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화. 망각 (4)
신들은 희망을 품었다.
쾅쾅쾅! 번개가 떨어질 때마다 티탄들이 숯 덩어리가 되어 죽어 가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몇몇은 불안감을 느꼈다.
쩌저적!
천둥소리 사이에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때문이었다.
신이라는 존재의 본질적 공포를 자극하는 소리. 그 정체는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신성이 서로 공명하며 일어나는 진동이었다.
“죽어라! 옛 시대의 망령들아!”
쾅쾅쾅!
제우스의 번개에 티탄들이 비명을 질렀다.
“제우스, 제우스, 제우스! 널 저주하겠다!”
“아아아악!”
가이아는 입술을 짓씹고, 기가스에게 명했다.
“제우스를 찢어 죽여라!”
강력한 번개를 흩뿌리는 제우스에게 달려들라는 명령. 비정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지만,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기가스들은 창조주인 가이아를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키에에에엑!
가장 먼저, 뱀의 하체를 가진 괴물들이 덤벼들었다.
그 뒤를 티폰이 낳은 무수한 괴물들이 따랐다.
-크어엉!
-무오오오오!
머리 개수가 서로 다른 히드라들은 독을 뿜어내며 제우스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덩치의 사자, 머리가 여럿인 맹수들은 날카로운 이빨로 제우스의 목덜미를 뜯고자 했다. 미노타우로스를 비롯한 반인반수의 괴물들은 단단한 무기를 내밀며 돌진했다.
제우스가 노호성을 터트린다.
“감히! 감히! 감히! 이 올림포스에 저런 추악한 괴물들을 들이다니!”
쾅쾅쾅!
아스트라페가 괴물을 겨눌 때마다 괴물들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티탄들과는 상황이 약간 달랐다. 티탄들은 말 그대로 전 세대 신들. 강하다곤 해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인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불사의 존재이긴 하지만, 그들은 짜릿한 번개에 닿기만 해도 풀썩풀썩 쓰러져 행동불능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끄에에에엑!
기가스들은 살을 태우는 번개에 몸서리치면서도 달려들었다.
뱀의 하체를 달고 있는 기가스들은 가이아가 직접 제우스를 죽이고자 만들어 낸 것들. 가이아는 바보가 아니다.
제우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아스트라페에 높은 저항력을 가질 수 있도록, 피부가 돌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쾅쾅쾅!
연이어 떨어지는 벼락에도 기가스들은 몸을 비틀며 달려들었다.
“크으윽……!”
-키에에엑!
제우스의 신성이 빠르게 줄어 가는 상황.
기가스들은 제우스에게 창을 던졌다. 대지가 만들어 낸 창, 종유석 창이 마구 날아들었다.
“크아악!”
제우스가 아스트라페를 휘둘러 그를 박살 냈으나, 수에서 차이가 심했다. 몇 개의 종유석이 제우스의 몸에 박혔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티폰이 낳은 무수한 괴물들.
-키엑!
-크어어엉!
-무오오!
히드라가 독액을 뿌렸고, 괴물 같은 맹수들이 제우스의 몸 여기저기를 물었다. 반인반수들은 흥분해 마구 무기를 던졌다.
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더러운 것들이 감히!”
콰과광!
아스트라페의 힘을 앞세운 제우스.
그가 번개의 창을 휘두를 때마다 매캐한 냄새가 올림포스를 가득 채웠다. 아름답던 올림포스는 이제 없다. 피와 불, 그리고 시체가 즐비한 곳.
가이아가 눈을 빛냈다.
“호호호! 제우스, 힘이 빠지고 있구나!”
까드득, 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가이아가 한 말대로다. 그는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아테나의 배신으로 인해 신성에 새겨진 상처. 그 상처는 힘을 쓸 때마다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절망했다.
“아, 아아……! 제우스 님마저도…….”
“어떡해!”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한다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는.
게다가 제우스가 어마어마한 수의 적을 쓸었지만, 모든 적이 쓰러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티탄과 기가스들은 많이 남아 있었다.
“감히, 감히…….”
“이제는 지쳐서 제대로 말도 못 하는 건가?”
가이아가 빈정거리며 제우스의 곁으로 다가섰다. 분명 올림포스 최고의 신성을 지닌 것은 제우스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12주신이다.
그렇다고 가이아와 같은 고대 신이 그들보다 약할까? 12주신에 속한 풍요의 데메테르나 불과 쇠의 헤파이스토스 같은 이들은 사실상 가이아의 하급 신이다. 그런 입장의 가이아가 제우스보다 약할 리가 없다.
그것도 제우스가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면?
