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화. 신중충(身中蟲)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날다 보니, 익숙한 고향의 냄새가 났다.
그리 상쾌한 곳은 아니다. 잘 정돈된 발할라와 비교하자면, 흙냄새와 오물 냄새가 뒤섞이고 어렴풋한 바다향이 가미된 곳.
깔끔한 공기는 아니지만,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
저 멀리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저곳에서 누릅나무 부족이 싸우고 있구나. 그 생각에 심장이 쿵쾅댔다. 전장의 피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장의 소란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친다.
당장 저쪽으로 가야겠다.
하지만 내 시도는 저지되었다.
“까아악!”
“음? 웬 까마귀가 겁도 없이…….”
까마귀 하나가 내 귓가를 시끄럽게 울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놈을 노려보자니, 까마귀가 말을 꺼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까아악! 오디슨? 오디슨! 제 말 들려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까마귀 부리에서 튀어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까마귀를 노려보았다.
“이라호드? 어쩌다 까마귀가 되었지? 당신도 까마귀의 날개옷 같은 걸 얻었나?”
“까악까악! 아니에요! 그냥 비상연락망으로 연락한 거예요! 니플헤임으로 연락하니까 바로 방금 떠났다고 하더라구요.”
“허, 신기한 일이군.”
까마귀를 이리저리 뜯어보다 슬쩍 부리를 들이댔다. 매가 되고 나니 살짝 부리가 간질거려 한 행동이었다.
까마귀가 기겁했다.
“까악까악! 어어? 오디슨! 뭐 하는 짓이에요?! 까마귀 본부에서 보낸 까마귀를 잡아먹으려고 하다니!”
까마귀가 놀라 뒤로 도망치고, 이라호드가 호통을 내질렀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푸드득 날개를 홰쳤다.
“일단 저쪽 나뭇가지라도 앉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매는 제자리에서 오래 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날개가 뻐근해서 한 제안에 까마귀를 통해 이라호드가 버럭 소리쳤다.
“까악!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돌아와요.”
돌아오라고?
날갯짓 몇 번으로 부족 전사들과 시그니료드, 판도라를 만날 수 있는데?
멈칫하자니, 이라호드가 답답한 듯 짜증을 부렸다.
“까악! 아이참! 지금 연맹에서 긴급소집령이 떨어졌다구요!”
연맹의 긴급소집이라니?
원래 그렇게 강제성 있는 집단이었던가. 눈을 끔뻑이자니, 까마귀 부리에서 자세한 설명이 튀어나왔다.
“까악! 긴급 민원이에요! 지금 민원을 맡지 않은 죄인들을 모두 불렀어요! 아주 큰일인가 봐요!”
으으음, 잠깐 들를 시간도 없는 건가?
와아아아아-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전장의 함성을 두고 돌아가야 한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뭐라도 주고 싶지만… 뭘 줘야 하지?
축복을 내려 줘야 하나?
“젠장, 난 축복을 내릴 줄도 모르는데.”
게다가 축복을 내리면 금방 들키고 말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누릅나무 부족은 그간 팽창을 거듭했다.
수많은 방랑자를 부족 내부로 흡수했고, 새로이 태어난 이들도 잔뜩이었다. 제국의 창칼을 피해 도주한 이들이 모두 모이니 그 숫자가 보통이 아니었다.
누릅나무 부족 마을에 사는 이들만 해도 거의 1만 명에 가까웠고, 민족 특유의 특징으로 인해 전사가 대략 3천 명이나 되었다.
그에 비하자면 덴 마스크 지역과 맞닿은 곳에 있는 이들은 숫자가 부족했다. 게다가 부족 전사들은 제국에 어마어마한 복수심을 가진 이들이었다.
“죽여라! 모두 죽여!”
“우리 옛 땅을 되찾자!”
와아아아아-!
전장의 피와 흥분이 부족 전사들을 미쳐 날뛰게 했다. 그들을 상대하는 제국의 잔당은 지방 방위군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갈기갈기 찢겨 서로 패권을 노리는 이들. 그중 하나이니만큼, 병력도 고작 1천여 명.
그들은 부족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용서하지 않겠다! 야만인들!”
“야만인에게 제국의 힘을 보여 주자!”
와아아아!
양측이 격렬하게 맞붙었다.
“제국? 망해 버린 제국은 무슨!”
“허! 제국의 혼란은 잠깐이다! 3황자께서 이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황제가 되실 것이다!”
“지랄도 풍년이군!”
챙챙챙!
무기가 서로 맞부딪혔다.
두 배의 병력과 맞서는 만큼, 제국군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하지만 부족도 이들을 압도하진 못했다.
“썩어 버린 나무로 만든 것도 무기냐!”
