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153화. 망각 (3)
“안 돼요!”
이라호드가 꽥 소리질렀다.
붉게 달아오른 그 얼굴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당황이 뒤섞인 얼굴이다. 미안한 마음이 안 들 수가 없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아프로디테한테 무슨 빚을 졌다고 그래요! 그 여자는 헬을 납치하려던 여자라는 걸 잊은 건 아니죠? 네?”
안달하는 이라호드의 말에 크레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디슨, 위험해요. 지금 올림포스의 상황은 그리 쉽게 생각할 게 아니예요. 전 세대 신들인 티탄들이 깨어난 데다, 신성을 지닌 괴물들인 기가스까지 부리고 있어요. 엘리시움의 영웅들도 패퇴했다고요!”
입을 다물었다. 내 침묵은 그녀들의 말에 대꾸할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의지를 굳혔다는 침묵.
두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전사다.”
딱 잘라 말했다.
이라호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헬께서 이 자리에 있으셔야 했는데.”
이라호드의 말에 쓰게 웃었다.
만일 헬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는 나보다 윗줄의 신. 신성을 이용해 충분히 날 옭아맬 수 있는 여신이다.
헬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깨를 으쓱였다.
“TV에서 말하기를, 헬께서는 수르트의 열기를 막아 내고자 니플헤임을 감싸고 계신다던데.”
걱정이다.
신성으로 냉기를 만들어 내는 것? 헬이라면 큰 고생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규모가 니플헤임이라는 지역 전체를 덮어야 한다는 게 문제다.
그건 헬이 아니라, 오딘이라 할지라도 힘겨운 일이리라.
“…수르트를 끝장내는 것도 서둘러야 하는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에 이라호드가 쯧- 혀를 찼다. 그녀의 눈이 날 흘겨보았다.
내 입가에서 쓴웃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라호드.”
“…왜요?”
불퉁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이라호드.
“크레네.”
“…후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울적한 표정을 짓는 크레네.
두 여자를 부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전사다.”
그게 내 본질이다.
그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싸움터를 벗어날 수 없다. 다치고 아프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멍청한 싸움을 찾아 전전하는 것이야말로, 내 가장 깊숙한 곳에 박힌 뿌리다.
이라호드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가려구요?”
“그야…….”
허리춤에 묶어 둔 숄을 펄럭였다. 매의 날개옷.
날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발할라 입출국 관리는 그리 느슨하지 않아요.”
“그런가? 흐음…….”
비프로스트의 지킴이, 헤임달이 떠올랐다.
발할라 입출국 관리국장이던가? 어쨌든 기괴한 이름의 직책으로 바뀐 그지만, 그의 권능은 우습게 볼 게 아니다. 후긴과 무닌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기억과 생각을 읽어 내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지킨다는 입장에는 훨씬 더 걸맞은 능력이다.
아홉 세계 모든 곳에 헤임달의 눈이 닿지 않는 데가 없고, 귀가 예민해 양털이 자라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한번 놓친 것에 대한 기억을 읽어 내는 재주는 없다지만, 눈을 돌리지만 않으면 모든 곳을 감시할 수 있는 권능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헤임달을 쓰러트리고 가야 하나.”
마뜩잖은 일이다.
딱히 안면도 없는데, 열심히 제 맡은 일을 잘하는 신을 쓰러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이라호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간다고 하면 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맞아요, 오디슨. 신들은 그리 허술하지 않아요!”
크레네가 맞장구쳤고, 이라호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도와줄게요.”
“네, 그러니까… 에?”
크레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라호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믿어 왔던 측근이 배신자라는 걸 들은 듯한 왕의 표정이다.
-이라호드, 너마저.
크레네의 생각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역시, 내 발키리다.”
“흥! 전 물건이 아니거든요?”
얼굴을 붉히며 짜증을 부리는 이라호드.
그 모습이 귀엽다. 슬쩍 머리를 쓰다듬자니, 이라호드가 내 품에 안겼다.
그녀가 속삭인다.
“…다치지 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거 없는 약속이다.
* * *
이라호드는 오디슨의 아파트에서 나와 곧장 입출국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CCTV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발키리들이 갑작스러운 방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라호드?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요. 그냥 선배들 도와주러 왔죠.”
“뭐? 오디슨 님은?”
일손이 부족한 발키리들이기에 도움을 주러 왔다는 이라호드를 내치진 않았다. 그저 전속 발키리라는, 모든 발키리들이 꿈에도 그리는 지위를 획득한 이라호드가 전속 대상을 내팽개치고 왔다는 게 신기할 뿐.
이라호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수련을 마치고 오자마자 자요. 그간 잠도 안 자고 수련했다고… 후우.”
이라호드가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이러다가 복 다 날아가겠네.’
