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128화. 두 번째 징조 (3)
거인족 피난민들은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혹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길을 나섰다. 목숨이 먼저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아니, 가정이 먼저라고 생각한 덕이었다.
“칫, 그깟 약골들, 내 도끼질 한 방이면…….”
“옆집 아저씨가 그 소리 하다가 훅 갔잖아요!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아스가르드 놈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덤볐겠어요? 이길 수 있으니까 덤볐겠지!”
“그래 봐야 아스가르드 놈들인데, 이 여편네 때문에…….”
“뭐라고욧? 구시렁거리지 말고 크게 말해욧!”
거인족 여성들은 똑똑한 판단을 내렸고, 거인족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급한 피난길. 남녀 간의 시각 차이 말고도 큰 문제가 가득하다.
“으으, 엄마, 나 배고프다!”
“조금만 참아.”
“배고프고 졸립다아!”
“얘가! 지금 떼쓴다고 뭐가 되는 줄 아니!”
가장 큰 문제는 식량.
먹을 것도 없이 하루 이상 걸었더니, 아이들이 점점 칭얼대기 시작했다. 그냥 칭얼대는 수준이면 다행이다.
“으, 으으… 주, 주글 거 같다…….”
“얘! 정신 좀 차려 봐!”
거인족은 몸이 크다.
덩치 큰 걸로 유명한 동물, 코끼리는 하루에 약 150kg의 풀을 뜯는다. 그런데 거인족은? 코끼리처럼 풀만 뜯지 않기에 그렇게까지 많이 먹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과 비교하면 대여섯 배는 먹는다.
극심한 식량난이 피난민을 괴롭혔다.
“으, 으어… 안 되겠다…….”
거인족 남성들도 근성으로 버틸 수준을 넘었을 때, 피난민 행렬이 멈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톨킬드가 투덜거렸다.
“아니, 저거 이제 힘도 다 빠졌는데…….”
입맛을 쩝쩝 다시는 게 걸어가는 거인족이 적이 아니라 먹잇감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건 다른 용병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평화로운 발할라에 젖은 이그나르나 토르손은 포로라는 이름의 노예 사냥을 꺼렸지만, 저 하나하나 황금이라 생각하는 용병단은 그렇지 못했다.
“그냥 잡지? 이제 힘도 다 빠져서 쉬울 텐데…….”
톨킬드의 말에 오디슨이 쯧쯧 혀를 찼다. 톨킬드가 노골적인 무시에 울컥했다.
“아니! 이렇게 숨어서 따라갈 필요가 있냐는 거지! 안 잡을 거면 그냥 놔두고 가던가!”
“쉿!”
“에이, 뭔 말을 못 하게 해?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 받을…….”
“조용히 해라, 거인족 병사들이 왔다.”
오디슨이 톨킬드의 말을 끊었다.
톨킬드가 입을 다물었고, 다른 이들도 침을 꿀꺽 삼키고 상황을 주시했다.
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다가온 거인들은 어림잡아 봐도 500가량 되는 숫자.
토르손이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걸 어떻게 잡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토르손. 그의 말에 오디슨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척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오디슨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와 엇비슷한 놈이 다섯 정도…….”
“뭐?”
톨킬드가 흠칫 놀랐다.
오디슨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덧붙였다.
“대장은 나보다 신성이 크군.”
“…그냥 가자.”
톨킬드의 말에 오디슨이 고개를 저었다.
톨킬드는 답답한 듯 가슴팍을 탕탕 쳤다.
“어쩌자는 거야! 우리 중에는 너 하나도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왜 없어요?”
“아, 발키리 아가씨 빼고…….”
급격한 태세 전환에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사실 이라호드도 전력으로 맞붙으면 오디슨을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특히나…….
‘질풍이라고 했던가? 그걸 쓰면…….’
답이 없는 기술이다.
적어도 신성을 자유자재로 못 쓰는 이들은 질풍신뢰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지리라.
톨킬드가 따지듯 물었다.
“어쨌든, 뭘 어쩌자는 거야?”
오디슨은 대꾸하지 않고, 거인족 병사들을 살폈다.
거대한 말에 올라탄 거대한 병사들. 마을에서 만난 경비대처럼 엉성한 꼴도 아니다. 제대로 된 무기와 방어구를 갖춘 놈들이다.
거인족 병사들이 피난민을 붙잡고 뭐라 말한다.
일부가 떨어져 바로 약탈당한 마을로 향하고, 일부가 다른 행동을 한다.
그 모습을 본 오디슨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큰놈이 물었군.”
* * *
“바우기 님! 밥 나눠 줘도 모자라다!”
“안다. 우리 먹기도 부족하다. 그걸로 어떻게 다 먹이나?”
“그러면 어쩌나?”
“걱정 마라! 형한테 좋은 거 받아 왔다!”
