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129화. 두 번째 징조 (4)
하지만 손해 보고 싸울 생각은 없다.
“명예를 건 결투다!”
커다란 외침에 거인족 병사들뿐만 아니라, 피난민들도 날 쳐다보았다.
거인족은 아주 단순한 놈들이다. 때때로 음흉하고 허세를 부리기도 하지만, 명예라는 단어에 집착한다.
전사다운 종족이다.
“명예를 건 결투?”
“인간이지만 당당하군! 거인족에게 당당하게 혼자 덤비다니!”
“바우기 님! 진짜 명예를 보여 줘라!”
“명예다, 명예!”
피난민들의 환호에 바우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내가 놈을 꼬드긴다고 했던 ‘1대1 승부, 5번까지’라는 약점. 그게 지금 이 순간 사라졌다. 저런 허세 덩어리 겁쟁이의 생각은 뻔하다.
“부하들을 먼저 내보내도 좋다!”
크게 소리치자, 거인족들이 반발했다.
“거인족을 무시하는 거냐!”
“부하를 내보내 힘을 빼다니! 비겁한 짓이다!”
“거인족 전사들은 약하지 않다!”
울컥해서 소리치는 거인들.
바우기는 입술을 질끈 씹고 나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은 누구지?”
뻔한 질문에 바우기가 콧김을 뿜으며 나섰다.
* * *
바우기는 생각했다.
‘보통 놈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다. 내가 질 리가 없다.’
커다란 몽둥이. 거의 기둥처럼 보이는 무기가 저기 선 인간 놈보다 더 크다. 보통 놈이 아닌 것 같지만, 한 방에 피떡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건방진 놈!”
바우기가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그 주위로 병사들과 피난민이 둥글게 섰다. 모두가 보고 있다는 사실에 바우기의 손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였다.
‘내가 제대로 이기는 순간, ‘바보’ 바우기라는 말은 쏙 들어갈 거다!’
오딘의 꾀에 속아 집안의 보물을 내준 바우기.
그는 이 기회에 명예를 되찾을 생각을 했다. 집안의 보물은 어마어마한 신주였다. 국경 마을의 약탈품 전체를 합쳐도 비교도 되지 않는 보물.
하지만 되찾아온다는 게 중요했다.
억만장자의 황금 한 덩이보다 가난한 자의 은화 한 닢이 더 값진 법이니까. 바우기의 머릿속에는 장밋빛 미래가 선명히 떠올랐다.
‘싸운다. 이긴다. 대단하다 칭찬한다.’
바우기가 히죽 웃었다.
오디슨이 흥- 콧방귀를 뀌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거기 계속 서 있을 셈인가? 덤벼라, 거인.”
건방진 인간.
바우기는 그 생각을 함성에 담았다.
“우아아아아아아!”
고막을 터트릴 정도로 커다란 고함.
외침과 함께 바우기의 몸이 바닥을 박찼다.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꽤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쿵쿵쿵! 발소리가 크게 들렸고, 그때마다 바우기의 몸이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갔다.
거인족이 환호했다.
“죽여라아아아!”
“거인족의 힘을 보여 줘라!”
바우기가 커다란 몽둥이를 번쩍 들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들이 꾸불텅하며 움직이는 광경은 척 봐도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오디슨은 여유롭게 바라볼 뿐.
“죽어라!”
부우우우웅!
일갈과 함께 몽둥이가 허공을 갈랐다.
바우기가 흠칫 몸을 떨었다. 조금 전까지 여기 있던 놈이 어디로 갔지? 그의 생각과 동시에 몽둥이가 바닥을 때렸다.
콰아앙!
“무식하군.”
“쥐새끼 같은 놈!”
어느새 제 뒤를 잡은 오디슨에게 욕하며, 다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바닥을 때린 탓에 피어오른 먼지들이 요동쳤고, 몽둥이가 횡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오디슨은 대수롭지 않게 풀쩍 뛰었다.
“읏차!”
그가 바우기의 팔 위에 올라탔다.
바우기가 깜짝 놀랐다.
“무슨!”
“난 먼지를 별로 안 좋아한다.”
푸욱!
바우기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쑤시개로 써야 할 것처럼 보이는 검은 창이 어깨를 꿰뚫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질긴 피부는 비단처럼 찢어졌고, 단단한 근육은 두부처럼 뭉그러졌다.
콰각!
“끄아아악!”
뼈를 긁는 고통에 바우기가 비명 질렀다.
그 소리에 거인족들이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붕쾅붕! 하더니… 으아악?”
“저, 등신 같은 놈! 거인족이 인간한테 당하다니!”