오디슨의 전속 발키리가 된 이후, 영 재수가 없는 게 그 이유가 아닐까? 이라호드가 괜한 생각을 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선배 발키리들은 쯧쯧, 고개를 저었다.
“불쌍하긴. 오디슨 님처럼 잘생긴 신의 전속 발키리가 독수공방이야?”
“독수공방은 무슨! 그,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이라호드가 볼을 붉히며 변명하자, 발키리들이 낄낄 웃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창 나이 때의 처녀들이 모여서 할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남자 이야기뿐.
이라호드는 일부러 약간씩 빌미를 주며, 그 이야기를 부정했다. 당당하게 말하는 것보다 부정을 섞어 손사래를 치는 게 더 효과적이다.
입출국 관리사무소의 발키리들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왕성하다. CCTV를 온종일 살펴보는 것 역시 그런 취향과 꽤 적절한 일이었다.
하지만 CCTV가 도심지에 설치된 것도 아니다. 국경선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뭐 볼 게 있겠는가?
좀 더 은밀한 걸 살펴보고 싶다. 좀 더 깊숙한 비밀을 알고 싶다. 가십에 굶주린 그들은 관음증과 같은 증상을 앓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에게 이라호드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오디슨 님이랑 헬께서 사귄다던데… 진짜야? 그거?”
“오디슨 님이 그… 그게 그리 튼실하다며?”
“이라호드, 말 좀 해 봐!”
이라호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연예인 매니저가 친구나 가족들에게 연예인 소식을 추궁당하는 꼴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매니저가 연예인의 애인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한 것이다.
유명인의 사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선배 발키리들을 허덕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소음은…….
“뭐가 이리 시끄러워!”
출입국 관리소장에게도 전달되었다.
양털이 자라는 소리마저도 들을 수 있는 헤임달에게 여자 여럿이 내지르는 소리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앗! 죄, 죄송합니다!”
이라호드가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계획대로.’
헤임달은 눈과 귀가 너무 밝은 탓에 잠을 새처럼 잔다. 즉, 만성 수면 부족이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소음을 낸다면?
“도대체가 말이야! 일을 도와주러 왔으면…….”
히스테리를 부리기 마련.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자 따발총처럼 쏟아지는 잔소리에 이라호드는 고개를 숙여 울먹이는 연기를 펼쳤다.
지금이 바로, 입출국 관리사무소가 마비된 시점이다.
부르르- 이라호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쯧! 일 도와주러 왔다면서 폰도 안 꺼 놓고…….”
그게 빌미가 되어 잔소리가 다시 또 쏟아졌다.
이라호드는 짜증이 벌컥벌컥 치솟았지만, 그저 감내할 뿐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보지도 않았지만, 그 내용이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크레네가 보낸 메시지일 터.
[크레네] [오디슨 갔어요]
[크레네] [진짜… 이래도 되는 거예요?]
이라호드는 삐친 표정으로 한참을 더 혼나야 했지만, 모두가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 * *
올림포스.
가장 강한 신계는 아니지만, 강중약으로 따지자면 강에 속하던 신계다. 그 특유의 아름다운 풍경과 목가적인 생활 방식은 올림포스를 동경하는 신들마저도 만들어 낼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하지만 조용하고 평화롭던 그곳이, 오늘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기, 기가스! 티탄들까지!”
“도망쳐! 도망쳐!”
비명이 여기저기 울려 퍼졌고, 폭발음과 파열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은 그 자체로 성스러움을 가진 예술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서지고 불타오르는 중이라 흉물스러울 따름.
흰색 대리석에 재와 그을음, 그리고 피와 내장이 묻었다. 흰색이 주로 사용된 올림포스 거리는 그 더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하급신들은 비명을 내질렀고, 영웅들은 겁에 질렸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오빠! 조심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등 싸울 수 있는 신들은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긋하기 짝이 없는 데메테르도 마찬가지였다.
평화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아악!”
“태양 전차를 몬다고, 네가 태양이라 생각했느냐?”
“헤, 헬리오스, 당신이 왜……?”
“형제들을 맞이하는 자리다. 내가 빠질 수는 없지.”
올림포스의 신들이 지닌 힘은 티탄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신과 티탄의 대결만 해도, 왕권을 가로챈 제우스가 있음에도 10년이나 걸리는 긴 전쟁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기가스까지 있다.
“아, 아아……! 오, 오빠!”
“크으… 아르테미스! 도망쳐라, 도망쳐!”
평화에 젖어 싸우는 법을 잊어버린 신들과 복수를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아온 티탄. 그리고 본능에 따라 신들을 사냥하는 기가스.
하급신들은 덜덜 떨면서도 눈물 흘렸다.
“아… 올림포스 최후의 날이다.”
“도망칠 곳도 없어…….”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하계로?
신계 연맹에 소속된 곳들끼리의 내전이라면, 훌륭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신계 연맹은 유명무실. 도움을 줄 수 없다.
