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137화. 늑대의 시대 (2)
채앵!
창과 검이 맞부딪혀 불똥이 튀었다. 찌르기를 통해 힘을 일점 집중하는 창과 휘두르기를 통해 넓은 면을 베어 내는 검.
보통이라면 창의 직선이 검의 궤적 때문에 뒤틀리는 일이 잦다.
하지만 나는 보통이 아니다.
“치잇!”
발리가 혀를 차며 몸을 뒤틀었다.
안타깝게도 창은 그를 찌르지 못했다. 창을 회수하고 입맛을 다시자니, 발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힘 하나는 장사구나!”
어깨를 으쓱였다.
불어난 신성 덕에 힘이 세다곤 하지만, 발리 역시 나에 뒤지지 않는 힘을 지니지 않았나? 괜한 칭찬에 입술을 삐죽였다.
“나를 부하로 두고 싶다던 잘나신 분이 생각보다 약하군.”
“건방진 놈! 신성이 부풀어 힘만 세다고 다인 줄 아는가? 신들의 싸움은 신성의 활용에 달린 법이다!”
하앗! 발리가 기합과 함께 달려들었다.
챙챙챙! 귀를 찌르는 굉음.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그리 신성을 잘 다루진 못하는데?”
“허! 시야가 좁군!”
아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겠다?
내가 짜증을 부리며 흥분하길 바라는 모양이지만, 글쎄. 누구의 시야가 좁은 건지 모르겠다.
채앵!
날아드는 검을 튕겨 냈다.
엄청난 힘 덕에 창이 뒤로 밀렸다. 발리 역시 제힘을 못 이기고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역시나 시야가 좁다.
부우웅!
“뭐?”
퍼억!
큭- 소리와 함께 발리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나는 히죽 웃으며 녀석을 후려친 창대를 쓰다듬었다.
“창은 검과 다르지.”
“…고작 이걸로 이겼노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복수해 주마.”
발리가 입가의 피를 닦아 내고 신성을 끌어올렸다.
피를 닮은 신성의 색이 익숙하다. 복수의 신은 모두 저런 빛깔의 신성을 가진 건가? 나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복수를 그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할 셈인가?”
“건방진 놈!”
발리가 달려든다.
쏜살같은 속도다. 확실히 복수의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을수록 더 강하고 억세지는 것이 비다르를 똑 닮았다.
문제는…….
“허술한 것도 닮았군!”
-크아앙!
달려들던 발리의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 늑대로 변한다.
악령의 공격에 발리가 흠칫 놀랐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흡!”
창을 내지른다.
검은 창이 공기를 찢어발기고, 발리를 노린다.
발리가 악령을 튕겨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발리! 오디슨 선수의 공격에 그대로 굴러 피합니다!]
[아아! 흙투성이가 됐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니겠는데요?]
[체면보다는 일단 피하는 게 중요하죠. 오디슨 선수! 놓치지 않습니다!]
[피해야 해요!]
퍽퍽퍽!
와아아아아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
“후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내 공격은 엄한 바닥만 찔렀다. 한번 찌를 때마다 발리는 잽싸게 굴렀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발리를 꼬치로 만들 수 있었는데.
아쉽다. 하지만 나쁘진 않다.
“피하기는 참 잘하는데… 피하기만 해서 복수를 어느 세월에 할 셈인가?”
“제기랄……!”
발리가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푸른 눈에서 불길이 일렁이는 것만 같다. 씩 웃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 아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
발리를 빨리 쓰러트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쨌거나, 좋은 구경을 했으니… 나도 힘을 좀 더 써 보도록 하지.”
‘좋은 구경’이 뭘 말하는 건지 알아챈 듯, 발리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평정심을 잃을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나다.
신성을 끌어올렸다.
“신성을 다뤄 온 시간이 얼마나 차이 난다 생각하느냐! 진정, 네가 이길 수 있을 거라 여기는가! 가엾은 종자여!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말이 많군.”
“뭐?”
발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럴 법도 하지. 내가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없었을 테니.
나는 창을 휘둘렀다. 찌르기엔 너무 가까웠으니까.
게다가…….
