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119화. 신의 이름으로 (3)
[어, 어, 음… 이게, 그러니까…….]
[자, 작전을 짜던 중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이건…….]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려 애쓰는 장내 방송이었지만, 관중들은 여전히 넋을 잃은 채였다.
“흠, 전사는 언제라도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되는 법.”
가장 무서운 것은 강한 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칼이다. 그 진리를 잊을 정도로 느슨한 정신머리라니.
쯧- 혀를 찬 오디슨이 시기의 시체에서 창을 뽑았다.
“오디슨 님… 아무리 그래도 시기를… 저자는 오딘의 아들입니다!”
블린디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말에 오디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 말 하나만 믿고 다들 이놈의 눈치를 봤겠지. 하지만 시기는 생전에 이미 죄를 지어 절연당했다. 그 덕에 신성을 타고났음에도 신성이 박탈당했지.”
오딘의 아들임에도 심장이 꿰뚫렸다고 죽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오디슨은 씩 웃으며 말했다.
“오딘께서 이를 신경이나 쓰실 거 같나?”
“어, 그게, 그러니까…….”
블린디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블린디르를 제외한 이들은 이미 상황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이 미친 새끼!”
“감히 오딘의 아들이신 시기 님을……!”
토르발드와 티우소스가 얼굴을 벌겋게 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토르발드는 제 무기인 커다란 도끼까지 뽑아 들었다.
“개 같은 놈!”
버럭 소리치며 달려드는 토르발드.
오디슨은 그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블린디르가 흠칫 놀라 경고했다.
“오디슨 님! 시기와 토르발드는 다릅니다! 순간 공격력만을 따지자면 토르발드가 시기보다 훨씬 더…….”
“내가 겨우 저따위 놈에게 질 것 같나?”
“네? 아니, 그게…….”
오디슨이 고개를 저으며 창을 고쳐 쥐었다.
“봐라, 내가 저 하찮은 놈들을 얼마나 봐줬는지.”
“개소리!”
토르발드가 축복을 발동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토르발드의 몸이 사라진다. 그 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장내 방송이 쩌렁쩌렁 울렸다.
[어어어! 지금 같은 편끼리 싸울 때가 아니거든요!]
[토르발드의 <천둥소리>! 그리고…….]
파지직!
사라진 토르발드가 튀어나온 곳은 오디슨의 등 뒤가 아니었다.
“꺄아아악! 오디슨 님!”
“위, 위, 위!”
오디슨의 머리 위, 불쑥 튀어나온 토르발드는 번개를 휘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커다란 도끼에서는 스파크가 튀었고, 얼굴에는 비릿한 웃음이 가득했다.
“죽어라!”
투기장이 들끓었다.
[어어어어어!]
[<벼락의 힘>! <벼락의 힘>이에요!]
<천둥소리>를 쓰는 와중에도 분명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하지만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천둥소리>이기에 <벼락의 힘>이 가진 위력을 깎아 먹는다.
토르발드는 노련한 투사였다.
‘<벼락의 힘>은 단순히 번개의 힘만을 더하는 공격이 아니다! 떨어지는 속도와 힘을 극대화해 주는 축복! 끝이다!’
히죽, 토르발드가 웃었다.
그의 눈에는 오디슨의 정수리가 훤히 보였다.
콰아아앙!
굉음이 터졌다.
* * *
하계의 전쟁에서 누릅나무 부족은 승리를 거듭했다.
그 덕에 본래 부족의 고토를 수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제국의 도시까지도 집어삼킬 수 있었다.
옛 제국 외곽의 행정청. 예전에는 황제의 명을 받은 행정관이 머무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북(北)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의 정통성이 저들에게 있다고 소리치는 놈들의 소굴이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해, 행정관! 아니, 폐하!”
“무슨 일이냐!”
“서, 서둘러 도망치셔야… 커억!”
서둘러 달려왔던 사내의 관자놀이에 날아온 도끼가 박혔다.
옛 제국의 행정관이었던 제3황자는 그 광경에 으드득- 이를 갈았다.
우르르, 부족 전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버럭 소리 질렀다.
“야만인!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황제의 핏줄답게 담대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전사들은 이 도시에서 자행된 노예 학살을 보고 왔다. 이제껏 잡혀갔던 동족들이 죽어 널브러진 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저 새끼가 이쪽 먹고 있던 새끼냐?”
“개 같은 새끼……!”
부족 전사들이 분노를 터트렸다.
