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45화. 혼돈 (1)
오딘은 개전을 명했다. 그에 퀭한 눈을 한 티르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거인족이 군대를 일으켰는데.
티르는 몇 잔째인지 모를 커피를 입안으로 쏟아부었다. 커피 탓인지 자꾸만 입안이 말랐고, 위가 쓰라렸다. 게다가 며칠에 이은 업무 탓에 머리도 지끈거렸다.
육체가 피로를 호소하는 게 아니다. 티르의 머리가 피로를 호소했다.
티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개 같은 거인 왕국 놈들…….”
까드득,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도 차마 거인족을 욕할 수는 없다. 티르의 아버지는 거인족이었으니까. 티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비서에게 물었다.
“반응은 어때?”
“그게…….”
티르의 비서 역할을 맡은 발키리는 잠깐 말을 골랐다.
지금도 집중력 향상을 위한 화이트 노이즈라며 켜 둔 TV에서 전쟁 소식을 떠들어 대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아주 예민한 문제를 떠들고 있다.
[징집 대상이 되는 이들은 하계에서 곧장 발할라로 초청된 전사들, 그리고 한 번이라도 투기장에서 겨뤄 본 모두입니다. 이로 인해 경제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우려를 쏟아 내고 있는데요? 발할라 경제 연구소에 파견 나간 특파원, 레이프 에릭손 기자에게 자세한 소식 듣겠습니다. 레이프 에릭손 기자?]
발키리의 눈이 TV를 향한 걸 본 티르가 쯧- 혀를 찼다.
경제고 나발이고, 전쟁이 당면했는데 그게 뭐 대수라고. 전쟁통에도 경제는 꽃피지만, 모조리 박살 난 곳에는 경제가 없다.
티르가 대답을 재촉했다.
“발할라 반응은? 나도 대충 아니까, 말 고르지 말고.”
“…죄, 죄송합니다.”
발키리가 고개를 숙였다.
차마 말하기 힘든 사항이었다. 과연 이걸 말해도 괜찮을까- 싶은 걱정도 있었다.
사실, 이번 전쟁에 호의적인 여론이 크지 않다.
* * *
발할라 상가 거리.
로키스 패밀리의 다이스를 비롯해 다양한 상점들이 늘어선, 발할라 최고의 번화가다. 언제나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이지만, 오늘은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울 지경.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은 상황이고, 문을 연 가게에도 손님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가게 주인과 점원들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뿐. 그들마저도 표정이 좋지 않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거,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몇백 년 전에도 거인 왕국이랑 전쟁이다 뭐다, 난리를 쳤는데… 그냥 서로 힘겨루기만 하다가 돌아왔으니까.”
“그렇긴 해도… 뭔가 불안해요.”
“쯧, 담이 그렇게 작아서야!”
“그래도, 늘 사람들이 북적이다가 너무 조용하니까…….”
수군거리는 목소리.
가게 주인은 괜한 소리를 한다고 호통을 칠 생각이었다. 불안이라는 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덩치를 부풀린다.
하지만…….
딸랑딸랑!
“어엇? 어, 어서 오세요!”
갑작스레 손님이 들어왔다.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고, 손님맞이에 전념했다.
불안을 떨치지 못한 여직원이 황급히 메뉴판을 가지고 손님에게 다가갔다. 평소라면 쫓아냈을 손님이다.
‘자리 차지한다고 혼자 오는 손님 쫓아낼 일은 한동안 없겠지.’
여직원이 다가가 메뉴판을 건넸다.
딱 봐도 잘 싸울 것 같은 사내다. 그을린 머리카락은 살짝 곱슬했고, 옷 역시 그을음이 가득했다.
“어… 그…….”
“음? 왜 그러시오?”
사내의 말에 여직원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 그게… 혹시 징집을 피해서……?”
“징집을 피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아, 아니에요. 그, 주문이 결정되면 불러 주세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뉴판과 함께 나온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얼굴을 닦았다.
여직원은 아저씨 같은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물수건이 얼굴의 그을음을 닦아 낸 뒤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오, 오디슨……?”
