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화. 신이 보우하사 (1)
장내 방송이 시끄럽게 떠든다.
[항복한 선수를 공격하다니! 오디슨 선수, 그건 아니죠! 규정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입니다! 정말이지 실망스러운…….]
[아뇨, 아뇨! 저건 규정 위반이 아니에요!]
[네? 규정 위반이 아니라뇨?]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해설자가 감탄하며 내 행동을 설명했다.
[오디슨 선수, 정말 영리합니다! 영리해요!]
[해설위원?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투기장 규칙이 그렇습니다. 룰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설명에 귀 기울였다.
투기장 규정 중 항복에 관한 규정.
항복한 적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그게 답니다. 그러니까… 아군인 오디슨 선수는 항복한 토르발드 선수라고 해도 공격이 가능한 상황인 거죠.]
[…이건, 허점 아닙니까?]
[허점이지만, 오디슨 선수가 처벌받을 상황은 아니죠. 새로 규정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소급 적용을 해서 오디슨 선수를 처벌할 수는 없는 법이거든요? 그러면 항복한 전사가 아군 공격에 휩쓸려 다친 모든 상황에 적용해야 하니…….]
허, 참. 대단한 양반이다.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공격한 건데, 저걸 저렇게 해석하다니.
해설자의 설명에 관중들이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안 그런 것처럼 하면서 엄청 두뇌파라니까.”
“신이 멍청하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꺅! 오디슨 님!”
“어, 음… 대장이 그럴 것까지 생각할 리가 없는데…….”
“아니, 근데 벌써 발할라가 불리해졌잖아! 이대로면 세스룸니르 그 뺀질거리는 놈들한테 진다고!”
관중들이 웅성이는 소리를 듣자니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시기와 토르발드를 끝장낸 게 후회되는 게 아니다. 괜한 오해가 부끄러웠다. 하계에서는 무식하다고 욕먹던 난데…….
머리를 긁적였다.
블린디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보았다.
“대단하십니다, 오디슨 님! 저런 세세한 규정까지 파악하시고 움직이시다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차마 오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 초롱초롱한 눈빛에 어찌 실망을 끼얹을까? 크흠- 헛기침을 해, 부끄러움을 숨겼다.
말을 돌렸다.
“이제 혼자군.”
제국 쪽과 혼혈인지, 제국 냄새가 나는 외모를 지닌 티우소스.
녀석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티우소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시기는 내 습격에 일격사했고, 토르발드는 워낙 빠른지라 차마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됐다.
그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리라.
“그, 오디슨 님?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닥쳐라! 비열한 놈아! 오디슨 님, 제가 저놈을 닥치게 하겠습니다!”
블린디르가 허락 받는 것처럼 하면서, 달려 나갔다. 한 손에는 망치를, 다른 한 손에는 방패를 든 그녀는 티우소스에게 무작정 무기를 휘둘렀다.
“큭! 이 미친년이…….”
“죗값을 치러라!”
캉캉캉!
망치가 날아들 때 티우소스는 양손 검을 휘둘러 막았다. 하지만 한 손에 쥐는 무기와 달리 묵직한 양손 검은 행동에 제약이 컸다.
밀리는 와중에 티우소스가 버럭 소리쳤다.
“벌써 5대 3이오! 그런데 우리끼리 더 싸우자고? 이기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인가!”
어이없는 소리다.
블린디르가 듣기에도 그러했는지, 그녀가 울컥해 외쳤다.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흐앗!”
부웅!
블린디르의 망치가 티우소스의 머리를 노렸다. 티우소스는 황급히 그 망치를 막아 냈다.
블린디르가 눈을 반짝였다.
“하아앗!”
“큭! 이년이……!”
쾅!
블린디르가 방패를 앞세우고 들이박았다.
그리고 휘청이는 티우소스에게 선고했다.
“죽어라, 어리석은 놈아!”
[블린디르 선수! 방패의 이점을 잘 살린 공격이었습니다!]
