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화. 신을 잡으려 하지 마라 (3)
최근 니플헤임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혹한이 늘상 자리한 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습격으로 인한 상처는 여전했지만, 어느 정도 아물어 가는 분위기.
게다가…….
“얘, 이거 봤어?”
“어머! 오디슨 님 기사네?”
얼음덩어리 여왕님께서 연애를 하시다 보니, 여러모로 민심을 돌보기 시작하셨다.
물론, 이전에도 민심을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산가족 상봉, 니플헤임 단체 결혼식 등의 행사가 열린 것은 처음이다.
헬도 연인을 그리워하다 보니, 동병상련의 아픔을 덜어 준 것이다. 약간의 대리만족도 없지 않아 있었을 터.
어쨌거나, 자연스럽게 니플헤임의 분위기가 예전에 비해 부드러워졌다.
성녀의 시녀들까지 느슨하게 풀린 건 좀 문제지만.
“<오디슨 약탈단, 대형 용병단의 몇 배나 벌어…….> 와! 대단하다!”
“잘생기고, 어리고, 돈도 잘 번다니.”
“그러니까, 우리 여왕폐하의 짝이시겠지.”
“어, 그러고 보니까……. 그거 들었어?”
시녀들의 대화.
청소며 요리며 빨래며,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이렇게 조잘거리는 수다를 빼놓기는 아쉽다.
“그거 뭐?”
“그러니까 말이야… 오디슨 님이…….”
크흠! 갑작스레 터져 나온 헛기침 소리에 시녀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대체 누구지? 의문을 가지고 뒤돌아봤을 때, 망자답게 창백한 얼굴이 한층 더 표백되었다.
“가, 강글로트 님……!”
“아, 으… 그, 그게… 노, 놀고 있던 게 아니라……!”
시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변명을 쏟아 냈다.
명실상부 헬의 성, 엘류드니르의 이인자다. 사실 계급으로 따지자면, 삼 인자에 가깝다. 하지만 군단장인 강글로티의 아내이며, 헬을 안에서 보좌하는 집사장.
시녀들이 깜짝 놀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청소는 끝난 거야?”
“아, 아직입니다…….”
시녀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강글로트가 입술을 삐죽였다.
한바탕 군기를 잡아 볼까- 생각했지만, 곧 피식 웃고 말았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어쨌든…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 같은데…….”
“그게…….”
“여왕님이나 오디슨 님의 욕은 아니겠지?”
살짝 싸늘한 시선을 보내자, 시녀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니에요!”
강글로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래서, 뭘 들었냐고 물었던 거지? 오디슨 님이 뭐?”
“아, 그게…….”
시녀가 우물쭈물하며 내놓은 말에 강글로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한층 기분 좋게 헬을 찾아갔다.
“으음? 강글로트?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헤헤헤, 이 기사 보셨어요?”
“기사?”
강글로트가 시녀들에게서 빼앗은 신문을 내밀며 말했다. 오디슨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이었다.
그 기사를 본 헬은 잠깐 웃었지만, 곧 헛기침과 함께 웃음기를 지웠다.
“…안 그래도 요즘 벌이가 좋은 모양이더군.”
“흐응… 우리 여왕님, 살짝 삐치셨어요? 요즘 약탈단 활동에 신경 쓰시느라 연락 하나 없으셔서…….”
“아니다! 삐치다니! 누, 누가 말이냐!”
헬이 발끈했지만, 강글로트는 배시시 웃을 뿐.
오랜 시간 쌓여 온 관계는 이런 건방진 소리도 장난으로 받아 줄 수 있을 만큼 돈독해졌다. 하지만 강글로트는 괜히 헬의 기분을 툭툭 건드리는 건방진 신하가 아니었다.
“시녀들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말이에요.”
“…시녀들이?”
“네, 시녀들이 말하기를, 오디슨 님이 이렇게 열심히 돈을 버는 게 한 사람 때문이 아닌가- 하더라고요.”
“…한 사람? 설마…….”
헬의 머릿속에 문득, 이라호드와 크레네가 스쳤다.
‘…그 도둑고양이 중 하나에게 홀렸다고……?’
그럴 리가 없다. 고개를 저을 때, 한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헬이 생각해도 엄청난 미인의 얼굴이었다.
‘…설마, 프레이야?’
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화난 것 같다가 울먹이는 것 같다가, 여러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강글로트가 픽 웃었다.
“안 좋은 생각만 하시네요, 정말. 당연히 여왕님이죠.”
“…나?”
헬이 눈을 끔뻑였고, 강글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디슨 님이 하신 말씀, 기억 안 나세요?”
“…오디슨이 한 말?”
