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151화. 망각 (1)
신성의 수련이 그림이라니. 어이없는 일이지만, 수련은 쉽지 않았다.
신성은 저렴하게 표현하자면, 주름과 같다. 나이가 먹으면 자연스레 늘어나는 주름처럼, 신성 역시 그랬다. 어느 정도 신위를 보인 뒤에는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아도 신성은 늘었다.
물론, 그 회복 속도를 늘리기 위해서는 열성적인 신자들이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조금만 고생하면 늘어나는 주름과 같다.
땡볕에서 농사를 짓던 부족 최고의 농사꾼, 후안은 40대에 이미 주술사 영감과 비슷한 나이 때로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주름으로 그림을 그리라면? 어려운 일이다. 강렬한 의지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인상을 구기고 있어야 한다.
신성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그와 비슷했다.
“제기랄.”
절로 욕이 나온다.
메르키가 깍깍 웃었다.
“그저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냑! 권능은 의지닥! 으지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닥!”
생각하는 힘.
확실한 형상을 떠올리고, 그 형상을 의지로 구현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성의 움직임으로 형태를 만들고, 신성의 성질을 바꾸어 색을 만드는 것. 그건 아주 기초일 뿐이었다.
“못해 먹겠군.”
한숨을 쉬며 말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메르키가 쯧쯧 혀를 찼다.
“왜 못 한다는 거냑!”
“아니, 대체… 없는 걸 그리라니, 그게 무슨 소린지 당최 모르겠소.”
툭 내뱉은 말에 메르키가 푸드덕 날개를 홰쳤다. 약간 화난 듯한 태도로 녀석이 말했다.
“권능 중에 보이는 것만 있더냐? 매혹을 도대체 어떻게 그릴 생각이지? 게다가 멀리 있는 걸 보는 천리안을 어떻게 그릴 생각이냑? 그런 ‘보이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신으로서 네가 가장 많이 쓰게 될 권능이닥!”
여러모로 어렵다.
미의 여신들이 대부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매혹’은 그저, 아름답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 아름다움이 치명적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숲은 미녀의 미모보다 더 신비롭다. 하지만 숲을 베어 내는 일을 꺼리는 이보다 미녀를 죽이는 일을 꺼리는 이가 훨씬 많다.
게다가 천리안이라…….
“…내 눈에는 안 보이는 곳을 그려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안 보이는 곳을 보는 나를 그려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메르키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날 째려보았다.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형태를 지닌 것은 아주 잘 그리는 놈이 도대체… 안 보이는 건 왜 이렇게 못 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다, 까악!”
메르키의 말에 별다른 대꾸하지 않고,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답답하다. 더 답답한 것은 내가 왜 ‘형태가 있는 것’을 잘 그려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메르키가 말하기를, 경험이 많은 나이 든 신일수록 명확한 형태를 잡아 낸다는데… 나는 인간의 기준에서도 나이가 많지 않다.
“제길.”
짜증이 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벌써 여기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났나? 괜히 걱정이 들었다.
무심코 걱정을 입 밖으로 꺼냈다.
“…수르트가 벌써 죽은 건 아니겠지?”
수련에 집중해야 한답시고, 메르키가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통에 바깥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다. 토르와 펜리르가 달려들어 수르트를 죽여 버린 게 아닐까?
괜한 걱정들이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걱정하지 마락. 수르트는 멀쩡히 살아 있으니깍!”
“…거짓말은 아니겠지?”
슬쩍 의심을 담아 바라보자, 메르키가 푸드득 날개를 홰쳤다.
“이 망할 자식! 내가 너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어딨냑! 어서 수련이나 해랏! 최단 기간 수련 완수가 어쩌니저쩌니하더니… 이미 최단 기간은 물 건너갔닥!”
쯧, 벌써 한 달이나 지났으니 당연한 일인가?
인상을 구겼다. 그런데 그 수련을 가장 짧은 시간에 마친 이가 누구지?
슬쩍 메르키를 보자, 메르키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가 그 기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한각?”
“으음, 누구지? 나도 아는 신인가?”
“그야, 당연하닥.”
오딘… 께서는 이깟 수련 하실 리가 없고……. 토르나 티르도 그렇다. 그 외에 가장 강한 신을 꼽자면? 흠. 누구지?
미간을 찌푸렸다.
“…펜리르?”
툭 내뱉은 말에 메르키가 깍깍 웃었다.
“브라기다.”
아, 그 자식. 얻은 신격의 문제로 신성을 모을 수 없다뿐이지, 신성을 다루는 데 천재적이라고 했던가?
-‘그림니르(오딘의 가명)의 입술이 흐르는 것’처럼, 나 역시 ‘에기르의 딸들’에게 안긴 듯한 유려한 물결을 탄다네. 허허, 뭐, 자네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이야긴가?
예전, 브라기놈이 한 말이 떠오른다.
