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두 번째 징조 (2)
“…괜찮을까?”
망설이는 목소리. 내가 한소리 하려고 했지만, 이그나르가 더 빨랐다.
“걱정할 게 뭐 있냐! 이럴 때 한탕 해야지, 안 그래? 엉?”
“하지만 형님…….”
“쯧쯧, 이 자식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이렇게 습격을 계획했겠냐?”
툭툭, 이그나르가 날 치며 토르손을 달랬다.
그 말에 용병, 할랴헤랴르 놈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톨킬드가 대표로 말했다.
“오디슨이라면, 아무런 계획이 없을 수도 있지 않나?”
그 말에 토르손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그나르가 흠칫 몸을 떨었다. 다른 용병들도 쑥덕쑥덕 귓속말하며 낄낄댔다.
퍽!
“억! 뭐야!”
눈에 익은 대머리 용병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녀석이 눈을 부라리기에 흥- 콧방귀를 뀌었다.
“날 못 믿나?”
“아니, 근데 왜 날 때리냐고!”
“네가 제일 치기 좋다.”
“뭐?”
대머리가 울컥해 뭐라 소리치려 했지만, 다른 용병들은 내게 동의하며 낄낄댔다.
“저 새끼 머리가 동그래서 치면 찰싹! 하는 게 손맛 좋지.”
“그건 그래.”
“이 새끼들, 대머리를 놀리지 마라!”
“왜 갑자기 저 새끼를 옹호하는 것인지? 혹시, 너…….”
“아니야! 내가 투구를 안 벗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니야!”
대머리가 부들부들 떨며 제 동료들을 쏘아보았다.
아무래도 내게 따지기보다는 동료들에게 느끼는 배신감이 더 큰 모양이었다. 대머리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이 개자식들이……!”
대머리가 한바탕 개싸움을 벌이려는 찰나,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제까지 난잡한 분위기가 거짓말이라는 듯,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그만, 이제 거인 왕국에 거의 다 닿았다. 진지하게 해라!”
토르손과 이그나르, 그리고 할랴헤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각기 무기를 꺼내 들고 싸움 전 긴장을 끌어올렸다. 대머리가 ‘왜 나한테만 그래!’ 하고 투덜댔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리고 저쪽 거인족 마을을 바라보았다.
니플헤임과 무스펠헤임. 냉기와 열기가 만나는 국경은 언제나 안개가 그득하다. 그렇기에 저 거인족 국경 마을은 아직도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이 정도로 저 마을을 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라호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작은 목소리였다. 아마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속삭이는 것이리라.
나는 나의 발키리에게 씩 웃어 보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저쯤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이라호드가 걱정하는 부분도 알고 있다.
우리 ‘약탈단’의 숫자는 고작 20명을 좀 넘는 수준. 그에 비해 저쪽 거인족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경비대는 100명을 넘는다.
대충 살펴도 5배의 병력 차이. 보통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이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가 뭔지 까먹은 건 아니겠지?”
“…약탈요?”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 명이 사는 마을을 고작 50명의 마적 떼가 털어먹기도 한다. 그걸 생각하면 우리의 숫자는 그리 중요치 않다.
싸움꾼과 보통 사람은 그 정도로 차이가 있다.
우리는 목숨 걸고 털어먹으려는 약탈꾼이다. 제 재산과 목숨을 지키려는 빈틈 하나 못 찌를까?
“아예 군단이었다면, 더 쉬운 일이었겠지만…….”
“그건 무리죠. 이 약탈도 오딘께서 나름 신경 쓰신 결과인걸요.”
그런가.
확실히 그렇다.
연맹이니 뭐니 하는 겁쟁이 집단에서 정해 둔 법률을 어기고 움직이는 짓이다. 그걸 어기기 위해 약간의 꼼수를 부렸다.
[약탈단 허가증.]
아스가르드가 전쟁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약탈 허가증을 내어 주는 식이다. 연맹에서 전쟁이 어쩌니 뭐니 하면, 전쟁이 아니라고 발뺌할 수 있을 수준은 된다고.
티르는 각개격파를 우려했지만, 나는 오딘을 지지한다.
“식량과 황금, 미녀가 걸린 탐욕을 자극하기엔 이만한 게 없지.”
탐욕스러운 인간은 상식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제 몫을 많이 챙기려 아등바등 애쓰는 것이다. 히죽 웃을 때, 이라호드가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윽!”
깜짝 놀라 풀쩍 뛰었다.
이라호드가 사나운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뭐, 뭐지?”
“미녀?”
