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화. 첫 번째 징조 (1)
그 겨울의 이름은 핌불베르트(Fimbulvetr).
세 번의 여름날, 해가 깜빡인다.
세 번의 겨울에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찾아오는 지독한 겨울, 그 겨울의 이름은 핌불베르트.
여름 없이 이어지는 삼 년 동안, 눈이 살을 벨 것이오. 얼음이 그 몸을 찢을 것이오. 배고픔만이 가득하리라.
고작 첫 번째 징조.
그 겨울의 이름은 핌불베르트.
* * *
세력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어찌나 잘 끝났는지, 두둑한 승리 수당이 나왔다. 무려 1억 크로나에 가까운 금액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와요?”
이라호드가 입술을 삐죽이며 타박했다.
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일 따름.
“뭐가 문제지?”
“그야…….”
이라호드가 입을 우물거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니, 발할라에 무슨 일이 있어 방문했다는 헬도 좀 시큰둥한 표정이다.
눈을 끔뻑였다.
“헬, 뭐가 문제지?”
“그… 크흠! 아무래도 미의 여신이라는 것들이 설쳐서 그렇지.”
헬이 살짝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비너스와 프레이야에 관한 이야긴가? 마침 틀어 둔 TV에서 그 소리가 나오고 있긴 하다.
[이번 세력전의 볼거리는 단순히 뛰어난 투사들의 싸움에 그치지 않았죠? 사실 싸움이 끝나고 난 뒤에 더 재밌었다는 의견도 있을 정돕니다. 다시 한 번 보시죠.]
아프로디테가 달려와 내 입술을 훔치는 광경. 프레이야와 아프로디테가 으르렁대는 모습. 그리고 오딘께서 중재하는 것까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별 신경 안 쓰는데.”
툭 내뱉은 말에 헬과 이라호드가 슬쩍 눈을 흘겼다.
움찔 몸을 떨고 변명을 보탰다.
“아니, 미의 여신이 어쩌니 저쩌니 해도, 결국 내 마음을 흔들지는 못하니까.”
후우- 한숨이 터져 나왔다.
크레네가 쓴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오디슨이 저 여신들한테 휘둘리는 게 걱정은 아니에요.”
“음? 그래?”
아까까지는 두 여신이 문제라더니?
이상하다는 듯 헬을 보자, 헬이 훽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꽤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데 계속 이렇게 눈을 피하다니. 약간 서운하다. 입술을 삐죽이자니, 크레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라드게리타 때문이에요.”
“라드게리타 말인가?”
내가 되물을 때, TV에서 내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를 제외하면, 라드게리타가 첫 입맞춤 상대겠군.]
틀린 말은 아니다.
고개를 주억이며 그 추억을 되새겼다.
“10년 전이던가. 라드게리타와 소꿉장난을 할 때 일이지. 나는 전사장이었고, 라드게리타는 볼바에 내 아내 역할이었으니.”
“…10년 전?”
이라호드가 눈살을 구겼다.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보다 더 된 이야기던가? 잘 모르겠군.”
그러자 후우- 하고 한숨이 나왔다.
아까와 달리 뭔가 안도하는 느낌의 한숨.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설마, 나와 라드게리타가 남녀 관계인 줄 알았나?”
내 질문에 세 여자가 모두 딴청을 피웠다.
헬을 수행하기 위해 온 강글로트만이 킥킥 웃었다. 그마저도 헬이 살짝 노려보니 사라졌지만.
이라호드가 말을 돌렸다.
“그런데, 황금사과는 언제 먹을 거예요? 오디슨이라면 받은 자리에서 당장 씹어먹을 줄 알았더니.”
“황금사과가 보통 사과도 아니고, 그럴 수는 없지.”
헬이 이라호드의 말을 끊었다.
이라호드는 황금사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지 눈을 끔뻑일 뿐.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신성 덩어리더군. 그거.”
찬란한 신성이 가득한 덩어리.
