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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오브 발할라-138화 (138/208)

# 138

138화. 늑대의 시대 (3)

“제기랄!”

와장창! 화려한 꽃병이 박살 났다.

주변에는 이미 그런 식으로 깨지고 부서진 가구와 장식품이 한가득하였다.

만일 오디슨이 보았다면 ‘물건을 아낄 줄도 모르는 졸부 같은 놈!’이라며 화를 냈으리라. 벌이가 늘어난 오디슨이라 한들, 태어나 태반을 씻어 내는 대야부터 금으로 만들어졌던 발리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발리는 경기가 끝난 지 며칠이나 지났음에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식히지 못했다. 차가운 미남은 반쯤 폐인이 되어 난동을 부려 댔다.

그가 오딘의 아들이 아니었더라면, 머무는 호텔에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든, 그 녀석에게 이 치욕을 갚아 줘야 하는데…….”

까득,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달아오른 머리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발리는 그게 또 짜증이 나서 뭐라도 때려 부수려 했다. 때마침 들려오는 벨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침대라도 부쉈을지 모른다.

띵동!

“…뭐지?”

발리가 인상을 구기고, 문을 열었다.

발리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허, 무슨 염치로 날 찾아왔지?”

“흥, 염치? 계약을 어긴 네게 위약금을 받으러 왔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라, 추방자.”

발리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오디슨 때문에 달아오른 뇌가 시기의 말에 완전히 터졌다. 지나친 분노 탓에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시기는 발리의 그 모습에도 으스대며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분명, 오디슨을 네가 처리하겠노라, 계약하지 않았나! 그 대가로 받아 간 금액만 10억 크로나에 가깝다!”

“…그래서?”

“윽… 오, 오디슨을 처리해야 하는 네가 오디슨을 이기지 못했으니, 여기 적힌 위약금을 물어야지!”

시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은 발리가 차마 보지 못하고 넘긴 조항이었다.

계약을 위반할 경우, 계약금의 3배를 돌려준다고 적힌 부분.

발리는 싸늘한 표정으로 시기를 노려보았다.

“이런 내용이 있었던가?”

“흥! 계약서를 꼼꼼히 봐야지!”

시기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이전 패배로 인해 부활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깨질 참이다. 죽은 약탈단원이 무려 100이 넘는다. 부활 비용은 인당 5천만 크로나. 그리고 5천만의 백 배는, 50억.

오래도록 투기장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라 한들, 메꿀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대신 내주지 않는다?

그러면 약탈단은 끝장이다.

‘내 평판도 끝장나겠지!’

오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로도 막아 낼 수 없는 악명이 널리 퍼지리라. 약탈단의 시대다. 그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도태된다는 의미다.

시기는 그렇기에 발리를 찾아왔다.

위약금은 표준 계약서를 깜빡하고 고치지 않아 남은 잔재지만… 이게 탈출구가 되리라.

‘발리와 적대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지만…….’

시기의 눈이 창을 향했다. 엉망이 된 호텔 방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창밖에 보이는 높디높은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발리가 막 나가는 놈이라 해도, 아버지의 눈이 닿는 이 발할라에서 무슨 짓을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계약서는 보통 물건이 아니니까.’

시기는 확신을 가지고 계약서를 펄럭였다.

계약은 힘으로 무산되기 쉽지만, 이 계약서는 그렇지 않다. 각자의 영혼에 걸고,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보증인 삼는 계약이기에 발리라 해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시기의 생각대로, 발리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계약서를 낚아챘다. 확인하기 위함이다.

찢는다면? 발리는 세계수의 징벌을 받으리라.

“…계약을 위반하거나 완수하지 못할 경우, 계약금의 세 배를 위약금으로…….”

발리가 위약금 항목을 나지막이 읽었다.

시기는 흐흐- 웃음을 흘렸다.

“나도 몰랐던 조항이야. 그래도, 너한테 30억 크로나는 별거 아니잖아? 동쪽 혹한의 왕국을 이어받을 왕자이자, 오딘의 피를 이은 아들인데 말이야.”

“…후우.”

