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152화 (152/208)

# 152

152화. 망각 (2)

티타노마키아.

오랜 옛날 있었던 올림포스의 전쟁. 제우스가 아버지인 크로노스에게 왕권을 빼앗고, 크로노스를 섬기던 티탄들과 한바탕 벌인 전쟁이었다. 티탄이라고는 하지만, 전대 신. 신 대 신의 전쟁인 만큼, 쉽게 끝나지는 않았다.

무려 10년에 걸친 전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와 다르다.”

제우스가 말했다.

12주신 회의. 벌을 받고 있는 아레스와 마음을 아직도 추스르지 못한 아프로디테를 제외한, 10명의 신뿐이다.

하지만 제우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기간토마키아도 이겨 낸 우리다.”

신들의 힘으로 부족해 인간 영웅이 반드시 필요했던 전쟁이다. 그로 인해 제우스는 하계에 무수한 씨를 뿌렸고, 전쟁을 일으켰다.

영웅을 담금질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전쟁이었다.

“겨우 구시대의 늙은이들에게 당하지는 않을 터.”

“…하지만 아버지, 그들은…….”

아폴론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제우스가 손사래를 쳐 그의 입을 막았다. 아폴론은 입을 닫는 수밖에 없었다.

‘…예언이 되지 않아.’

티탄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같은 신이다.

당연히 아폴론의 예언은 먹통이 되었다. 예언 없이 벌인 일들이 얼마나 끔찍했던가? 아폴론은 불안감을 숨길 수 없었다.

그에 제우스가 피식 웃었다.

“별것 아닌 놈들이다. 엘리시움의 영웅들을 보내면 그만. 괜한 걱정할 필요 없다. 하지만…….”

제우스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눈썹을 씰룩였다.

“아스가르드 측, 오딘에게는 어느 정도 배상을 받아야겠지.”

오래전부터 올림포스의 영역이던 곳이 아스가르드의 영역이 되어 버린 탓에 생긴 일이다. 제우스는 결코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해도, 하계를 모두 잃는 건 좋지 못하지.’

제우스는 이미 닥쳐 온 전쟁을 이겨 낸 후를 생각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올림포스의 그 누구도 티탄들에게 패배할 거라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왜? 왜, 패배했지?”

으드득, 제우스가 이를 갈며 헤라클레스에게 따져 물었다.

영웅신, 헤라클레스는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 패배의 이유? 들자면 여러 가지 들 수가 있다.

방심했다고 할 수도 있다. 티탄들을 무시하던 제우스의 태도, 그리고 마냥 낙천적이던 신들의 태도가 엘리시움의 영웅들에게 옮았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가이아가 깨어났습니다.”

“…가이아가?”

제우스가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왕좌의 손잡이를 와락 쥘 정도였다.

대지의 여신. 아니, 대지 그 자체인 가이아(Gaia).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다. 아스가르드에서 긴눙가가프라고 부르는 곳이며, 곤륜에서 대라천이라 부르는 곳.

그 장소는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신이었다. 혼돈은 두 딸을 낳았다.

대지인 가이아와 밤인 닉스(Nix)다.

혼돈이 닉스를 낳을 때, 가이아는 스스로 우라노스와 우레아, 폰토스를 낳았다. 그리고 제 아들인 천공의 신 우라노스와 결혼하여 크로노스를 낳았다.

즉, 가이아는 제우스의 증조모이자, 고조모다.

개족보가 따로 없는 만큼, 제우스는 옛 신들을 추악하다 생각했다. 크로노스의 왕관을 빼앗은 뒤에 티탄들을 모조리 타르타로스에 쑤셔 박은 것도 그런 연유였다.

지독한 자기모순. 현 올림포스 족보를 제대로 꼬아 놓은 제우스가 할 짓이 아니었다. 그 시절, 제우스는 자신이 이리될 줄 몰랐겠지만.

“가이아… 기간토마키아 이후, 어디론가 숨었다 여겼건만…….”

티탄들을 풀어 주기 위해 티폰을 낳았다.

그 티폰은 가이아가 만들어 낸 기가스라는 괴물들을 이끌고 올림포스를 침공한다.

그것이 바로 기간토마키아다.

“영웅들은 괴물을 이길 수 있지만, 땅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헤라클레스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제우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영웅이라 한들 인간 혹은 반신이다.

대지를 이길 수 있다? 그렇다면 그건 인간도, 반신도 아닌 온전한 신이라 불러야 하리라.

제우스는 차마 헤라클레스를 더 타박할 수가 없었다.

방심했다.

‘…가이아가 다시 나설 줄이야.’

제우스는 신들도 영웅과 함께 싸우도록 명령했다.

아레스의 부재중인 지금, 그 명령을 받들 수 있는 것은 아테나뿐이었다.

