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142화. 신을 잡으려 하지 마라 (1)
“으, 으아! 으아아…….”
겁에 질렸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에 번쩍 치켜든 글레이브가 비친다. 햇볕을 반사하는 모양새는 아름다웠지만, 저쪽에 쓰러진 놈이 보기엔 섬뜩하리라.
이를 악물고 달렸다.
“죽어라!”
거인족이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부우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지고, 엉덩방아를 찧은 채 올려다보던 단원의 눈에 절망이 서린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절망이 그를 덮치는 일은 없었다.
채앵!
“으어?”
거인족이 흠칫 놀란다.
내 창에 서린 힘을 눈치챈 모양.
상황이 반전된다.
“이, 작은 인간 놈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소리치는 거인족.
나는 그에 대꾸하지 않고 창을 회수하기 무섭게 다시 내질렀다.
쉭- 나와 거인족 사이에 있는 공간이 검은 선으로 이어진다.
거인족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어어?”
히이이잉!
말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보통보다 훨씬 거대한 말. 그 장엄한 덩치가 쓰러지는 광경은 장관이었지만, 그저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악! 애, 애플잭!”
말의 이름인 듯, 거인족 기마병이 애절하게 외친다.
그에 나는 씩 웃으며 다시 창을 내질렀다.
“사이좋게 가거라.”
“이, 나, 나쁜 새끼……!”
그 말을 끝으로 거인족이 고개를 툭 떨궜다.
낙마의 충격과 이어지는 치명타에 숨을 거둔 것이다.
녀석을 보니 괜히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단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먼저다.
“괜찮은가?”
“어, 어어… 괘, 괜찮다.”
단원은 덜덜 떨면서도 강한 척했다.
보통이라면 강한 척하지 말라고 호통치며 도주를 도와야겠지만…….
그럴 시간은 없다.
“그럼, 얼른 후퇴하라.”
말 한마디를 던지고, 다시 싸움터로 몸을 옮겼다.
녀석뿐만 아니라 제대로 도망치지 못한 단원들은 수두룩하니까.
“아악!”
“끄아아악!”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최선을 다해 거인족을 막았지만,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피해가 쌓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다.
“개 같은 놈들!”
욕설을 토하며 마구 덤벼 보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기는 힘들었다.
하나둘, 단원들이 쓰러졌다. 피를 뿜으며,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단원들.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죽어라!”
“크어억……!”
거인족의 창이 단원의 몸을 꿰뚫고, 거인족의 칼이 단원의 목을 친다.
하계에서 벌인 마지막 전쟁이 떠올랐다. 천천히 전사단이 죽어 가던 장면이 떠오르자, 머릿속의 생각이 하얗게 지워졌다.
달리고, 싸우고, 달리고, 싸운다.
푹! 퍽! 서걱!
창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흥분으로 눈이 돌아간 와중에도 소리쳤다.
“후퇴하라! 후퇴해!”
목이 쉴 정도로 외쳤다.
피와 땀으로 정신이 몽롱했다.
그 외침을 그만둔 것은, 주위가 조용해졌을 때다.
살아남은 단원들은 모두 도망쳤고, 그러지 못한 이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입술을 짓씹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인족 군대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보다 오히려 숫자가 늘어난 것 같은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가장 선두에 있는 거인족 전사가 입을 열었다.
“네가 오디슨이겠지.”
불타는 망치를 든 녀석. 그 모습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수르트.”
내 말이 맞았는지, 녀석은 씨익 웃으며 불타는 망치를 치켜들었다.
저 망치의 정체는…….
“그게, 레바테인인가?”
“오호! 레바테인도 알고 있나?”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유명한 물건 아니던가?
재앙의 가지. 그 정체에 대해서는 나뭇가지라니, 지팡이일 것이다- 아니다, 검이다- 등등 많은 억측이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든 걸 보니, 모두 맞고, 모두 틀렸다.
“…불의 검.”
“나는 망치로 쓰는 걸 더 좋아하지만 말이야.”
내가 레바테인을 알고 있자, 수르트가 으스대며 말한다. 그의 손에 잡힌 레바테인의 망치 머리가 일렁이며 모습을 바꿨다.
길쭉하게 늘어난 모양은 불의 검이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불에 모양이 있을까? 그저 주인이 원하는 무기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신물(神物)이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불이라.”
지옥 불에서도 변치 않은 나에게는 잘된 일이다.
창을 꽉 쥐었다.
지금도 열심히 달리고 있을 이들을 위해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리고…….
“내 부하들의 핏값을 받아 내겠다!”
나는 창을 움켜쥔 채, 달려들었다.
죽어 버린 단원들의 복수를 위해.
* * *
수르트는 놀랐다. 생각보다 빨리 환상 마법이 깨졌기 때문이다.
“허, 이 정도로 빨리 깨지다니.”
본래 계획대로라면, 아예 포위하고 난 뒤에 깨졌어야 할 환상 마법이다. 그것도 사실, 수르트는 ‘너무 고평가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생각보다 너무 빨리 깨졌다.