발리가 시기를 다시 째려보았다.

그 서늘한 눈에 시기가 흠칫 몸을 떨었지만, 그는 발리가 계약을 어길 방법이 없다 여겼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윽!”

덥석!

발리가 시기의 목을 낚아챘다. 시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발리가 히죽 웃으며 계약서의 다른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천재지변이나 그에 준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경우, 이 계약은 무효로 한다. 이 부분은 안 읽어 본 모양이군.”

“크윽! 컥, 그… 그 부분은……!”

시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 자리에서 시기를 죽이고 그 영혼까지 불사른다? 발리에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건 완전히 미쳤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시기는 게거품을 물면서도 입을 벙긋거렸다.

“끄륵, 끄으… 아, 아버지… 오, 오딘이 두렵지도… 끄윽……!”

발리가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하는 건 어렵지.”

꽈드득!

시기의 목이 부러졌다. 시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절명했다.

발리는 축 늘어진 시기를 보며 말을 이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화르륵! 발리가 일으킨 불꽃이 늘어진 시기의 몸을 태웠다.

몸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도 탐욕적인 핏빛 불꽃에 녹아내렸다.

-끄아아악!

영혼의 비명을 끝으로, 검은 재 한 줌이 남았을 뿐이다.

발리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쓰레기 같은 놈 덕분에 머리가 좀 차가워졌군.”

발리가 생각했다.

그는 진작부터 오딘의 눈을 피하고자 왕국의 보물로 스위트룸을 감싼 채였다. 패배의 울분을 못 이기고 미쳐 날뛰는 아들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주진 않을 테니까.

발리는 아버지의 눈을 피하고자 친 커튼이 꽤 효과적이라 여겼다.

그리고 식은 머리로 복수할 방법을 떠올렸다.

-응? 어쩐 일이지?

“마법대공, 우트가르다-로키(Útgarða-Loki). 거래를 하자.”

거인 왕국은 넓다.

그곳은 불의 땅-무스펠헤임에서 그치지 않고, 거인의 땅-요툰헤임까지 뻗어 있다. 무스펠헤임은 니플헤임과 붙어 있지만, 요툰헤임은 무스펠헤임에서 뻗어 나온 곳. 더불어 ‘이핑그’라는 강을 건너기만 하면 곧장 아스가르드에 닿는 거인족 최전선이다.

그리고 우트가르다 로키는 오딘의 의형제인 로키와 이름이 같지만, 우트가르트라는 거인족 요새를 다스리는 군주다.

당연히 우트가르다-로키는 헛숨을 흘리며 되물었다.

-…거래를? 이 전쟁통에?

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이기에 할 수 있는 거래였다.

* * *

오딘은 혀를 찼다.

주름진 얼굴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가린다고 모를 거라 생각했더냐?”

어린아이가 깨진 화분을 몰래 갖다 버리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보이지 않는 장막 속으로 시기가 들어갔고, 발리가 벗어났음에도 시기는 찾아볼 수 없다.

물증은 없지만, 정황상 발리가 한 짓은 명확하다.

오딘은 불만스러웠다.

“좀 더 치밀하게 굴어야 하건만.”

쯧쯧, 혀를 찼다.

후긴과 무닌이 깍깍 울었다.

오딘이 낄낄 웃었다.

“녀석을 왜 이대로 두느냐고?”

오딘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회색 눈이 아득해진다.

“그야, 이쪽이 더 재밌을 것 같으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낄낄낄.”

오딘은 본질적으로 미치광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다. 동시에 전쟁이 계속되길 바라는 자다.

미친 전쟁 신이 가장 총애하는 자들이 누굴까?

어떤 고난도 이겨 내는 싸움에 미친 전사들이다.

“마침 거인들도 움직이는군. 아마, 발리가 무언가 언질을 줬겠지. 안 그런가? 로키?”

오딘이 제 의형제에게 물었다.

오딘이 미친 전쟁 신이라면, 로키는 똑똑한 장난꾸러기다. 사실 그 장난의 범주가 워낙 과격한 탓에 로키 역시도 미치광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괜히 둘이 의형제를 맺었겠는가?

