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화. 바람의 시대 (2)
오디슨과 시기는 싸우고 싶었지만 싸울 수 없었다.
약탈단 허가증에는 약탈 권리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의무도 있었다. 개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약탈단 간의 분쟁 금지 조항이었다.
오디슨과 시기는 서로 으르렁대면서도 공격을 하진 않았다. 허나 둘 다 이대로 흐지부지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약탈단 분쟁 조정을 신청했다. 오디슨은 있는지도 몰랐던 문제 해결 방법이었다.
오디슨의 약탈단과 시기의 약탈단.
둘의 문제는 이제 재판으로 판가름 나게 되었다. 그 덕에 골치 아파진 것은 아스가르드의 대법관, 티르.
“빌어먹을.”
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잘생긴 얼굴, 안색이 거멓게 죽었다. 눈 아래는 심연을 닮은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입술이 부르튼 데다, 볼까지 핼쑥해 티르의 멀끔한 모습만 보던 이들은 그가 티르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티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고 싶다.’
티르는 최근 산재한 문제 때문에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신에게는 잠이라는 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 피로를 푸는 데에는 잠만 한 게 없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게다가…….
“둘 다 마음에 안 들어.”
티르가 서류를 살피다 말했다.
오디슨과 시기. 둘 다 티르와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오디슨은 사고뭉치였고, 시기는 범법자였다.
시기가 의절했다곤 하나, 오딘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발할라에 재입성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티르가 스트레스에 몰려 짜증을 부렸다.
“으아아.”
탄식과 함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 꼴을 보던 토르가 낄낄 웃었다.
“아주 죽어나는구만!”
“…후우, 젠장할. 원래 이거 네 일이었다는 걸 잊지 마라.”
“글쎄, 그랬을까?”
토르가 씩 웃었다.
티르가 한 말이 그리 틀리진 않다.
약탈단이라는 기괴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면? 토르가 주축이 된 아스가르드군이 거인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리라. 그 상황에서 오디슨과 시기는 부대를 이끌고 싸웠겠지.
휘하 부대장의 다툼은 분명 토르가 신경 써야 할 일이지만…….
‘만약은 없다!’
토르는 흐뭇하게 웃었다.
오디슨과 시기는 부대장이 아니라 약탈단의 단장이 되었고, 토르가 군법으로 재판해야 할 일은 티르가 골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게 되었다.
토르는 저런 꼴이 되고 싶진 않았다.
“…젠장할. 사실 주장만 놓고 보자면…….”
티르가 스트레스를 밀어젖히고, 사안을 자세히 살폈다.
오디슨의 약탈 성공, 이후 포위. 그 위기 상황에서 시기의 약탈단이 포위한 국경 수비대를 무찔러 오디슨의 약탈단을 구조함.
그에 오디슨은,
‘신세를 졌으니, 절반을 주겠다.’
제안했고, 시기는 거절했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전멸했을 테니, 모조리 내놔라.’
절반과 전부. 둘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티르에게까지 올라온 건수다. 티르는 한숨을 쉬었다.
“보통의 약탈단이라면, 시기의 손을 들어주는 게 맞는데.”
문제는 오디슨의 약탈단이 보통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오디슨의 주장대로다. 시기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피해는 있었을망정 패배는 없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또 괘씸하다.
“구출한 뒤 전부 내놔라? 이건 양아치 같은 마인든데.”
“큭큭, 틀린 말은 아니지.”
토르가 벌꿀주를 마시며 고개를 주억였다.
만일 오디슨이 전멸했을 법한 상황이라면야 시기의 말이 맞다.
하지만…….
“쯧.”
티르가 혀를 찼다.
“시기가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군.”
“뭐, 그놈은 아버지를 믿고 설치는 버릇이 나아진 게 없어.”
토르가 맞장구쳤다. 티르가 뚱한 표정으로 토르를 보았다.
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왜?’ 하고 묻는다.
“아니, 그래도 네 동생 아닌가?”
“의절했고, 추방됐으면 끝이지. 남남이야, 남남. 난 차라리 오디슨과 더 친할걸?”
“흐음, 그러면… 내가 어떤 판결을 내려도 괜찮다 이거지?”