“크윽!”
검을 세워 공격을 막아 낸 발리가 휘청였다.
찌르기가 더 위력적이지만, 이 ‘커튼 봉’은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이렇게 휘두르는 것만 해도, 어지간한 몽둥이보다 낫다.
반드시 막게 하기 위한 공격이 통했다.
막았다면? 틈이 생긴다.
[어어어!]
[몰아칩니다! 몰아쳐요!]
와아아아아!
함성이 나를 부추겼다.
발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이 한층 더 짙어졌지만, 상관없다.
나는 신성을 움직였다. 내 몸은 형체가 없는 바람처럼 빠른 듯 느리게,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갔다.
앞에 있는가 하면 뒤에 있고, 뒤에 있는가 하면 앞에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람’의 특징이다.
쾅쾅쾅!
“크윽! 어떻게… 어떻게, 곤륜 놈들의 도술을?”
발리가 당황해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공격은 사방팔방 가리지 않고 발리를 압박했다. 발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까지 잘 막아 냈다 한들, 막다 보면 한계가 오기 마련이다.
팔에 충격이 쌓여 움직이지 않게 되거나, 집중이 분산되어 막아 낼 수 없게 되거나…….
쨍그랑!
무기가 부러진다.
“어머니가 주신 왕국의 보물이……! 만년 한설로 만들어진 검이……! 어떻게!”
발리가 깜짝 놀랐다.
만년 한설? 높은 산 정상에 쌓인 눈이라 한들, 바람이 불면 흰 먼지가 되어 날린다는 걸 모르는 건가?
어리석은 놈 같으니.
“끝이다!”
퍼억!
발리의 뒤에서 녀석을 후려쳤다. 발리는 팔을 내밀어 내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팔에 팔꿈치가 하나 더 생긴 듯 기괴하게 굽혀지고, 발리의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발리가 바닥을 나뒹군다.
[방어가 깨졌습니다! 저 검, 먼 동방의 보검이 아닌가 싶은데요…….]
[보물이라 해도, 오디슨 선수의 소나기 같은 공격을 막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비다르와 달리, 발리는 확실한 한 방이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 회드르를 찔러 죽인 바로 그 한 방!]
“꺄아아악! 오디슨 님!”
“우아아아아아! 최고다!”
함성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치켜들자, 함성이 한층 더 커졌다.
쓰러진 발리는 그런 나를 보며 이를 아드득 갈아 댔다. 그의 몸을 감싼 핏빛 신성은 이제 거의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어졌다.
발리의 한 방? 회드르의 심장을 꿰뚫은 그 한 번은 분명 강렬하리라. 갓 태어난 아기가 이미 다 자란 신의 심장을 찔러 죽인다는 것만 봐도 보통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발리의 분위기가 변했다. 곱게 자란 귀공자, 차가운 이성을 앞세워 계산적으로 굴 것만 같던 그 냉철함이 사라졌다.
검붉은 신성을 품은 발리의 눈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오라, 아버지께서 내게 내리신 운명이여! 복수를 이루는 데 필요한 나의 칼이여!”
우우우웅-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함성을 내지르던 관중들이 침묵했다. 장내 해설도 지금 발리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역시 예사롭지 않은 상황에 침을 꼴깍 삼킬 뿐.
발리는 퀭한 눈으로 날 보며 히죽 웃었다. 자존심이 상했던가? 이처럼 뭔가 대단한 일을 꾸밀 정도로?
“신이란…….”
오만하기 그지없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창을 고쳐 쥐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든 그에 대처할 힘이 있다면 당황하지 않아도 좋다.
발리가 손을 쭉 뻗고 외쳤다.
“노퉁(Nothung)! 목적을 위한 필수품이여!”
번쩍! 밝은 빛과 함께 흉흉한 마검이 그의 손에 나타났다.
보통 검이 아니다. 그저 자리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 칼.
오딘께서 갓 태어난 발리에게 쥐여 준 검이 바로 저것이란 말인가? 발두르가 멀쩡히 살아 있는 이 역사에서도, 발리는 저 검을 받아 냈단 말인가?
혼란이 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내가 할 일은 빤하다.
