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156화. 타락한 자들 (1)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다.
어지럽다.
언제였던가? 어릴 적, 갑자기 열이 끓어올랐을 때 이후로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아니다. 발할라로 오기 전에도 느껴 봤던가?
기분 나쁜 감각이다.
“이 느낌은…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을 불러왔지.”
열이 끓어오르고 난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주술사 영감에게 듣자니, 어머니께서도 그 당시 나와 같은 증상을 앓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날 돌보시느라 제대로 쉬지 못하시고 악화되었다고.
죄책감이 들었다. 누군가를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한 건 그 일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계에서의 마지막 전투, 독 때문에 어지러웠다. 그리고 물푸레나무 부족의 울프헤딘 대장으로 사는 삶이 끝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너스인가.”
하나씩 잃었고, 언제나 그 상실을 딛고 일어섰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전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계에서의 삶이 끝났을 때, 나는 에인헤리가 되었다. 그리고 비너스는…….
“신성.”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을 남겼다.
올림포스 12주신 중 하나였던 만큼, 이전 내가 가지고 있던 신성보다 최소 3배는 될 법한 신성이었다.
분명, 비너스 신앙이 많이 훼손되었음에도 그랬다.
기쁜 일이다. 기쁜 일.
“…후우.”
그런데 왜 이렇게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할까?
기분이 좋지 못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길게 쭉 뻗은 위그드라실 줄기가 떡하니 자리한 하늘. 발할라의 하늘은 오늘도 푸르다.
멍청하게 거리 한복판에 서 있자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디슨 아니야?”
“뭐지… 갑자기 휙 나타난 거 같은데…….”
“무슨 촬영 중인가? 카메라는 안 보이는데…….”
“사인해 달라고 해야겠다. 너, 펜 있어?”
언제나와 같은 반응들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그뉘나 판도라와는 다르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방식으로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다.
팬 서비스 같은 걸 할 여유는 없지만… 기분이 상했다고 그들을 내치는 것도 안 좋은 짓이리라.
마음을 정리했다.
“…복수.”
수르트의 이름 옆에 유피테르의 이름을 새겼다.
욱신거리는 영혼의 통증을 뒤늦게 알아챘다.
“비너스의 것을 받았다고 해도, 아직은 미치지 못한다.”
유피테르는 강력하다.
비다르 같은 놈도 타락하여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는데, 올림포스의 왕은 오죽할까?
순서를 밟아야 했다.
비너스가 한 부탁을 들어줘야지.
“그럼 일단은…….”
발키리 본부로 가자.
이 지독한 영혼의 통증과 답답함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싸울 필요가 있다.
저벅저벅, 걷는 내 앞을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 * *
거인 왕국과의 전쟁 후, 발할라는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투사들이 수르트의 폭주에 희생되었지만, 그 상처도 점점 아물어 가는 중.
다시 찾아온 평화에 발할라 사람들은 점점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곧 투기장도 다시 열린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발할라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속보] 올림포스, 사실상 멸망?>
갑자기 튀어나온 뉴스.
옆 동네라고 할 수 있는 올림포스가 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이건 굉장한 충격이었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올림포스가 왜 망해? 거기가 얼마나 센데?”
“오보겠지.”
발할라 사람들은 대부분 오보일 거라 생각했다.
올림포스가 전쟁 중이라는 건 이미 전해진 소식이다. 하지만 그 전쟁은 분명 올림포스가 우세한 상황. 그런데 갑자기 멸망?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믿건 말건 사실이었다.
<[속보] 올림포스, 멸망 확인!>
<마법으로 확보한 올림포스의 모습!>
<올림포스에서 신계 연맹에 보낸 마지막 통신 확보.>
더 이상 사람들은 오보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많았다. 대신, 사람들은 ‘왜?’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체 왜, 올림포스가 망했는가?
<배신으로 멸망한 올림포스.>
<티탄을 상대하러 갔던 아테나의 배신?>
<티탄과 기가스, 그리고 아테나.>
시끌벅적해졌다.
티르는 이 소식에 깜짝 놀라 오딘을 찾았다. 그리고 토르를 대신해 아스가르드 가디언을 이끌고 있는 펜리르도 오딘을 찾았다.
두 신은 오딘이 기거하는 위그드라실 최상부에서 마주쳤다.