[아주 노련하죠? 방패를 방어 이상으로 사용하는 데다, 아주 공격적인 플레이! 저게 바로 ‘죽어도 죽이는’ 블린디르입니다!]
티우소스의 몸에 서린 티르의 신성이 번뜩였다.
티르의 축복? 눈살을 구기고 입을 열었다.
“블린디르! 조심해라!”
내 외침이 무색하게 블린디르는 전력을 다해 망치를 휘둘렀다.
티우소스의 앞에 커다란 책이 하나 튀어나왔다.
“<법 앞의 평등>!”
콰앙!
방패처럼 펼쳐진 책이 블린디르의 망치를 막았고, 티우소스가 비틀거렸다. 하지만 더 큰 피해를 본 것은 블린디르였다.
“꺄아아악!”
블린디르가 비명 지르며 뒤로 튕겨 나왔다.
티우소스가 쯧- 혀를 찼다.
“거, 그만합시다. 발할라의 승리가 우선 아니겠소?”
티우소스의 거만한 소리.
해설이 그 뒤를 따라 크게 울렸다.
[<법 앞의 평등>! 충격을 받되, 상대에게도 같은 충격을 주는 축복입니다! 일회성 축복인 데다, 충격을 반사하는 것도 아닌지라 인기는 별로 없죠.]
[하지만 티우소스 선수는 저걸 아주 잘 구사하죠?]
[예. 귀공자처럼 생긴 외모지만, 사실 N100 최고의 맷집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세흐림니르 도축 사업을 부업으로 하는 만큼, 회복력 또한 상당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쓰러진 블린디르 곁으로 다가갔다. 퇴장할 정도의 충격은 아니겠지만, 아무런 대비 없이 얻어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블린디르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떨궜다.
“죄, 죄송합니다. 오디슨 님… 제가 방심해서…….”
아니, 죄송할 건 없다.
나는 그녀에게 웃어 보이고,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말거라. 저런 놈은 금방이니.”
“오디슨 님…….”
블린디르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티우소스를 바라봤다.
녀석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가소롭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그건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더 무서운 녀석이라면 차마 물지 못하리라.
창을 꺼내 들자, 티우소스가 식은땀을 흘렸다.
“빌어먹을… 무식한 새끼…….”
겁에 질린 게 빤히 보인다.
창을 쥐고,
푸욱!
“커억……!”
“으음?”
눈을 끔벅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티우소스의 어깨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아앗! 그러고 보면 이미 경기가 시작한 상황입니다!]
[세스룸니르 팀, 발할라 팀의 내분을 이용하나요!]
우우우우-!
야유가 들려온다. 화살이 날아온 쪽은 티우소스 너머. 다섯 명이 히죽 웃고 있었다.
알프가 셋, 그리고 인간이 둘.
과연, 세스룸니르 쪽은 알프가 많은가.
“경기 시작한 지 한참이나 됐는데, 이쪽만 재미 보고 있었잖아?”
“멍청한 놈들, 우리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군!”
볼을 긁적였다.
딱히 무시할 생각은 없었지만… 세스룸니르 쪽에서는 무시당한다 여기는 게 당연할지도.
어깨를 으쓱이자니, 티우소스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허! 화났나 봐?”
“개 같은 자식들!”
버럭 소리친 티우소스가 휙 몸을 돌려 양손 검을 쥐고 달렸다.
충분히 위력적인 화살이건만, 티우소스를 끝장내기엔 부족했던 모양이다. 부위도, 그 공격력도 부족했다.
“비실비실한 알프 놈들! 목을 꺾어 주마!”
“허! 개소리도 수준급이군! 사격 준비!”
척척척, 알프 셋이 동시에 활시위를 당겼다.
티우소스는 저 화살에 대고 축복을 쓸 셈인가?
“쏴라!”
핑핑핑!
화살이 시위를 떠나 허공을 가로질렀다.
“흥!”
티우소스가 양손 검을 휘둘러 화살 셋을 모조리 격추했다.
