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화. 신중충(身中蟲) (4)
작전은 단순했다.
사탄의 설명이 떠올랐다.
‘손오공은 어째서인지 네게 집착하고 있다. 그 점을 백분 활용해 손오공을 끌어들여라. 그리고…….’
힐끔, 저쪽에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그 숲에는 협력자들이 대기 중이리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젠장, 차라리 옥쇄(玉碎)하라 할 것이지…….”
손오공을 끌어들이고, 저쪽으로 도망치면 매복해 있던 협력자들이 그를 덮치겠단다. 전사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작전이다.
죽든 살든 싸우는 게 낫건만, 도망이라니.
“그렇게 큰소리쳐 놓고 망쳐 놓을 수도 없고…….”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나저나, 역시나 마음에 안 드는 작전이다.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카카카카카! 오디슨! 내가 널 만나는 걸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아? 어?”
우끼끼! 손오공이 낄낄댔다.
성공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지키겠군.
입꼬리가 씰룩였다.
“…훈둔이라던가, 하는 걸 못 써서 느릴 거라 하더니…….”
어이가 없다.
자존심을 굽히고 작전을 수행하려 했건만. 애당초 내 능력 밖의 작전이었다.
게다가…….
“확실히 보통은 아니군.”
“카카카! 이 제천대성께서 보통이겠냐? 엉?”
낄낄 웃어 대는 이 원숭이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흙먼지로 더러워진 털이나, 앙상하게 마른 팔다리가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내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원한은 없소. 하지만…….”
손오공이 행패를 부리며 퍼진 괴물들이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렇기에 눈앞의 원숭이를 잡아야 한다.
“댁이 잡혀 주는 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일이오.”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굽혀 무게 중심을 낮췄다. 창은 화난 황소의 뿔처럼 상대를 찌를 듯 내밀었다.
손오공의 눈빛이 바뀐다. 그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승산이 없어도 해 보겠다, 이 말인가?”
“허! 겨뤄 보지도 않고 어떻게 승산을 논하시오?”
“킥킥! 너도 알잖냐.”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나도 안다.
눈앞에 있는 원숭이에게 창을 들이댔을 뿐이지만, 등이 축축해졌다. 오금이 저렸다. 입이 바짝 말랐다.
나보다 훨씬 작은 원숭이다. 그런데 꼭 태산이 떡하니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압박감을 떨쳤다.
“…얌전히 잡힐 생각은 없겠지?”
“물론! 그래도 걱정 말거라.”
걱정 말라고?
고개를 갸웃하자, 손오공이 씩 웃으며 말했다.
“죽이진 않으마. 한 수 가르쳐 주지.”
울컥 호승심이 치밀어올랐다. 도대체 날 얼마나 얕보기에 저딴 소리를 뱉는단 말인가? 저 여유로운 얼굴을 박살 내고 싶었다.
“오만방자하군.”
“글쎄, 내가 보기엔 나한테 덤비려는 네놈이 오만해 보이는데? 우끼끽!”
“그건, 겨뤄 보면 알겠지!”
으득! 이를 악물고 바닥을 박찼다.
쏜살처럼 손오공에게 달려들었다. 그때까지 손오공은 뒷짐 진 채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쐐애액!
창을 내질렀다.
손오공은 흥- 콧방귀를 뀌며 몸을 홱 틀었다.
“카카카! 어딜 찌르느냐?”
제길! 내 찌르기는 허공을 찔렀다.
어디로 올지 다 읽고 있다는 듯한 태도, 하지만 이것도 그럴까?
“흐읍!”
찌른 채로 창을 휘둘렀다.
부웅!
거친 소리가 났지만, 역시나 손오공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바닥에 삐딱하게 누워 하품하고 있었다.
“흐아아암! 느리구나!”
“…빌어먹을!”
짜증이 치솟았다.
잽싸게 회수한 창을 내질렀다.
푸욱!
“키키키!”
바닥에 창이 박혔다.
닿질 않는다. 그렇다면 더 빠르게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흡!”
전력을 다해 창을 찔렀다. 그러는 허공을 가르는 사이에 이라호드의 비법을 사용해 궤적을 휘게 했다.
쐐애액!
“오호, 잔재주도 부릴 줄 아는구나!”
“젠장할!”
이번에도 닿지 않았다.
내가 휘둘러 휜 궤적마저도 다 읽었다는 듯.
부웅!
“난 여기 있는데?”
공격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실패했다.
손오공을 그때마다 날 놀려 댔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날쌘 몸놀림이 짜증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그 덕에 짜증이 펄펄 끓었다.
으드득! 이를 갈았다.
“더, 더, 더!”
“그래! 더 빨리 찔러 봐라! 겨우 이 정도냐? 응?”
쉭쉭쉭!
창을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찔렀다.
상단, 중단, 하단 가릴 것 없이 마구 섞어 찔렀다. 하지만 손오공은 딴청을 피우거나 여유를 부리면서도 그 창을 모조리 피했다.
나는 짜증을 넘어 감탄이 나왔다.