툭 내뱉는 단어가 어두운 동굴 속 늑대의 숨소리처럼 오싹하다.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황급히 약탈단을 불렀다. 이라호드도 부하들 앞에서 날 타박할 수는 없으리라. 그녀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약탈단에게 외쳤다.
“싸울 준비 됐나!”
쿵쿵! 약탈단이 발을 구르며 눈을 빛냈다.
탐욕스러운 눈빛이 마음에 든다. 나는 히죽 웃으며 창을 내밀었다.
그 창이 가리키는 곳은 거인족 마을.
“한바탕 해 보자!”
모두가 히죽 웃는다.
치열한 싸움과 귀를 찢는 비명, 그리고 뜨거운 불꽃과 후끈한 피가 아른거린다. 그로 인해 얻게 될 황금은 그저 따라올 뿐.
전사의 심장이 쿵쾅거린다.
“내 뒤를 따르라!”
거인족 정벌의 첫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 뒤를 와아아아아- 커다란 고함이 뒤따랐다.
옛 생각이 나는군.
* * *
“사냥했다! 큰 사슴!”
“이거 사슴 아니다! 못 먹는 거! 안 산다!”
“왜 안 사나! 사라!”
“안 산다!”
거인족 마을은 언제나처럼 시끌벅적했다.
국경이니 뭐니 하지만, 사실상 짙은 안개에 가려져 불안감은 없는 곳이다. 거인족 자체가 딱히 그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도 아니다.
대부분의 거인족은 싸움을 꺼리지 않는다. 오히려 싸움이 벌어지길 바라는 이들도 좀 있다.
“전쟁 안 하나?”
“전쟁은 무슨! 여보, 전쟁 타령하지 말고 가서 돈 벌어 와요, 돈! 애들 교육비로 나가는 거 생각하면, 이제 정말 통장이 텅 비어서 텅장이에요, 텅장!”
“너 시끄럽다.”
“아이고!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거인족 여자들은 이런 거인족의 투쟁심과 관련 없었다. 거인족은 대부분 3미터가 넘는 거구지만, 거인족 여자들은 170~180센티미터 정도의 키. 게다가 빼어난 미녀였다.
예로부터 뭇 신들이 거인족 미녀를 애첩으로 두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거인족 미녀들은 아름답고 똑똑하다.
거인족의 특성이다. 남자는 힘, 여자는 지혜.
애매한 평화 속에서 신들과 거인족은 뒤섞여 살았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었다.
“빨리 우리 왕이 아스가르드를 정복했으면 좋겠다!”
“맞다! 그러면 나도 전쟁에 나간다!”
거인족 꼬마들마저도 전쟁을 그리워했다.
이대로 있으면 말라 죽는다는 걸 그 어떤 거인족도 알고 있었다. 그중 신들에게 적대감이 덜한 이들은 로키스 패밀리로 달려갔다.
가장 위대한 신의 의형제인 거인, 로키.
그 애매한 위치만큼, 그들은 이득을 얻었다. 아스가르드와 거인 왕국, 양쪽 모두에 장사했다. 그들은 거인족을 발할라 투기장으로 보내 주는 일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발할라의 인기 없는 투사들이 거인족 미녀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도 했다.
<거인족 미녀와 결혼하세요!>
[재혼, 초혼 가리지 않습니다!]
[참가비, 700만 크로나(거인족 아가씨들과 단체 미팅의 참가비이며, 결혼 성공 확률과 무관한 비용입니다.)]
수많은 거인족 아가씨들이 화려한 발할라의 생활을 꿈꿨다.
무식하고 힘만 센 거인족보다는 차라리 좀 약하더라도 말은 통하는 에인헤랴르를 선호했다.
거인족의 그 이중성.
그게 문제가 됐다.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조리 무찔러라!”
커다란 고함 소리에 뒤따르는 것은 우렁찬 함성.
약탈의 시작이었다.
“싸움이야? 나도 끼어야 한다!”
“싸움! 싸움! 싸움이다!”
거인족 남성들이 모조리 무기를 챙겨 들고 나섰다. 하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거인족 남성은 덩치가 너무 컸다. 3미터가 훌쩍 넘는 건 예사요, 좀 크다 싶으면 4미터에 달하는 덩치.
소수 정예의 약탈단은 그들을 농락했다.
“오우야! 이게 다 얼마야?”
“시끄럽고 얼른 챙겨!”
상점을 털어 댔다. 상점 운영하는 거인족들이 싸움이랍시고 무기 하나 들고 나간 탓에 오히려 더 쉬웠다.
별동대로 편성된 다섯 사람, 가장 날쌘 이들이 그들의 금고를 탈탈 털어 버렸다.
“막아라! 막아!”
