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124화 (124/208)

# 124

124화. 첫 번째 징조 (2)

“말도 안 되는 짓이야!”

고운 미성이 찢어질 듯 울렸다.

보듬어 주고 싶은 목소리였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목소리의 주인을 탐탁지 못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아프로디테가 버럭 화를 냈다.

“제우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고모의 말을 무시하고 설치다니!”

아프로디테의 말에 제우스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아프로디테는 의기양양하게 소리 질렀다.

“내가 어? 너 어릴 때 기저귀도 갈아 주고, 어! 이유식도 먹여 주고, 어! 업어도 주고, 어? 다 했어, 다 했다고!”

후우- 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신들의 왕으로서 위엄을 해치는 발언.

제우스는 마른세수하고 아프로디테를 똑바로 보았다.

“아프로디테, 아니, 고모. 내 똑바로 말하겠소. 그런 일은 없소. 나는 님프들의 보살핌을 받았고, 염소의 젖을 먹고 자랐으니까.”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는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고, 신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극상이었다. 그리고 하극상을 벌인 크로노스는 그 누구보다 아들들을 경계했다.

언제라도 아들들이 왕좌를 가지고자 하극상을 벌일 수 있노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하데스를 삼키고, 포세이돈을 삼켰다. 그 이후 태어난 제우스를 크로노스의 아내이자 제우스의 어머니인 레아가 돌덩이와 바꿔치기해 숨어 살았다.

우라노스의 잘린 성기가 바다에 떨어져 태어난 아프로디테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제우스는 싸늘한 눈으로 아프로디테를 노려보았다.

아프로디테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어디 고모가 말하는 또박또박 말대꾸야!”

아프로디테는 기죽지 않고 오히려 덤벼들었다. 제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머리를 좀 식히시오. 디케, 아프로디테를 가둬라.”

제우스가 딱-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딸 중 하나인 정의의 여신 디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우스와 테미스 사이에서 난 세 자매, 호라이는 제우스를 도와 올림포스의 치안을 담당하는 이들이었다.

제우스가 하늘이라면, 호라이는 그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이들.

천륜에서 정의가 나오기에 디케는 망설이지 않았다.

“야!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신왕께서 스스로의 권리로 만드신 법도요. 아프로디테, 그대가 주신 중 하나라 할지라도, 신왕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소.”

“야! 야야! 이게 무슨… 이놈들! 오디슨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기만 해 봐! 내가…….”

쿵-

회의실 문이 닫히고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로디테가 원칙을 비튼 것에 반발할 것은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그 상태가 예상을 뛰어넘는 정도라는 게 예상외였지만.

뭇 신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당혹감을 떨쳐낼 때, 데메테르는 비웃음을 흘렸다.

“남자에 미친년.”

툭 뱉은 말이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데메테르가 제우스를 힐끔 보았다. 지친 듯한 얼굴이지만, 언제나처럼 위엄이 가득했다.

데메테르는 혀로 입술을 적시며 제안했다.

“어쩔 거야?”

짧은 말이지만, 모두가 제우스를 주목했다.

제우스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야만 왕국을 더 강하게 조인다.”

데메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망할 곳인데,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내린 기근을 거뒀다고 해도, 그 피해를 덮진 못해. 절반 정도가 그냥 날아갔으니까.”

1할가량이 굶어 죽으리라.

왕국의 1할이라는 인구는 우습게 볼 게 아니다. 못 사는 나라라면 흉작이 들었을 때 그 정도 피해는 입을 수 있다. 하지만 방금 점령한 곳이다.

폭력과 공포로 지배하는 곳에 굶주림이 찾아간다면 어찌 될까?

데메테르는 그에 대해 잘 알았다.

‘도망치겠지. 야만인 밑에서 굶으면서 살고 싶어 하는 이는 없을 테니.’

데메테르가 히죽 웃었다.

아무리 단단하게 방비한다 하더라도 막아 낼 수는 없다. 굶어 죽는 이들이 나올 테고, 도망자가 우후죽순처럼 생기리라. 아사하는 이는 전체의 1할. 하지만 도망자까지 합치면?

야만 왕국 인구의 2~3할이 증발할 것이다. 그리되면 이제 악순환이다. 건강한 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빈곤과 병마가 설치는 땅이 된다.

그러면 당장의 기근을 견디더라도, 성장은 없다.

추락만이 가득할 뿐.

“신성을 소모할 필요도 없겠는데?”

“그런가?”

“그야 당연하지! 한번 확인해 봐. 벌써 야만 왕국에서 도망치는 놈들이 수두룩할걸?”

죽음을 피해 달아나는 자들은 신을 두려워한다. 신을 두려워하면 더 큰 신앙을 가질 수밖에.

괜히 온갖 신계에서 무서운 지옥을 만들어 두는 게 아니다.

공포만큼 빠르게 신앙을 모을 수 있는 건 없다.

회의실에 있는 신들 모두가 그걸 알았다.

아테나가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했다. 데메테르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올해 농사는 망했고, 비축해 둔 식량은 썩었지. 아주 볼 만할걸?”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아테나만 굳은 얼굴이었다.

데메테르가 입술을 삐죽였다.

“성장세가 둔해서 그래? 곧 회복될 거라니까. 도망치는 놈들이 많을수록 주변에 있는 놈들도 우리를 무서워하겠지.”

“그게…….”

아테나가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데메테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답답하긴! 이거 봐! 이 성장세를! 그러니까 어디 보자… 어?”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오드피(ODPI)를 확인한 데메테르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생각한 성장세는 대략 5%.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마이너스 12%?”

