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46화. 혼돈 (2)
“배신자라……. 배신자..."
헬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결재할 서류를 펼쳐 두고 일하는 모양새를 하고는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오디슨이 잠깐 머무르지도 않고 곧장 발할라로 떠난 뒤, 계속해서 저 상태였다.
강글로트가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서운하신 거 다 아니까, 괜히 다른 생각하시는 척하지 마세요.”
“…으음? 아니, 나는 그저…….”
“제가 여왕님을 하루 이틀 뵀나요?”
강글로트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리고 분류가 끝난 서류를 헬의 책상 위에 얹었다.
헬은 그 서류 더미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오딘이 전쟁을 선포한 뒤, 일이 몇 배로 확 늘었다.
‘이거만 아니었으면, 나도…….’
헬이 서류 더미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강글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노려보셔도, 일거리는 안 줄어요.”
“…크흠. 누가 뭐라고 했나?”
“펜리르 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오디슨 님께서는 토르 님의 소개로 신성 훈련에 들어가셨다고.”
강글로트는 강글로트였다. 오랜 시간 헬의 곁을 지켜 온 만큼, 이제 헬의 생각을 읽는 지경에 닿았다.
헬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적, 어머니(앙그르보다, 로키의 두 번째 아내)가 하신 말이 떠올랐다.
‘매달리는 여자는 매력이 없단다.’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을까?
헬은 머리를 휘휘 저었다.
“그나저나, 펜리르는… 출발했나?”
“네, 헬께서 내주신 군량을 가지고 오늘 아침 출전하셨어요. 가실 때, 남편한테 니플헤임을 잘 지켜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네요.”
아스가르드는 이번 전쟁을 두 갈래로 나눠 치르는 중이다.
니플헤임에서 안개를 넘어 무스펠헤임으로 돌진하는 펜리르군. 그리고 아스가르드에서 이핑그 강을 도하해 조심스레 접근하는 토르 특공대.
전자는 수르트와 우트가르다-로키를 붙잡아 놓을 방패이고, 후자는 스륌헤임으로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 거인왕 스륌손을 잡기 위한 칼이다.
펜리르는 혹여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퇴로를 확보하는 일을 강글라티에게 부탁한 것이다.
“…별일 없겠지.”
헬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강글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펜리르 님이신 걸요.”
오딘을 씹어 삼킬 잠재력을 가진 멸망의 늑대다.
그 멸망이 거인 왕국을 향했다.
신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한편, 하계에서는?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수척해진 시그니료드가 단상 위에서 연설하고 있었다. 단상은 임시로 만들어진 조잡한 물건이었지만, 그 앞에 자리한 전사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전사들은 시그니료드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숨소리마저 죽인 채였다.
시그니료드가 숨을 골랐다.
‘…3천.’
최후의 공격이다.
4황자와 군단장이 지배하고 있던 도시들은 하나둘 왕국의 품에 떨어졌고, 신(新)제국이라 스스로 칭하던 이들에게 남은 것은 겨우 도시 하나뿐이었다.
최후의 방어선.
저 성벽을 넘고, 4황자와 군단장을 잡으면 이 전쟁도 끝이다.
시그니료드는 수척해졌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났다.
“우리의 신을 부정한 자들은 저 가녀린 성벽 뒤에 숨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던 제국은 이제 저 도시 하나만을 지켜 보려 발버둥 칩니다.”
숨을 골랐다.
“우리는 서로 다른 때에 태어났습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전사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다양한 외모의 전사들이다. 심지어 본래 제국인이었던 전사도 있다. 오디슨을 믿으며 스스로 전사가 되고자 자원한 이들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각양각색이다. 제국의 군대와는 다르게 질서정연한 모습도 아니었고, 통일된 군수품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전사들의 눈동자는 모두 똑같은 빛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에 대한 갈망이다.
시그니료드는 오디슨의 선물인 방패, 앙킬레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같은 분을 믿습니다! 가자, 전사들아! 그분께 승리를 바쳐라! 그분께 승리를!”
“그분께 승리를!”
와아아아아!
천둥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연설은 끝났고, 전쟁이 남았다.
성전의 끝이 머지않았다.
* * *
“주술사 영감! 영감!”
“꼭두새벽부터 웬 고함질이냐?”
“크흠… 내 갑자기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소.”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찾아온 거냐?”
“거참, 영감이 삐치기는… 영감이 했던 이야기 중에 그거 있잖소?”
“삐치긴 누가… 그나저나 뭐?”
“훌륭한 전사들은 죽으면 에인헤리가 된다는 말 말이오.”
“그렇지. 오딘께서 미래를 보시고 안배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듣자 하니, 에인헤리도 발할라의 에인헤리가 있고, 세스룸니르의 에인헤리가 있잖소?”
“그렇지. 오딘께서 이끄시는 전사와 프레이야께서 이끄시는 전사가 있지. 어느 쪽이든 영광스러운 일이다.”
“흐음… 그렇소? 그, 라그나로크의 때에 말이오.”
“그래, 그때가 되면 에인헤랴르가 모두 들고 일어나겠지.”
“…그렇소? 음, 영감의 이야기 중에서… 프레이를 제외한 뇨르드와 프레이야는 나오지 않는 것 같아, 궁금했소. 그때가 되면 그들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이오?”
“그건…….”
* * *
전쟁을 앞두고 적막한 발할라.
그보다 더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 있었다. 세스룸니르. 발할라와 마찬가지로 에인헤랴르가 머무르는 곳이다.
발할라가 오딘 직할령이라면, 세스룸니르는 프레이야의 영지였다. 프레이야는 분명 아스가르드 소속이긴 하지만, 약간은 애매한 입장.
