 감지해 냈다.
오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무슨 함정일까.’
짜증이 치솟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요새라는 건 공격자에게 짜증을 안겨 주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으응?”
오디슨이 눈을 끔뻑였다.
화르륵! 거대한 공동에 불의 정령들이 가득했다. 모두가 적대감을 진하게 품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 유난히 얄미워 보이는 정령 하나가 버럭 소리쳤다.
-다가올 강적을 위한 연습이라 생각해라! 수르트 님을 위하여!
-수르트 님을 위하여!
와아아아아!
불의 정령들이 마구 달려들었다.
이라호드가 당황했다.
“어… 수르트가 있는 화산까지는 분명 많이 남았는데……? 왜……?”
발키리에게 있어서 전략 전술은 기본 중의 기본.
그렇기에 이라호드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함정만 몇 개 더 이어졌어도 이 일행의 전투력은 굉장히 낮아졌으리라.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달려든다?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한 전술이었다.
‘거인족 남성이 원래 좀 무식하다곤 해도, 수르트는… 나름 거인족 명장 중의 명장이건만… 혹시 이 병력이 미끼?’
이라호드의 머릿속에 혼란이 소용돌이쳤다.
이 혼란을 노린 거라면 대단한 전술이다. 하지만 오디슨은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지루하던 참인데… 잘됐군!”
번쩍! 거대한 신성이 권능을 이뤘다.
축복은 일반적인 권능에 비해 소비가 심하다. 꾸준히 신성을 그쪽으로 빼앗기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수천에 달하는 불의 정령에게 모두, 불 면역을 달아 준다?
어림도 없는 소리.
“안식에 드시오.”
오디슨은 헬의 권능을 흉내 냈다.
서늘한 죽음의 한기가 공동에 나타났다.
불의 정령, 아부쟁이는 생각했다.
‘망했다.’
바로 이 순간, 아부쟁이는 정답을 찾아냈다.
대규모 정령 소실 사건의 범인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수르트의 오판과 아부쟁이의 오판이 뒤엉켜 최악의 실수로 나타났다.
그 실수는 수르트의 계획을 모조리 망치는 끔찍한 것이었다.
-아, 아아! 도망, 도망쳐라아아!
아부쟁이가 소리치는 그 순간, 니플헤임의 한기가 불의 정령들을 휩쓸었다. 뼛속까지 얼리는 죽음의 한기가 정령들의 불을 꺼트렸다.
-아아악!
-차, 차가워!
-추워어!
단말마의 비명이 켜켜이 쌓여 지독한 공포의 선율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죽음의 노래가 끝났을 때, 남은 것들은 엄청난 수의 붉은 구슬뿐이었다. 그것은 화정(火精)이라는 불의 정수로서, 대장일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물건이었다.
이그나르가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다 얼마야?”
또한, 화정은 토벌대의 공적 계산에도 사용된다.
만일 불의 정령들에게 역사가 남는다면, 이 일은 최악의 인재(人災)로 기록되리라. 종족 전체를 멸망케 할 뻔한 실수라고.
뭐, 멸망해 버린 지금은 아부쟁이의 이름이 치욕스레 남을 이유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