“올림포스 건 때문인가?”
티르의 물음에 펜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르트의 폭주로 인해 숱한 병력을 잃어버린 펜리르는 몇 달 사이에 폭삭 늙은 듯 보였다.
“그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지.”
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신은 오딘을 함께 알현하고 대책을 회의하고자 했다.
오딘의 거처를 지키고 있던 발키리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오딘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티르가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때가 어느 땐데 자리를 비웠다는 건가? 짜증이 치솟았다. 전후 처리로 바쁜 와중에 시간을 냈건만!
펜리르 역시 혀를 찼다.
“쯧, 부전자전이군.”
토르가 자리를 비워, 아스가르드 가디언을 맡게 된 펜리르다.
그는 이 부자(父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았다. 티르처럼 기대하고 실망하여 짜증 내기보다는 차선책을 생각했다.
“젠장할. 본 걸 말해 줘야 할 거 아냐!”
“쯧쯧, 괜히 짜증 부리지 말고, 가자고.”
“가? 어딜! 오딘도 보지 않고 가겠다는 건가?”
티르가 화를 참지 못하고 펄펄 뛰었다.
펜리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딘이 자리를 비웠어도, 오딘의 자문은 멀쩡히 있을 테니까.”
“자문……?”
티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펜리르가 씩 웃었다.
“울 아부지.”
오딘의 의형제인 로키는, 오딘의 참모다.
지략이 부족한 오딘을 보좌하는 역할. 회귀 이후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오딘과 가장 가까운 신이다.
두 사람은 곧장 로키에게로 향했다.
아무도 없어야 할 오딘의 거처에서 쯧- 나지막하게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우스가 사건을 터트렸군.”
그를 위해 오디슨을 보내 ‘희망’을 빼앗아 오도록 했다. 멀쩡한 신이라면 신경 쓸 게 없는 희망이지만, 타락한 신에게는 그만큼 탐나는 물건도 없을 터.
본래 신앙으로 채우고 사용할 수 있는 신성. 하지만 타락한 신이 신앙을 받을 수 있을까? 극소수의 원한을 먹어치울 수는 있지만, 대다수의 신도들은 타락한 신을 외면할 터.
그런 상황을 상정하여, 영혼을 대가로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사악한 물건.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인간을 미워하던 제우스가 만들어 낼 법한 물건이다.
“예정된 대로.”
하지만 알고 있던 일이었다.
수르트의 폭주가 예정된 일이라면, 타르타로스의 붕괴도 예정된 일. 그리고 아테나의 배신은 필연이다.
올림포스 12주신 중 아테나는 유독 인간을 아꼈다. 전쟁 신이지만 아레스와는 다르다. 아레스가 그저 전쟁을 위한 전쟁 신이라면, 아테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쟁을 펼친다.
인간을 미워하는 제우스와 그의 아래에 있는 아테나.
오딘은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예상치 못한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오디슨.”
늑대가 멋대로 날뛰었다.
그 늑대가 아프로디테의 신성을 물어 온 것은 좋은 일이지만…….
“목줄이 필요하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늑대를 묶어야 한다.
그 목줄을 쥘 수 있는 건…….
“…흐음.”
오딘이 명단을 훑어보다 멈췄다.
그가 살피던 명단은 발키리 명부. 모든 발키리의 인적사항이 수록된 책자다.
* * *
토벌대는 약탈단보다 오히려 적은 수로 이뤄졌다.
일단 할랴헤랴르 용병단 인원을 모조리 제외했다. 그것만 해도 인원이 확 줄어들었다. 50이 넘던 숫자 중 절반이 죽었고, 남은 이들의 대부분이 제외됐다.
“이게 무슨 토벌대야? 토벌조지!”
이그나르가 어이없다는 듯 투덜댔다.
딱히 대꾸할 필요는 없다. 어깨를 으쓱였다.
토르손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불의 정령만 잡는 거라면야 뭐……. 상관없긴 한데…….”
힐끗힐끗 날 살피는 게, 아무래도 나와 익숙한 녀석답다. 토르손은 내가 토벌대를 꾸리는 의미를 확실히 알아챈 모양이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럴 것 알잖나.”
“…그럴 줄 알았지.”
어휴- 토르손이 한숨을 내쉬었다.