하락세가 되었다.

데메테르는 당황하여 관련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알아냈다. 데메테르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고,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하다니!”

다른 신들도 상황을 확인하고 침음을 흘렸다.

데메테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그녀의 얼굴을 빨간색으로 칠했고, 데메테르는 그런 모욕을 견딜 여자가 아니었다.

“박살 내 주겠어!”

데메테르가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제우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데메테르의 이탈?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아폴론, 아르테미스.”

제우스가 쌍둥이 남매를 불렀다.

먼저 아폴론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아폴론, 그들에게 태양을 빼앗아라.”

아폴론은 그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지나치다. 빛과 소금은 인간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빛은 특히나 그랬다. 소금은 먹거리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빛이 빼앗긴 이들은 미쳐 버릴 터.

아폴론은 이 순간, 예언했다.

‘깜깜한 곳에서 비명과 울음이 가득하리라.’

제우스는 정말로 야만 왕국을 지워 버릴 셈이었다.

아폴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디슨과 그는 거래했다. 거래지만, 그 덕에 구사일생한 사업이다. 호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올림포스 소속, 거절할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아폴론의 대답에 제우스는 아르테미스에게 명했다.

“아르테미스, 데메테르를 도와라.”

“네, 아버지.”

야만 왕국의 올겨울은 신들의 자존심을 건 싸움판이 되었다.

태양이 사라진 겨울은 지독한 추위를 선사할 것이며, 농사와 사냥을 빼앗긴 사람들은 모조리 굶어 죽을 것이다.

올림포스는 배신자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 * *

“자요, 먹어요.”

이라호드가 식탁에 빵과 달걀, 치즈와 베이컨을 내주었다.

이런 자잘한 것들보다 그냥 고기 한 덩어리가 더 끌리지만, 아침 식사를 마련해 준 그녀에게 괜한 소리를 할 필요는 없으리라.

우걱우걱,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그 님프는 어제도 여기서 자고 갔어요?”

툭 뱉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꿀꺽- 음식을 삼키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크레네가 신경 쓰이나?”

“신경은 무슨! 그냥…….”

이라호드가 입술을 우물댔다.

이 수줍은 발키리를 골려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삐칠 게 분명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수자원 어쩌고 하는 시험을 봐야 한다더군. 그래서 최근에는 자주 못 봤다.”

“그래요? 그거 좀 어렵다더니, 고생하나 보네요.”

갑자기 부드러워진 말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시계를 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라드게리타는 잘하고 있으려나?”

툭 뱉은 말에 이라호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이면 자고 있겠죠.”

“그런가?”

“네, 그런데… 왜 거절한 거예요? 싸움의 법칙 말이에요. PD는 그 라드게리타 양이랑 오디슨이 같이 나와 줬으면 하는 거 같던데. 돈도 많이 준댔잖아요. 돈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돈 필요하다.

부족민을 구하려면 엄청난 금액이 있어야 하니까. 지금 모아 둔 자금이 꽤 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뻔한 거 아닌가?”

내 말에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싸움의 법칙이라는 그… 어쨌든 그건, 투사들이 나와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것이지. 거짓말이 대부분인 데다가 기초 중의 기초를 대단한 것인 양 포장하기도 하지만.”

“그런데요?”

“예전에야 별 상관 없었지. 하지만 앞으로 나와 싸울 상대들은 모두 보통이 아니다. 내 손에 들어온 패를 다 보여 주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그렇기에 거절했다.

라드게리타에 대한 이야기를 묻길래, 대뜸 그 녀석을 소개해 주고 나는 빠졌다. 이게 잘돼서 라드게리타가 TV에 꾸준히 나오는 것도 좋을 텐데.

약간 불안하기도 하다. 라드게리타가 잘할 수 있을까?

식사 속도가 떨어졌다.

“…음, 그건 그런데……. 오디슨도 그냥 적당히 대충 노하우를 가르쳐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건 거짓말이지.”

빵을 씹고 말을 이었다.

“거짓말은 명예롭지 못해.”

“…뭐, 오디슨답다면 오디슨답네요.”

이라호드가 픽 웃었다.

당연한 일이건만,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너무 많다.

남은 음식을 입에 욱여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럼 이제 대충 씻고 훈련이나 하러 가 볼까?

의자에서 일어나는 찰나, 이라호드가 입을 열었다.

“근데, 오디슨.”

“음?”

“오늘은 황금사과 안 들고 다니네요? 황금사과 받고 난 이후로 계속 챙기더니… 이제 좀 안심되나 봐요?”

안심? 아니, 보물을 지닌 이는 안심할 수 없다.

하지만 안심이 되느냐 아니냐 묻는다면 안심된다.

씩 웃으며 말했다.

“황금사과가 없으니까, 안심이 안 될 수가 없지.”

“…네? 그게 왜 없어요?”

왜 그런 걸 묻지?

나는 눈을 끔뻑이고 굉장히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

“썼으니 없지.”

이라호드가 입을 쩍 벌렸다.

“머, 먹었다고요?”

“아니, 썼다.”

“그게 무슨…….”

어깨를 으쓱였다.

“시그뉘가 힘든 것 같아서, 그쪽에 좀 뿌렸지.”

“…그걸 뿌려요? 그게 얼마짜린데……!”

비싸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날 믿는 사람들이 그 사과 수천 개보다 더 비싸다. 그리고… 죄다 뿌린 것도 아니지.”

절반은 먹었다.

그 절반이 얼마나 강할지는 시험해 봐야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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