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12화. 신들리다 (3)
“가장 먼저, 황금과 영혼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강글로트가 숫자를 줄줄 읊었다.
이집트 신계에서 얼마, 올림포스에서 얼마, 그리고 아스가르드에서 얼마.
금액은 아스가르드가 가장 적고, 이집트 신계가 가장 많았다.
그 점을 물었다. 강글로트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명목상 아스가르드의 보상은 단순히 치안의 허점에 대한 거고, 이집트 신계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는 거니까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죠.”
“그런가?”
“네. ‘우리가 잘못했지만, 앞으로 잘할게~’ 하는 거랑 ‘잘못했으니까 제발 봐주세요~’ 하는 건 다르잖아요?”
명쾌한 설명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황금은 총 8억 크로나가량이고, 영혼은 6천만가량이에요. 대단한 숫자죠.”
그런가? 황금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다 보니, 이전에 잿팍인가 하는 걸로 벌어들인 것보다 적은 느낌이라 괘씸한데.
하지만 슬쩍 헬의 안색을 살피니 적은 양은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말이다.
강글로트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이 배분은 아무래도 두 분이서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이제 막 커플이 된 사람들한테 돈 문제라니… 난이도가 너무 높은 거 같은데…….”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말했다.
“영혼은 내게 필요치 않으니, 황금의 3할만 받겠소.”
“3할? 왜?”
헬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내가 헬을 구하러 갔다고 한들 사실 내 도움은 별것 아니었으니까.”
씁쓸한 일이지만, 이게 사실이다.
헬을 구하겠답시고 프레이와 싸웠고, 졌다. 그 와중에 강글로트를 구한 건 잘한 일이지만, 사실 이 보상과 크게 연관은 없다.
오시리스, 마르스, 비너스가 모여 있을 때도 그랬다. 난 최선을 다했건만 마르스를 이기지 못했다. 세트가 도와준 덕에 비너스가 우리 편이 된 건 좋지만, 그 역시 내 실력은 아니었다.
기분이 점점 처진다. 3할도 많은 거 아닐까?
나도 모르게 비굴한 눈빛으로 헬을 살피게 된다. 내가 욕심부린다고 화내는 건 아닐까?
“오디슨.”
헬이 나를 또렷하게 노려봤다.
그 눈빛에 흠칫 떨었다. 헬이 말한다.
“네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가장 충성스러운 집사를 잃었을 테고, 또 사랑의 묘약을 먹고 그 추악한 미라에게 아양을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끔찍하다는 듯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 역시 오시리스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지 못하다.
“그러니, 황금은 모두 네 몫이야. 아니, 부족해. 내가 더 보태서 보답하고 싶을 정도야.”
저건 니플헤임의 지배자, 헬의 의견일까? 아니면 나의 연인, 헬의 의견일까? 내 표정을 읽었는지 헬이 피식 웃었다.
“난 공사 구분이 철저해.”
“…그렇지만, 황금을 모두 내 몫으로 하는 건 좀 과한 것 같다.”
“아니, 받아.”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과한 황금은 필요도 없다. 넘치는 황금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니까.”
확실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헬은 눈살을 구기고 강요했다.
“받으라니까.”
“아니다.”
“그냥 좀 받아!”
“싫다!”
자연스레 목청이 커졌다.
강글로트가 키득키득 웃는 와중, 헬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결혼하면 니 꺼 내 꺼가 어딨어? 그러니까 줄 때 받아.”
“아니, 그건 아니지.”
눈살을 구겼다.
전사장의 말을 떠올렸다. 많은 부인을 거느리고도 화목하던 그의 집을 떠올렸다. 전사장은 분명히 말했다.
“남자의 자존심은 돈주머니에서 나온다더군. 그러니 결혼 후에도 서로 돈은 따로 관리하는 게 낫겠다.”
헬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 그런 말이 어딨어?”
“전사장이 그러더군.”
헬이 ‘전사장, 전사장…….’ 하고 중얼거렸다. 입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쥔 채였다.
전사장의 현명한 말에 굉장히 감명 받은 모양이다.
뿌듯한 일이다.
“전사장이랬나요? 그분은 여러모로 골치 아프겠네요.”
킥킥, 웃으며 말하는 강글로트.
음, 부인이 그 정도나 있으면 골치 아플 수밖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황금은 모두 오디슨 님의 몫이고, 영혼은 모두 여왕님 몫. 됐죠?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 정도로 해야 비율이 맞다고 봐요. 영혼은 황금보다 수백, 수천 배 더 귀하니까요.”
이번 보상에 황금이 적은 것도, 영혼을 상당히 떼어 주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도 할 말은 없다.
헬은 계속해서 웅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고, 강글로트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다음으로 각 신계에서 보내는 보물을 말씀드릴게요.”
설명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올림포스에서 아레스의 죗값을 줄이고자 보낸 물건이에요. 앙킬레라는 방팬데…….”