“하늘이여! 오늘, 땅으로 떨어져라!”
“크흐윽……!”
콰앙!
가이아의 신성이 권능을 이룬다. 그 권능은 <태산>. 하늘을 찌르기 위해 준비된 제우스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권능이었다.
제우스는 그 공격에 비틀거렸다.
“가, 감히……!”
“입만 살았구나!”
“가아아암히이이!”
쾅쾅쾅!
제우스의 신성과 가이아의 신성이 서로 맞부딪치며 전쟁을 벌인다. 천공과 대지의 전쟁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다.
땅이 하늘로 치솟고, 하늘이 땅을 짓누른다.
하늘과 땅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끔찍한 광경.
올림포스가 마구 뒤틀렸다.
“아아아악! 사, 살려 줘!”
“아, 안 돼! 안 돼! 나, 나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죽어 나갔다. 티탄과 기가스들은 가이아의 손짓에 물러서 있기라도 했지만, 올림포스의 신들은 제우스의 경고를 받지 못했다.
아니, 경고를 받았다 한들 도망칠 곳도 없었으리라.
하급신들의 비명 속에서 12주신은 제 살길을 모색했다.
“아르테미스! 이, 이쪽이다! 이쪽으로 와라!”
“오빠!”
팔 한쪽을 잃은 아폴론과 눈 하나를 잃은 아르테미스. 쌍둥이 남매는 벌벌 떨며 싸움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쪽으로 달아났다.
“어, 엄마! 얼른 가자! 도망가야 돼!”
“하지만, 난 그 새끼 꼴도 보기 싫은데…….”
“그럼 어쩔 거야? 이대로 죽을 거야?”
“신은…….”
“신성을 빼앗기면 끝장이야!”
페르세포네의 말에 데메테르가 화들짝 놀랐다. 신은 기본적으로 불로불사다. 하지만 신성을 빼앗긴다면?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즉, 죽을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지금의 올림포스는 12주신에 의해 돌아가던 법과 원칙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다.
‘영혼까지 소멸한다.’
데메테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위이자 오빠인 하데스를 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명계로 도망치는 것조차 특권이다.
“엄마!”
“아, 알았어!”
페르세포네가 이끌고, 데메테르가 뒤따랐다.
데메테르는 마지막으로 올림포스를 눈에 담았다. 본래 올림포스에서 지내지 않던 데메테르지만, 하계불가침이 제정되고 늘 여기에 있었다.
궁전 하나 떡하니 있던 곳에 마을이 들어섰고, 도시가 생겼다. 처음부터 그 모습을 지켜본 데메테르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녀가 눈에 담은 올림포스는 그녀의 추억이 깃든 곳이 아니었다. 건물들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하늘이 땅으로 떨어진다.
데메테르는 결국, 명계로 달아났다.
그렇게 달아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티탄들에게 붙은 이들도 있었다.
“이보쇼, 내가 거 뭐냐… 키클롭스 삼형제 그 할배들이랑 친했거든? 거 뭐냐, 같이 쇠도 두드리고, 같이 술도 먹고, 어? 다 했어! 다!”
“으음, 헤파이스토스……? 으으으음…….”
가이아가 우라노스에게 반발한 가장 큰 이유가 키클롭스 삼형제를 타르타로스에 가뒀다는 것이다. 외눈박이에 흉측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 우라노스로서는 그 자식들이 껄끄러웠던 모양.
이후, 크로노스를 왕위에 올리게 되지만, 그 크로노스 역시 키클롭스를 꺼내 주지 않았다. 그 결과, 티타노마키아 때에 제우스가 그들을 꺼내 주어, 아스트라페를 만들게 했다.
최후가 영 좋지 않긴 했지만.
“키클롭스 삼형제의 제자라면야. 우리 티탄들로서도 너를 싫어할 이유가 없지.”
“그렇고말고! 쉬불! 내가 거, 원래 멀끔하게 잘생긴 놈이었다 아니우? 근데 제우스 저 쌍놈의 쉐끼가…….”
헤파이스토스가 제우스를 싫어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헤라 홀로 낳은 헤파이스토스가 부부 싸움에서 헤라의 편을 들자, 제우스가 그를 하늘에서 떨어뜨려 절름발이로 만들어 버린 탓이다.
제우스가 지금 저렇게 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 모두 그의 원죄다.
“거 따라오시오. 티탄을 배신한 년을 잡아 죽여야 할 거 아니오?”
“티탄을 배신했다?”
“아프로디테 모르시오?”
“그 창녀!”
헤파이스토스는 티탄들을 이끌고 아프로디테의 저택을 급습했다.