피난민들이 비난했다.
바우기는 지독한 고통에 손을 휘저었다. 쇠파리에 쏘인 소가 꼬리를 맹렬히 흔드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오디슨은 그 손을 아무렇지 않게 피했다.
“약골이군.”
“끄으, 끄흐으으……! 이, 인간……! 쥐, 쥐새끼같이 도망치지 마라! 비겁한 놈!”
오디슨이 인상을 구겼다.
어이없는 논리다. 피하면 비겁하다니? 세상 어느 싸움에서도 그런 개소리가 통용되는 경우는 없다.
거인족 역시 그랬다. 싸움을 보던 거인족들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오디슨은 피식 웃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정면으로 상대해 주지. 와라!”
“흐, 흐흐흐! 힘으로 거인족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죽어라!”
방금까지 아프다고 난리 피우던 바우기가 히죽 웃으며 덤벼들었다.
거대한 몽둥이를 한 손으로 휘두르는 건 어색했다. 하지만 거인족의 힘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바우기가 눈을 빛냈다.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힘으로 거인족과 싸울 순 없다!’
바우기의 공격이 쇄도했다.
부우우웅!
굉음과 함께 내리꽂히는 몽둥이.
거인족들이 모두 감탄을 터트렸다. 바우기의 공격에? 아니, 오디슨의 담대함에 흠뻑 빠졌다.
“대단한 인간이다.”
“명예를 아는 인간이다.”
쑥덕거리는 소리는 이어지는 폭음에 묻혔다.
콰아아앙!
먼지가 피어올랐고, 바우기가 파르르 떨었다.
“어, 어떻게……?”
붕붕붕- 바우기가 들고 있던 몽둥이가 하늘을 날았다.
쿠웅! 그 커다란 몽둥이가 정말 기둥이 되어 바닥에 꽂혔다.
오디슨이 히죽 웃었다.
“신성이 늘어난 만큼, 힘도 대단해졌군.”
“시, 신성? 인간! 인간이 아니었구나! 신이다!”
오디슨이 쯧쯧- 혀를 찼다.
“또 비겁하니 어쩌니 할 셈인가? 인간이 변신술을 한다는 게 비정상이지.”
거인족은 타고나는 신성 덕에 변신의 권능을 지닌 놈들도 있지만, 그와 달리 인간은 변신술에 능하지 않다.
바우기가 입을 벙긋거렸다.
“네 술통은 내가 가지겠다.”
오디슨이 히죽 웃으며 창을 당겼다.
울룩불룩 핏줄이 솟는 광경에 바우기는 등골을 따라 흐르는 소름을 느꼈다. 바우기가 버럭 소리쳤다.
“나, 날 지켜라!”
그 외침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결투니 뭐니 해도 국경수비대의 상명하복이 우선이었다.
잔뜩 뛰어 들어오는 병사들을 보며 오디슨이 헛숨을 터트렸다.
“1대1 승부에 도움 요청이라니? 패배를 시인하는 건가?”
“아, 아니다! 1대1 다섯 번이나 5대1 한 번이나 똑같지 않나!”
바우기가 머리를 써서 말했다.
병사들은 당황했다. 적게 잡아도 수십 명이 달려왔건만, 5대 1? 병사들은 당황한 눈빛으로 바우기를 보았고, 피난민들은 싸늘한 눈빛을 했다.
“명예도 모르는 놈.”
피난민 하나가 뱉은 말이 바우기를 부끄럽게 했다.
하지만 오디슨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래, 좋다! 그렇다면, 덤벼라.”
오디슨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5대 1이든, 50대 1이든 상관없다.”
힘은 이미 확인했다.
질풍신뢰를 사용한들, 예전처럼 힘겹지 않다. 그렇다면?
“질풍.”
오디슨은 거친 바람처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에 하나를 더한다.
“신뢰.”
빠른 번개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낼 수 있는 속도.
그리고 권능을 일으켜 섞는다. 본래라면 그저 견디는 데에 그쳤을 권능이지만, 신성이 불어난 지금은 그 권능을 제 맘대로 주무를 수 있다.
오디슨은 스스로의 신명 앞에 붙은 공포를 떠올렸다.
<지옥 불 앞에서도 변치 않는 자.>
카드모스를 저지한 이라호드 덕에 얻어 낸 권능.
굳건하기 짝이 없는.
“철벽.”
권능이 발현되었다.
그 광경을 본 거인족 피난민들이 말하기를.
“질풍신뢰 금강불괴.”
다이아몬드처럼 부술 수 없는 폭풍우.