누릅나무 부족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자, 내통할 동족들을 모조리 죽인 놈이다. 부족 전사들은 이 도시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고얀 것들! 나는 제국의 핏줄을 이은…….”
퍼억!
“커, 커억…….”
주먹질에 3황자의 이가 후두둑 튀었다. 3황자는 생전 처음 느끼는 폭력에 정신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야, 패!”
“끄, 끄으… 이 빌어먹을… 컥! 커억!”
퍽퍽퍽!
황자의 몸이 무너졌다. 그가 새우처럼 웅크렸다. 하지만 부족 전사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마구 그를 짓밟았다.
위엄을 보이려던 황자는 엉엉 울었다.
“으어, 으어어어! 아, 아파! 아프다고!”
“개 같은 새끼! 황제의 핏줄? 지랄하고 있네!”
퍽퍽퍽!
황자는 공포에 질렸다. 간단한 고문도 못 참는다고 근성 없다 비웃었던 기억이 문득 스쳤다. 그러자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황자를 밟아 대던 부족 전사가 기겁했다.
“뭐야! 이 새끼! 지렸어!”
“으어, 으어엉……!”
수치심과 고통, 그리고 공포에 황자가 실금했다.
전사들이 쯧쯧 혀를 찼다.
“쓰레기 같은 자식.”
“이까짓 놈이 제국의 가장 높은 놈이라고? 어이가 없군.”
부족 전사들은 황자와 티격태격하는 것 자체가 치욕스럽다 생각했다. 명예를 더러운 오물에 내던지는 꼴이다.
전사단 대장이 말했다.
“일단 데리고 나가자.”
황자는 만신창이가 된 채 끌려 나갔다.
광장에는 황자와 비슷한 꼴이 된 귀족들이 수두룩했다. 도시에 있던 시민들은 그 모습에 벌벌 떨었다.
“귀, 귀족을…….”
“야만인들이 우리를 다 죽일 거야…….”
모든 시민을 광장에 몰아넣고, 흉흉한 기세를 뿜는 군대로 포위한 형국이다. 공포가 없을 수 없었다.
귀족 하나가 버럭 소리쳤다.
“야만스러운 놈들! 귀족 예우도 없더냐!”
그 말에 부족 전사들이 비웃음을 흘렸다.
귀족? 부족에도 그와 비슷한 것이 있기야 하다. 대대로 전사나 주술사 가문이었다면,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약간이나마 대우해 주는 풍습이다. 하지만 그건 귀족제가 아니었다.
그 대상이 나중에 뛰어난 자가 될 거라 믿기 때문이었다.
만일 나중에 그가 존경받는 이가 되지 못한다면? 그런 대우는 없다.
“어이가 없군.”
“전사의 명예도, 주술사의 지식도 없는 것들이……!”
부족 전사들이 으르렁거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법한 태도에 시민들이 더욱 움츠렸다. 기가 약한 몇몇은 공포에 질려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였다.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귀족들을 묶어 둔 단상에 여자 하나가 올라갔을 때 분위기가 바뀌었다.
“조- 용!”
전사들은 모두 그녀에게 존경을 보냈고, 시민들은 상황을 읽고 침묵했다. 끅끅-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약하게 깔렸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제국 귀족들만이 헛소리를 뱉어 댔다.
“허! 여자에게 겁먹는 꼴이라니!”
“저런 여자가 이끄는 야만족한테 우리 군이 패배했다고? 비열한 마녀임이 틀림없다!”
꽥꽥 소리를 질러 대는 귀족들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다.
시그니료드가 싸늘한 눈길을 보내자 오히려 기가 더 살아 꽥꽥 소리질렀다. 추잡스러운 소리에 시그니료드가 눈살을 구겼다.
“내가 이제까지 품은 야만족 년들이 몇인지 아느냐? 응? 네년도… 끄아아아아악!”
퍼억!
그의 어깨에 도끼가 박혔다.
전사 하나가 으르렁대며 그에게 말했다.
“닥쳐라, 돼지 같은 놈.”
“끄어어어, 끄어어어!”
“말로 해서는 안 듣는군.”
퍼억!
그의 다리가 잘려 나갔다.
비명을 꽥 지른 뚱뚱한 귀족은 그대로 실신했다.
시그니료드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누릅나무 부족장, 시그니료드다. 우리는 이겼고, 너희는 졌다. 그리고 우리는 분노했다.”
시그니료드가 잘근잘근 씹듯 말을 뱉었다.
고요한 광장에 시그니료드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어슬렁거렸다.
“우리 동족들을 모조리 죽여, 그 시체를 쌓아 뒀지? 그 죗값을 치를 때다.”
