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115화. 신중충(身中蟲) (3)
“커억!”
우드득!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개를 닮은 요괴의 목이 뚝 꺾였다.
털이 숭숭 난 손은 자비 한 점 없이 살생의 업을 쌓았다. 그 광경을 보던 요괴들이 기겁했다.
“도, 도망쳐! 손오공이 돌았다!”
“부, 분명 오행산에 갇혔다고 들었는데! 으악!”
온갖 형상을 한 요괴들이 우르르 달아났다.
그 광경을 보며, 털북숭이 손의 주인이 혀를 찼다.
“칫! 여의봉만 있었어도 이렇게 귀찮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는데! 우끽!”
손오공이 짜증을 부리며 개 요괴를 뒤로 휙 던졌다.
그 시체를 받아 든 건 저팔계. 돼지 코가 씰룩인다.
“하필이면 개야, 꿀꿀.”
본명인 강렵보다 훨씬 유명한 팔계(八戒)라는 별명은 삼장법사가 지어 준 것이다.
삼장법사는 저팔계에게 계율을 내렸는데, 불교에서 금하는 오신채(파, 마늘, 부추, 달래, 생강)와 도교에서 금하는 3가지 고기(기러기, 개, 뱀장어)를 금지했다. 그런 8가지 음식에 관한 계율을 지녀서 팔계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지금 저팔계가 개를 꺼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오정이 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형, 지금 우리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않소? 게다가 정단사자가 되며 계율도 사라졌으니, 딱히 문제는 없잖소?”
“하도 안 먹다 보니 약간 거부감이 드는 거양, 꿀꿀. 그나저나…….”
저팔계가 주위를 둘러보고 한숨을 쉬었다.
부서진 나무, 깨진 바위, 그리고 여기저기 튄 피. 싸움의 흔적이 생생한 이 자리를 보자니 걱정이 들었다.
“손형, 어쩔 셈이양?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징, 꿀꿀. 이 난리를 계속 피우는데 곤륜에서 가만 있을깡? 천장 모두가 동원된다면… 으!”
“으음, 그것도 그렇긴 하구만.”
사오정이 동의했다.
오행산에 갇힌 동안 셋은 나무뿌리나 지렁이, 그도 아니면 약간의 틈으로 들어온 지네 같은 벌레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요괴들을 때려잡아 먹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본디 셋 모두 요괴에 가까웠고, 대부분 요괴들의 주식은 인육 아니면 같은 요괴였으니까.
흥! 손오공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미 늦었다. 우리가 탈출했을 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그 말에 저팔계와 사오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결계를 부수고 오행산을 탈출했다. 손오공의 도력이 돌아오며 가능해진 일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못할 일도 아니었다.
둘의 불안한 얼굴을 본 손오공이 헹- 콧방귀를 뀌었다.
“아스가르드로 가서 오디슨, 그놈을 데리고 곧장 공허로 도망치면 그만이다! 뭐 그리 걱정하느냐? 응?”
손오공의 말에도 둘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천축으로 가는 대모험을 해낸 이들인 데다, 그 당시 모든 요괴들의 꿈이나 다름없던 삼장법사도 없다.
그렇다고 그때보다 쉬운 여정이 될까? 아니다.
저팔계가 한탄했다.
“아스가르드로 가는 길목만 해도 신계가 몇 개양? 곤륜과 천축, 다르마, 파시, 올림포스까지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궁. 꾸익.”
곤륜이 체면보다 실리를 살려 다른 연맹 가입 신계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저팔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혹 무사히 아스가르드에 닿는다고 한들,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아스가르드에서 오디슨이란 놈을 데리고 가게 놔둘 리가 없징…….’
결국, 신계 하나와 싸워야 하는 셈.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오공이 눈썹을 찌푸리며 저팔계를 노려보았다.
“너희… 이 대사형을 못 믿냐? 엉?”
“아니, 그거야…….”
당연하다 말하고 싶었다.
최근 손오공이 큰소리친 것 중에서 제대로 된 게 있던가? 저팔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오정도 입맛을 다시며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에이! 뱃가죽과 등가죽이 이산가족 상봉하겠소! 일단 저놈이나 먹고 생각합시다! 어차피 오행산에서 탈옥한 것만 해도 큰일 난 상황이오. 요선들과 접촉할 생각이 없다면야, 죽이 되건 밥이 되건 간에 대사형을 따라야 하지 않겠소?”