“그럼 이것도 피해 보시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공격을 준비했다.
관절을 느슨하게 풀고,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몸을 채찍질하듯 휘둘렀다.
뼈가 우드득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 고통을 감수할 만한 공격이 뻗었다.
쩍-!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공격.
검은 번개가 바람을 갈랐다. 손오공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놈이 히죽 웃는다.
“이것 참… 괜찮구나.”
글쎄, 그리 여유 부릴 때일까?
이미 내 창끝은 댁 가슴 털에 닿은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파고들면…….
채앵!
“뭐?”
눈을 부릅떴다.
도무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있던 손오공이 언제 오른손을 휘둘렀나?
야른시다의 <천둥소리>도 읽어 내던 내 눈에도 전혀 보이지 않는 동작이었다. 마치 사진을 이어 붙인 듯한 어이없는 움직임.
나는 튕겨 나간 창을 번쩍 들고, 가슴팍에 빈틈을 훤히 드러낸 채 헛웃음을 흘렸다.
“대단하군.”
“그래? 하지만 봐주진 않을 거다. 흥!”
콧방귀를 뀐 손오공이 자세를 잡았다.
아주 천천히 자세를 잡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 엄청나게 빠른 자세 변환이다.
손오공이 말한다.
“봐라, 이게 질풍신뢰(疾風迅雷)다.”
그에 답은 하지 않았다.
말하기보다는 당장 빈틈을 메꾸는 게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늦었다.
쿵-!
“컥……!”
가슴팍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저 단순한 주먹질이건만, 단순하지 않았다. 주먹이 뻗어온다 싶을 때, 이미 그 주먹은 내 가슴 정중앙을 때리고 있었다.
피 맛이 진하게 느껴지고, 입술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흐른다.
“신뢰는 어느 정도 괜찮게 익혔지만, 아직 질풍이 부족하다. 좀 더 노력하도록.”
미친놈의 원숭이. 진짜 한 수를 가르쳐 주는군.
어이가 없어 그대로 픽 쓰러졌다.
* * *
“쯧, 맷집이 한참 약하군. 아직 멀었어.”
손오공이 고개를 저었다.
투지는 가상하지만, 몸과 실력이 아직 영 아니었다. 손오공이 바라는 싸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고행을 거쳐야 하리라.
푸- 손오공이 한숨과 함께 싸늘한 눈빛을 던졌다.
“그만 나오지 그래? 응?”
그 말에 숲에서 한 사내가 나왔다.
시뻘건 피부를 지니고 머리에 뿔을 단 사내, 사탄이었다.
사탄의 뒤로 협력자들이 긴장한 채 나왔다.
사탄이 감탄했다.
“도력을 거의 소진했다 들었는데… 어떻게?”
손오공이 피식 웃었다.
“도력은 거들 뿐이지.”
어깨를 으쓱인 손오공이 사탄을 위아래로 훑고 고개를 갸웃했다.
턱을 긁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연맹에서 벌써 나설 줄이야.”
“…그럼 얌전히 잡히겠나?”
“헹! 어림없는 소리. 너 같으면 잡혀 주겠냐? 근데 대체 여긴 왜 왔어? 댁은 이 차원에서 아무것도 아니잖아.”
사탄이 쓰게 웃었다.
이 차원에는 사탄을 섬기는 마녀들과 악마들도 없었고, 사탄을 두려워하는 샌님들도 없었다. 그런고로 그의 신성은 여기에서 아무런 권능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사탄이 쓸모없다는 건 아니었다.
“착한 놈은 멍청해도 되지만, 나쁜 놈은 멍청하면 죽는다. 이 이야기 들어봤나?”
“어…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댁은 작전만 짠다 이거지?”
손오공이 히죽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사탄의 뒤에 있던 협력자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들도 제각기 명성을 지닌 신이지만, 손오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움찔 떠는 그들의 모습에 손오공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별 볼 일 없는 것들.”
저런 놈들이 수두룩하니, 오디슨 같은 이가 소중한 것이다.
용맹하다 싶은 것들은 죄다 다른 신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손오공이 한숨을 푹 쉬고 오디슨의 창을 뺏어 들었다.
“별, 쓸데없는 걸 달아 뒀군.”
오디슨이 들었다면 삐쳤을 것이오, 아누비스가 들었다면 뒷골을 잡았을 이야기였다. 손오공은 아무렇지 않게 단단하게 붙여 놓은 창 촉을 떼어 냈다.
그리고 힐끔, 협력자들을 보았다.
협력자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번 일에는 신성이 거대한 이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사실 협력자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사탄이 있지만… 사탄은 이 차원에서는 아무런 힘도 못 쓴다.
“구경값을 받아야겠는데?”
손오공이 히죽 웃었다.
협력자들은 한층 더 긴장했다.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손오공은 겨우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럼 어디 한번…….”
“손- 오- 공-!”
손오공이 눈살을 구겼다.