헬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오디슨이 한 말이 한두 마디여야 기억난다고 답하지, 수백, 수천 마디를 나눴는데 그중 무슨 말인지 알 게 뭔가?
강글로트가 어휴- 한숨을 쉬고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여유가 되면 식을 올려야지.”
“아!”
헬의 눈이 반짝였다.
그 여유라는 것. 헬이 마련해 줄 수 있음에도 거절했다.
대부분의 문제는 돈이 있으면 해결되고, 최근 오디슨은 열렬히 돈을 긁어모으는 중이다.
헬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여왕님은 좋으시겠네요.”
“…후후.”
헬이 나지막이 웃었다.
보통 때라면 ‘좋기는!’ 하고 한 번쯤 튕겼을 헬이지만, 지금은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헬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때.
“여, 여왕 폐하!”
쾅! 소리와 함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느슨한 헬의 얼굴이 단숨에 딱딱해졌다. 미간을 찌푸리고 쳐들어온 경비대장을 노려봤다.
강글로트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경망스럽게 구는 거예요?”
“죄, 죄송합니다… 하오나…….”
경비대장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오디슨 약탈단이 패퇴해 돌아왔습니다. 거인족이 대군을 이끌고 니플헤임 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오디슨 약탈단이?”
강글로트가 깜짝 놀랐다.
오디슨은 절대 약하지 않다. 그런데 패퇴했다니…….
헬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디슨은?”
경비대장은 우물쭈물, 눈치를 살폈다.
헬은 입을 굳게 다물고, 황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조금 전까지의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 * *
오디슨 약탈단, 총원 54명 중 22명 귀환.
개중 단장인 오디슨은 포함되지 않았다. 헬은 오디슨이 시간을 끌며 수르트와 맞붙었다는 소식에 잠깐 휘청였으나, 정신을 잃진 않았다.
그녀는 망자들의 여왕이며, 니플헤임의 주인이다.
이 정도로 쓰러질 만큼 유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강글라티!”
헬의 외침에 군단장, 강글라티가 부복했다.
서늘한 한기가 감도는 헬이 그에게 명을 내렸다.
“군단을, 군단을 소집하라!”
“옛! 알겠습니다!”
“거인놈들에게 뼛속까지 얼리는 한기의 맛을 보여 줘야겠다.”
헬의 눈초리에는 서리가 잔뜩 끼였다.
그런 헬을 보며 강글로트는 어쩔 줄 몰랐다. 말리고 싶지만, 말릴 수도 없다. 강글로트 역시 강글라티가 거인족과 맞붙고, 군단의 도주 시간을 끌기 위해 적들을 붙잡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곧장 뛰쳐나가고 싶었을 테니까.
“전군! 여왕 폐하께서 부르신다!”
강글라티의 목소리가 니플헤임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에 니플헤임의 망자들이 모두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왜……?”
“전쟁인가! 산 자들의 생명을 거둘 시간이다!”
“흐흐흐, 산 자들의 생명이 날 되살려 주리라!”
“…부질없는 짓이다…….”
“여왕 폐하의 명이라면.”
망자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아직도 자신이 망자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은 괜한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분노한 망자들은 낄낄 웃으며 전쟁을 반겼고, 헛된 희망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
무기력하게 징집령에 끌려가는 이들도 있었고, 오롯이 헬에 대한 충심으로 뭉친 자도 있었다.
니플헤임의 망자들 중 대다수가 군단의 징집 대상이었다.
그런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깜짝 놀란 것도 당연한 일.
펜리르가 황급히 니플헤임으로 달려왔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전쟁이다, 펜리르. 저 거인족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리라!”
“아니, 잠깐, 누이! 좀 진정하시오! 대체 왜……?”
펜리르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만에 하나 헬이 무작정 거인 왕국에 달려간다면?
‘진짜, 전쟁이다.’
약탈처럼 소규모 분쟁이 아니라, 정말로 전쟁이 터진다.
준비되지 않은 전쟁은 재앙이다. 오히려 거인족이 이 상황을 반기리라.
갑작스러운 누이의 돌발행동에 펜리르는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다.
‘이럴 때, 아버지라도 있었다면!’
펜리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에게 강글로트가 사정을 설명했다.
“뭐? 수르트가……? 오디슨이 막아 보겠다고 남았다고?”
깜짝 놀랐다.
수르트는 무스펠헤임의 국경을 책임지는 자. 거인 왕국 최고의 전사이며, 거인 왕국에 둘뿐인 공작이다. 나머지 한쪽이 우트가르다-로키라는 걸 생각하면…….
‘빌어먹을.’
펜리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있었다.
오디슨 약탈단의 보고가 없었다면, 니플헤임이 쑥대밭이 되는 선제공격을 맞이했으리라.
헬이 펜리르에게 물었다.
