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118화. 신의 이름으로 (2)
“전 관중석에서 볼게요, 이따 봐요.”
이라호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투기장으로 들어오면서 본 어마어마한 인파가 내지르는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개중에는 내 욕도 있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기고, 내가 죽인 적군의 가족들이 내뱉는 저주를 얼마나 들었던가? 그 딱딱하게 굳은 저주의 피딱지를 떼어 내기엔 발할라의 욕설은 너무 간지럽다.
이라호드가 사라지고, 여자 하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입가를 붉은 천으로 가린 여자는 내 앞에 무릎 꿇으며 예를 갖췄다.
“’제국 파괴자’ 오디슨 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말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만일 그때 마르스가 제정신이었다면? 만일 그때 마르스가 직접 강림했더라면? 결코 이뤄 낼 수 없는 위업이었으리라.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번에 같은 편이 될 투사인가?”
“예! ‘죽어도 죽이는’ 블린디르라고 합니다.”
죽어도 죽이는?
섬뜩한 별명이다. 그런 별명이 왜 붙었지?
눈살을 좁히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몸을 움찔했다.
“이 복면은…….”
아무래도 내가 복면 쓴 것을 트집 잡을 거라 생각한 모양. 나는 쓰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복면을 썼다고 모두 수상한 자는 아니다. 복면 바로 위로 살짝 보이는 흔적을 생각하면, 이 여자의 복면을 벗길 생각은 없다.
아마, 하계에 있을 때 제국의 고문을 받은 모양이었다.
제국 귀족이라는 놈들을 욕하면 내리는 고문의 일종이 떠올랐다. 입술을 비롯해 아래턱까지 가죽을 벗기는 고문이다.
“헬이 축복을 내렸군.”
눈살을 좁힌 건 그녀에게 서린 헬의 신성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내 말에 블린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죽어도 죽인다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그녀도 내가 받은 것과 같은 축복을 받았으리라.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이번 경기, 잘해 보자고.”
“오디슨 님만 믿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블린디르가 내 손을 잡으며 감격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째, 부끄러워 커흠- 헛기침을 뱉었다. 블린디르는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허리춤에 걸린 한 손 망치를 보고, 말을 이어 보려는 순간-
“야, 저거 들었냐? 썩은 사과같이 생긴 년이 꼬리 치는 꼴 봐라.”
“큭큭, 어디 믿을 새끼가 없어서 저런 양아치 새끼를…….”
대놓고 날 욕하는 말에 이를 악물었다.
블린디르 역시 그랬는지, 홱 뒤로 돌아 망치를 쥐었다.
“뭐라고 했지?”
“어이쿠, 겨우 5위 주제에 덤비냐? 응?”
이죽거리는 사내는 붉은 머리를 한 덩치였다.
블린디르가 이를 갈았다.
“토르발드, 네놈이 토르의 축복을 받았다 해도……!”
“허! 느려터진 년이…….”
토르의 축복을 받아?
미약하게 느껴지는 신성은 확실히 토르의 것이었다. 저런 놈이 어떻게? 생각했지만, 순간 축복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른시다 역시 토르의 축복인 <천둥소리>를 사지 않았던가.
토르발드와 블린디르가 으르렁댈 때, 언뜻 제국 놈들을 닮은 외모를 가진 사내가 끼어들었다.
“이봐, 토르발드. 공평하지 못하다.”
“뭐? 티우소스, 그게 무슨 소리지?”
“저년이 네 상대가 될 리 없단 소리지.”
“크하하하! 그것도 그렇군!”
토르발드가 껄껄 웃었고, 블린디르가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달려들 것 같아, 어깨를 잡아 말렸다.
블린디르가 나를 보고 억울하다는 눈빛을 했다.
나는 싸늘한 눈으로 두 놈을 바라보았다.
“토르와 티르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들이 겨우 이까짓 놈들이라고?”
내 말에 토르발드가 웃음을 멈췄고, 티우소스가 눈살을 구겼다.
토르발드가 이를 드러내며 인상을 구겼다.
“얼굴만 뺀질해서 연줄 타고 올라간 놈이…….”
“너처럼 얼굴도 못생긴 게 아니라 다행 아닌가?”
“뭐라고?”
으득-!
토르발드가 이를 악물며 튀어나오려 했다.
덤빈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 등에 매 둔 창을 슬쩍 잡으며 씩 웃었다.
“증명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네놈이 덤벼라. 아니, 네놈들이 덤벼라. 증명될 테니까.”
히죽 웃으며 말하자, 토르발드가 쾅!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티우소스가 당황했다.
“토르발드!”
야른시다를 통해 익숙해진 <천둥소리>다.
야른시다가 그 비싼 <천둥소리>를 가지고도 U500에 머물던 것은 단순한 일이었다. 놈은 공격력이 약했다.
하지만 N100의 토르발드가 과연 그럴까? 그렇기에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지만, 그 대처는 야른시다 때와 다를 바 없었다.
퍼억!
“커억……!”
창 자루 끝을 다가올 곳으로 들이대는 가벼운 몸짓.