“아테나, 내게 승리를 가져다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술이라는 게 생기기 전 시대의 신들, 단순무식한 티탄들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괴물들은 감히 아테나를 이길 수 없을 터.

제우스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수였다.

“왜 이렇게 소식이 없나? 아테나에게 연락은 여전히 안 되는가?”

제우스가 물었다.

전쟁이 터진 지 3개월이 다 되어 가는 시기였다.

그는 기억했어야 했다.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난 자식이 그 누구보다, 심지어 신왕(神王) 제우스보다도 뛰어날 거라 예언했던 게 누구인지를.

* * *

“허.”

헛숨을 흘렸다.

겨우 3개월 사이에 수르트가 거인이 아니라 괴물이 되었다. 재앙의 거인? 예전 그 별명 그대로지만, 문제는 저 거인이 거인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거대한 인간 형상.

[모두 불태우리라!]

TV 속에서 보이는 모습은 끔찍했다.

피와 살로 이뤄져 있던 수르트는 온데간데없고, 용암으로 이뤄진 괴물이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고 있었다.

한마디 외칠 때마다 불길이 사방팔방에 치솟았다. 그리고 그 불꽃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수르트의 명을 받들어 아스가르드를 침공할 준비를 하는 불의 정령들, 그리고 온몸이 시뻘건 불꽃으로 이뤄진 샐러맨더.

나는 TV 속 모습을 보며 그저 헛숨만 토했다.

“…이제 알겠어요? 왜 말렸는지? 저런 괴물한테 덤비면 그냥 죽는다구요!”

텅 빈 투기장 대기실.

전쟁 중이라 텅 비었겠거니- 생각한 게 틀렸다.

전쟁 중이라 텅 빈 게 아니라, 수르트가 폭주할 때 휩쓸린 투사들이 돌아오지 못한 탓이었다.

“부활… 부활은?”

이라호드에게 물었다.

이라호드가 고개를 저었다.

“…영혼이 불탔는지, 아니면…….”

[모조리 태워버리자! 수르트 님의 명을 따라라!]

수르트를 작게 축소한 듯한 불의 정령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후우, 오디슨. 그러니까…….”

“저 불의 정령들이, 죽은 이들의 영혼이 다시 탄생한 것들이라고?”

“…아마도요.”

이라호드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수르트에게 복수를 꿈꾸면서도, 분노는 크지 않았다. 단원들이 부활했을 거라 믿은 덕이었다.

내가 약해졌다는 것. 그 자존심의 상처와 부활 비용의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부활할 수 없다니…….”

저 광경을 보니 달랐다.

머리에 열기가 확 치솟았다.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한 것도 모자라, 되살아날 수 없게 하다니.

당장 저 빌어먹을 괴물을…….

“오디슨! 진정해요!”

“마, 맞아요! 아무 준비도 없이 뛰쳐나가서 어쩌려구요?”

크레네와 이라호드가 날 말렸다.

마음 같아서는 날 잡는 손을 떨쳐 내고 싶지만……. 분노로 뻑뻑해진 머리를 굴리자니, 정답이 보였다.

맞다. 당장 뛰어 들어가서 어쩌겠단 건가?

“…제길.”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 아까 TV에서 라드게리타가 한 말은? 거액의 현상금이 어쩌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 괴물을 홀로 잡을 수 있는 이가 있다고?

펄펄 끓어오르는 가슴을 식히고자, 내뱉은 의문에 이라호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아스가르드 정규군이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래요.”

“…어째서지? 투사들이 많이 죽어서?”

“그것도 있지만…….”

이라호드가 입을 벙긋거릴 때, 크레네가 슬그머니 신문을 내밀었다. 글자가 빽빽해 나는 좋아하지 않는 물건이다.

읽으려 하지 않아도, 가장 큰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토르, 잠적! 우트가르다-로키의 정체에 충격 받은 듯.>

이게 무슨…….

“…우트가르다-로키가 로키라는 사실에 토르께서 삐치셨다고?”

어이가 없어 묻자, 크레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이번 전쟁을 끝장낸 일격도 사실은…….”

토르께서 하신 일이다.

나도 들어서 안다. 하지만 세세한 이야기를 듣자니, 여러모로 좀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토르께서는 우트가르다-로키의 환상이었던 ‘스크리미르’에게 적개심을 품고 계셨단다.

그야, 이제까지 너도 나도 한방이었는데, 그게 간지럽다느니 새똥이 떨어졌냐느니 하며 무시했으니까.

그럴 법하다.

다만…….

“다시 또 환상에 속았다는 게, 좀 충격이셨나 봐요. 토르의 시종인 티알피가 발표하기를, 토르께서 쪽지 하나만 남겨 두시고 사라지셨다고…….”