좋은 거? 바우기라는 거인이 조심스레 말안장에 얹어 둔 통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더니 풀어냈다.
쪼로록.
한 잔을 따르자마자 짙은 주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농밀한 술 냄새에 거인족 사내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냄새만 맡아도 어마어마한 명주(名酒)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물에 타서 먹여라.”
“한 잔?”
“그거면 된다.”
“진짜?”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먹여!”
으르렁! 바우기가 윽박지르자, 병사가 화들짝 놀라 ‘때리지 마라!’ 소리치며 도망쳤다. 그 손에 달큰한 냄새를 풍기는 술잔이 꼭 쥔 채다.
“이거면 된다고? 이상하다.”
“몰라, 바우기 님이 시킨 대로 하자.”
“내가 욕먹는 것도 아니다. 바우기 님이 술 탄 물 먹이라 했다고 해라.”
“알았다. 나도 욕먹는 거 싫다.”
커다란 물통에 술을 붓고, 잘 섞었다.
시뻘건 술이 물에 섞여 투명하게 변했다. 은은한 술 냄새가 나는 물.
그 물을 한 잔씩 받은 피난민은 당연히 짜증 낼 수밖에. 아무리 봐도 그걸로 버티긴 힘든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목마른 피난민들이 물을 거절할 리가 없다.
꿀꺽꿀꺽!
덩치도 크고 입도 큰 거인족들에게는 겨우 두 모금.
크흐- 탄성을 토한 거인족 사내가 인상을 구긴다.
“밥 안 주나? 배고픈데… 어? 아니다! 배 안 고프다! 힘 난다! 우아아아!”
“어머어머! 이거 뭐예요? 정말 힘이 쑥쑥 나네!”
“엄마! 나 이제 안 아프다!”
놀라운 일이었다.
엄청난 덩치의 거인족이 겨우 물 한 잔에 펄쩍펄쩍 뛸 정도니까.
병사들은 그 놀라운 광경에 감탄을 토했다.
“이 술 뭐냐?”
“크흐흐! 우리 형 누군지 모르나? 수퉁이다, 수퉁!”
바우기라면 유명하지 않지만, 수퉁은 꽤 유명하다.
신주(神酒), 크바스(kvas).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술에 얽힌 거인이니까.
먼 옛날 신들의 전쟁이 있었다.
아스가르드 토속신인 애시르 신족과 뇨르드, 프레이, 프레이야 등이 소속되어 있는 외래신 바나 신족.
아스-반 전쟁.
그로 인해 하계가 황폐해졌고, 신계도 엉망이 되었다.
결국, 양측은 어마어마한 상처를 남기고 휴전했다.
그 휴전 협정 때에 모든 신들이 싸움을 멈춘다는 의미로 항아리 하나에 침을 뱉었다. 오딘은 모든 신들의 침에 진흙을 섞어 한 사내를 만들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크바지르. 지혜롭고 말을 잘하기로 유명한 사내였다.
그 덕에 신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정도였으나, 그 최후는 비극적이다.
음흉한 난쟁이 형제가 크바지르를 질투해 그를 잡아먹고, 지혜와 언변을 빼앗을 음모를 꾸민 것이다.
난쟁이 형제는 크바지르를 죽이고, 그 피와 꿀을 섞어 크바스를 만들었다.
그 이후 지혜로워진 난쟁이들은 좀 더 대단해지고 싶은 마음에 거인족 부부를 노려 술을 담가 먹으려 했는데……. 살해에는 성공했지만, 술을 담지는 못했다. 그 부부의 아들이 바로 수퉁이다.
그는 복수를 다짐하고 난쟁이 형제를 핍박했으나…….
‘목숨만은 살려다오! 그 대신, 크바스를 내주마!’
명주에 홀려 난쟁이들을 풀어준다.
“그런데… 수퉁은 크바스 뺏기지 않았나? 오딘한테 뺏겼다고 들었다.”
“크흐흐, 정말 술 한 통만 받은 줄 아나? 피로 담근 술이 있다면, 살로 담근 술도 있지 않겠나?”
“오오오! 똑똑하다! 대단한 술이다!”
바우기가 눈을 흘겼다.
병사가 제 술을 눈독 들인다는 생각에 황급히 자물쇠를 채웠다.
드르륵, 드르륵!
비밀번호로 여는 자물쇠를 잠근 바우기가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병사는 흠칫 놀라 물러섰다.
그때, 먼저 마을로 보낸 수색대가 돌아왔다.
“놈들은 뭐하나? 술 먹고 뻗었나? 여자 끼고?”
“그게… 이상하다.”
“으응? 뭐가 이상한가?”
“마을에 아무도 없다.”
보고를 받은 바우기가 눈을 끔뻑였다.