“그거야 그렇지만…….”
저팔계가 말끝을 흐렸다.
손오공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내 도력이 회복되는 순간, 곤륜 놈들은 상대가 안 돼! 그러니까 식사 준비를 해라.”
손오공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저기 저놈들을 무찔러서 내 말을 증명할 테니.”
“으응? 저놈들……?”
저팔계가 손오공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리고, 움찔 몸을 떨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화려한 갑옷을 걸친 천장들이 수십이나 늘어서 있었다. 개중 가장 앞선 이는 부리부리한 눈에 삐죽삐죽한 수염을 달고 용린갑을 걸친 사내였는데, 한 손에는 창을, 다른 한 손에는 석탑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오정이 흠칫 떨었다.
“탁탑천왕(托塔天王)!”
곤륜의 무력부대 대장인 탁탑천왕. 곤륜의 천장 중 하나였던 사오정인 만큼 그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사오정의 안색이 물이끼처럼 눅눅해졌다.
탁탑천왕이 버럭 소리쳤다.
“네 이- 놈-! 손- 오- 공-!”
손오공이 씩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양반이구만! 네 아들, 나타와 협공해도 날 잡을 수 없었는데… 그때보다 수십 배 더 강해진 날 잡겠다고?”
“흥! 여기에는 나타뿐만 아니라 금타와 목타도 함께 있다. 네까짓 죄인쯤이야, 쉽게 잡아낼 수 있지! 하지만 곤륜의 엄정한 법도에 따라,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탁탑천왕이 숨을 고르고 외쳤다.
“죄인 손오공과 그 사형제들은 들어라! 지금 투항한다면 그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하지만 저항한다면…….”
손오공은 지루하다는 듯 귀를 후볐다.
“우끼끼, 아저씨. 웬 혀가 그리 길어? 응? 그냥 덤벼!”
“저, 저놈이 감히!”
울컥한 탁탑천왕이 얼굴을 붉혔다. 그 뒤에 있던 그의 두 아들, 금타 목타의 얼굴도 와락 구겨졌다.
이 많은 천장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다니!
일촉즉발의 상황, 눈치를 살피던 저팔계가 사오정 곁으로 다가섰다.
“소, 손형이 저러는 동안, 우리는 도망칠깡……? 지금 우리는 힘도 제대로 못 쓰잖앙…….”
도력을 과다 사용해 비정상인 손오공이라 해도, 지금 저팔계와 사오정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쫄쫄 굶은 둘은 힘을 합쳐도 저쪽에 있는 천장 하나를 이길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까.
사오정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일심동체요. 대사형이 당하고 나면 도망친 우리가 어찌 될 것 같소?”
“그야…….”
“끝이오, 끝. 대사형이 이기길 바라며, 어떻게든 발버둥 쳐야 하는 상황이지.”
둘이 속닥거릴 때, 탁탑천왕이 버럭 소리쳤다.
“죄인들을 잡아라!”
그 명령에 천군이 요동쳤다.
와아아아아아아! 고함이 터져나왔고, 어마어마한 기세가 흙먼지와 함께 벌떡 일어났다.
저팔계와 사오정은 움찔 몸을 떨었고, 손오공은 씩 웃었다.
“개미는 뭉쳐도 개미지! 내가 여의봉이 없다고 너희들에게 당할까? 응?”
손오공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힘을 끌어올렸다.
그 역시 제대로 먹지 못했고, 도력을 몽땅 소진하여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 투쟁심만은 모든 신계를 통틀어 최고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카카카카! 죽이진 않으마!”
손오공이 낄낄 웃었다.
저팔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개 요괴의 시체를 던지고, 침을 꿀꺽 삼켰다.
“에라이, 모르겠당! 한번 붙어 보장!”
“흐흐흐, 사내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소?”
사오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이지만, 한바탕 신나게 싸워 볼 셈이었다.
손오공이 씩 웃으며 동생들에게 외쳤다.
“이기러 가자!”
저팔계와 사오정이 고함을 내질렀다.
“우아아아앙!”
“흐아아아!”
셋이 동시에 바닥을 박찼다.
수십 대 3. 어마어마한 전력 차지만, 손오공 일행은 결코 겁먹지 않았다.
