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158화. 타락한 자들 (3)
-사라졌구나.
어딘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였지만,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분노와 원망이었다. 그는 이제 그런 목소리밖에는 낼 수 없게 되었다.
재앙. 모든 것을 부수고 망치는 ‘재앙’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의 거인, 조금 과장하자면 ‘재앙의 거인’이라 불리던 수르트는 거인족으로서도 닿을 수 없는 거대한 덩치를 가졌다. 거인족 수백이 합쳐도 낼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가졌다. 하지만 그 탓에 그는 여러 가지를 잃었다.
첫 번째는 웃음이었다.
-니플헤임 쪽으로 보냈던 정령 무리가 사라졌어.
수르트의 말에 불의 정령들이 덜덜 떨었다.
수르트에 의해 탄생하고, 수르트를 모시며 사는 녀석들이다. 하지만 녀석들도 수르트를 무서워했다.
언제고 이 재앙이 움직이는 순간, 불의 정령들은 세상을 불사르리라. 그를 위한 정령들이니까.
-자, 자세한 사항을 조사해 보고 보고드리겠습니다!
불의 정령 중 가장 강력한 놈이 외쳤다.
직접적인 연결이 없는 만큼, 수르트처럼 그 자리에서 정령들의 소멸을 알아챌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갈 필요 없다.
부글부글, 수르트의 피부를 덮은 용암이 펄펄 끓었다.
수르트는 눈처럼 보이는 붉은 불덩어리를 불의 정령들에게 고정했다.
-비열한 아스가르드 놈들이 마침내 움직인 것이니까.
수르트의 말에 불의 정령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세상을 불태울 날이 머지않았다. 온 세상이 불타는 광경을 보는 건 불의 정령들에게 있어서 낙원을 건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어쩐지 꺼려졌다.
불의 정령을 이루는 영혼들이 본능적으로 꺼리는 일이었다. 그 당사자들은 제 영혼을 볼 수 없어 혼란스러워할 따름이었지만.
수르트는 기다리기가 힘든지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저 오게 두어라.
-오게 두란 말씀입니까? 간악한 적들에게 초벌구이의 맛을…….
장군급 불의 정령이 한 말에 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한번 익혀 나오는 고기?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고기는 보통 불로 익혀질 놈이 아니다.
-불은 모일수록 강하다.
괜히 화력을 나눠 각개 격파당할 필요는 없다.
수르트는 명을 내렸다.
그 명에 모든 불의 정령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말이다.
“크아아악!”
“젠장, 젠장! 물! 물 더 없어?”
“끝이야! 없다고!”
“빌어먹을 요술사! 포르디에르, 이 망할 자식아! 어떻게 좀 해 봐!”
“젠장!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해, 미친놈들아!”
“썩을! 끝인가! 아아악! 이, 이번 토벌이 끝나면 결혼하기로 했는데……!”
토벌대 중 하나가 궁지에 몰렸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그들의 각오는 헛수고였다.
“어……? 어어……?”
“뭐, 뭐야? 불의 정령들이……?”
잘 꺼지지 않는 불처럼, 한번 싸움이 붙으면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지독하게 달려드는 것이 불의 정령이다. 하지만 지금, 그 불의 정령들이 물러나는 꼴을 보게 되었다.
포르디에르와 그의 동료들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대체…….”
구사일생했다는 안도감보다 괜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대체 불의 정령들이 뭘 하려고 모여드는 것일까?
어쩐지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포르디에르가 속한 토벌대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 어어어?! 왜, 왜!”
“왜 니플헤임 쪽에서 정령들이……!”
“아아아악!”
실력에 자신이 있어 무스펠헤임 심장부로 들어왔던 이들은 갑작스레 닥쳐온 불의 정령들에게 휩쓸려 불타올랐다.
불의 정령들은 모두 수르트에게로 몰려들었다.
무스펠헤임의 심장부, 거대한 화산으로 몰려갔다. 그 화산의 분화구에는 수르트가 자리 잡은 채였다.
불의 정령들이 모여들고, 수르트는 명을 내렸다.
-요새를 만들라.
불의 정령들이 그 명을 따랐다.
거대한 화산을 중심으로 들어가기 어렵고, 빠져나오기는 더 어려운 수르트의 요새가 지어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무스펠헤임에 거대한 요새만이 자리 잡았다.
꼭 섬과 같은 꼴이라, 붙여진 이름.
쉬르트세이(Surtsey, 수르트의 섬).
-어서 오라, 비열한 아스가르드여. 내가 바싹 태워 주마.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불길한 곳에 한 토벌대가 닿았다.
* * *
“함정이에요.”
