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141화. 신을 속이려 하지 마라 (3)
우트가르다-로키에 얽힌 이야기는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다.
존경하는 토르께서 골탕 먹는 이야기니까. 나는 이 이야기와 함께 토르께서 여장하는 이야기를 최악으로 꼽았다.
‘이놈 자식아. 신들의 이야기건만,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쩔 테냐?’
주술사 영감은 나더러 까탈스럽다며 투덜댔다.
토르의 여장 이야기를 두고 거짓말이라고 설쳐 대다 두들겨 맞고 난 뒤에 들은 이야기이기에, 거짓말이라 매도하진 않았다.
그래도 과장이 섞여 있을 거라 믿었지만…….
“…후우.”
과장은 없었으리라.
이 짧은 시간이 라우디로 변해, 날 속이려 한 것만 해도… 우트가르다-로키는 보통 놈이 아니다.
그래도 이야기 속에 놈의 약점이 숨어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그 ‘싫은 이야기’를 돌이켜 보았다.
‘토르와 그의 시종 티알피, 그리고 로키가 거인 왕국의 요툰헤임을 살피러 여행길에 올랐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그러던 중, 그들은 하룻밤을 보내기 딱 좋은 커다랗고 포근한 동굴을 발견했다. 늦은 시간이기에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밤중,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인해, 너른 공동에서 잠자던 이들이 모두 좀 더 작은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아침이 되어 동굴 밖으로 나와 보니…….
‘그들이 잠을 청한 동굴은 사실, ‘스크리미르’라는 거인의 벙어리장갑 속이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큰 거인이 아닐 수가 없다. 토르는 토르손보다도 훨씬 커다란 거구였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지진이라 생각한 것은 사실, 스크리미르의 코골이였다.
스크리미르는 정체를 숨긴 그들에게 제안한다.
‘요툰헤임? 나도 그곳으로 가는데 함께 가지.’
거인족의 입에서 내부 정세를 들을 수 있겠다- 생각한 토르와 로키는 거절하지 않았다. 스크리미르는 기뻐하며 일행의 짐을 모조리 제 보따리 안에 넣은 뒤, 단단하게 묶고 짐꾼을 자처했다.
거절할 이유가 있었을까? 토르 일행은 편하게 하루를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저녁 무렵에 터졌다.
‘먹거리는 내 몫뿐이오. 댁들은 알아서 해결하시오.’
거대한 거인, 스크리미르인 만큼 토르 일행의 먹을거리를 노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스크리미르는 보따리에서 단단하게 매듭지은 음식 주머니를 찾아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것도 못 푼다고? 실망이군.’
아스가르드 최고의 장사인 토르도 풀 수 없을 정도로 매듭이 단단했다. 결국, 토르 일행은 저녁을 굶어야 했다. 거기에서 불행이 끝난 게 아니었다.
주린 배를 안고 잠을 청했으나, 스크리미르의 코골이 때문에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토르가 묠니르를 들고 뛰쳐나가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아마, 그게 바로 크레네와 이라호드가 내게 충고한 층간소음이라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허나…….
‘으응… 가을 낙엽인가?’
스크리미르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고 드르렁 코를 골았다. 자존심마저 상한 토르가 다시 묠니르를 휘둘렀으나 스크리미르는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 뿐. 토르는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했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스크리미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댔다.
‘빌어먹을 새 같으니. 밤이 깊었건만 자지도 않고, 새똥을 뿌려 대는군!’
토르는 차마 더는 힘을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잠도 못 자고 자존심에 심한 타격을 입은 토르는 다음 날 아침 스크리미르와 헤어져 요툰헤임에 닿았다.
그런 그들을 반긴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새.
우트가르트.
토르와 로키는 그 요새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거인족이 전쟁을 대비해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우트가르트의 성으로 가 하룻밤 묵어 가길 요청했고, 우트가르다-로키는 그들의 꼴을 본 뒤 한마디 했다.
‘이 성에는 비범한 자만이 머무를 수 있다.’
그에 로키가 나섰다. 로키는 ‘내가 먹는 거로는 최고다!’라며 자신만만하게 나섰으나, 우트가르다-로키의 부하인 ‘로기’와의 빨리 먹기 승부에서 동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판정은 로키의 패배였다.