“놈들은 칼도, 방패도, 갑옷도 없다! 해치워라!”
부족은 고립된 곳이었다.
철이 부족했고, 제대로 된 무기를 지니지 못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창이 대부분이었고, 심하면 돌창이나 돌도끼를 들고 있기도 했다. 갑옷? 제대로 된 갑옷은 없었다. 가죽을 대충 무두질해 덮어썼을 뿐.
그에 비교해 제국은 무너졌다 한들 자원은 풍부했다. 그들은 제국군 제식 무기를 아직도 가지고 있었고, 그 상태가 나빠도 나무창보다는 훨씬 나았다.
“으으음……!”
팽팽한 상황.
부족의 후방에는 주술사들이 모여 있었다.
전쟁에 나서기 전 전사들에게 문신을 그려 주고, 주술로 그들의 혈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맡은, 사실상의 지휘부였다.
시그니료드는 그 지휘부의 상석에서 룬스톤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 전사들이 창칼에 상처 입지 않도록……!”
“거친 바다마저도 갈라 버리시는 분이여…….”
시그니료드와 판도라, 그리고 다른 볼바 견습생 및 주술사들이 웅얼웅얼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그 경건한 분위기는 곧 깨졌다.
“아아아악!”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모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시그니료드가 눈살을 구겼다.
“무슨 일이냐!”
고함에 천막 바깥을 지키던 전사가 소리쳤다.
“적의 특공대입니다! 다들 피신을… 아아악!”
늦었다.
특공대는 경비를 몰살시키고 당장에 천막으로 쳐들어왔다.
“놈들의 수뇌부를 죽인다면… 음?”
특공대가 흠칫 떨었다.
아무리 봐도 이 천막은 수뇌부가 아닌 것 같았다.
이는 부족과 제국 간의 전략 차이를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제국의 수뇌부는 기본적으로 전장과 떨어진 장소에서 전략 전술을 짜내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부족 전사들의 대장들은 모두 선봉에 서서 무력을 뽐내야 했다.
특공대의 눈살이 구겨졌다.
“빌어먹을 야만인들! 장군이라는 놈들이 죄다 전장에 뛰어든 건가!”
“대장, 어떻게 할까요?”
“보아하니 이곳에 모인 놈들도 보통이 아닌 것 같다. 모조리 죽여!”
특공대장의 말에 부하들이 피 묻은 칼을 고쳐 쥐었다.
노인과 여인들이 가득한 모습에 그들도 그리 내키진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다. 노인과 여자라 한들 봐줄 수는 없었다.
“고얀 것들!”
버럭, 소리친 주술사 하나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는 주술사가 되기 전 전사로 이름을 날렸다. 심각한 부상으로 다리를 절게 되며 주술사가 된 이였다.
하지만 주술사가 되며 전투 기술에 녹이 슬었고, 젊은이들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웬 영감쟁이가 지랄이야!”
“끄아아악! 내, 내가 니플헤임의 망자가 되더라도… 네, 네놈들을 저주하겠다!”
주술사가 부르르 떨며 절명했다.
시그니료드가 이를 질끈 깨물었다.
“모두 방패 들어!”
그녀의 명에 모두가 제각기 무기를 들었다.
볼바니 주술사니 뭐니 해도 어느 정도의 무력은 가지고 있었다. 부족 마을의 처녀들이 방패술을 익혀 마을 방어에 도움을 주듯 말이다.
하지만 부족했다.
“꺄아아악!”
“아악! 아, 안 돼……!”
피비린내가 천막을 가득 채웠다.
판도라가 시그니료드를 감쌌다. 시그니료드가 흠칫 놀랐다.
판도라의 등에 긴 자상이 남았고, 피가 쏟아졌다.
“판도라 언니!”
“으, 으윽… 시그니료드. 나, 난 괜찮아…….”
판도라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불사의 저주를 받았기에 이 정도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시그니료드는 피와 비명 속에서 분노를 느꼈다.
좌절? 절망? 무력감? 아니, 그녀는 그저 분노를 느꼈다.
“아!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전사시여! 이 분노로 적들을 죽일 수 있기를!”
시그니료드의 동공이 풀렸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은 낄낄 비웃음을 흘렸다.
“완전 넋이 나간 모양이군!”
“허, 신께 빌어라! 사악한 너희의 마왕에게 말이다!”
시그니료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특공대장은 이번 공격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걸 알았다.
“야만인들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놈들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걸 부술 수는 있지.”
그가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처음 천막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이제까지 살펴본 바. 이 자리에 있는 가장 귀한 사람은 바로 시그니료드였다.
모든 이들이 시그니료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걸 아까워하지 않았다.
“죽어라!”
