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17화. 신의 이름으로 (1)
땀이 쏟아졌다.
머릿속에는 그 원숭이 놈이 한 말들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와 함께 느긋하게 굴던 손오공의 빈정거리는 표정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빌어먹을!”
슈우욱!
짜증을 터트리듯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럴수록 손오공의 일격에 못 미친다는 걸 깨달을 뿐이었다.
“젠장!”
댕그렁!
창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무리 짜증을 부려 봐야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를 벅벅 긁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최근 계속해서 깨지기만 했다. 마르스에게 얻어터졌고, 손오공에게도 얻어터졌다. 기절한 뒤, 협력자들이 날 보던 눈빛을 떠올리면 뒷골이 당길 지경이었다.
“…신성.”
더 큰 신성이 필요하다.
강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신성을 키우는 거다.
하지만 신성이라는 게 그냥 클까? 무작정 하계로 내려가 부족의 전쟁에 한 손 보태고 싶다. 그러면 겁먹은 제국 놈들과 환호하는 부족민들이 내 신성을 살찌울 텐데.
고개를 떨궜다. 그딴 이유로 싸워 대면 올림포스에서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대체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기술을 갈고 닦는 것? 그에 대해서 메르키에게 물은 바가 있었다. 이라호드의 조언이었다.
‘신성에 대해서라면, 아마 메르키가 저보다 나을 거예요.’
하지만 메르키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신성을 다루는 기술은 결국 몸을 움직이는 것의 연장이라고.
-끼잉…….
왼손에서 악령이 날 위로하듯 울었다.
손오공과 싸움에서 아무런 역할을 못 한 탓에 내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약하다고 남에게 화를 낼 정도로 못난 놈은 아니다.
왼손을 쓰다듬었다.
“괜찮다. 그저 답답할 뿐이니…….”
단기간에 강해질 방법은 결국 하나뿐인가?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손오공이 남기고 간 듯한 그 쪽지는 여전히 알아먹을 수 없는 글자로 적혀 있었지만… 내용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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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라호드가 해석해 준 것과 같은 거니까.
그와 동시에 한 가지 배운 것도 있다.
“…빠른 번개는 익혔지만, 거친 바람은 아직이라…….”
손오공이 한 말이다.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욕 아니면 한숨이었다.
“제길…….”
지독한 무력감에 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때,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디슨? 좀 괜찮아요?”
이라호드였다.
쓰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뭘 말인가?”
“…그게.”
이라호드가 내 눈치를 봤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고 있었다.
마음이 괜찮으냐는 거겠지. 손오공의 한 방에 내장이 진탕되기는 했지만, 에이르 신전에 갈 필요는 없었다.
손을 휘저었다.
“그냥, 훈련하다 쉬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오디슨은 이제까지만 해도 굉장히 빠르게 성장해 왔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오디슨은 저보다 셀 걸요?”
입술을 삐죽이며 하는 말에 차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나와 이라호드는 어느 순간 방향성이 달라졌으니까. 이라호드가 알려 준 세밀한 움직임은 내게도 충분히 도움이 되기야 했지만… 그녀처럼 유연한 움직임은 내게 무리였다.
이라호드가 살짝 따지듯 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래요? 뭐에 쫓기듯 훈련을 엄청나게 늘리기나 하고.”
그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사로서 강해지는 것에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과욕이 화를 부른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라그나로크를 막고 싶다.”
“그게 대체 언제일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요?”
“…글쎄, 어쩐지…….”
머지않았을 것 같다.
그 말을 삼켰다. 쓴웃음 지었다.
이라호드는 후- 한숨을 내쉬며, 내 기분을 살살 달랬다.
“오디슨, 라그나로크가 온다고 해도… 오디슨 혼자서 막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몸 좀 생각하면서 움직여요. 신성도 있고, 세흐림니르 고기를 많이 먹어서 괜찮다? 아니에요. 아무리 튼튼한 밧줄이라도 잘 견디다 어느 순간 끊어지기 마련이라구요.”
잔소리 같지만, 그 아래에 깔린 걱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그저 묵묵히 그녀의 잔소리를 들었다.
한참이나 잔소리를 쏟던 이라호드가 말했다.
“연기됐던 세력전 일정이 잡혔어요. 증명이니 뭐니 그것보다는 일단 빨리 열자는 느낌으로 좀 다급한 일정이에요.”
“…그런가? 그런데 증명 없이 괜찮은가?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리던데…….”