판정을 비열하게 했느냐고? 아니다.
‘댁은 음식을 다 먹어치웠지만, 로기는 음식뿐만 아니라 뼈와 테이블, 접시를 먹어치웠고, 포크는 디저트로 남겨 뒀지.’
로키가 입을 쩍 벌리고 물러섰으며, 다음으로는 토르의 시종인 티알피가 나섰다. 티알피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토르의 시종이지만, 토르와 숱한 모험을 하는 동안 신성을 얻어 빛의 하급 신이 된 사내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누구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다 했다. 그에 우트가르다-로키는 부하인 ‘후기’를 내보냈다.
‘내 생전, 저렇게 빠른 인간은 본 적이 없군!’
우트가르다-로키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
티알피는 두 번의 승부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허나 마지막 승부에서 그가 출발하려 할 때, 이미 후기는 도착지에 닿아 있었다.
‘비범하긴 하지만, 내 성에 머무르게 할 정도는 아닌 것 같군.’
우트가르다-로키의 말에 마침내 토르가 나섰다.
나는 그 대목에서 ‘토르께서 다 해주실 거야!’ 하고 방방 뛰며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뿔잔 속의 술 마시기.’
‘고양이 들어 올리기.’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우트가르다-로키의 과제들은 보통이 아니었다. 뿔잔 속의 술을 세 번 이내에 모두 마시지 못하면 패배라 했으나, 토르는 최선을 다해 마셨음에도 겨우 뿔잔 속의 술을 약간 비웠을 뿐이었다.
젊은 거인족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잠자는 고양이’ 들어 올리기 역시, 겨우 뒷다리 하나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토르는 분노했다.
‘사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싸움이라오. 어디 한번 붙어 보자!’
그에 우트가르다-로키는 ‘약자를 괴롭힐 수 없다’ 말하며, 제 유모를 대신 내보냈다. 늙은 유모 엘리와 토르는 씨름을 했으나… 토르는 엘리를 이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가… 지다니… 저 노파에게 지다니…….’
토르 일행은 넋이 나갔고, 우트가르다-로키는 그들이 불쌍하다며 극진히 대접했다.
다음 날, 토르는 급히 아스가르드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거인족이 이 정도로 강하다면, 준비를 단단히 해 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상은 달랐지.”
내가 눈을 빛내며 우트가르다-로키라 밝힌 라우디를 노려보았다.
옆구리에 끼인 라우디의 머리통이 씩 웃었다.
“잘 아는군.”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사 영감에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호통을 쳤으니, 당연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스크리미르도 너였지.”
“그래, 벙어리장갑이라 생각한 동굴은 사실은 동굴이었고.”
“매듭은 마법이었던가?”
“사실, 매듭 같은 건 없었다. 그 어떤 장사도 허공을 찢어발길 수는 없으니.”
주술사 영감은 매듭이 마법으로 묶였기 때문에 적절한 마법을 쓰지 않는 이상 풀리지 않는다고 말해 줬었건만.
사실은 약간 달랐다.
“토르가 때린 머리통은 사실 산이었고.”
“토르의 망치질 때문에 골짜기 두 개와 분지 하나가 생겼지.”
라우디의 모습을 한 우트가르다-로키가 “괴물이라니까, 정말.” 하고 혀를 내둘렀다.
나 역시, 감탄스럽다. 묠니르로 때려 산의 모습을 바꾼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과연 토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로키가 상대한 로기는…….”
“불(Logi)이다.”
“티알피가 상대한 후기는…….”
“생각(Hugi)이다.”
내가 알던 것과 같다.
로키가 아무리 빨리 먹어치운다 한들, 뜨거운 불보다 빠를 수는 없다. 티알피가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고 한들, 생각보다 빠를 수는 없다.
그리고 토르가 겪은 시험들은…….
“뿔잔은 바다와 이어져 있었지.”
“잠든 고양이는 사실 요르문간드였고.”
“마지막으로 토르와 맞붙은 늙은 유모는…….”
시간.
아무리 강대한 토르라 할지라도 감히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우트가르다-로키는 역시…….
“환상에 능숙하군.”
깨달음과 동시에 이상한 점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 뿌연 것이 내려앉은 듯한 느낌. 그 뿌연 막 같은 것을 자세히 바라볼 때, 이전에도 본 것이라는 걸 알았다.