토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인류의 수호자였고, 정의의 화신이었다. 사냥을 나가 열등감을 못 이기고 스카디의 하인을 때려죽인 뒤 시체를 유기한 동생? 의절했으니 이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티르는 오디슨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불만은? 다시 또 불복하고 재심을 청구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쌓인 일이 얼마나 많은데!’
티르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Winner Take it All.”
약탈단 대 약탈단.
약탈단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약간 한산해진 투기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돈을 펑펑 쓰게 하리라.
토르가 낄낄 웃었다.
“오디슨 외사촌 동생인가? 걔가 하계에서 신성을 잘 벌어 줘서, 편파 판정하는 거 아니지?”
“흥, 그 덕에 내 일이 얼마나 늘었는지 아나?”
“뭐, 너무 일만 하고 살지 말라고. 여자도 좀 만나고 그래.”
토르의 말에 티르가 발끈했다.
“난 안 그러고 싶은 줄 아나!”
토르가 아내와 딸, 아들들을 둔 것도 모자라 애첩도 있는 데 비해 티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공평한 판결은 사실,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도 모른다.
“천년 동정의 힘!”
“이 자식이……!”
토르가 티르를 놀려먹으며 낄낄대는 소리, 티르가 짜증을 부리는 소리가 집무실 밖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이가 있었다.
“…오디슨이 이길 거라 생각한다고? 그 천한 놈이?”
시기(Sigi)였다.
의절하긴 했지만, 오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발키리들을 압박하여 티르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찾아왔다. 하지만 그 선물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티르는 이미 내린 판결을 뒤집을 신이 아니니까. 게다가 정의를 신봉하는 토르가 함께 있다? 뇌물을 먹이려다 묠니르 맛을 보게 되리라.
시기는 굳은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무슨 수가 필요하겠군.”
어떻게든 오디슨을 이겨야만 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약탈품에 대한 것이 아니다.
세력전에서 시기의 짓밟힌 자존심과 권위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다. 시기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 녀석’이라면…….”
시기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동쪽, 혹한이 자리한 왕국이었다.
* * *
[약탈단 VS 약탈단!]
[오디슨 VS 시기!]
[세력전의 악연이 다시 한 번?]
이번 승부는 단순히 약탈단 간의 갈등을 벗어나, 투기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싸움이 되었다. 최근 약탈단의 활약에 발할라에서 투기장 관람객이 줄었다더니, 지금 투기장 앞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흥미진진한 싸움을 보다 보면 목이 마르죠? 자! 시원한 맥주 있습니다!”
“곧 마감입니다! 승패 결정전! 발할라 공인 승부 예측 복권!”
와글와글한 사람들이 시끌벅적 시장바닥이나 다름없이 떠들어 댔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곧 열릴 결투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오디슨 쪽이 이기겠지?”
“글쎄, 시기가 아무리 전에 무력하게 무너졌다고는 해도, 오딘의 축복을 둘둘 말아 은 양반 아닌가? 게다가 시기 쪽이 숫자도 훨씬 많다고.”
“아무리 그래도 20대 200은 좀 오버 아닌가? 투기장이 꽉 차겠군!”
“자! 구호 연습할게요! 오디슨!”
“이겨라!”
“시기!”
“꺼져라!”
낯뜨거운 목소리도 꽤 있었다.
어쨌거나 투기장 내부, 대기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사람이 빽빽하다. 이렇게 대기실이 꽉 찬 느낌을 받은 적이 있던가?
혀를 내둘렀다.
“오디슨!”
이라호드가 날 부르며 다가왔다.
잔소리를 한바탕 쏟아부을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황급히 봉지를 들어 올렸다. 바스락하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오! 뭐 사 온 거야?”
톨킬드가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이라호드가 잔소리하기 전에 잽싸게 봉지에서 캔 하나를 꺼내 던졌다.
“헤이드룬 미드? 나쁘지 않… 뭐야! 이거 왜 무알콜이야?”
“무알콜? 젠장할! 무알콜을 마시고 어떻게 힘을 내!”
톨킬들의 불평에 용병들이 한마디씩 더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일 따름. 이라호드에게 변명했다.