손오공이 바닥을 치는 도력을 끌어모으며 털을 뽑았다.
“카카카! 일당백, 일당천, 일당만! 이 제천대성의 힘을 보아라!”
후- 불기만 하면 약하긴 해도 분신들이 펑펑 튀어나와 함께 싸워 줄 터!
그때,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손- 오- 공! 나와 한번 겨뤄 보자!”
손오공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익숙한 목소린데?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챘다.
손오공의 표정이 환희로 물들고, 그의 몸이 우뚝 멈췄다.
저팔계가 눈을 끔벅였다.
“손형?”
사오정이 흠칫 몸을 떨었다.
“대사형?”
손오공이 환희에 차 소리 질렀다.
“오디스으은!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거다! 우끼끼끽!”
손오공이 쌩하니 몰려드는 군세의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저팔계는 당황했다.
“뭐양! 소, 손형! 어디 강!”
사오정도 마찬가지였다.
“대사형! 사형?! 손오고오오옹!”
하지만 손오공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원숭이 특유의 날렵한 움직임으로 잽싸게 달렸다.
사오정의 이마에 맺힌 땀이 주룩 흘렀다.
“야! 이 원숭이 새끼야아아아!”
그러거나 말거나 천군은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저 새끼 어디 강!”
“젠장할! 내가 또 저 원숭이 새끼를 믿으면 사람도 아니다!”
저팔계와 사오정은 천군과 부딪혔다.
그 결과는 뻔했다.
“잡아라! 손오공 패거리를 모조리 붙잡아!”
“아닝, 자, 잠깐만! 꿀꿀! 그게 아니라…….”
“시끄럽다! 돼지 놈아!”
탁탑천왕의 손에 들린 삼십삼천영롱탑이 저팔계에게 휘둘러졌다.
영롱탑은 상대에게 던지면 크게 변해 상대를 가두고, 그 내부에서 뜨거운 불길을 일으키는 보패다. 이렇듯 휘둘러 치면?
치이이익!
“꾸이이이익!”
고소한 돼지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사오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냄새를 맡으며 배가 꼬르륵 우는 소리를 들었다.
“허…….”
화르륵! 뜨거운 불길이 공기를 달구는 소리와 함께, 풍화륜(風火輪)을 신은 나타가 허공에서 멈춰섰다. 롤러블레이드를 탄 것과 흡사한 모양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게 공격 수단도 된다는 것 정도일까?
나타가 건조하게 물었다.
“너는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
태을진인에 의해 만들어진 보패 영주(靈珠)인 나타는 인조 신선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그는 항복하지 않으면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을 터.
사오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무리 강한 사자라 한들, 몸속의 벌레 한 마리에게 죽는다더니…….”
사자신중충(獅子身中蟲)의 의미를 되새긴 사오정이 후우- 한숨을 내쉬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무기는 본래 없었다.
“그만하겠소.”
사오정은 항복했다.
나타는 그에게 말했다.
“무기를 버려라.”
사오정이 당황했다.
“무, 무기는 없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
“아니, 무기가 없다니까!”
“무력을 행사하겠다.”
나타가 화점창을 들어 올렸다. 창의 형태를 한 보패로서,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기였다. 그 끝에서 뜨거운 불꽃을 쏘기까지 하니, 모든 전사의 꿈이나 다를 바 없는 물건.
사오정이 당황했다.
“자, 잠깐! 항복이라니까!”
“무기를 버려라.”
“아니, 무기가 없는데 왜 그래!”
“항복하지 않으면 무력을…….”
구식 기술로 만들어진 나타는 업데이트가 필요했으나, 태을진인은 이런저런 일로 바빠 자주 업데이트할 수가 없었다.
점잖은 편에 속하는 사오정이지만, 답답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고물 덩어리 같으니! 무기도 없는데 무슨 항복이야!”
“삐빅! 당신은 지금 모욕죄를 저질렀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러니까 ㅆ…….”
“항복, 항복, 항복, 항복……!”
“자, 잠깐!”
“무력을 행사하겠다.”
“자, 잠… 끄아아아악!”
사오정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손오공처럼 털이라도 많았으면 나타 내부의 기계 오작동을 기대할 수 있겠건만… 사오정은 대머리였다.
안타까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