“뭐, 쓸데없는 소리죠, 사실.”
탐탁지는 않다만.
눈썹을 찌푸리자, 이라호드가 덧붙였다.
“근데 별로 안 기뻐 보이네요?”
“그야, 매의 날개옷을 이미 얻어 버렸으니 말이지.”
그렇다고 해도 세스룸니르의 전사들이 궁금하기는 하다. 최근 투기장에서 싸움을 벌인 바가 없다 보니 더욱 그랬다.
혼자서 훈련하는 것보다는 실전이 더 낫겠지.
홀로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싸울 생각 하니까 좀 낫네요. 우중충한 분위기도 살짝 가셨고.”
“…그런가? 난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싶은데…….”
“뻔히 보이거든요? 그리고 이번에 아무래도 프레이야가 제대로 싸움을 붙여 보고 싶은 모양이에요.”
제대로? 그게 무슨 의미지?
눈을 꿈뻑일 때, 이라호드가 이전과 바뀐 점을 콕 짚어 말해 주었다.
“MVP 보상이 새로 추가됐어요. 그 보상은 오디슨이 그토록 탐내던 거구요.”
“내가 탐내던 거라면? 설마…….”
이라호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황금 사과예요.”
그것도 특등품이라고.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 * *
메이니르코나. 아니, 메이니는 오디슨이 제국을 무너뜨린 후 그의 열혈팬이 되었다. 직접 팬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오래간만에 오디슨이 출전하는 세력전을 빼먹을 리 없다.
“회장님! 오디슨 님이 MVP겠죠?”
“얘는! 당연한 소리를 왜 해? 난 그냥 오디슨 님이 안 다치기만 하면 좋겠어. 오디슨 님이 다칠 때마다 내가 다 아프더라.”
“흥! 누가 너한테 물었어?”
팬클럽 회원들이 티격태격하는 와중 메이니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처음 질문을 던진 회원에게 대꾸했다.
“당연히 오디슨 님이 이기겠죠. 관건은 오디슨 님이 몇 명이나 처리하느냐에 달린 거 아닐까요?”
“아마 상대 쪽 다섯 명 다 오디슨 님한테 당하는 거 아닐까요?”
호호깔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수염이 성성한 사내가 투덜댔다.
“흥, 증명도 제대로 안 된 놈이 무슨…….”
작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곁에 앉아 있던 메이니는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메이니의 눈썹이 꿈틀댔다.
“제국을 무너뜨린 분이 증명이 안 됐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허!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요?”
수염 난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메이니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어머나! 혼잣말인데, 들렸나 봐요?”
“이 여자가 진짜……!”
수염남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벌떡 일어나자, 메이니도 지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곁에 있던 팬클럽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주먹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거 봐요, 저거. 교양 없는 놈을 좋아하는 것들이라 그런지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네요.”
“당연하죠, 찬란하신 그분이 그 교양 없는 놈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니까요. 그런데도 그놈은 프레이 님의 하인들을 모조리 죽였다죠?”
“야만스러운 놈!”
메이니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도 최근 오디슨에 대한 여론이 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소수 의견일 뿐이라 생각했다.
‘이 수염쟁이는 분명 하급 투사야.’
딱 봐도 알 수 있다. 발할라는 평화로운 곳이었고, 이렇게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 이들 대부분이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사들. 그중에서도 오디슨을 욕하는 이들은 하위 리그에서 정체된 투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는 뻔했다.
“증명이 안 됐잖아, 증명이!”
헬 납치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대형 사건 때문에 취소된 증명. 앞선 두 번의 증명보다 훨씬 약한 세 번째 증명자를 두둔하며 소리치는 것이다.
메이니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세 번째 증명은 앞에 두 사람도 감당 못 하는 투사였잖아요? 그런데 웬 증명? 쓸데없이 이벤트랍시고 돈 뜯어내는 일 아닌가요?”
“흥, 오디슨도 한물갔지. 그 돈 뜯어내려는 이벤트를 벌였는데도 매출이 영 아니었잖아?”
“허! 그건 올림포스 쪽에서 사건이 벌어져서…….”
메이니가 논리적으로 반박했지만, 수염남과 더불어 끼어든 프레이 팬클럽이 수염남 편에 섰다.
“프레이 님한테 당하고 도망친 데다가, 올림포스의 아레스에게도 당했다죠? 이번에는 또 동방의 원숭이한테도 얻어맞았다고 기사 떴잖아! 오디슨은 그냥 약한 놈한테만 센 거야!”