언제였던가, 케닝그를 자꾸 써서 짜증 나서 한소리 했더니 들은 이야기다.
그때는 이게 무슨 미친 소린가- 생각했지만…….
그림니르의 입술 흐름은 시(詩)를 의미하고, ‘에기르의 딸들’은 파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해석해 보자면…….
“오딘께서 시를 읊는 것처럼, 파도처럼 요동친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대충 무슨 소린지는 알 것 같지만. 그러니까…….
“…뜬구름 잡는 소리군.”
어? 뜬구름?
그걸 어떻게 잡지?
“하.”
문득,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브라기가 왜 신성을 자유자재로 다뤘는지 알 것 같다. 그놈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에 빗대 이야기를 했으니까.
“먼 곳을 보는 형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현실을 무시할 필요가 있군.”
신성이 얽힌다.
언제나처럼 멍한 표정의 내 얼굴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는 주변과는 상관없는 광경이 비친다.
…됐다.
“깍깍! 이제야 알았구나! 신성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힘! 현실에 얽매일 필요가 없닥!”
메르키가 깍깍 웃었다.
나는 이 작은 깨달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생 도움 안 될 것 같던, 주둥이만 산 브라기가 도움이 되다니!
감격에 잠긴 내게, 메르키가 말했다.
“이제 마지막 난관만이 남았닥!”
“마지막?”
메르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으로 그림을 그려, 신성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지 않은가? 그런데, 그걸로 긴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겠닥?”
긴급한 상황이라…….
메르키가 제시할 마지막 난관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속도.”
메르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수련의 마지막은 속도를 올리는 일이었다.
아무리 엄청난 신성과 최강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상대가 선수 친다면?
아무것도 못 하고 맞는 수밖에 없다.
* * *
브라기가 수련을 시작하고 마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2달.
오디슨은 벌써 3달째 수련 중이었다. 어느새 해가 바뀌어 오디슨의 나이도 19살이 되었다. 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메르키에게는 오디슨의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본래 신이라는 작자들은 수천 년에 가까운 수명을 가지고 있기에 나이는 중요치 않다.
그저…….
‘얼마나 강력한가, 그게 중요하지.’
그런 점을 생각할 때, 오디슨은 이미 궤도에 올랐다. 물론, 3주신(오딘, 토르, 티르)에 미치기까지는 한참이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리되리라.
메르키는 확신했다.
“아직 느리구낙!”
“크윽……!”
오디슨이 황급히 신성을 둘러 갑옷을 이뤘다. 하지만 쏘아진 메르키의 검은 깃털을 막기에 급급한 모습.
메르키는 깍깍 웃으며 다시금 권능을 발현했다.
<검은 암흑>!
메르키의 신성이 주위를 감싸고, 오디슨의 눈을 가렸다.
오디슨은 이를 악물었다.
“또 이거냐!”
“깍깍깍, 이걸 깨기 전에는 못 나간다!”
“크으으… 전쟁 중에 계속 처박혀 있을 수는 없다!”
새까만 암흑, 검은색 세계에서는 자신의 몸조차 볼 수 없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그림자로 이뤄진 검이 쇄도한다.
메르키가 자신하는 최고의 공격이다. 특히나 갑옷으로 몸을 두른 오디슨이라면, 막기만 하다 쨍그랑- 갑옷이 깨지고 또 패배하리라.
신성만을 이용해 대련을 펼치는 중. 한번 권능을 이루고 깨진 신성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내일 다시 도전하거락!”
까아아악!
메르키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날아든다.
오디슨의 최고 강점인 ‘눈’을 봉쇄하기 위해, 메르키가 만들어 낸 권능.
메르키는 오디슨이 눈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여겼다.
‘이걸 깨트린다면, 수련은 끝이다, 오디슨!’
소리도 모습도 없이 쇄도하는 암흑 칼날.
오디슨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메르키가 히죽 웃을 때, 오디슨의 신성이 변화했다.
이제까지 하지 못하던 짓이었다.
‘또 막을 것인가?’
메르키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오디슨은 그러지 않았다.
화들짝, 메르키가 놀랐다.
“허…….”
헛숨이 튀어나왔고, 어이가 없다.
저건, 메르키의 상식을 뛰어넘는 권능이었다.
쨍그랑!
“…음?”
오디슨이 눈을 깜빡였다.
이제 막 반격을 시작하려는 찰나, 메르키의 권능이 갑자기 깨지다니? 오디슨의 표정에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메르키는 바보가 아니다.
까악까악, 메르키가 웃었다.
“수련은 이제 끝이닥!”
오디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날 그렇게 패 놓고, 이제 와서 끝이라고?”
“깍깍깍! 신성 대련에서 이겨야만 수련을 끝내 준다 했던가? 아니닥!”
오디슨이 까드득, 이를 갈았다.
메르키는 그 모습에 흐뭇하게 웃었다.