그 안에 서린 신성이 내 신성보다 크다 보니, 무리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귀한 신성을 반 이상 흘려 버릴 걸 알면서도 한입에 씹어 삼킬 수 없지 않은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반으로 쪼개 먹은 뒤에 한참 있다 다시 먹던가, 아니면 내가 더 성장하고 난 뒤에 먹어야 탈이 없을 거 같더군.”
“음. 맞아. 하지만 반으로 쪼개면 바로 신성 유출이 시작되니까, 좀 더 힘을 키운 뒤에 먹는 게 좋지.”
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 묵힐 생각은 없었다.
“어쩐 일인지는 몰라도, 요즘 내 신성이 무럭무럭 자라더군.”
아마 세력전에서 활약한 덕인가 싶다.
하고 말하며 씩 웃었더니, 눈이 마주친 헬이 흠칫 떨었다.
볼이 붉어진 게 왜 저러나 싶었다.
“헬?”
헬의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아 슬쩍 이라호드를 보았더니, 이라호드 역시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강글로트가 킥킥 웃었다.
“오디슨 님께서 요즘 너무 잘생겨지셔서, 여왕님이 부끄러우신가 봐요.”
“어, 크흠! 그, 그런가?”
내가 생각해도 요즘 얼굴이 살짝 바뀐 거 같긴 한데……. 정말 그런가? 어째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가, 강글로트! 무슨 헛소리를……!”
헬이 버럭 소리쳤다.
그럼에도 강글로트는 입술을 삐죽이며 사실이잖아요~ 할 따름.
언제 봐도 사이 좋은 군신지간이다.
“그런데… 오늘 자고 갈 텐가?”
헬에게 묻자, 헬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녀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띵- 동- 하는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할 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디슨 님! 저 싸움의 법칙 PD입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 * *
“그렇게 아쉬우세요?”
헬이 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강글로트가 물었다.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헬이 흠칫 몸을 굳혔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에이, 저도 여자예요.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만난 님이랑 좀 더 있고 싶은 건 당연한 거죠.”
“그건… 후우.”
헬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발할라에서 지내는 이라호드나 크레네와 달리, 헬은 니플헤임에서 지내니까.
하지만 차마 당당하게 ‘오늘은 양보해!’ 하고 말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마침표를 찍은 게 방송국 PD의 등장이었다. 특종 잡았다 싶은 표정을 보자, 헬은 당장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그래도 발할라에 일이 있다고 거짓말까지 했는데……. 후.’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자, 강글로트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래도, 오디슨 님께서 최대한 빨리 니플헤임에 오신다 하셨잖아요. 이번에 번 돈으로 부족민을 데리고 갈 겸 해서요.”
“…오디슨한테 스마트폰이라도 사 주는 건데.”
툭 내뱉은 말에 강글로트가 킥킥 웃었다.
아파트에서 모닥불을 피운 사람한테 스마트폰이라니. 여전히 TV가 마법 물품인 줄 아는 사람이다.
헬 역시 제가 한 말이 이상하다 싶었는지 풋- 하고 웃었다. 강글로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오디슨 님께서 오시면, 같이 목욕이라도 하시는 건 어때요?”
“…같이?”
“네, 부부 금실에 꽤 좋답니다.”
“으으음, 고, 고민해 보지.”
볼을 붉히며 말하는 헬.
강글로트는 다음번 오디슨 방문 때에 혼욕이 이뤄질 거라는 걸 알아챘다.
‘정말 귀여우시다니까!’
살아온 햇수가 몇 년인데, 이렇게 귀엽단 말인가.
강글로트는 이 평온한 일상이 계속 이어졌으면 싶었다. 헬이 지배자가 아닌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 바람은 엘류드니르에 닿자마자 박살 났다.
“손님?”
강글로트가 경비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방문자가 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헬을 그리로 안내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헬은 강글로트의 안내에 응접실로 향했고,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펜리르?”
언제나처럼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씩 웃으며 헬을 반겼다.
헬의 얼굴이 니플헤임의 지배자답게 위엄을 품었다.
“…무슨 일이지? 이렇게 직접 찾아왔단 건, 전화로는 못 할 이야기가 있단 건데…….”