“맞아! 프레이 님처럼 고귀한 분위기도 없고!”
메이니가 눈살을 구겼다.
하지만 이쪽도 보통은 아니었다.
“여자한테 폭 빠져서 무기도 팔아먹는 멍청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네?”
“얼굴만 번지르르하면 범죄자도 좋아하는 머리 빈 년들!”
프레이의 단점 둘이 연달아 터졌다.
프레이는 아스가르드 최고 미남이다. 오디슨이 그 바로 뒤를 추격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최고 미남을 꼽으라면 프레이가 꼽혔다. 하지만 그게 범죄를 감쌀 요소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게르드를 아내로 삼고자 엄청난 마검을 거인족에게 넘긴 건 아주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탓에 원 역사에서는 사슴뿔 하나 들고 라그나로크에 참전했다 사슴뿔이 부러지는 바람에 수르트에게 죽임당했다.
할 말 없는 프레이 팬클럽, 수염남이 끼어들어 외쳤다.
“운이 좋아서 연달아 이길 수는 있지만, 그렇게 쉽게 얻은 승리가 실력이 될 리가 없지! 거 이번에 여기저기에서 두들겨 맞는 거만 봐도 그렇잖아!”
최근 오디슨의 부진을 걸고넘어지면, 뭐라 할 말이 없다.
오디슨이 이제까지 비다르나 강림한 아레스를 이긴 것이 특이한 일이지, 그들과 신성을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디슨 팬클럽의 한 사람이 수염남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쪽 분은 O500에서 몇 년이나 빌빌거리세요?”
“뭐, 뭐라고?”
“O500 소속 투사잖아요, 그쪽.”
수염남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는 O500 투사가 맞았다. 그것도 근 10년간 O500에만 소속되어 있었다. 갑작스레 치고 올라가는 오디슨을 시기해 투덜거리는 사내였다.
사람이 할 말이 없으면 화를 낸다던가?
“이 쥐방울만 한 것들이!”
수염남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메이니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계에서의 삶이 지독했던 만큼, 그녀에게는 그때의 공포가 남아 있었다.
‘아……!’
메이니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수염남의 손이 그녀를 향해 휘둘러졌다.
메이니가 눈을 꼭 감았다. 다가올 충격이 두려웠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어, 어어……? 뭐야?! 넌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사람을 치려고?”
꼭 곰 같은 사내였다.
2미터가 넘는 덩치에 순박한 얼굴을 지닌 사내는 오디슨 팬클럽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남자였다.
메이니가 그를 불렀다.
“토르손 님!”
토르손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허허, 토르손 님이라뇨… 그, 그냥 토르손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오디슨과 친한 투사였다.
오디슨의 절친으로 알려진 이그나르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오디슨과 같은 부족 출신인 사내. 팬클럽에서는 오디슨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토르손에게 이것저것 물은 일도 있었다.
“크윽……! 이, 이거 놔!”
수염남이 버둥거리자, 토르손이 웃음기를 감추고 싸늘하게 말했다.
“이봐, 투사가 민간인을 공격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응?”
“그, 그건…….”
수염남의 안색이 변했다. 처벌은 단순하다.
육신을 박탈당한다. 니플헤임의 망자가 된다는 의미다.
토르손이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꺼져, 인마.”
“제, 젠장할!”
수염남이 후다닥 도망쳤다.
오디슨 팬클럽이 환호하고, 메이니가 고개 숙여 감사했다.
“고마워요, 토르손 님.”
“헤헤헤, 뭐, 뭘요……. 그나저나, 제가 여기 앉아도 될까요? 자리가 빈 거 같은데…….”
아까 보인 카리스마는 사라진 지 오래.
토르손은 얼굴을 붉히며 메이니에게 양해를 구했다.
물론, 메이니의 대답은 ‘예’였다.
“그나저나 토르손 님, 오디슨 님은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여론이 좀 안 좋은 거 같아요.”
토르손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 대장이라면 잘하겠죠. 문제는…….”
“문제는?”
토르손이 떨떠름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대장 성질머리를 건드리는 놈만 없으면…….”
“네?”
메이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고, 토르손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오디슨이라고 해도, ‘황금 사과’가 걸린 경기에서 아군을 공격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래야 하는데.’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런 토르손의 걱정을 모르는 메이니는 벌떡 일어나 소리질렀다.
“꺄아아아악! 오디슨 니이이임!”
와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과 함께 선수들이 입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