“아… 나를 아시오? 아니, 괜한 질문이었군.”
오디슨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워낙 약탈단과 어울리다 보니, 이런 반응이 의외였다. 집을 비우고 떠돌아다닌 것도 몇 달이나 된 이야기 아니던가?
여직원이 오디슨의 정체를 파악한 뒤, 그녀는 질문을 던졌다.
“저… 괜찮을까요? 이번 전쟁?”
그 말에 오디슨은 멈칫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길 거요.”
“정말요?”
“그럼! 오딘이 어떤 분이신데. 무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시는 분 아니시오? 그런 분이 패배할 전쟁을 벌이실까?”
“아……!”
여직원이 품고 있던 불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아까와 달리 밝은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섰다.
오디슨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여직원에게 스스로 뱉은 말에 여러 가지 복잡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전쟁의 승패라.’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몇몇 희생을 어쩔 수 없다. 오디슨도 잘 아는 바다. 하지만 동고동락하던 약탈단의 단원들이 죽어 나가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후우.’
오디슨의 고민이 한층 더 깊어졌다.
알현이 끝나고, 이라호드는 전쟁 준비로 바쁜 발키리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오디슨을 달랬다.
‘재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탓하지 마세요.’
이라호드는 오디슨이 스스로를 탓하리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지만, 오디슨이 듣기에는 오딘을 탓하지 말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알겠노라- 시원하게 대꾸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주억일 뿐.
‘…괜한 걱정을 안겨 준 것 같군.’
오디슨이 한숨을 푹 내쉬고, 물을 들이켰다.
그 이야기를 나눈 게 벌써 며칠 전이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홀로 훈련장에서 창을 휘두르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나온 길이다.
이그나르가 니플헤임에 있다 보니 당연히 공짜 밥은 물 건너갔다.
창을 휘두른 것은 비단 오딘에게 서운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난 아직 약하다.”
수르트를 떠올렸다.
<국경선>이라는 권능에 저항했지만, 그 권능을 빼고 붙어도 수르트는 오디슨보다 윗줄에 있었다. 적어도 수르트의 목은 스스로 따고 싶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수르트는 나와 정면으로 맞붙을 정도로 강한 거인이야. 그러니까… 놈이랑 싸우고 싶다면, 신성을 제대로 다루는 법부터 배워.’
토르의 말이었다.
오디슨은 쯧, 혀를 찼다. 토르에게 신성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줄 스승에 대해 들었다. 약간은 불안하지만, 일단 신성 훈련에 전념하는 수밖에.
오디슨은 머릿속 얽히고설킨 복잡한 생각을 뒤로 미뤘다.
오딘이 옳은가, 그른가. 단원들이 내지르던 비명, 그리고 수르트에 대한 복수심을 몽땅 구석으로 처박았다.
일단, 훈련을 해야 한다.
“…그 전에.”
꼬르륵.
이 배부터 채우는 게 좋겠지.
오디슨이 메뉴판을 펼쳤다.
<메인>[햄, 참치… (중략)… 터키쉬 베이컨 아보카도]
<빵>[허니오트, 하티이탈리안… (중략)… 화이트, 플랫]
<재료>[양상추, 토마토… (중략)… 아보카도]
<소스>[랜치드레싱, 마요네즈… (중략)… 올리브 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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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의 무리가 해일처럼 오디슨을 덮쳤다.
오디슨은 혼란에 빠졌다.
‘…그냥 먹지 말고 훈련하러 갈까……?’
굉장히 끌리는 선택지가 오디슨을 이끌었다.
하지만…….
“후우, 다행이다. 미리 준비해 둔 식재료 한 번도 안 쓰고 버리게 되는 줄 알았네…….”
“그렇긴 하죠? 갑자기 전쟁이 터져서 손님이 뚝 끊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도… 제가 잡지에서 봤는데… 오디슨 님, 되게 많이 드신대요.”
“오! 그래?”
오디슨은 차마, 믿어 주는 이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늘 그랬다.
* * *
전쟁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으리라.