이라호드가 딱 잘라 말했다.
그녀의 말에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르트가 함정을 꾸릴 정도로 정신이 말똥한가 아닌가- 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야 눈앞에 이런 거대한 구조물이 있으니… 의심할 대상이 아니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거, 딱 보니까 오븐 같구만.”
이그나르가 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오븐이라. 내 집에도 있는 주방기구다. 물론 써 본 적은 없다. 가스레인진가 뭔가 하는 마법 물품에도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그걸로 뭔가를 구울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억지로 사용법을 배웠다.
그런데 오븐은?
좀 더 본격적이고 어려운 요리를 위한 기구였다. 불길이 치솟는 가스레인지보다 훨씬 뜨겁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쨌거나 이그나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계속했다.
“열 손실이 적고, 내부 온도는… 으음, 잘 모르겠군. 거 뭐냐, 예전에 그… 태양 불? 그것만큼이나 뜨거운 모양인데…….”
아폴론에게서 얻어 낸 물건을 말하나 보다. 스콜과 하티가 그걸 받고 기대감에 가득차 낄낄 웃은 적이 있는데… 그 물건을 이그나르에게 주고 식사를 대접받은 모양이다.
크레네가 움찔 몸을 떨었다.
“…오디슨, 설마… 들어갈 생각은 아니죠? 오븐은 엄청 뜨겁다구요. 오디슨 집에 있는 것만 해도 230도까지 올라가요. 그런데 수르트가 만든 함정이라니…….”
크레네가 진저리쳤다.
그녀의 말이 꽤 설득력 있었는지 일행은 모두 고개를 주억였다.
“함정에 괜히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죠.”
“이 크기를 봐. 세흐림니르도 통째로 구울 수 있겠는걸? 그런 곳에 들어가겠다고? 아주 기름이 쫙 빠지다 못해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질걸?”
“…대장, 여긴 좀 아닌 것 같은데…….”
230도면 얼마나 뜨거운 거지? 눈썹을 찌푸렸다. 영 감이 안 온다. 하지만…….
“들어가기 싫다면 됐다.”
“오! 그래? 그렇다면, 천천히 바깥부터 무너뜨리는 건가?”
이그나르가 반색했다.
멍청한 놈.
“아니, 그냥 남아 있어라. 나 혼자 다녀올 테니.”
이건 나를 위한 초대다.
수르트가 날 눈치채고 지어 올린 궁전이다.
그를 거절하는 건 사내답지 못한 일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다른 일행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디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얼마나 많은 불의 정령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들어가겠다고요?”
이라호드와 크레네가 꽥 소리쳤다.
귓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라 깜짝 놀랐다.
귀를 후벼 파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문제 있나? 저들의 열은 내게 닿지도 않건만.”
“후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혼자 들어갔다가 신성이 똑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신성이 똑 떨어진다?
글쎄… 지금 내가 가진 신성은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에 그보다 3배는 더 큰 비너스의 신성을 합친 것이다.
이게 똑 떨어지는 걸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릇이 커진 만큼 차오르는 속도가 느려야 하지만, 신성이라는 것은 좀 달랐다. 그릇이 커지면 차오르는 속도도 빨라진다.
며칠 전 일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랬다. 썼던 신성은 싸움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차올랐다.
고개를 갸웃했다. 과연, 힘이 다 되어 쓰러지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아마 몇 년은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쉬고.
일행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꼭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 영 마뜩잖다.
크흠- 헛기침을 했더니, 크레네가 괜히 화들짝 놀랐다.
이라호드 역시 혀를 내두르다, 큼큼-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말이 그렇지. 먹지도 쉬지도 않고 계속 싸우겠다구요?”
으음, 그걸 생각하면 확실히.
혼자 들어가는 건 무리다. 하지만 괜찮을까? 내가 일행을 보호할 수 있을까?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일행을 둘러보는 시선. 그 의미를 알아챈 모양인지, 이그나르가 제 가슴팍을 탕탕 두드렸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얼음도끼 이그나르라고!”
“…얼음은 불에 취약하지 않던가?”
“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 무슨 주머니 괴물 같은 소리야?”
주머니 괴물은 나도 TV를 돌리다 본 적 있다. 기괴한 동물들을 부리는 만화영화다.
이라호드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얼음 공격은 불속성에 절반 피해, 반대로 불 공격은 얼음에 두 배 피해…….”
“거! 만화 이야기 좀 하지 말라니까.”
“게임 원작이거든요?”