어느새 탁탑대왕이 손오공을 또렷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손오공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네 형제들을 구하고 싶다면 당장 투항해라! 아니면 이 두 놈의 목숨은 없다!”
피떡이 된 저팔계와 사오정이 금줄에 묶인 채 늘어져 있었다.
손오공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저 멍청한 새끼들.”
“멍청한 건 네놈이다! 감히 탈옥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원숭이.”
“카카카카! 나 하나를 숱한 신들이 포위했건만, 그래도 불안한가? 응?”
탁탑천왕이 무어라 대꾸하려는 때, 손오공이 씩 웃었다.
“대답할 필요는 없다. 나 역시 할 일을 마쳤으니까.”
“그렇다면… 투항하는 것인가?”
손오공이 고개를 저었다.
“투항 같은 소리 하네, 등신 같은 게.”
“이 자식이……! 네가 아무리 투전승불이라 할지라도 이 숫자를 상대로 혼자 싸우겠다고?”
“하하하! 누가 혼자라고 했지?”
손오공이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원숭이들이 튀어나왔다.
탁탑천왕과 곤륜의 천군, 그리고 사탄을 비롯한 협력자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어떻게! 너는 분명 도력이 남아 있지 않았을 텐데……!”
“글쎄, 그건 알 필요가 없잖아? 애들아! 한바탕 놀아 보자!”
손오공의 외침에 수많은 분신이 우끼끼!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손오공의 분식들이 적에게 덤볐다. 탁탑천왕은 이를 아득바득 갈며 그 분신들을 쳐냈다.
“끼이이익!”
“꺼져라! 털 뭉치야!”
그와 함께 온 천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대 놓치지 마라!”
와아아아아!
고함이 터져 나왔다.
사탄을 비롯한 협력자들도 손오공의 분신을 박살 냈다. 과연 도력이 약해진 건 사실인지, 손오공의 분신답지 않게 픽픽 쓰러졌다.
“끼이이……!”
“우끼이익!”
얼마나 싸웠을까?
남은 분신은 없었다. 아니, 남은 원숭이가 하나도 없었다.
탁탑천왕은 당황했다.
“뭐, 뭐지? 손오공은 어디에……?”
“…아버지, 지금 손오공을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뭐? 금타,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손오공을 걱정하지 않으면 무슨… 저, 저건?”
탁탑천왕이 가리킨 곳에는 저팔계와 사오정을 묶었던 금줄만이 처량하게 버려져 있었다.
“…도망쳤습니다. 포로들…….”
탁탑천왕은 눈앞이 노랗게 물드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목덜미가 바싹 당겼다. 그가 버럭 소리쳤다.
“어떻게 관리를 했으면 다 잡은 저팔계와 사오정을 놓쳐! 어? 말해봐, 이 새끼들아!”
당황한 것은 사탄을 비롯한 협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어디 갔어?”
“젠장할! 간만에 큰 건수라고 했더니……!”
사탄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도력을 회복하면, 곤륜이 난리가 나겠군.”
다행스럽게도, 그게 더 나았다.
적어도 보상이 더 커질 테니까. 그리고 더불어…….
‘뭐가 됐든, 연맹의 힘은 약해지겠군. 손오공이 잡히든, 손오공이 난리를 피우든 말이야.’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하르마게돈(Harmagedon)이 머지않았다.
세계의 명운을 건 선과 악의 대결. 지금은 토벌 예정자 따위가 되어 연맹에 빌붙어 사는 상황이지만…….
‘그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사탄이 속으로 웃음 지었다.
* * *
그 시각, 손오공 일행.
그들은 놀랍게도 곤륜에 있었다.
“아고고……!”
손오공이 신음하며 엎어졌다.
그와 동시에 손오공이 데리고 온 저팔계와 사오정도 풀썩 쓰러졌다.
손오공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무리였나? 도력의 그릇에 금이 간 모양이군.”
축지법(縮地法). 땅을 접어 이동하는 최고 수준의 도술이다.
손오공은 다시는 도술을 쓰지 못할 위험을 안고서, 분신술에 이어 축지법을 사용했다. 다행스럽게도 신체만이 튼튼한 게 아니라, 영혼도 튼튼한 손오공은 몇 달 정도 요양하면 도술을 문제없이 쓰겠지만.
그 몇 달을 어디에서 보낸단 말인가?
‘거기밖에 없지.’
대라천.
다른 이름은 태초의 공허.
손오공은 살금살금 대라천으로 향하는 승천지로에 올랐다. 그리고 눈살을 구겼다.
“이 새끼들은 금신나한, 정단사자라는 것들이… 쯧.”
찍소리도 못하고 그 잠깐 사이에 당하다니.
손오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혼자 킬킬 웃었다.
“그래도, 목적은 반쯤 달성했군.”
손오공은 싸움꾼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전사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싸움을 좋아하는 이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고고하던가?
손오공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크크크, 내가 인정한 진짜 전사, 오디슨이라면?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을 리 없지.”
그리고 손오공의 예상대로, 아무도 쓰러진 오디슨이 쥔 작은 쪽지를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