“막을 테냐?”
펜리르는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막기도, 막지 않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대로 전쟁을 개시한다면, 아스가르드의 꼴이 골치 아파지는 건 당연하다.
‘…아직 우린 준비가 안 됐다.’
당장 며칠의 말미만 있다면 준비할 수 있건만!
어쩌자고… 펜리르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 앓았다.
그때, 지친 표정의 발키리 하나가 헬을 가로막았다.
“안 돼요.”
“…오디슨을 지키지 못한 년이 어디서 감히……!”
헬의 분노에 이라호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디슨을 지켰어야 했나? 아니다. 오디슨은 크레네를 데리고 도망칠 것을 말했다. 이라호드는 후우-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오디슨은 기다리고 있으면 온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오디슨 홀로 싸우게 두잔 건가?"
헬에게서 죽음의 한기가 뿜어졌다.
이라호드는 덜덜 떨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 난 오디슨을 믿어요.”
그 말에 헬이 눈살을 구겼다.
헬도 오디슨을 못 믿는 건 아니다. 다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라호드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오딘의 지시 없이 출진하는 건 문제가 크다. 게다가 망자 군단과 가장 궁합이 나쁜 전장이 바로 무스펠헤임이다.
헬의 신성으로 망자들의 영혼이 열기에 녹지 않도록 보호한다 한들, 기본적으로 후끈한 땅에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뻔하다.
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펜리르와 이라호드가 그녀를 말렸다.
“마, 맞아… 오디슨이라면…….”
“오디슨은 바보가 아니에요.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목숨을 걸고 싸우진 않아요.”
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이라호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오디슨이라면… 오디슨이라면…….
‘…전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지 않을까……?’
헬이 이라호드의 반응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출진해야겠다.”
“아…….”
이라호드가 눈을 꾹 감았다. 그녀 역시 오디슨의 자존심보다는 오디슨의 목숨이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약속을 믿었다.
“…나, 날 얻기 위해서라도 꼭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널 얻기 위해서?”
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였다. 이라호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아스가르드의 한 축을 담당하는 니플헤임의 망자 군단이 출진하는 걸 막아야만 했다.
“그, 그게…….”
이라호드가 말을 더듬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던 님의 목소리였다.
“미녀를 두고 죽을 수야 있나.”
능글맞은 목소리와 함께, 날아든 매가 오디슨으로 변했다.
그에 모두가 오디슨의 이름을 외쳤다.
“아!”
이라호드가 반색했고.
“오디슨! 다친 곳은 없는가!”
헬이 당장이라도 뛰어들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들의 반응에 오디슨이 피식 웃었다.
“크레네는?”
“무, 무사해요. 그보다… 다치지 않을 거라면서요!”
이라호드가 오디슨의 상처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오디슨이 쓰게 웃었다.
“여봐라! 의, 의사를 불러라!”
헬이 당장에 소리쳤다.
하지만 오디슨은 이라호드의 눈물도, 헬의 호의도 거절했다.
어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보다, 먼저 오딘을 뵈어야겠소.”
“일단 상처부터…….”
오디슨이 진지하게 헬을 쳐다보았다. 헬은 그 눈빛에 흠칫 몸을 떨었다.
오디슨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겨우 열고, 침통한 어투로 말했다.
“…배신자가 있었소.”
헬이 눈을 부릅떴다.
“배, 배신자가……?”
“그래… 아마, 그자가 내가 갈 위치를 일러 준 것 같소.”
오디슨의 어조는 담담했다.
헬이 그 배신자가 누구인가 물었지만, 오디슨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오딘에게만 말할 수 있다 할 뿐. 헬은 서운했지만, 오디슨의 표정을 보고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오디슨은 굉장히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오, 헬.’
오디슨의 마음은 참담했다.
* * *
“배신자?”
오딘께서 물으셨다.
세상을 굽어보시는 분께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던가? 심장에 얹힌 돌이 한층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오딘이시여. 그 배신자는…….”
“되었다.”
그게 무슨…….
눈을 끔뻑일 때, 오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안 그래도 마침, 연락이 왔더구나.”
“…알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오딘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눈을 반달 모양으로 굽히시며 내게 물으셨다.
“토르를 골탕 먹일 수 있는 이가 세상에 그리 많더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네 약탈단의 일은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수르트까지 조종할 수는 없었다 하더구나.”
심란했다. 미리 한마디만 해 주셨다면, 그 피해는 없었으리라.
아니, 아닌가?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 했던가?
머리가 어지럽다. 허나.
“…전쟁에는 피가 뒤따르는 법이겠지요.”
전쟁의 승패를 쥐고 계신 것은 오직 높디높으신 분뿐이시라.
오딘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거인족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였다.”
승자가 정해진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