“마법 대공, 우트가르다-로키. 꽤 괜찮은 친구지.”

“이름이 같다고 너무 띄워 주는 거 아닌가?”

“토르를 엿 먹일 수 있는 놈이 몇이나 되겠어?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 아마 단 한 사람뿐이지 않을까 싶네만…….”

오딘이 킬킬 웃었다.

로키 역시 킬킬킬 웃었다.

두 미치광이는 같은 사람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다.

로키는 눈에서 광기를 지우고, 진지한 태도로 고쳐 앉았다. 그의 눈에는 기대와 동시에 불안이 함께하고 있었다.

‘내 딸을 꼬신 놈이란 말이지. 어디, 사윗감으로 적당한지 두고 볼까?’

딸이 과년하다 못해 손주의 손주의 손주까지 봐야 할 시기에도 혼자건만,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사위에게 혹독한 법이었다.

그런가 하면 오딘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더, 더, 더… 진정한 승리를 위한 열쇠가 고작 이까짓 것에 꺾여서는 안 된다! 네 가치를 증명하라, 오디슨!’

오딘은 오디슨이 이 고난을 이겨 내고, 승리에 더욱 가까워지길 바랐다.

의형제는 한 사내를 주목했다.

* * *

거인족은 대대적인 징집을 실시했다.

약탈단의 행패가 워낙 거센 탓에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전쟁 준비가 덜 된 게 문제가 아니다. 패배 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터.

차라리 준비가 미흡하다 해도 발버둥 치는 게 낫다.

무스펠헤임을 담당하는 총군단장, 수르트는 그 광경을 꼼꼼하게 바라보았다. 불의 거인 중 가장 강하다 이름난 수르트는 일렁이는 불꽃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정보는 확실하겠지?”

재차 확인했다.

그에 한 서리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족 사내답지 않게 선이 가는 사내였다. 젊은 얼굴이지만, 그 눈에 서린 현명함은 적지 않았다.

그는 푸른 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맛있는 과일일수록, 그 속에 벌레를 품고 있는 법이지.”

“개 같은 케닝그.”

수르트가 짜증을 부렸다. 서리 거인, 우트가르다-로키가 낄낄 웃었다.

“오디슨이라는 놈이 기세등등하니, 놈을 꺾고 나면 다른 약탈단은 몸을 사릴 거다. 그때를 노려 재정비하고, 아스가르드 놈들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자고.”

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디슨. 최근 들어 자주 들려오는 이름이다. 약탈이 시작되기 전까지 거인 왕국은 발할라 방송을 수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수르트는 꽤 흥미가 동했다.

“투기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사가 얼마나 강한지 볼 기회로군.”

“글쎄, 귀찮게 결투 같은 거 하지 말고, 마법으로 뿅- 하는 건 어때?”

“사내답지 못해.”

딱 잘라 말한 수르트가 늘어선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싸움을 좋아하는 거인족이니, 전쟁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수르트가 씨익 웃었다.

“나를 따르라!”

화르륵! 뜨거운 불길이 그가 치켜든 망치에서 뿜어졌다.

용암이 뭉쳐진 듯한 뜨거운 망치 머리는 계속해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닿기만 해도 숯덩이가 될 망치를 본 우트가르다-로키가 감탄을 내뱉었다.

“신모라가 레바테인을 내주던가?”

“흐흐흐, 내 아내가 보관하는 기물을 내가 못 쓸 이유가 뭐가 있겠나?”

우트가르다-로키는 짧은 말만을 듣고도 상황을 곧장 파악했다. 쯧쯧 혀를 찼다.

“들고 날랐군. 조심하게나, 돌아가면 지독한 잔소리에 시달릴 터이니.”

“크흠! 사나이는 걱정 따위 하지 않는다!”

수트르가 호기롭게 외쳤지만, 그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불의 거인, 최강의 용사라지만 그 역시 거인족 여성의 잔소리가 괴로운 거인족 남성이었다.

배신과 배신이 판을 치는 늑대의 시대, 서로를 괴롭히던 신과 거인족 간에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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