그 화려한 검술에 관중들이 와아아아아! 하고 환호했다. 하지만 세스룸니르의 알프들은 모두 비릿하게 웃을 뿐.
“자유 사격!”
“벌집으로 만들어 주마!”
핑핑핑핑!
알프들이 제대로 화살을 쏘기 시작하자, 티우소스의 검술로도 모두 막을 수 없었다. 저걸 어찌 막겠는가?
1초에 세 개씩 날아드는 화살.
티우소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궁술에 정통한 알프들이네요!]
[발할라 투기장에서는 화살이나 볼트 같은 투사체가 개수 제한이 있죠? 하지만 세스룸니르에서는 없습니다! 이번 세력전은 발할라와 세스룸니르가 섞인 룰을 채택한 만큼…….]
해설의 말에 흠- 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이라호드가 규칙이 섞였니 뭐니 하며 종이 하나를 건넨 것도 같은데… 수련하느라 읽어 보지 않았다.
퍽퍽!
“크윽!”
화살을 잘 튕겨 내던 티우소스지만, 놓치는 게 한둘씩 있었다.
게다가 그 화살이 하필이면 티우소스의 무릎에 맞았다. 그가 신음과 함께 무릎 꿇었다.
알프 하나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끝장내라!”
그 외침과 동시에 핑핑핑! 다시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끝났군. 그렇게 생각할 때, 티우소스에게 있던 티르의 신성이 번쩍였다.
“흠, 일부러 빈틈을 보인 건가?”
무릎에 맞은 화살도 사실 별로 치명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티우소스가 히죽 웃었다.
“걸렸군! <법 앞의 평등>!”
블린디르가 당했던 책이 튀어나온다.
아마도 법전이리라.
펄럭!
두꺼운 법전이 펼쳐지고, 화살을 튕겨 낼 준비가 끝났다.
[오오오! 맷집을 믿는다 이겁니다!]
[똑같이 당하면 누가 이기나 해 보자! 화끈한 작전이네요!]
와아아아아!
관중들이 환호했다. 블린디르 역시 허- 하고 헛숨을 터트렸다.
“…비열한 놈이긴 해도, ‘공평한’ 티우소스는 역시… N100의 최상위권에 오를 만한 놈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예, 적을 무조건 무시하는 건 바보짓이니까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저 알프들은 그걸 모를까?”
“네?”
블린디르가 눈을 끔뻑였다.
곧이어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짐이 곧 국가니라>!”
불쾌한 신성의 빛이 느껴졌다.
프레이의 신성. 왕권을 내리는 신, 프레이다.
쨍그랑!
“뭐……?”
푹푹푹푹!
와아아아아아아!
“…저럴 수가.”
블린디르가 파르르 떨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티우소스가 축복을 사용했을 때, 이제까지 사격을 명령하던 알프의 웃음이 한결 진해졌었다.
저런 수를 숨기고 있었기에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겠지.
[어……!]
[프레이의 축복! <짐이 곧 국가니라>입니다! 카운터! 티우소스의 완벽한 카운터예요!]
[허… 그게 어떤 축복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크흠. <짐이 곧 국가니라>는 일시적으로 대상의 모든 축복과 방어를 무시하는 축복입니다. 절대 권력이죠.]
놀라운 능력이다.
티우소스가 가진 뛰어난 방어력과 회복력을 무시하고 화살 여럿을 박았으니, 뭐. 결과는 뻔하다.
“제, 젠장…….”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티우소스가 풀썩 쓰러졌다. 바늘을 꽂아 저주를 내리는 인형 같은 몰골이었다.
으아아아! 하는 안타까운 목소리와 와아아아! 하는 함성이 엇갈렸다.
블린디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런 축복이 있다니… 시판하는 축복이 아닌데…….”
저걸 어찌 깨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할 거 없다. 저건 쉽게 깰 수 있으니.”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꾸하지 않고, 그저 걸었다.
저벅저벅,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탄식과 함성이 사그라들었다.