“칼 하나를 더 꺼낸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 같은가!”
“흐흐흐, 이 노퉁은 보통이 아니지. 왕국의 보검? 분명 귀하디귀한 칼이다. 어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애지중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귀하다고 한들, 가장 높으신 분께서 내리신 이 검만큼 귀할까?”
발리가 부드럽게 노퉁을 쓰다듬었다.
우우우웅- 노퉁이 애처롭게 울었다. 마치 피를 갈구하는 듯한 칼 울음에 모두가 긴장을 이기지 못했다.
발리가 날 보며 말했다.
“네 패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패배하는 것은 너다.”
발리가 흥- 콧방귀를 뀌고, 내게 덤벼들려는 순간.
삐이이익!
경기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건, 너와 나의 싸움이 아니다. 오디슨 약탈단과 시기 약탈단 간의 싸움이지. 그리고…….”
내가 손가락을 뻗어 이그나르를 가리켰다.
녀석이 히죽 웃었다.
“거, 쓸데없이 싸우고 그래? 빨리 이놈만 잡으면 끝나는데 말이야.”
이그나르가 도끼로 가리킨 곳에는 쓰러진 시기가 누워 있었다.
발리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만약을 대비해 발키리들이 발리를 노려보며 창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젠장할!”
발리는 얼굴을 붉히며 욕을 토해 제 화를 삭일 뿐.
차마 오딘께서 정하신 규칙을 어길 배짱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깨를 으쓱이고 발리에게 말했다.
“다음에 한번 제대로 겨뤄 보면 좋겠군.”
내 말에 발리는…….
“크아아악! 빌어먹을 놈! 시기! 이 멍청한 자식!”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해 혼자 방방 날뛸 따름이었다.
장내 해설이 이 어이없는 싸움의 끝을 알렸다.
[아… 저,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만……. 대장이 잡힌 이상, 경기는 끝이죠.]
[하하하! 어쨌거나 오디슨 약탈단의 승리입니다! 시기 약탈단은 오디슨 약탈단과의 다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와아아아아!
얼떨떨하긴 했지만, 관중들은 환호했다.
시기의 목을 딴, 이그나르가 허허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괜히 힘 뺄 필요가 어딨어? 시기만 잡으면 끝나는걸.”
이그나르 말이 맞다.
그런데…….
“시기를 어떻게 잡았지? 녀석은 나름 강할 텐데.”
오딘의 축복을 둘둘 두른 놈이다. 약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어이없이 끝났다고? 이전 세력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뭔가 어정쩡하다.
이그나르가 볼을 긁적였다.
“너랑 발리가 치고받고 열심히 싸우다 보니까, 다들 싸움은 안 하고 멍하니 보고 있었거든. 시기도 다르지 않았지.”
“…그러니까, 기습했다?”
내 말에 이그나르가 껄껄 웃으며 제 배를 퉁퉁 두들겼다.
“빨리 끝나면 좋은 거지! 밥이나 먹자고! 쓸데없이 더 싸우는 거보다 그게 좋지!”
쓸데없다?
뭐, 승패와는 별개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니까.”
슬쩍 손아귀에 신성을 일으켰다.
내 손 안에 핏빛 신성이 일렁였다.
질풍신뢰를 익힐 때도 그랬지만…….
“비다르, 시구르드, 발리.”
세 번이나 봤다.
대기실로 돌아가 뒷정리를 하려는데, 발리가 내 등에 대고 소리쳤다.
“오디슨! 복수해 주마!”
그 말에 피식 웃고, 손을 휘휘 저었다.
노퉁? 꺼내 들어라. 난 이제 복수에게 복수를 해 줄 수도 있다.
“흠.”
그나저나 고민이다.
이 권능은 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한단 말인가.
멋있는 이름이 필요한데.
“어, 무지개다. 크흐, 하늘도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는군!”
이그나르가 투기장 위로 떠오른 무지개를 보며 껄껄 웃었다. 다른 녀석들도 다르지 않았다.
승리의 무지개라.
“무지개 복수라고 하면 되겠군.”
복수보다 강한 <무지개 복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