“…아무도 없다고? 왜? 뺏었으면 먹어야지. 왜 아무도 없나? 이상한 놈들이다.”
“함정 아닌가?”
“함정? 함정이면 어쩔 건가? 겨우 100명도 안 되는 인간이다! 함정을 아무리 쳐도 무섭지 않다! 넌 무서운가?”
“아니다! 안 무섭다!”
“흥! 겁쟁이 같은 놈들!”
바우기가 투덜댔다.
삐이이익!
커다란 소리에 놀란 바우기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거 뭐냐! 시끄러운 새다! 짜증 난다!”
“짜증 난다고?”
“어… 어어어어?”
바우기가 기겁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중얼댔다.
“새, 새가 말을 한다!”
피식 웃었다. 머리 나쁜 놈이다.
바우기라는 놈 이름이 어째 익숙하다 했더니… 크바스 이야기에 나오는 이름이다.
거인으로 변장한 오딘을 집안의 하인으로 고용한 것이 바로 저 바우기다. 집 안에 잠입한 오딘께서는 수퉁의 딸인 군로드를 달콤한 말로 꾀어 술을 몽땅 마셔 버리고, 새로 변해 달아나셨다.
수퉁이 강하다? 그래서 어쩔 텐가. 상대는 바로 그 높으신 분인데.
그 이후, 아스가르드로 돌아오신 오딘께서는 입에 머금고 있던 술을 다시 술통에 뱉고 가끔 마시셨다.
오딘께서는 때때로 인간에게 그 술을 내리실 때가 있는데… 그런 행운을 가진 이들이 바로 ‘브라기의 사람’, 즉 시인이 된다고.
“멍청한 놈.”
“뭐, 뭐라고! 내가 날 욕한다!”
“아직도 내가 새로 보이느냐? 높으신 분께 그리 당하고도?”
“뭣!”
바우기가 흠칫 몸을 떨 때, 날개를 퍼덕여 녀석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우기가 깜짝 놀라 제 무기인 커다란 몽둥이를 꺼내 휘둘렀다.
부우웅!
거대한 소리가 났지만, 내 목표는 처음부터 바우기가 아니었다.
지면에 거의 도착한 뒤, 변신을 풀었다.
“인간!”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녀석의 말안장에 놓인 술통을 가리켰다.
“네 술통이 마음에 드는군. 비밀번호 좀 알려다오.”
바우기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미친놈! 정신 차려라! 여기 있는 우리를 너 혼자 상대하겠다고!”
“허! 싫으면 네 목을 내놔라!”
바우기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까불지 마라, 인간!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으르렁대는 바우기를 보며 피식 웃었다.
바우기와 병사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날 노려보고 있지만…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바우기가 깜짝 놀랐다. 병사들 역시 그랬다.
지금 이 자리는 피난민 행렬의 가장 앞쪽. 그리고 함성이 들려오는 쪽은 피난민 행렬의 뒤편.
이놈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인간! 비겁하다! 인질을 잡다니!”
비겁? 이 정도는 전략의 기본이다.
괜히 피난민을 풀어 준 줄 아나? 쓸 수 있는 건 다 쓰는 게 좋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비겁하다니, 내 제안 하나 하지.”
“술은 못 준다!”
쯧쯧, 이 상황에서 제 술통을 껴안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이런 놈을 대장 삼아 따라온 병사들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
“그래, 1대 1이라면, 다섯 번까지 받아주지. 하지만 네가 패배했을 때에는 술통을 내놓고 얌전히 물러나라. 내가 패배한다면?”
씩 웃으며 내기를 걸었다.
“나 역시 얌전히 물러나 주지. 그것도 약탈한 것을 다 두고.”
바우기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을 살폈다.
비겁하니 뭐니 하더니, 유리한 상황을 포기하긴 싫은 모양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싫다면 뭐… 내 부하들이 피난민을 덮치겠지.”
“으, 으으으……!”
바우기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녀석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뻔하다.
살살 긁어 볼까?
“너희 쪽은 다섯 번의 기회가 있고, 나는 한 번인데 무섭나? 응?”
“으, 으음……!”
이래도 안 넘어와?
어지간히 겁쟁이군! 과장된 몸짓이나 행동들이 죄다 겁쟁이인 걸 숨기기 위한 짓이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이런 놈을 화나게 하는 건…….
“네 형, 수퉁이라면 물러서지 않았을 텐데.”
“크으! 알았다! 결투다!”
바우기의 눈이 돌아갔다. 그와 함께 내 입꼬리가 씰룩였다.
형이 누군지 아느냐고 으스댈 때부터 알아봤다. 이 녀석, 형을 동경하면서도 열등감을 느낀다.
어쨌거나, 늘어난 신성을 제대로 써 볼 기회가 왔다.
그것도 큰 보상이 달린 기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