수르트는 우트가르다-로키의 말을 떠올렸다.
‘토르는 멍청해서 내 환상을 꿰뚫어 보지 못했지만… 오디슨이라는 놈은 듣자 하니 상당한 두뇌파라는군. 은근히 무식한 면모를 일부러 보여서, 적의 방심을 끌어낼 정도야. 조심해야 해.’
완벽한 오해지만, 숱한 오해가 겹치며 이미 사실이 되었다. 오디슨이 무식한 짓을 해도, 이제는 뭔가 계획이 있겠지- 생각할 정도.
수르트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역시나, 한 전사의 이름.
‘오디슨.’
투쟁심이 들끓었다.
오디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두! 후퇴한다!”
수르트가 웃었다.
불명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명령이다. 하지만 휘하 전사들을 이끄는 지휘관이라 생각했을 때는 오히려 정답이었다.
수르트가 그에 외쳤다.
“동지들이여!”
부하들이 집중하는 게 느껴진다.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불꽃이 긴 꼬리를 남기며 화려한 모습을 보였다.
더 늦출 수는 없다.
“반격의 시작이다! 비열한 약탈자들에게 죽음을 선사하라!”
“죽음을 선사하라!”
와아아아아!
부하들이 고함과 함께 돌진한다.
오디슨 약탈단의 임시 거처는 도망자와 추격자가 뒤엉켜 난장판이 되었다. 간부들이고 뭐고 죄다 도망치는 와중, 추격에 잡힌 이들은 약한 놈들뿐이었다.
“죽어라!”
“으아악!”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수르트가 킬킬 웃었다. 만족스러웠다.
“수르트.”
우트가르다-로키는 언제나처럼 소리 소문 없이 옆으로 다가왔다. 거인족답지 않게 차분한 인상과 산적 수염이 아닌, 비단결 같은 길고 푸른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마법사.
수르트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마법대공.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글쎄… 내 생각보다 오디슨이 강해서 말이지.”
우트가르다-로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제안했다.
“피해를 가장 줄이고 싶다면, 저렇게 한둘을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활을 쏘는 게 어떤가?”
우트가르다-로키의 말에 수르트가 음- 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우트가르다-로키의 말대로다. 은근히 쓰러지는 이들은 모두 도망치는 놈들을 쫓다가 오디슨에게 당하는 이들뿐이다.
수르트가 혀를 찼다.
“…활이라.”
“숫자에는 놈도 답이 없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수르트는 그보다 더 뛰어난 방법을 안다.
“궁사들은 모두 뒤로 물러서라!”
“뭐? 어째서……!”
우트가르다-로키가 당황할 때, 수르트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말을 몰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에 병사들이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수르트의 한마디에 확 가라앉았다.
“결투다.”
의문이 사라진 자리에 흥분이 가득했다.
빙 둘러선 병력 가운데, 수르트와 오디슨만이 자리했다.
“네가 오디슨이겠지.”
“…수르트.”
피와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놈이 제 이름을 부른다. 수르트는 히죽 웃었다. 오디슨이 다시 입을 연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은 수르트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레바테인인가?”
“오호! 레바테인도 알고 있나?”
“…불의 검.”
오디슨의 눈치를 보아하니, 수르트가 나온 이유를 알아챈 모양.
수르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망치로 쓰는 걸 더 좋아하지만 말이야.”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오디슨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불이라…’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멍하니 싸움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디슨의 눈빛이 바뀌었다.
“내 부하들의 핏값을 받아 내겠다!”
이글거리는 복수심.
수르트는 등골이 오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특유의 느낌은 강자를 상대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었다.
수르트가 고함과 함께 고삐를 잡아챘다.
“더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결투다!”
히이잉!
애마가 울부짖으며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 전투의 흥분이 수르트를 감싸 안았다.
강자와의 대결. 전사에게 있어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오디슨 역시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아까 본 것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허나, 부족하다.
“흥!”
수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화르르륵! 레바테인이 주위 공기를 후끈하게 데우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콰앙!
“크윽!”
달려들던 오디슨이 뒤로 물러선다.
수르트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덤벼들었다.
레바테인이 불의 궤적을 그려 대며 마구 허공을 뛰놀았다.
쾅쾅쾅!
레바테인의 공격이 이어질 때마다, 오디슨의 몸이 덜컥덜컥 흔들렸다.
오디슨은 이를 악물었다. 답답했다.
‘…길이의 차이가 너무 난다.’
창을 주 무기로 쓰는 오디슨은, 근접전에서 사정거리의 불리함을 떠안은 적이 거의 없다. 창은 근접전에서 가장 긴 무기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거인족이라는 규격 외의 종족은 오디슨의 창보다 훨씬 긴 망치를 휘둘렀고, 오디슨은 제대로 창을 뻗을 시간도 없었다.
‘기술 역시… 내 아래가 아니다.’