그녀는 아스가르드 토속 신인 아스 신족이 아니라, 바니르 신족이다. 아스-반 전쟁 이후 볼모 겸 상호 간의 평화를 부르짖으며 이주한 상태다.
이후, 바니르 신계가 다른 차원으로 이전되며 돌아갈 곳이 없긴 하지만.
“후우. 전쟁은 좋아하지 않는데.”
프레이야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고양이 집사가 그 모습에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딘께서 명하신 일입니다요…….”
“알아, 알지만… 너무 야만스러운 짓이잖아, 전쟁은.”
프레이야가 쓰게 웃었다.
펜리르나 토르처럼 주력을 맡는 건 아니다. 그들의 뒤를 받쳐 주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 토르나 펜리르가 선봉이라면, 니플헤임의 망자 군단이나 아스가르드의 입출국을 관리하는 헤임달이 최후방. 그 둘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 주는 역할을 프레이야가 맡아야 한다.
전쟁이 잘 풀린다면, 프레이야가 싸울 일은 아예 없을 터.
‘…차라리, 선봉을 맡겨 주면, 오디슨을…….’
프레이야가 까득, 손톱을 깨물었다.
마음이 어지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차라리 최선을 다해서 빨리 끝내고 손을 떼는 게 낫겠지.
프레이야가 그렇게 생각할 때, 뇨르드가 찾아왔다.
“아버지?”
갑작스러운 방문에 프레이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프레이와 프레이야 남매의 아버지이자, 해신(海神) 뇨르드. 혹여나 거인이나 찌꺼기가 하계의 바다에 접근하지 않도록, 자리를 지켜야 하는 아버지가 왜? 프레이야가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전쟁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 어려우셨을 텐데!”
“흥, 그까짓 전쟁.”
뇨르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살짝 취한 것처럼 보였다.
프레이야는 눈썹을 팔자로 휘었다. 사건의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오딘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마법을 펼쳤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뇨르드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으니까.
“프레이야, 네 오빠를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오라버니는…….”
“오딘이 이토록 과감하게 에인헤랴르를 모두 불러 모은다? 이때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턱도 없어!”
뇨르드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거인 왕국이 정벌되고 나면, 뭐가 남을 것 같으냐? 오만하기 짝이 없는 오딘이 뭘 하겠느냐? 지금의 아스가르드는 멸망을 향해 달리는 중이다!”
“하지만…….”
프레이야는 전쟁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워낙 갑작스러운 전쟁인지라, 그 이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언제나 아스가르드의 숙적이었던 거인 왕국이 사라진다면? 프레이야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프레이야, 오딘은 여러 가지 신좌를 꿰차고 있지만, 그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본질이 무엇이더냐? 전쟁신 아니더냐? 전쟁에서 이긴다고 전쟁이 끝날까? 아니, 아니다.”
뇨르드가 단단한 말투로 단정 지었다.
“오딘은 거인 왕국을 무찌르고 나면, 아스가르드를 넓히고 싶어 할 거다. 그는 전쟁신이니까.”
아스가르드와 가까이 붙은 올림포스, 그리고 이집트.
프레이야는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반발했다.
“오딘은 이미 후계자 경쟁을 선포했어요. 투기장에서 1년간 챔피언을 한다면…….”
허! 뇨르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1년간 투기장 챔피언을 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 모르겠느냐, 프레이야? 아직 토르와 펜리르, 요르문간드 등 숱한 강자들은 투기장에 등록조차 하지 않았다.”
프레이야가 미간을 좁혔다.
토르가 오딘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니던가? 게다가 펜리르나 요르문간드 역시 딱히 오딘의 자리를 탐낸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오딘이 마음만 먹으면, 1년간 챔피언을 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오딘이 설마 그런 수를 쓰겠어요?”
“하, 하하… 너는 잘 모른다, 내 사랑스러운 딸아.”
뇨르드는 회한에 젖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딘은 탐욕스러운 자다. 최초, 오딘과 함께 위미르를 무찌른 그의 형제들은 어디에 있느냐? 인간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삼 형제는 이제 하나만이 남았다. 그게 우연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말은…….”
“과한 벌을 받은 네 오라비를 생각하거라, 프레이야.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프레이는 헬 납치 사건의 공범으로서 벌을 받았다.
오딘이 직접 그 벌을 내렸다.
‘내가 왕관을 쓰고 있는 한, 프레이에게 햇빛을 보게 하는 일은 없으리라.’
이미 후계자 경쟁을 선포한 상황에서 나온 이야기인지라, 큰 반발은 없었다. 하지만 오딘이 정말, 영원토록 전쟁을 하고 싶어 한다면?
프레이야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아무리 기회라고 할지라도, 우리끼리 오딘을 물러나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아버지… 좀 진정하시고…….”
일단은 말렸다. 그럴듯한 예측이긴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뇨르드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우리만이 아니다, 딸아. 우리만이 아니야.”
“…우리만이 아니라뇨? 그게 무슨…….”
뇨르드는 흐흐- 나지막한 웃음을 지었다.
“오딘의 아들 중 원죄를 가진 이가 있다.”
그가 우리를 도울 것이다. 또한, 이웃을 모조리 없앨 필요는 없지.
아들을 잃은 신의 목소리는 마치, 깊은 심해의 어둠을 닮았다.
프레이야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고될 것이닥.”
메르키의 말에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네 생각보다 성과가 없을 수도 있닥.”
피식 웃었다.
메르키가 인상을 구겼다.
“뭐냑! 왜 웃냑!”
“아니…….”
어깨를 으쓱이고 그에게 말했다.
“성과가 있기는 할 거라는 소리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