하계불가침? 티탄들이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다.
신들은 절망했고, 침략자들은 미쳐 날뛰었다.
“더러운 옛것들이 괴물을 끌고 왔구나!”
꽈르르릉!
번개가 떨어졌다.
아스트라페가 쉴 새 없이 벼락을 떨어뜨렸다.
올림포스 최강의 신. 명실상부, 올림포스를 지배하는 자. 신왕 제우스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끄아아악! 제우스! 네놈을 저주한다!”
“으아아아아아!”
-끼에에에엑!
티탄과 기가스들이 번개에 맞고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제우스가 아무리 강대하면 뭐할까? 제우스의 신성은 제우스를 제외한 11명의 주신을 합친 것만큼이나 크다. 문제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수백의 티탄과 수천의 기가스가 힘을 합치면 제우스도 어쩔 수 없다.
복수에 미친 티탄과 본능에 따라 올림포스를 파괴하려는 기가스.
제우스는 신왕의 자리에 오른 후, 처음으로 벅참을 느꼈다.
“…아테나는, 아테나가 당했단 말인가……!”
가용 가능한 병력을 최대 한도로 끌고 나간 아테나. 그 빈자리를 노리고 들어온 공격인 만큼, 제우스는 힘겨워 헐떡였다.
그가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하급신들은 비명을 토하고 죽어 나가고 있었다. 제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올림포스를 넘겨야 한단 말인가!’
권력에 미쳐 후계자인 아레스를 밀어내고, 후계자가 될 법한 모두를 쳐냈다. 그런데, 제 핏줄도 아닌 옛 세대에게 밀린다?
제우스는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거대한 신성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모여들었다.
“미, 미친!”
“저, 저런 걸 여기에 떨어뜨리겠다고? 올림포스를 네 손으로 부술 셈이냐!”
티탄들이 비명 질렀다.
제우스가 눈을 꾹 감고 말했다.
“찬탈자들이여! 반역자들이여! 이 올림포스를 쉽게 앗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빼앗길 바에 차라리 내 손으로 부수겠다!”
거대한 신성이 아스트라페에 깃들었다.
내던지기만 하면 올림포스가 박살 날 터. 신과 티탄, 기가스는 이 순간, 한마음이 되었다.
‘피, 피해야 해!’
어디로? 피할 곳은 없었다.
그때, 청량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멈추십시오, 아바마마!”
아테나였다.
“아테나! 돌아왔구나!”
“예, 돌아왔습니다.”
“잘됐다! 저 잡것들을 모조리 죽여라! 모조리!”
제우스가 답지 않게 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테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칼을 뽑아 들었다. 신조차도 찔러 죽일 수 있을 법한 날카로운 칼.
제우스는 후우- 한숨을 내쉬며 신성을 진정시켰다. 최후의 수단으로 올림포스를 부수려던 것이지,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걸 안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푸욱!
“뭐? 무, 무슨 짓이냐, 아테나…….”
아테나의 칼은 제우스의 심장을 찔렀다.
제우스가 눈을 부릅뜰 때, 아테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왕위를 계승하는 중이옵니다, 아바마마.”
“네, 네가… 어떻게……!”
제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뜰 때, 티탄들과 기가스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들이 내준 길로 여유롭게 걸어 들어온 것은 가이아. 대지의 여신이었다.
가이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잊었느냐, 제우스? 너와 메티스의 아이가 가장 위대한 자가 될 거라는 예언을? 그 예언을 한 나를?”
“가, 가이아… 아, 아테나는…….”
제우스가 덜덜 떨며 말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가이아는 알아들었다.
가이아가 피식 웃었다.
“딸이라고? 그 딸의 아들, 네 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예언이 완성될 리가 없다고? 우스운 소리다, 제우스.”
가이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시대가 바뀌었다.”
여신이라도 신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옛것을 몰아낸 제우스지만, 그도 어느샌가 옛것이 되었다. 제우스는 자신이 옛것이 되었다는 걸 몰랐다.
그게 아테나의 배신을 알아채지 못한 이유다.
“…크, 크흐흐… 크흐흐흐! 내가 낡았다고? 우스운 소리!”
쩌저적- 제우스의 신성에 금이 갔다.
보통의 신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빠져나가는 신성을 통제하지 못할 터. 제우스는 달랐다. 가뭄이 든다 한들, 깊은 강이 마르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리는 게 당연하다.
제우스는 아스트라페를 휘둘렀다.
꽈르릉!
“꺄아아악!”
아테나가 튕겨 나갔다.
제우스가 심장에 박힌 칼을 뽑아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채 제우스가 외쳤다.
“이 땅은 내 것이다!”
꽈르르릉!
금 간 신성이지만, 거기에 담긴 힘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올림포스에 번개 폭풍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