[5 대 2! 아니, 블린디르 선수가 함께 가지 않습니다! 사실상 5 대 1입니다! 오디슨 선수, 자신 있다 이겁니까?!]
[오디슨 선수를 표정을 보세요! 아주 평화롭거든요? 자신 있다는 거예요!]
[아니, 대체 어떻게요? 무수히 쏟아지는 화살을 다 막아 낼 축복을 가진 티우소스 선수도 벌집이 됐잖습니까?!]
[저도 모르죠.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졌다. 내 발치에는 죽어 버린 티우소스의 시체가 당황과 놀람,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쓰러져 있었다.
알프 놈이 으스대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만한 놈. 알프헤임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이들의 복수를 하겠다!”
으드득, 분노를 끌어올리는 알프들.
커다란 방패와 긴 창을 든 인간 전사 둘은 슬그머니 방패를 들고 알프들의 앞을 가렸다.
인간 전사들이 방어하고, 알프들이 뒤에서 활을 쏜다?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전쟁이었다면 궁수가 아군을 사격할까 두려워 못 쓸 방식이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날 화살로 잡겠다고?”
“하하하! 쏟아지는 화살 비를 어쩌겠느냐? 네놈이 쌓아 온 맷집과 회복력도 프레이 님의 축복 앞에서는 무용지물! 죽을 준비나 해라!”
알프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관중 모두가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프가 소리쳤다.
“쏴라! 힘을 아끼지 마! <짐이 곧 국가니라>!”
“<부서지는 햇살>!”
“<굽이치는 파도>!”
축복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알프들뿐만 아니다.
앞에서 방어를 준비하던 이들도 축복을 읊조렸다.
“<눈부신 미모>!”
“<기사도>!”
핑핑핑!
화살들이 허공을 난다. 저 하나하나가 내 몸을 부술 수 있는 <짐이 곧 국가니라>가 적용된 것들이다. 그리고 화살이 분열했다. 마치 햇살이 냇가에서 부서지듯. 마지막으로 화살들의 잔상이 실체를 가졌다.
헛웃음이 나온다. 고작 세 사람의 알프가 쏘아 낸 화살이 정말, 소나기에 가까운 숫자가 되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화려한 축복들 탓일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장내 방송이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 마치 달리는 말발굽 소리처럼 빠르고 정신없는 해설이 쏟아지듯 사방팔방으로 튀어 댔다.
[많아요많아오디슨어떻게할겁니까!]
두두두두- 쏟아지는 말 중에 제대로 알아먹을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나는 ‘검은 번개’를 익히며 ‘광검’ 료나디를 뛰어넘는 속도를 가졌다.
그런데도 손오공을 단 한 번도 공격하지 못했지.
‘신뢰(迅雷)는 어느 정도 괜찮게 익혔지만, 아직 질풍(疾風)이 부족하다.’
손오공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무슨 개소린가 싶었지만, 토르발드와 싸우며 느낀 점이 있었다.
토르발드는 나보다 빨랐지만, 거친 바람처럼 종잡을 수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질풍신뢰.”
들었고, 겪었으며, 깨우쳤다.
그렇다면 못 쓸 이유가 어딨는가?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 * *
올림포스.
아스가르드에서 열리는 발할라와 세스룸니르의 세력전은 이곳에서도 큰 화제였다. 어지간한 이들은 모두 집이나 술집 등에서 세력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올림포스의 행정을 맡은 아테나는 놀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찡그려진다.
“…흐음. 이건 이상하구나.”
아레스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제국이 아레스가 강림한 석상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다. 그 덕에 숱한 이들이 올림포스를 두려워하고, 올림포스 신들에게 자비를 바라며 기도하고 제사 올렸다.
당연히 신성이 치솟았다.
그런데, 지금 상승세가 약간 주춤했다.
“한참이나 더 올라야 정상이건만… 왜 이러는지…….”
아테나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그녀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최근 제국 땅의 문제는 여럿 있었다. 황자들이 제각기 정통성을 주장하며 전쟁을 벌이는 일. 그리고…….
“야만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