“으어어어! 너무 세다!”
게다가 본대는 거인족이 무수히 덤벼도 막을 수 없는 이가 둘이나 있었다. 보통의 거인족보다 훨씬 강한 이들.
“너 마음에 든다!”
“헛소리! 난 나보다 약한 남자는 질색이거든요!”
“내가 더 세다! 내 몽둥이맛을 봐라! 어억!”
이라호드는 특유의 날렵한 창술로 거인족을 농락했다.
“흥! 성희롱이라니!”
그녀의 미모에 혹해 덤벼들던 거인족이 모조리 쓰러졌다.
그리고 오디슨은…….
“거인족이라더니, 겨우 이거냐!”
“으, 으어어어!”
홀로 거인족 수십을 압도했다.
그 광경을 보며 톨킬드가 혀를 내둘렀다.
“엄청나게 세졌잖아?”
“어이, 용병단장 나리. 시간 없어, 가자고!”
“그건 그렇지……. 자! 모두 쐐기 진형이다! 거인족을 뚫는다! 소란을 피워!”
톨킬드가 본대의 지휘를 맡았다.
오디슨의 룬스톤 구절, ‘무리 사냥’ 덕에 용병단과 토르손, 이그나르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왼쪽! 오른쪽! 왼쪽!”
“이번은 오른쪽이다?”
“왼쪽!”
“으아악! 비겁한 놈들……!”
거인족은 하나 되어 움직이는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가정을 꾸린 거인족들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아내가 집으로 오라 한다.”
“어… 내 아들 학원 시간 다 됐다!”
싸우려는 이들과 피하려는 이들이 뒤엉켰다.
하나 되어 움직이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차이였다. 거인족 경비들은 100명에 달하는 훈련된 인원이었지만, 그 점이 문제였다.
“2조! 놈들을 막는다!”
“어… 조장? 기다려야 하지 않나?”
“시간 없다! 막는다!”
10명의 거인족 경비가 한 개의 조로 편성되어 있었다.
10조가 한 번에 덤빈다면 모를까, 한 조씩 덤빈다면?
“한 조?”
“겨우 경비대 한 조각이다!”
한 조각은 오히려 경비대 전체가 각개격파 당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경비대가 빠르게 줄었다. 100명이 90명으로, 90명이 80명으로.
그리고 겨우 3조만이 살아남았을 때, 경비대장은 결심했다.
“피해라! 피해! 전멸은 안 된다!”
“대장, 겁쟁인가?”
“시끄럽다! 피해랏!”
거인족 국경 마을은 오디슨의 약탈단을 이겨 낼 힘을 잃었다.
어마어마한 거인족이 피난길에 올랐다.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거인족 여성이 그에 앞장섰고, 거인족 남성들이 투덜대며 뒤따랐다. 그리고 그들을 얼마 남지 않은 경비대가 호위했다.
대승이었다.
“우아아아아아! 진짜 이겼어! 이겼다고!”
“크으으으! 이게 다 얼마야?! 흐흐흐흐흐!”
용병들이 소리를 질렀다.
톨킬드 역시 흥분된 듯 시뻘건 얼굴로 오디슨에게 다가왔다.
“오디슨! 얼른 쫓자! 거인족 미녀라면 노예상에 팔아넘길 수 있다고!”
하지만 오디슨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아니, 지금까지 잡은 거인족 여성들도 풀어 줘라.”
“뭐? 어째서? 설마…….”
톨킬드의 눈이 싸늘한 표정을 짓는 이라호드에게 박혔다. 저 발키리가 두려워 아직까지 포로로 잡은 거인족 여성을 건드린 이는 없었다.
톨킬드가 오디슨에게 속닥거렸다.
“발키리한테 꽉 잡혀 사는구만?”
오디슨이 피식 웃었다.
“멍청한 자식. 가끔은 더 큰 걸 위해 작은 걸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흐음, 저 발키리라면야, 뭐…….”
“쯧쯧.”
쾅!
오디슨이 톨킬드의 머리통을 때렸다.
톨킬드가 비명을 내질렀다. 오디슨이 말하는 작은 것은 거인족 여성이 아니었고, 그가 말하는 큰 것은 이라호드가 아니었다.
오디슨은 아직도 싸움이 고팠다.
“낚시를 위해서는 떡밥을 풀어야지.”
오디슨의 눈이 피난 행렬로 향했다.
저 떡밥은 대물의 눈이 돌아가게 하는 매력적인 미끼다.
오디슨은 목적을 잊어 먹지 않았다.
‘약탈이 목적이 아니다. 이건 그저 수단일 뿐.’
그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