에로스가 망연자실한 제 어머니를 억지로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콰아아앙!
지금 박살 난 저택에서 아프로디테가 사로잡혔으리라.
에로스가 아프로디테를 잡아끌었다.
“어, 어머니… 빠, 빨리요! 빨리!”
“어디로 달아난단 말이더냐? 에로스… 늦었다, 늦었어.”
아프로디테는 초췌한 꼴로 탄식했다.
에로스가 입술을 질끈 씹었다.
“아스가르드로. 아스가르드로 가요, 어머니.”
“거긴…….”
아프로디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아스가르드라는 말에 그녀가 떠올린 이는 오딘이 아닌 오디슨이었다. 사랑의 묘약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던 때의 기억은 끔찍한 것이었다.
납 화살을 맞아 그를 미워하게 된 아프로디테는 망설였다.
에로스가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요! 오디슨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라면…….”
“…후우. 됐다, 에로스. 너 홀로 달아나거라.”
“하지만 어머니!”
“에로스, 새아가를 잘 지켜 줘야 한다.”
“엄마!”
아프로디테가 쓰게 웃으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에로스는 어쩔 줄 몰라 하고, 프시케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 그 둘을 피신시키려면 아프로디테가 남는 게 낫다.
그게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에로스는 제 어머니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에로스, 엄마 말 들어! 당장 가!”
“아, 안 돼…….”
에로스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프로디테가 피식 웃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엄마가 시간을 끌 테니까.”
“어, 엄마…….”
“새아가! 에로스를 데리고 가렴, 어서!”
프시케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로스는 가지 않으려 애썼지만, 아프로디테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에로스에게 권능을 사용해 명령했다.
분홍색의 신성이 에로스의 정신을 옭아맨다.
“에로스! 가라! 가!”
“아, 아으……!”
에로스가 권능에 저항하지만, 완벽하게 저항할 수는 없다.
신성의 차이가 너무 컸다. 오디슨처럼 무식하게 제 영혼을 깎아 먹으며 저항하는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늦었다.
“어딜 가시나!”
헤파이스토스가 쩔뚝거리며 티탄을 이끌고 아프로디테 앞에 나타났다.
아프로디테가 입술을 짓씹었다.
“헤파이스토스…….”
“흐흐흐, 티탄들께서는 배신한 창녀를 두고 보실 생각이 없다는군.”
아프로디테가 이를 악물었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저들에게 잡힌다면 죽는 것만 못한 상황이 되리라.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아프로디테는 신성을 끌어올렸다.
“저리 꺼져!”
분홍색 신성이 그들에게 명했다.
에로스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곳에서 가장 약한 신이라고 해도 헤파이스토스다. 제국의 모신(母神)으로 추앙받을 때야 헤파이스토스를 떨쳐 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제국이 무너졌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신성이 확 줄었다. 그에 비해 어둠 속에서 할 일 없던 티탄들은 신성을 다루는 데 있어 아프로디테보다 훨씬 능숙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아프로디테의 <매혹>을 막아 냈다.
“흐흐, 앙탈을 부리는구나!”
“걱정 마라, 곧 앙앙거리는 소리를 내게 될 테니까!”
티탄들은 혀를 날름이며 히죽 웃었다.
헤파이스토스가 망치를 짊어지고 나섰다.
“팔이나 다리는 딱히 필요 없겠지?”
“아…….”
아프로디테는 자신에게 닥쳐 올 끔찍한 운명을 떠올리며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헤파이스토스의 망치가 아프로티데의 팔다리를 짓뭉개는 일은 없었다.
푸욱!
“어, 어어어……?”
헤파이스토스가 눈을 끔뻑였다.
그 와중, 그는 자신의 신격에 걸맞은 행동을 보였다. 헤파이스토스는 제 가슴팍을 꿰뚫은 창의 재질을 알아보았다.
“신진철……?”
부피가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곤륜의 전략 자원.
이를 쓰는 걸로 가장 유명한 신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헤파이스토스가 입가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며 중얼거렸다.
“손오공이 왜……?”
덜덜 떨며 한 말이지만, 그 대답은 틀렸다.
“나는 원숭이가 아니다, 대머리.”
아프로디테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설마? 눈을 끔뻑였다.
“…왜?”
그리고 질문이 튀어나왔다.
아프로디테의 이해를 뛰어넘은 일이 벌어졌다.
질문에 대한 답은 피식 옅은 웃음과 함께 튀어나왔다.
“불렀잖나?”
아프로디테는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 오디슨은 사고방식이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프로디테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의 묘약을 먹은 뒤 오디슨에게 푹 빠졌던 자신을.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차지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