그것만으로도 토르발드는 저 스스로 달려와 공격당했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혼자 뛰고 넘어지고, 아주 바쁘군?”
“이 개자식이……!”
토르발드가 울컥해 설치고, 티우소스라는 제국 놈과 닮은 녀석이 눈살을 구겼다. 두 녀석이 당장이라도 덤빌 것 같았다.
나는 히죽 웃으며 창을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 헤쳤다.
그러면서도 블린디르에게 말했다.
“먼저 시작한 것은 분명, 저놈들이다.”
“네? 그게 무슨……? 아! 예! 물론입니다!”
블린디르가 어리둥절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쪼잔한 짓이다. 하지만 제국 멸망과 헬 납치 사건 때에 친 사고에 죄를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민원 해결이니 봉사활동이니 뭐니, 아주 귀찮으니까.
녀석들을 보며 말했다.
“뭐 해? 안 덤비나? 먼저 덤벼 놓고 가만히 있으면 뭐가 될 거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장이라도 두 녀석을 박살 낼 셈이었다.
그 말에 토르발드와 티우소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
이 싸움 직전의 팽팽한 공기가 내 입꼬리를 밀어 올린다.
티우소스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토르발드의 몸에 서린 토르의 신성이 뭉친다.
축복의 발현인가? 히죽 웃으며 창을 휘두르려는 찰나.
“그만!”
웅장한 목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메웠다.
움찔한 티우소스와 토르발드가 기세를 죽였다.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구석에서 무게 잡고 있던 놈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가운데로 다가왔다. 녀석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티우소스, 토르발드.”
“넷!”
허, 저게 뭐지? 그저 한마디 한 걸로 저렇게 떤다고?
어이가 없어 눈을 꿈뻑일 때, 블린디르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시기(Sigi)예요.”
시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고민하고 있자니, 시기가 입을 열었다.
“나는 ‘선조’ 시기다. 오디슨이라고 했던가?”
갑작스러운 하대라.
눈썹을 찡그리자, 시기가 쯧- 혀를 찼다.
“역시, 잘 모르는 모양이군.”
깔보는 듯한 눈빛. 저 눈을 뽑아 버릴까?
잠깐 고민하는 찰나, 시기가 말을 이었다.
“오딘의 셋째 아들이자, 뵐숭 일족의 시조인 뵐숭이 바로 내 손자다.”
그러고 보니 주술사 영감의 말이 떠오른다.
시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뵐숭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딘의 혈통을 이은 뵐숭, 시기의 아들인 레리르의 아들이자 후날란드의 왕인 그는…….’
분명 뵐숭에 대해 말할 때 그렇게 시작했다.
멈칫한 내 꼴이 마음에 든 걸까? 시기가 씩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짜증스러운 손길이지만, 차마 오딘의 아들에게 창을 들이댈 정도로 짜증스럽진 않았다.
그저 심드렁하게 그를 보자, 시기가 입을 열었다.
“지금 중요한 건 발할라의 승리 아니겠나? 설마 세스룸니르에 져도 된다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의 늑대여?”
입을 꾹 닫았다.
나 역시 프레이야 밑에 있는 이들과 싸워서 패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MVP 보상이 황금 사과다.
차마 포기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승리를 위해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한다. 그걸 잊지 마라.”
“넷! 알겠습니다!”
토르발드와 티우소스가 대답했다.
나는 그 두 녀석이 못마땅했지만, 시기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저 두 놈을 가만히 두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이 싸움이 끝나고 어떻게 처리할 일일 뿐이다.
“흠.”
그런데 시기라는 이름을 대체 어디에서 들었더라?
분명 낯익은 이름이다.
오딘의 아들이라? 뵐숭의 할애비라?
아니, 그거 말고 뭔가 굉장히 중요한 걸 잊은 기분이 든다.
미간을 찡그린 채 어색한 침묵 속에 고민을 이어 가자니, 블린디르가 다가와 속삭였다.
“잘하셨어요. 시기까지 저쪽에 붙으면… 좀 곤란하거든요.”
“저자가 센가?”
“네, N100 1위예요. 높으신 분의 축복을 모조리 받았으니, 셀 수밖에 없죠.”
흐음, 턱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뭔가가 턱 걸리는 느낌인데.
* * *
“발할라 측! 입장하세요!”
투기장을 관리하는 발키리의 안내.
“가지.”
시기가 앞장섰다.
시기는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본래 T100에 소속되어 있던 그는 이바르와 마찬가지로 신들의 다툼에 밀려 강등된 투사였다.
‘저놈은 쓸모가 있단 말이지.’
오디슨을 보며 시기가 턱을 쓰다듬었다.
오딘의 아들이라는 걸 안 뒤로 언제나 아부를 떨던 두 놈, 토르발드와 티우소스가 키득거렸다.
“여윽시 시기 님이십니다!”
“저놈도 감히 시기 님께는 대들지 못하지 않습니까? 대단하십니다!”
두 녀석은 손금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알랑방귀를 뀌어 댔다.