크레네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디슨, 그냥 불의 정령들을 잡으면서 공적을 쌓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같은데…….”
“무리예요, 오디슨.”
이라호드 역시 크레네에게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는 게, 아무래도 내가 느끼는 가슴속 답답함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도 그러리라.
비너스를 구하러 간다고 갔던 내가 빈손으로 돌아와 토벌대를 꾸리겠다- 소리쳤으니까. 그녀들이 말리지 않은 것도 내 마음을 헤아린 결과 아닐까?
쓰게 웃었다.
괜한 걱정을 안겨 준 것 같아서.
“그렇게 걱정되나?”
툭 뱉은 말에 이그나르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손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이그나르와 크레네는 그저 날 뚫어지게 쳐다볼 뿐.
일행이 모두 꺼리는 일이다.
독불장군처럼 내 말대로 해! 하고 소리치는 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것도 필요하다.
“반론은 안 받는다. 빠지고 싶으면 빠져.”
“제길, 왜 물어본 거야?”
이그나르가 입술을 삐죽였다. 꼭 곰같이 생긴 놈이 저렇게 뚱한 표정을 지으니, 영 보기 좋지 않다.
토르손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대장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따라갈게.”
“토르손! 오디슨, 이 무식한 놈 말대로 하겠다고?”
이그나르가 기겁하며 외쳤다.
무식한 놈이라니. 내가 이그나르에게 저런 소리를 들을 만큼 무식하지는 않은데……. 눈살을 좁힐 때, 토르손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은 무모한 짓을 많이 하지만… 못 할 짓은 안 해요.”
“…끄응. 못 할 짓을 안 한다니……. 지금 겨우 다섯이서 무스펠헤임에 발을 들여놓은 것부터가 미친 짓인데…….”
이그나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그나르에 대한 설득은 뒤로 미뤄 두고, 크레네와 이라호드를 바라보았다. 내 눈빛에서 뭔가를 느낀 걸까? 두 여자는 서로를 보더니 후우- 한숨을 쉬었다.
“…오디슨, 날 죽이진 않을 거죠?”
크레네의 말.
죽이다니. 내 여자를 죽일 리가 없다.
문득 비너스가 떠올랐다. 울컥, 마음속에서 거친 파도가 쳤다.
까드득,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널 죽일 일은 없다.”
나도 놀랄 만큼 단단한 말.
그 말에 크레네가 흠칫 놀랐다.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믿을게요, 오디슨.”
이라호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그나르를 제외한 모두가 날 따르기로 했다.
이그나르가 한숨을 푹 쉬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젠장, 알았어. 안 그래도 가족들을 불러오려면 수르트가 끝장나야 한다니까… 거기에 한 손 보태는 걸로 하지, 뭐.”
툴툴대면서도 언제나 날 믿는 녀석이다.
처음 고기를 먹으러 갔다가 이놈에게 쫓겨났다는 게 문득 생각났다.
비너스는 죽었지만, 이들을 죽이진 않을 거다.
이건, 그를 위한 싸움이다.
-화르륵.
공기가 데워지는 소리.
이라호드가 흠칫 몸을 떨고 창을 꺼냈다. 다른 사람도 모두 당장에 싸울 준비를 마쳤다.
잘됐군.
“무기는 넣어 둬도 좋다.”
“네? 그게 무슨…….”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겨우 이 인원으로 왔는지, 보여 줄 테니까.”
“하지만 오디슨, 저 숫자를 봐요! 불의 정령이 약하다곤 해도, 저 숫자라면…….”
크레네가 걱정을 드러냈다.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뜨, 뜨거워어… 뜨거워!
-내 불을 가져가! 내 불을 가져가라고!
-나, 나는 이렇게 아픈데 왜… 불태워 주마! 너희도 불태워 주마!
화르르륵- 불의 정령들이 무수히 튀어나왔다.
개중에는 샐러맨더 위에 올라탄 이들도 있었다.
-모두, 모두 불태워 버려라!
-키에에에엑!
샐러맨더의 울음소리와 함께, 불의 정령들이 덤벼들었다.
하지만 나는 창조차 꺼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창을 뻗는 것도 아깝다.
“이제 그만 쉬시오.”
권능을 발했다.
비너스의 신성을 얻은 뒤, 처음으로 쓰는 권능.
그 위력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