긴눙가가프 터미널에 쳐져 있던, 오딘의 방어벽.
“…이게, 마력인가.”
우트가르다-로키가 흠칫 놀랐다.
그와 동시에 와장창! 보고 있던 것들이 깨져 나갔다.
목이 잘린 채 제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있던 라우디는 없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거인족 하나뿐.
그 모습에 흠칫 몸을 떨었다.
우트가르다-로키가 허허허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 눈은 대체 뭐지?”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반대로 내가 그에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뭐, 뭐야! 거인족이다! 거인족 군대다!”
“미, 미친! 경계! 경계 뭐 했어! 어? 저렇게 근처까지 왔는데 뭐 했냐고!”
천막 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마법이 깨진 덕이리라.
나는 놈을 바라보았다. 그를 보며 이를 아득 갈았다.
실실 웃고 있는 녀석을 보자니, 확실히 속았다.
“…매복은 역시 거짓말이었군.”
“끌끌끌, 말하지 않았던가?”
거인이 히죽 웃었다.
익살스러운 표정과 붉은 머리카락.
나는 혀를 차고 천막을 벗어났다. 당장 공격받지 않을 것을 알았다.
천막을 나온 내 눈에 비친 것은 군대다.
날 뒤따라 나온 이들도 흠칫 떨었다.
“…빌어먹을.”
“허, 참… 여기가 내 무덤이 되겠는데? 허, 허허…….”
“대, 대장, 괜찮을까?”
톨킬드, 이그나르, 토르손이 중얼거렸다.
크레네가 내 옷 소매를 살짝 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내 손으로 감싸 주고, 이라호드를 보았다.
이라호드는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오디슨.”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 꼴이 될 때까지 약탈단의 눈을 가리고 있던 놈이 천막을 걷으며 나왔다. 찡긋- 윙크하며 그가 말했다.
“뛰어난 마법사는 실패의 경우를 두고 보지 않아. 두 번째, 세 번째 계획을 미리 세워 두지.”
히죽 웃는 꼴을 보고 이그나르가 ‘에이 씨벌!’ 하고 덤비려 했으나, 내가 막았다. 어차피 이그나르가 덤벼도 이길 수는 없다.
나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소리쳤다.
“모두! 후퇴한다!”
그 목소리에 멍한 상태였던 약탈단원들이 정신을 차렸다.
비명이 터져 나왔고,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입맛이 쓰다.
이렇게 도망치는 건 취향에 맞지 않건만…….
불길이 일렁이는 거대한 망치를 든 거인이 소리질렀다.
“동지들이여! 반격의 시작이다! 비열한 약탈자들에게 죽음을 선사하라!”
“죽음을 선사하라!”“
와아아아아!
거인족 군대가 돌진을 개시했다.
두두두두두! 우리 인간들이 타는 말보다 몇 배는 큰 말이 바닥을 디딜 때마다 쿵- 쿵- 땅이 흔들렸다.
“아아악!”
“아, 안 돼!”
약탈단원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광경에 이를 악물었다.
“오디슨!”
크레네가 날 잡아당겼다.
“빨리, 빨리 가요!”
쓰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도망치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라호드, 크레네를 부탁한다.”
“오디슨……?”
크레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는 손을 휘둘렀다.
퍽! 크레네의 몸이 무너졌다. 지나치게 세게 때린 건 아니니, 몇 시간 뒤면 정신을 차리리라.
무너지는 크레네의 몸을 받아, 이라호드에게 내밀었다.
이라호드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디슨……”
“…걱정할 것 없다. 내 한 몸 빼는 건 문제가 아니니.”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그러니까… 꼭 돌아와요.”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호드가 울먹이며 다시 말했다.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기만 해 봐요! 그러면 내 몸에는 손도 못 대게 할 테니까.”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다치지 않고 돌아가면 잔뜩 만져도 된다는 소린가?
이거.
“아름다운 발키리를 얻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겠군.”
다칠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이라호드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고, 나는 창을 쥐며 숨을 골랐다.
심장 속에 끓어오르는 열기를 그대로 토했다.
“날 속인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바닥을 박차고 거인족 군대를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