“잠깐 마실 걸 사러 다녀왔다. 늦지 않게 오지 않았나?”
“…그래도 그렇지, 대장을 맡은 사람이 결투 직전에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요? 네?”
후우, 잔소리가 또 한참 이어지겠군.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이그나르는?”
“어? 형님은 가게에 잠깐… 경기 전에 온댔는데? 왜 찾아, 대장?”
토르손이 잽싸게 내가 던진 화제를 물었다.
잔소리를 피할 수 있어 참 좋다. 그에 나는 씩 웃었다.
“싸움 전에 한잔해야 할 거 아닌가?”
내 말의 숨겨진 뜻을 알아챈 용병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찝찝하긴 하지만, 첫 약탈에서 얻은 가장 귀한 물건을 풀 때가 됐다.
이전 잔치에서 풀까- 생각했지만, 모두가 날 말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거, 뜯는 거야?”
톨킬드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봉지에서 무알콜 헤이드룬 미드를 꺼내 들었다.
“이 밍밍한 술을 왜 가져 왔다고 생각하지?”
크바지르의 살로 만든 귀한 술. 하지만 양이 좀 아쉬웠다. 그 양을 채우기 위해서는 섞는 수밖에 없다.
이라호드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오디슨, 아직 나이 안 되는 거 알죠?”
“흐흐흐, 그것 때문에 내가 법전까지 뒤져 봤지.”
“네? 법전을요?”
이라호드가 깜짝 놀랐다.
내가 책을 뒤지는 게 그리 놀랄 일이던가? 괜히 심통이 났지만, 입술을 삐죽이며 그녀에게 내 지식을 나눴다.
“알고 보니, 미성년자에게 술을 파는 게 금지지, 미성년자가 술을 마시는 게 금지는 아니더군.”
“어,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사회 통념상…….”
쯧쯧, 혀를 찼다.
“사회 통념은 무슨. 한 잔쯤 할 수도 있는 거지.”
이라호드가 여러모로 복잡한 표정을 지을 때, 반가운 이가 등장했다.
이그나르였다.
“오오오! 왔다, 왔어!”
“얼른 뜯으라고!”
이그나르를 반기지 않고, 술통을 반기는 용병들을 보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그나르 역시 낄낄 웃었다.
“내가 이걸 혼자서 얼마나 뜯고 싶었는지 모를걸?”
이그나르의 너스레에 당장 뜯으라는 고함이 뒤따랐다. 이그나르는 그 거친 말에 히죽 웃으며 술통을 열었다.
“아.”
이제까지 통념이 어쩌니 저쩌니 잔소리를 하던 이라호드가 감탄했다. 이라호드뿐일까?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그나르는 혹여 술통에 제 침이 떨어질까, 입가를 훑었다.
“스읍, 일단, 그러면…….”
슬쩍 이그나르가 날 보았다.
나는 씩 웃으며 밍밍한 무알콜 헤이드룬 미드를 내밀었다. 거기에 이그나르가 술을 약간 부었다.
밋밋하기 그지없는 무알콜 헤이드룬 미드지만, 지금은 그 어떤 명주와 함께 둬도 뒤지지 않을 물건이 되었다.
이라호드가 무어라 잔소리를 하려는 찰나, 내가 술을 입에 부었다.
꿀꺽꿀꺽!
“으으으!”
이라호드가 입술을 삐죽인다.
나는 술을 몽땅 비우고 머리 위에 잔을 털어 남은 게 없음을 과시했다. 속이 아주 후끈후끈한데?
“어…….”
좀, 지나치게 후끈하다.
부르르- 전신에 힘이 넘친다.
“크어어!”
“끄으, 죽인다!”
다른 놈들도 나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는 모두가 당장이라도 힘을 쓰고 싶어 낑낑대는 모습이 되었다. 수많은 거인족 피난민을 딱 한 잔으로 배불리 먹인 술답다.
약주(藥酒).
이 약빨이 있다면?
“오디슨 약탈단, 준비하세요.”
“우오오오오!”
“꺅, 엄마야!”
우리를 부르러 온 발키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제는 우리의 승리에 물음표를 붙인 관객들을 놀라게 해 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