시그니료드의 말에 귀족들 뒤에 서 있던 전사들이 모두 무기를 치켜들었다. 숨소리조차 사그라든 광장.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제3황자가 덜덜 떨며 말했다.
“자, 자비를 베푸시오…….”
황족답지 않게 치욕스러운 목숨 구걸이었다.
그는 묶은 상태에서 바닥에 엎드리며 살려 달라 빌었다.
그 광경을 본 시그니료드가 단어를 곱씹었다.
“…자비.”
시그니료드가 눈을 꾹 감았다.
자비. 좋은 말이다. 시그니료드의 머릿속에 폭풍이 몰아쳤다.
결정해야 할 때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야 하나? 그들의 목숨을 내 명령으로 끊어야 하는 건가……? 그 죄업은…….’
시그니료드가 한숨을 내쉬고, 결심을 내뱉었다.
“…자비를 베푸마.”
3황자가 눈을 크게 떴다.
광장에 있는 시민들도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그니료드의 말이 이어졌다.
“자비롭게, 그들에게 안식을 내려라.”
“뭐?”
3황자가 되물을 때, 부족 전사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를 이끄시는 자비로운 신의 이름으로!”
귀족들의 목이 모조리 떨어졌다.
하지만 시그니료드는 오디슨이 아니었다. 그녀는 차마 시민들까지 모조리 죽일 수가 없었다.
‘…미안해, 오빠. 난 아직…….’
시그니료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판도라가 그녀를 위로했다.
“잘했어.”
“…정말 잘한 걸까?”
“응, 시그니는 최선을 다했잖아. 오디슨 님께서도 기꺼워하실 거야.”
“그러면 좋겠는데.”
시그니료드는 왕관의 무게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오빠.’
시그니료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 * *
한편, 도망친 시민들이 소문을 퍼트렸다.
공포의 마왕.
“엄마아! 나 배고파아! 엉엉엉!”
“떽! 자꾸 그러면 붉은 마왕이 잡아간다!”
“힉!”
악명이 두터워졌다.
그런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야만족, 아니… 덴마크 왕국에서는 오직 귀족들만 죽인다는군.”
“뭐? 귀족을 섬겼다고 시민들을 다 죽이는 게 아니라?”
“그 뭐냐… 오디슨이라는 그네들의 신이 자비를 베풀라 했다던가?”
“…빌어먹을, 마르스께서는 아무리 빌어도 돕지 않건만…….”
오디슨을 믿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건, 오디슨의 힘이 세진다는 의미였다.
* * *
쾅쾅쾅!
굉음이 연달아 터졌다.
“대, 대단해!”
블린디르가 감탄했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씩 웃었다.
그와 동시에 피투성이가 된 토르발드가 꽥 소리질렀다.
“젠장하아아알!”
콰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리고, <벼락의 힘>이 번개줄기를 펑펑 뿜어 댔다.
하지만 그저 축복을 등에 업고 날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맷집은 괜찮지만, 그래도 약하군.”
푸욱!
“컥!”
토르발드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그 얼굴에 불신이 가득 차올랐다.
“약하다며…….”
거의 떼쓰듯 하는 말에 난 웃었다.
“신들과 비교하자면 약한 거지.”
신성도 얻지 못한 주제에 어디서 설치는 거지?
토르발드는 몸에 구멍이 숭숭 난 주제에 포기하진 않았다.
나쁘지 않다.
“헛소리만 안 했으면 말이야.”
“커억!”
창을 뽑자, 토르발드가 무릎을 꿇었다.
흘린 피의 양을 생각하자면 제대로 못 서는 게 당연했다.
토르발드가 나를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어, 어어… 하, 항복! 항복이야!”
토르발드가 꽥 소리쳤다.
[아! 토르발드 선수, 항복합니다!]
[오디슨, 대단합니다! 확실히 신성이 있고 없고가 차이가 크죠?]
[네! 신성이 이렇게까지 차이나니… 어? 잠깐, 오디슨 선수! 뭐 하는 겁니까!]
창을 치켜들었다. 방송이 뭐라 소리치며 날 말렸고, 토르발드가 덜덜 떨었다. 그놈이 어버버- 바보같이 외쳤다.
“항복! 항복이라고! 항복한 투사를 공격하면 너도…….”
어이가 없어 헛숨을 흘렸다.
“멍청한 자식. 너와 난 한편이다.”
“어… 어어?”
“항복은 적한테나 해라.”
콰드득!
창 자루가 녀석의 머리를 으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