“쪽지?”

“수련하러 가신다고 해요.”

골이 아프다.

그렇다면 펜리르는?

“그게…….”

펜리르는 본래도 수르트에게 밀렸다고.

로키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으면, 아주 크게 당했을 거란다.

원 역사에서 오딘의 머리를 씹어먹은 양반이 무슨…….

“불이랑 상성이 안 좋은가 봐요.”

“…스콜이랑 하티를 생각하면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

해와 달을 삼켰다는 늑대들이 떡하니 있는데, 괴물 늑대의 왕인 펜리르가 그걸 못한다? 이상한 일이다.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오디슨이 원 역사 이야기를 틀리는 건 처음 보네요.”

“틀렸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스콜과 하티가 해와 달을 삼킨 게 아닌가?

눈을 끔뻑였다.

“맞아요, 그건.”

“그럼 뭐가 틀렸단 거지?”

“원 역사에서는 그 이후에 스콜과 하티가 죽어요. 열기와 냉기를 못 이겨서요.”

…그런가?

아폴로를 상대할 때는 멀쩡했던 것 같은데.

“아폴론은 태양이 아니라, 태양을 인도하는 자니까요. 올림포스의 태양신은 여전히 헬리오스예요. 헬리오스가 태양 관리를 소홀히 해서 아폴론이 대신해 주는 거라고 보면 돼요.”

그래서 그랬나?

태양을 터트리니 뭐니 할 때, 비너스가 말도 안 된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그야, 주인이 아니라 빌려 쓰는 놈이 그딴 소리를 하니까 어이가 없었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로 돌아와서 정규군이 못 움직인다면?”

“그야, 토벌대를 따로 조직하겠죠. 아, 약탈단 허가 끝났어요.”

그건 당연한 일이다. 전쟁이 끝났으니까.

토벌대에 관해 더 듣고 싶다.

“토벌대는 그, 사실상 약탈단이 바뀐 거나 다름없어요. 무스펠헤임을 제외하면 세계수가 이어진 모든 곳을 점령했으니까요. 불의 정령을 잡는 걸로 공적치를 계산해 수당을 제공한다더라고요.”

흐음, 그런가? 하지만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잠깐만요… 자세한 건 저도 봐야 알아요.”

“발키리가?”

“…그쪽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이라호드가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크레네가 했던, 맨날 놀았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가? 뭐, 이라호드도 휴식이 필요하겠지.

이라호드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어디 보자…….”

그 납작한 판석을 이리저리 찌르고 누르고 쓰다듬었다.

여전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기물이다. 그 광경을 빤히 보고 있자니, 이라호드가 살짝 볼을 붉혔다.

“흐응.”

크레네가 샐쭉하게 나와 이라호드를 흘겼다. 우리 둘 사이에 흐르는 분홍색 분위기를 알아챈 모양.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지만, 이라호드는 괜히 머쓱한지 헛기침을 했다.

“큼큼! 아! 찾았다. 그러니까, 여기 보면…….”

이라호드가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내민 판석 위에는 토벌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부르르르!

“어, 어어?”

이라호드가 눈을 깜빡였다.

나 역시 눈살을 좁혔다.

“…에로스?”

“뭐지? 갑자기 왜……? 일단 전화 받아 볼게요.”

전화라면 나도 안다. 이그나르에게 전화를 해서 하계로 보낸 일도 있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뿌듯하다.

메르키의 마법 물품을 빌려서, 내가 마법을 쓰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이라호드가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아, 네? 네? 그게 무슨……!”

이라호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핀다.

눈살을 구겼다. 에로스라는 놈은 내가 알기로 비너스의 아들이다. 또, 계집애처럼 희멀건 녀석이었다.

설마!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이라호드가 바람을……?

미간을 찌푸릴 때, 스마트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어머니를 살려 줘! 제발……! 제발… 흑흑……!

울부짖는 소리.

비너스가 위험에 처했다고?

올림포스가 전쟁 중이라는 건 들었지만…….

“…으음.”

고민이다.

눈을 끔뻑일 때, 이라호드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끊어졌어요.”

내 집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그 적막을 깨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크레네와 이라호드가 잽싸게 내 양팔을 잡았다.

“오디슨, 설마! 올림포스로 가겠다는 건 아니죠? 네? 아니죠?”

“오디슨, 안 돼요!”

두 여자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언젠가 꺼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해내느냐의 문제지.”

분명, 비너스와의 첫 만남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빚을 졌다. 사랑의 묘약 때문이든 뭐든, 상관없다.

그 빚은 갚았다고 생각하면 갚았다. 하지만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게다가…….

“나 좋다던 여자가 죽는 것도 영 개운치 못한 일이지.”

그게 이제는 날 미워하는 여자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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