거센 바람이 불었다. 짙은 피 냄새가 평원을 가득 채웠다.
* * *
“…허.”
헛숨이 나왔다.
과하게 신성을 쓴 탓에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건만, 그 피로가 한순간에 싹 사라지는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이라호드가 씩 웃었다.
“왜요? 많아요?”
당연한 소리.
약탈한 물건은 이라호드에게 맡겨 정산했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모조리 크로나로 바뀌어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40억 크로나.”
어마어마했다.
툭 내뱉은 말에 전전긍긍하며 날 보던 놈들이 입을 쩍 벌렸다. 그 멍청한 표정도 잠시, 놈들이 우아아아아- 괴성을 내질렀다.
“두당 2억이라고?”
“미쳤다, 미쳤어! 크하하하하!”
용병놈들이 덩실덩실 춤을 췄다. 시꺼먼 사내놈들이 춤추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녀석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더러운 춤을 추지 마라!”
버럭 소리쳤다.
얻어맞은 놈들은 화를 내야 할 상황에 그저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아프네? 아파! 아픈 거 보니까 꿈이 아니구만!”
“크하하하하! 크하하하!”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이라호드가 툭 말했다.
“그거 경매 붙인 거 뺀 금액이에요.”
그 말에 이제까지 멍하던 내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환호하던 용병들도 움찔 몸을 떨고 입을 다물었다. 저놈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게 아닐까?
“어, 얼마지 그럼……? 딸꾹!”
“왜, 딸꾹! 질을 하고 딸꾹! 그래! 그러니까… 두, 두당 3억…….”
갑자기 딸꾹질하는 두 놈 탓에 모두가 긴장했다. 두당 3억이라는 말에는 그저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데굴데굴 굴릴 뿐.
우리의 반응이 의외였던가?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다 합치면 대충 60억 가까이 되는데, 갑자기 왜…….”
“…이라호드.”
“네?”
숨을 고르고 그녀에게 말했다.
“무섭다.”
남자의 자존심이니 뭐니, ‘그깟 황금 얼마나 된다고 그래!’ 하며 허세를 부리고 싶지만… 그럴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래, 무서웠다.
어마어마한 금액이 갑자기 들어오자, 정신이 없다. 그런데 거기에 더 들어온다? 오싹할 지경이었다. 소름이 돋는다.
이라호드의 표정도 굳었다.
“…이렇게 정직하게 계산해 주는 거 보면… 확실히 아스가르드에서는 책임을 전가할 셈이에요. 후우.”
이라호드가 한숨을 쉬었다.
책임 전가라. 맞다.
아스가르드가 주도적으로 전쟁을 벌이기 힘드니, 약탈 허가증 따위를 내주고 약탈한 이들 개개인이 책임지게 해 버렸다.
그게 나쁜가? 아니, 나쁘지는 않다.
그저 괜히 걱정이 들 뿐.
“흐음…….”
침음을 흘렸다.
다른 놈들도 다르지 않았다. 톨킬드를 비롯한 용병들은 갑자기 요조숙녀처럼 조용해졌고, 토르손은 파르르 떨었다. 이그나르 역시 딱딱한 얼굴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미 지은 죄를 어쩌랴.”
툭 내뱉은 말에 하나둘 동의했다.
“맞아, 벌써 털었는데, 뭐.”
“에이 씨… 걸리면 걸리는 거지! 어쩌겠어? 잡힐지도 모르니까 돈이나 펑펑 쓰자고!”
다시금 용병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나는 그 광경에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짓는 이그나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잔치를 벌이자.”
“잔치?”
고개를 끄덕였다.
“돈도 많이 번 데다, 좋은 술도 얻지 않았나?”
그 외에도 이유는 있다. 하지만 아직은 비밀이다.
여기에서 할 말은 아니니까.
특히나, 이라호드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 괜한 잔소리를 듣고픈 마음은 없었다.
“술……?”
꿀꺽, 침을 삼키며 말하는 대머리 용병.
나는 씩 웃으며 텅텅, 술통을 쳤다.
나무통 두드리는 소리 뒤에 숨은 소리.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에 모두가 입맛을 다셨다. 예사롭지 않은 술 냄새를 맡아 본바, 기대가 안 될 수가 없다.
이그나르가 씩 웃었다.
“그렇지. 잔치를 벌여야지.”
“그래, 아는 사람 몽땅 불러서 말이야.”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껄껄 웃었다.
얼마나 웃었을까? 이그나르가 웃음을 멈추며 내 어깨를 짚었다.
“근데 넌 아직 나이 안 되는 거 알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