엉성하게 길이로만 덤벼들었다면, 쉽게 공격을 파훼하고 안쪽으로 덤벼들었으리라. 하지만 수르트는 굉장히 노련했다.
과연, 무스펠헤임의 국경을 책임지는 장군다운 모습이다.
오디슨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길었다면…….’
그런다고 창이 당장 길어지는 일은 없다.
수르트가 껄껄 웃었다.
“아스가르드의 신이 겨우 이 정도인가! 별것 아니구나!”
“크윽……!”
짜증을 부리며 신성을 일으켰다.
수르트는 그걸 기다렸다는 듯, 맞상대하며 신성을 일으켰다.
오디슨이 흠칫 놀랐다.
“신성……?”
수르트가 씩 웃었다.
“너희들만이 신성을 다룬다 생각했나? 오히려, 너희들이 우리의 신성을 훔쳐 간 것이다! 태초의 거인, 위미르를 죽이고 신성을 훔쳐간 도둑놈들!”
수르트가 버럭 소리치며 망치를 휘둘렀다.
오디슨은 다가오는 불의 망치를 피했다. 빠르고 강맹한 공격이지만, 아까까지와는 분명히 달랐다.
질풍. 바람은 오히려 덮쳐 오는 망치를 타고 휘날렸다.
망치의 아래에서 망치의 궤적을 따라 뒤쪽으로 치솟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수르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잡았다!”
오디슨이 창을 내질렀다. 그 얼굴에 걸린 것은 환희.
하지만 수르트 역시 비릿한 웃음을 품고 있었다.
“<국경선>!”
번쩍! 수르트의 불꽃과도 같은 신성이 너르게 펼쳐졌다.
오디슨의 몸이 우뚝 멈췄고, 넘어갈 수 없는 막이 자리 잡았다. 무기는 밀어 넣을 수 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오디슨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고, 수르트가 흐흐- 웃었다.
“끝이구나, 침략자여.”
레바테인을 들어 올린 수르트.
오디슨은 그를 피하려 신성을 끌어올렸지만, <국경선>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파르르 떨 뿐.
오디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떻게……?”
신성을 발휘할 수 없게 하는 권능이라니.
비상식적이다. 적어도 오디슨이 아는 한도 내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권능이었다. 수르트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웃음을 흘릴 뿐.
우트가르다-로키가 낄낄 웃으며 설명했다.
“권능은 여러 가지 제약을 걸수록 강해지지. 수르트의 제약은 자신도 신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저 자리에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
우트가르다-로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신들을 낚을 거미줄을 뿌리지 않겠는가?”
과연 라그나로크의 때에 프레이와 동귀어진하는 자, 불의 거인, 수르트.
오디슨은 궁지에 몰렸다. 수르트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까짓 설명 하지 않아도 되건만.”
“곧 죽을 놈 아닌가? 이 정도는 베풀어야지.”
우트가르다-로키의 말에 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싱거웠다. 아쉽군.”
수르트가 그와 함께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쐐애애액!
레바테인이 쇄도하고, 오디슨이 창으로 최선을 다해 공격을 막았다.
쾅쾅쾅! 연이은 공격은 오디슨을 궁지로 몰았다.
“제길……!”
도망칠 수도, 공격할 수도 없다. 오직 막는 수밖에.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주르륵 흐른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막는 것조차 못하게 되리라.
훈련용 허수아비 같은 꼴로 맞이할 죽음을 떠올리니, 오디슨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괜한 무기를 원망한다.
수르트가 껄껄 웃으며 레바테인을 휘몰아친다.
“죽어라! 벌레 같은 놈!”
“크으윽! 내 창이 조, 조금만 더 길었다면……!”
수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다고 네 창이 길어지더냐!”
부우웅!
레바테인이 날아들었다.
콰앙! 막아 냈다.
부르르르- 창대가 덜덜 떨리고, 손이 미끄러웠다.
어떻게든 공격해야 한다. 이대로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생을 마감할 수는 없다. 싸우지도 못하고 죽는다?
덜컥, 공포가 자리 잡았다. 수르트가 무서운 건 아니다.
원통함이었다. 전사답게 죽지 못하는 분함.
오디슨이 고함을 터트렸다.
“으아아아!”
마구잡이로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한참이나 벌어진 거리.
수르트가 오디슨을 놀렸다.
“흐하하! 발버둥을 치는구나!”
“늘어나라! 늘어나! 놈의 심장을 꿰뚫어라!”
“푸하하하하하! 그런다고 늘어나겠느냐? 엉? 바보 같은…….”
푸욱!
“노옴……?”
수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디슨의 창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심장을 찌른 건 아니다. 하지만 닿았다.
수르트도, 오디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뭐……?”
수르트가 주춤거렸고, 오디슨은 제 창을 바라보았다.
길이가 늘어나는 걸로 유명한 다른 신계의 무기. 들어본 적 있다.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질풍을 보여 준 손오공의 애병(愛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