“크흠, 어째 발키리 아가씨는 그런 쪽을 잘 아는 거 같지만… 어쨌든! 내가 누구야? 식당 주인 아니냐, 이 말이야! 스콜하티에 별을 다섯 개나 따낸 대단한 요리사라고!”
이그나르가 자신의 장점을 바꿨다.
얼음도끼보다 식당 주인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녀석은 두툼한 배를 내밀며 히죽 웃었다.
“밥은 그냥 툭 나오나? 누군가 해야 할 거 아냐?”
그럴듯한 이야기다.
토르손 역시 고개를 주억이며 덧붙였다.
“요리라는 건 혼자 하기 힘든 일이죠. 대단한 주방보조가 필요합니다, 형님.”
“크흐흐, 그렇지, 그래.”
이그나르와 토르손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라호드가 쯧, 혀를 찼다. 영 못 미더운 모습인가 보다.
“오디슨, 저런 바보 같은 소리를 듣고…….”
이라호드가 뭐라 말했지만, 크레네가 슬쩍 끼어든다.
“오디슨, 수분 공급은 아주 중요해요. 인체의 절반 이상이 수분인데, 개중 겨우 5%만 손실되어도 의식이 사라질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저도 따라가야겠어요.”
“크레네, 당신마저……!”
이라호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결심한 듯, 이라호드가 입술을 열었다.
“오디슨, 공적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알아요?”
갑작스러운 질문이다.
그게 뭐지? 눈을 끔뻑였다.
이라호드가 흠흠- 목을 고르고 말했다.
“공무원을 대동하는 일이죠.”
피식 웃음 지었다.
식사 조달과 수분 공급, 그리고 이번에는 공적 증명인가?
나는 일행을 푸근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힘든 일이다.”
툭 던진 말에 일행이 제각각 한마디씩 내놓는다.
“거, 인생에 안 힘든 일이 얼마나 있다고.”
“대장, 힘든 일이니 여럿이서 해야지!”
“올림포스를 빠져나오는 것도 여러모로 힘든 일이었어요.”
“흥, 얼마나 잘하는지 봐 줄게요.”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모두가 재앙에 겁먹지 않았다.
혼자보다 둘, 둘보다는 셋이던가? 다섯이나 되니, 든든하다.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접었다.
다들 어린애가 아니니까.
“가자.”
그저 이끄는 걸로 족하다.
내가 전사인 것처럼, 이들도 전사다.
* * *
“후우.”
지쳤다.
헬은 도대체 얼마 만에 이렇게 피곤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태어난 이후 가장 피곤한 게 아닐까?
날 때부터 신이던 헬으로서는 낯선 느낌이었다.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강글로트가 쓰게 웃으며 달콤한 꿀물을 가지고 왔다.
헬은 피로 회복에 좋다는 꿀물을 들이켜며 멍하니 무스펠헤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안개벽이 가로막고 있는 그 땅. 이전보다 훨씬 짙어진 안개가 서린 곳이다. 얼마 전, 오디슨이 그리로 향했다.
걱정되었지만, 그를 막을 순 없었다.
“…괜찮겠지?”
“네, 강대한 힘을 손에 넣으셨으니… 금방, 수르트를 끝장내실 거예요.”
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너스의 신성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덕에 헬은 기분이 이상했다.
“…감싸 줘야 할 사람이었는데.”
어느샌가 그에게 기대는 일이 늘었다.
보호받는다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 넓은 품에 안겨 있자면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헬은 멍하니 안개벽을 바라보았다.
‘빨리 돌아왔으면.’
볼이 살짝 붉어졌다.
자신이 아주 맹랑해졌노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예언을 하나 할까?”
갑자기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 헬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종잡을 수 없는 운명의 여신들, 노른 세 자매가 예언을 읊조렸다.
“세 갈래로 나뉜 사슬은 모두를 옭아맸지.”
“첫 번째 갈래는 오딘의 늑대가 제 이빨을 포기하고 끊어 냈어.”
“두 번째 갈래는 오딘의 늑대가 늑대 무리를 이끌고 나서서 쫓아냈지.”
헬은 불길함을 느꼈다.
오딘의 늑대. 오딘의 늑대.
반복되는 등장인물. 그리고 그는…….
“…오디슨.”
오딘의 늑대, 프레키 오디슨.
헬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동방의 격언은 아직 그녀가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노른들이 그를 언급했다.
“세 번째 갈래 앞에 선 늑대는 이 싸움이 끝나고 어찌 될까?”
예언답지 않게 궁금증을 남기며 끝났다. 하지만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은 듣는 이가 가지고 있었다.
토사구팽(兔死狗烹).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까지 삶아 먹는 것.
오딘이 자주 쓰는 방식이다.
헬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