오디슨이 으르렁거렸다.
“이번은 참지만, 세력전이 끝난 뒤를 기대해라.”
서슬 퍼런 목소리에 토르발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잠깐 부딪혀 본 바, 오디슨이 만만찮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오딘의 총애를 받는 놈이니까 오딘께서 내리신 축복도 받았겠지. 그러니까 저런 거야. 제대로 붙으면 내가 저딴 놈한테 밀릴 리가 없지.’
토르발드가 생각했다.
<천둥소리> 외에도 <벼락의 힘>을 가진 토르발드다. 게다가 그가 가진 명성이 적지 않아, 야른시다처럼 경기당 몇 번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연달아 쓸 수가 없을 따름이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면 다시 쓸 수 있다.
그렇기에 토르발드는 오디슨을 얕잡아봤다.
“흥, 제대로 된 축복이나 권능도 없는 놈이…….”
투덜투덜, 그 말에 오디슨이 울컥했다.
하지만 시기가 나서 막았다.
“그만, 우리는 한 팀 아니더냐?”
그 소리와 함께 통로가 끝나고, 수많은 관중들이 들어찬 투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투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와아아아아아!”
“발할라, 이겨라아아아!”
발할라에서 열리는 만큼(프레이야가 양보했다), 발할라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하지만 세스룸니르 측도 작은 건 아니었다.
“프레이야 님을 위해 죽도록 싸워!”
“발할라 놈들보다 낫다는 걸 보여 줘라!”
“꺄아아아아악!”
장내 방송이 경기 시작 전, 선수 소개를 했다.
[해설위원님? 이 경기, 선수들이 다들 대단하지 않습니까?]
[예. 가장 먼저, ‘선조’ 시기 선수를 소개하자면…….]
가장 먼저 소개된 것은 시기.
시기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무엇 때문인지 오디슨의 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내가 먼저 소개된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흥! 가소로운 놈!’
시기는 오디슨을 무시하고, 발할라팀을 모두 모았다.
‘MVP인 황금 사과를 얻기 위해서는… 가장 문제 되는 게…….’
시기가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오디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생각 날 듯 말 듯, 가물가물했다.
“오디슨,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결코 세스룸니르에 질 수 없다.”
“…질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 말에 시기가 씩 웃었다.
“그렇다면 승리를 위해 어느 정도 희생할 수 있겠지?”
오디슨의 얼굴이 구겨졌다.
얼마 전 손오공을 상대하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기는 씩 웃으며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저쪽도 나름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이다. 아무런 희생 없이는 이길 수 없어. 게다가 우리 팀에서 가장 강한 건 자네 아닌가?”
시기가 씩 웃으며 말했다.
꾸며 낸 웃음은 자연스러웠고, 정말로 승리를 위한 희생이 필요하다 싶을 정도였다. 시기는 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숫자라고 말했다.
“5대5다. 이걸 4대 3이나, 4대 2로 만드는 것이 바로 오디슨 네 역할이지.”
오디슨이 침묵했다.
5명 뭉친 세스룸니르 팀에 홀로 달려들어 둘이나 셋을 상대하면, 나머지 넷이 다른 쪽 셋이나 둘을 상대하겠다는 계획.
말만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5대 1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오디슨의 말에 시기가 쯧- 혀를 찼다.
오디슨은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기는 오디슨과 같은 이들을 무수히 다뤄 봤다. 왕이지 않았던가?
이런 타입은 쉽다.
“저쪽은 발할라에도 오지 못한 ‘반편이’들이 가득한 세스룸니르다. ‘고작’ 그 ‘반쪽짜리’ 다섯을 상대하지 못하겠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자존심을 긁었다.
오디슨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기가 마침표를 찍을 때라 생각했다.
“제국 파괴자, 오딘의 늑대, 붉은 마왕이 고작 세스룸니르의 투사들에게 겁먹는 건가? 응?”
“다섯이라…….”
오디슨이 창을 들었다.
시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이놈이 혼자 덤벼들어 망한 뒤라면… 다른 놈들은 MVP가 될 가능성이 없다! 조금만 더 긁으면…….’
푸욱.
“어……?”
시기가 비틀거렸다.
“시기. 그 이름이 떠올랐소.”
“무슨 개짓거리……?”
오디슨이 웃으며 말했다.
“추방자, 시기. 스카디의 하인을 죽인 탓에 신계에서 쫓겨난 놈 아닌가? 그 와중에서 오딘께 절연당했고 말이야.”
“지금 왜 그 이야기를……?”
오디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쪽이 그리 약해 빠졌다면, 나 혼자 다섯을 다 이기고 황금 사과를 얻는 게 더 좋은 방법 아니겠나?”
시기는 어이가 없었다.
오디슨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붓고 싶었다. 그러나 오디슨의 눈을 보자니 덜컥, 피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와 똑같은…….’
시기가 주르륵 무너졌다.
“미치광이의 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풀썩 엎어졌다.
관중이 가득한 투기장이었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장내 방송 역시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어… 그…….]
시작부터 팀킬.
돌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