아무리 이쪽의 간자가 거인 왕국에 숨어 들어가 있다 해도, 하루아침에 끝낼 수는 없다.
또, 그래서는 안 된다.
힘의 차이가 ‘아스가르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아스가르드의 한 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안다면?
거인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이들은 계속해서 저항하리라. ‘아스가르드의 한 신’만 배제한다면~ 하는 헛된 희망을 품을 테니까.
“보여 줄 땐, 확실히 보여 줘야만 한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읊조렸다.
그로 인해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흘리게 되더라도. 그러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정답이겠지.
“후우.”
속이 불편하다.
여전히 오딘의 결정에 대해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아니, 그게 아닌가?
“…과식했나?”
괜한 소리를 듣고, 부끄러움을 참고서 직원을 불러 묻고 물어 주문했다. 엄청난 양이었다. 여전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식당이다.
발할라에 사는 이들은 평소에 저런 걸 대수롭지 않게 주문해 먹는다고? 마법사가 외우는 주문보다 더 복잡한 것 같은데…….
“뭐, 든든하게 먹어 둔 만큼, 수련에 집중할 수 있겠지.”
숨을 고르고 내 스승이 될 자를 찾아왔다.
의외로 익숙한 장소여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보통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제야 알겠다.
이제까지 몰랐다는 게 우스울 정도다.
아직 대면하지도 않았건만, 거대한 신성을 느낄 수 있었다. 오딘이나 토르, 티르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아직도 그 셋의 신성은 느낄 수 없을 정도니까.
“…괜찮겠지.”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토르가 한 말이 약간 걸리긴 한다.
‘은퇴한 양반이라서 말이야.’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한 토르는 이후, 힘내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출진했다.
아스가르드 정예 전력, 아스가르드 가디언.
토르와 펜리르 등 숱한 신들이 속한 그야말로 신들의 군단이다. 내가 그리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그쪽에 가담할 필요가 있을 터.
“수르트.”
재앙의 가지, 레바테인을 휘두르던 그 거인에게 부서진 전사의 자존심을 떠올렸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프레이나 오시리스, 아레스에게 당한 것과는 다르다. 손오공에게 당한 것과도 달랐다.
앞의 도주는 모두 ‘아군의 피해’가 없었으니까.
“…죽어 간 단원들의 복수…….”
쿵쿵- 문을 두드렸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오디슨?”
내 스승이 되어 줄 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날 불렀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오.”
“…어쩐 일이지? 지금 투사들은 모두…….”
“징집에 대한 이야기라면 할 필요 없소. 토르께서 허가하신 일이니.”
“토르가?”
그 얼굴에 불안감이 서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친하게 지내긴 했구나- 싶은 기분이다.
크흠- 목을 가다듬고, 용건을 꺼냈다.
“…신성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시오. 메르키.”
메르키가 안경을 으쓱였다.
까마귀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에 당황이 가득 찼고, 날개로 안경을 연거푸 추켜올렸다.
“까, 까악? 나, 나는 그저… 투기장 관리조(-鳥)닥! 시, 신성이라니……. 그 무슨…….”
“나도 많이 컸소. 당신이 품고 있는 신성을 눈치챌 정도로.”
메르키가 부리를 앙다물었다.
후우- 한숨을 쉰 까마귀가 부리를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며 말을 골랐다. 정말로 싫은 모양인데? 미안하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메르키.”
“내가 뭐라고 널 가르치겠느냑…….”
메르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군대를 이끄는 새, 흐라픈스메르키(hrafnsmerki)가 못한다면, 대체 누가 할 수 있겠소?”
메르키의 몸이 덜컥 흔들렸다. 눈을 꾹 감은 채 고민에 빠졌다.
흐라픈(hrafn)은 도래까마귀를 의미하는 말이다. 메르키(merki)는 깃발을 의미하는 말이고.
흐라픈스메르키, 도래까마귀 깃발.
숱한 바이킹 왕과 우리 민족의 군주들이 사용한 깃발. 그 깃발이 신성시되며 태어난 까마귀.
하급 투기장 관리인의 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