‘저 무식한 놈은 힘 조절 같은 건 못하니까.’
괜히 맞고 싶진 않았다.
오디슨, 수련 시작 3개월 만에 메르키의 합격 선언을 받아 냈다.
비극적인 천재, 브라기를 제외하면 가장 빠른 속도였다.
‘…게다가 저놈은 브라기처럼 치명적인 문제도 없닥.’
메르키가 보기에 오디슨은 분명 크게 될 놈이었다.
문제는, 단 하나뿐.
‘오딘께서는…….’
메르키가 한숨 쉬었다.
* * *
3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수련이 끝났다.
메르키에게 합격 선언을 받자마자 훈련장을 나섰다. 그간 나는 이 답답한 훈련장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하계와의 연결도 시그뉘가 찌꺼기를 만난 때가 끝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단원들에게 부탁했으니…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겠지.”
중얼거리며 투기장 대기실을 나섰다. 여전히 텅 비어 있는 대기실 꼴을 보니, 아직도 전쟁 중이긴 한 모양.
메르키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수르트.”
복수를 위해 이를 갈았다.
일단 바로, 약탈단을 소집해서…….
“오디슨!”
반가운 목소리가 날 반겼다.
그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라호드, 크레네!”
어떻게! 반가운 얼굴을 보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수련은 다 끝났어요?”
이라호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여기저기 내 몸을 살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요?”
“음… 다친 데는 딱히 없다. 너는?”
“저요?”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깨를 으쓱였다.
“전쟁 중 아닌가? 발키리인 너는 싸울 일이 많았을 터.”
내 말에 이라호드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뭐지? 저 웃음은? 눈살을 찌푸리자, 크레네가 옆에서 툭 한마디 했다.
“싸울 일은 무슨… 요즘 맨날 놀던데…….”
“…노는 건 당신이죠, 백수 님프.”
“…올림포스 출신이라고 죄다 1차 탈락시키는데 뭘 어쩌란 말이야…….”
크레네가 이를 갈았다.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놈들이 있다고?”
“그야…….”
크레네가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볼을 부풀리는 게 약간 삐친 건가-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크레네를 우악스레 기절시켜 이라호드에게 맡겼다. 그리고 급한 일이랍시고 바로 발할라로 와 버렸다.
수르트에 대한 복수에 정신이 쏠려, 크레네를 신경 쓰지 못했다.
그 앙금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지만, 아무래도 약간 어색한 모양이다. 화를 내자니, 한참 된 일로 투덜대는 속 좁은 여자처럼 비칠 테고… 화를 안 내자니, 내가 또 그럴까 걱정되는 건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안다. 전사장이 가르쳐 준 수법이 있으니까.
“내 여자라고 말했나?”
“어, 으. 그게…….”
크레네가 당황했다.
삐친 척 연기도 확 풀려 버렸다.
그 귀여운 모습에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다음부터는 내 여자라고 적어라.”
“…그, 그게…….”
“싫은가?”
“아, 아뇨… 그냥, 그냥…….”
“그때 일은 미안하다, 크레네. 네가 다치는 게 보고 싶지 않았어.”
화낼 시기를 빼앗았다.
크레네는 어쩔 줄 몰라하다, 한숨을 푹 쉬고 날 와락 껴안았다.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크흠! 이라호드가 헛기침했다.
“오디슨?”
“아, 그러고 보니……”
이라호드와 약속을 했었지?
수르트에게 다친다면 손가락 하나 못 대게 한다는 이야기였던가? 반대로 말하면, 수르트에게 다치지 않는다면…….
흐뭇하게 웃으며 이라호드를 보자,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그, 전쟁 말인데요.”
“…상황이 어떻지?”
말을 기가 막히게 돌린다.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게 뭔지 확실히 아는 모습이다. 곧이어 이라호드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끝났어요.”
눈을 끔뻑였다.
전쟁이 끝났다고? 아니겠지?
입을 벙긋거리자, 이라호드가 확실히 못 박았다.
“전쟁, 끝났어요.”
그와 함께 거리에 설치된 대형 TV에서 라드게리타가 비쳤다.
[토르 님의 묠니르에 의해 박살 난 스륌헤임 복구 소식입니다. 스륌헤임 복구 총책임자를 맡은 드베르그…….]
라드게리타의 모습이 사라지고, 스륌헤임으로 보이는 잔해들이 비쳤다. 드베르그 여럿과 인간들이 돌과 나무를 옮기며 건설에 힘쓰는 모습이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수르트는?”
제발, 죽었다고만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이라호드와 크레네의 표정이 이상하다.
크레네는 ‘설마?’ 하는 걱정이 여실히 드러난 표정이었고, 이라호드는 말하기 싫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아니어도, 수르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TV 속 라드게리타가 말했다.
[티르 님께서는 재앙의 거인, 수르트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다행이었다.
내가 갈아 온 복수심이 헛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