“쯧, 동생이 찾아왔으면 밥은 먹었냐~ 하고 반기지는 못할망정.”
“펜리르.”
딱 자르는 말에 펜리르도 더는 히죽거리지 않았다.
그저 얼굴이나 보자는 식이었다면, 전화로 미리 알렸으리라.
펜리르가 답지 않게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디슨이 발견한 구멍.”
툭 뱉은 이야기에 헬이 눈살을 구겼다.
“…그게 어디로 이어지는지 찾은 건가?”
펜리르가 고개를 저었다.
헬이 눈살을 구겼다.
“그럼?”
“…그게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지만… 그 시작점은 우리가 탐색할 수 없는 영역에 있어.”
“…설마.”
헬의 얼굴이 굳었다.
펜리르가 후우-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스펠헤임.”
그곳은 니플헤임과 딱 붙은 땅이다. 그리고…….
“거인족이 얽혀 있다.”
아스가르드의 영원한 적인 거인족의 왕국이 자리한 곳이었다.
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찌꺼기의 탈출이 아니라고 기뻐한다?
아니다. 심증이 있던 무스펠헤임과 찌꺼기의 연합.
그 심증이 단단하게 굳었다.
적들이 뭉쳤다.
* * *
노른들이 노래했다.
“굳건한 사슬이 흔들린다. 끌끌!”
처음은 언제나 과거를 담당하는 장녀, 울드의 몫이었다.
과거가 없이는 현재도, 미래도 없으니까.
그 노래를 현재, 베르단디가 이어받았다.
“그 사슬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네, 호호.”
“히히, 사슬의 끝에 매달린 것은 짐승.”
마지막으로 노래한 것은 미래, 스쿨드.
세 자매가 한목소리로 합창한다.
“멸망을 불러올 짐승.”
익숙한 노래다.
미래를 예언하는 노래가 익숙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적어도 오딘에게 있어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딘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써 그때가 왔는가.”
세계수의 가지가 휘청거리고, 세계수 가장 위에 앉은 이름 없는 수리가 언제나처럼 오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감시하는 듯한 눈빛.
가장 높으신 분을 감히 감시하고 있음에도 오딘은 그저 입을 다물 뿐.
그의 회색 눈동자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첫 번째 징조가 시작될 예언이로다.”
멸망의 징조.
하지만 그 자체가 멸망이 될 수도 있는 끔찍한 징조다.
오딘은 자신이 지쳤다는 걸 알아챘다.
“…몇 번이나 더 반복할 수 있을까.”
툭 뱉은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노른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딘은 혼자였다. 어깨에 놓인 짐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이번 회차의 열쇠를 찾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오디슨. 그의 침대 옆 협탁에서 번쩍이는 황금사과를 본 오딘이 고개를 저었다.
“관여할 수는 없겠지.”
이것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관여보다는 재시작이 더 나으리라.
오딘은 묵묵히 왕좌에 앉아 어두운 하늘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결정은 네가 하는 것이다, 오디슨.”
자신이 한 말에 오딘이 쓰게 웃었다.
덧붙일 말이 있으나, 그 말을 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나 되새겨 봐야 했다.
오래된 상처가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그 고통을 이기고, 오딘이 읊조렸다.
“그리고 결정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책임에서 도망친 자가 입에 담기엔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 시각, 오디슨은 꿈을 꾸고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시그니료드가 기도를 올리는 꿈이었다. 그는 땀을 흘리며 끙끙 앓았다.
잠에서 깨어난 오디슨은 망설이지 않았다.
오딘이 그 모습에 감탄했다.
“…결정에 걸리는 시간도 없군.”
자신도 가지고 있던 과감한 태도.
회귀가 반복되며 사라진 그 성격이 오디슨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로 인해 일어날 문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딘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폭풍우로 뛰어들길 주저하지 않는구나. 저것이 젊음이겠지.”
오딘은 회귀하기 전, 자신을 떠올렸다.
무모하고 멍청한 결정을 연이어 내리면서도 자신만만하던 그때.
그때가 그리웠다.
노인은 추억에 잠겨 한참이나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