칼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시그니료드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지직!
목이 하늘을 날았다.
“아!”
시그니료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공대원들은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스러운 방패가 날아와 대장의 목을 치다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때, 허공에 뜬 방패가 시그니료드에게 날아왔다.
시그니료드는 공손하게 그 방패를 받아들었다.
“…오빠.”
방패의 표면에는 대충 휘갈겨 쓴 룬문자가 적혀 있었다.
[들르려 했으나, 바쁜 일이 생겨 선물만을 보낸다. 힘내라, 시그니.]
시그니료드가 그 방패를 집어 들었다.
특공대원 중 하나가 그 방패의 정체를 알아챘다.
“저건… 앙킬레? 앙킬레! 제국의 보물이 어찌하여 여기에……!”
“앙킬레라고? 그거라면!”
특공대원들의 눈에 대장을 잃은 슬픔이나 공포는 없었다. 탐욕이 가득 찼다. 앙킬레라면 사라진 제국의 보물이다.
이걸 가지고 황자들 중 하나에게 간다면? 곧장 그 황자는 대의명분을 얻게 되리라.
게다가 제국의 보물을 가지고 온 사람을 홀대할까?
모두의 머릿속에 개국공신이 된 미래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 미래를 위해 당장이 중요하다는 걸 잊었다.
방패를 든 시그니료드가 눈을 빛냈다.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아챈 것이다.
“후우.”
숨을 고를 때, 꿈에서 깨어난 특공대원이 칼을 내질렀다.
“앙킬레를 내놔라!”
칼이 날아들었고, 시그니료드는 방패로 그 칼을 막았다.
우두두둑!
“어어?”
칼이 그대로 튕겼다. 팔이 기괴하게 꺾이고, 지독한 고통이 뒤따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고통은 길지 않았다.
서걱!
“어……?”
결국,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앙킬레가 공격을 완벽하게 튕겨 낸 탓이었다. 아니, 그건 반사에 가까웠다.
“아!”
시그니료드의 눈에 희망이 가득 찼다.
사실 방금 그녀가 한 행동은 방패술을 잘 아는 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었다. 칼날을 정면에서 맞받는 짓.
앙킬레 같은 보물이 아니라면 방패를 든 쪽이 밀려났으리라.
“뭐, 뭐야?”
“죽여!”
남은 특공대원들이 모조리 달려들었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방패술이었지만, 앙킬레의 위력은 대단했다. 빗겨 친 칼이 튕겨 나가 아군을 찔렀고, 제대로 친 칼이 튕겨 나가 제 목숨을 거뒀다.
특공대는 그렇게 욕심에 자멸했다.
“와아아아아!”
모든 특공대원이 죽었을 때, 함성이 들려왔다.
시그니료드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승리했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대단한 방패야. 그리고 망한 제국 놈들은 이 방패를 뺏으려 하겠지.’
가짜 방패를 만들어 진짜를 숨겨야 한다.
앙킬레에 얽힌 이야기 속 왕과 시그니료드의 생각이 똑같았다.
보물이 남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건 악몽이었다.
* * *
“후우.”
날갯짓을 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뛰어난 방패를 내준 탓에 약간은 허탈감도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휘저어 그 마음을 떨쳤다.
“내게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양손으로 창을 쓴다.
제국놈들처럼 팔랑크스니 뭐니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저쪽 작은 섬나라의 호플리테스처럼 한 손에 창을 쥐고, 한 손에 방패를 쥐기도 싫었다.
마르스의 석상이 그 꼴이었으니까.
“잘 쓰겠지.”
아쉬움을 감추고, 발할라로 날아들자마자 이라호드와 만날 수 있었다.
청동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온 이라호드가 꽥 소리 질렀다.
“오디슨! 서둘러야 해요!”
“그렇게 급한 상황인가?”
내 말에 이라호드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의 영역에 요괴들이 날뛰고 있대요.”
“요괴? 괴물들 말인가?”
“네, 그러니까…….”
이라호드가 설명을 이어 가려 할 때, 거리의 TV 하나가 소식을 전해왔다.
[곤륜의 영역에 있는 동방에서 일어난 난리. 그 난리의 원인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레이프 특파원에게 자세한 소식을 들어보겠습니다. 레이프 특파원?]
[네! 레이프 에릭손입니다. 곤륜의 대리통치자, 염라대왕이 곧 이번 일에 대한 원인 발표를 한답니다. 아! 지금 염라대왕이 나왔습니다!]
화면 속에는 기괴한 화장을 한 사내가 침울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커다란 사진이 떠올랐다.
이라호드가 헉, 숨을 삼켰다. 그녀가 떨리는 눈을 한 채 중얼댔다.
“손오공이잖아……?”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