* * *
세스룸니르.
프레이야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벽에 내던졌다. 그녀의 고운 자태와 어울리지 않는 흉악한 표정으로 버럭 소리 질렀다.
“대체 오라버니는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듯, 아악-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쯧쯧, 혀를 차는 이가 있었다.
미의 여신이며, 동시에 주술과 마법을 능숙하게 다루는 프레이야에게 혀를 찰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녀의 오빠인 프레이, 그리고…….
“네 오빠를 너무 탓하지는 말거라. 그 녀석도 무슨 생각이 있었겠지.”
실패해서 문제지만.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한숨 짓는 뇨르드.
바다의 신인 뇨르드는 프레이와 프레이야 남매의 아버지였다. 아스가르드의 개방을 주장하는 바니르족의 대표로서, 이번 일은 골치 아픈 사안이었다.
“쯧, 폐쇄파가 더 힘을 얻겠군.”
뇨르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읽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떡하니 불쾌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신계 연맹 내 교류 제한? 득인가 실인가?>
[최근 ‘헬 납치’로 인한 하급 신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신계 내에서 강대한 힘을 지녔다고 한들, 타 신계와 내통하는 이가 있다면…….]
“신계가 아닌 세계를 봐야 하건만.”
뇨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프레이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레스가 한 제안을 거절하며 오디슨과의 만남을 꾸미던 프레이야는 이번 일이 굉장히 불쾌했다.
‘특히나, 오라버니의 죗값을 줄이자고 그걸 줄 줄이야.’
짙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눈이 벽에 걸린 옷으로 향했다. 그 옷은 새의 깃털을 덧붙여 만들어진 멋진 숄이었다. 어깨에 걸치거나 목에 감아 방한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허리에 둘러도 문제없는 디자인.
매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깃털을 하나씩만 뽑아 만든 보물 중의 보물이다.
‘매의 날개옷.’
그걸 뒤집어쓰면 매로 변신할 수 있는 보물.
프레이야가 이번 세력전에 보상으로 내건 물건이다. 그걸로 오디슨을 꾀어내 주최 측의 입장을 써서 그와 만날 셈이었다.
하지만 다 틀렸다.
‘오라버니가 내줄 수 있는 것 중에서 어렵긴 해도 양산이 가능한 유일한 물건이기야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디슨에게 매의 날개옷이 들어갔으니, 세력전에 불참할지도 모른다.
프레이야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더, 더 좋은 보상이 필요해.’
그녀의 눈이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프레이야는 오디슨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그게 당연하다.
오디슨은 그저 강자를 이기는 것, 그 승리를 가장 큰 보상이라 생각하고 싸우는 전사였으니까.
“프레이야 님? 괜찮으십니까?”
“응… 그저, 더 좋은 보상을 내걸어야 할 거 같지만…….”
후우- 프레이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로디테가 자꾸 오디슨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프레이야의 뇌리에 물건 하나가 스쳤다.
“아! 그거라면……!”
프레이야의 눈이 반짝였다.
내놓을 추가 보상이 정해졌다.
* * *
앙킬레(Ancile).
마르스가 제국에 내렸다는 성순(聖盾)이다. 제국 황제를 위해 내렸다는 이 방패는 안전과 승리의 보장이라 한다.
제국에 보관되어 있어야 할 게 왜 배상품으로 나왔지?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제국이 망했으니 성스러운 물건도 회수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다. 마르스의 것이라는 걸 제외하면 아주 만족스러운 물건이었다.
“흐음.”
방패를 만지작거리자니, 강글로트가 그 기능을 설명해 줬다.
“막을 때 반발력이 없대요.”
“반발력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세게 때린다고 해도, 방패를 쥔 나는 그 충격을 하나도 안 받는다는 소리 아닌가? 내가 처음으로 쓴 명품 창도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반발력을 줄여 주는 것만 해도 어찌나 편했나? 그런데 아예 없애 준다니!
놀라운 능력이다. 감탄을 터트렸다.
헬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내가 너무 많이 받은 거 같은데.”
“허. 황금도 모두 내게 주고, 보상이랍시고 나온 보물도 모두 내게 주지 않았나? 그런데 부족하다니. 나는 그리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헬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영혼만 해도 사실 그 보상들보다 더 비싸. 게다가 이집트 신계의 명계인 두아트 관리도 내 몫이 됐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리스의 처벌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이집트 신계라는 곳에서는 그의 처벌이 끝날 때까지 헬에게 두아트라는 곳의 지배권을 넘겼다. 번거로운 일인 만큼 헬의 몫도 상당하다고.
“나는 그걸 해낼 능력이 없으니까. 네가 맡는 게 당연하지.”
“…이집트에서 보낸 보물에 익숙해진다면 능력도 생길 텐데.”
“난 책과 그리 친하질 않아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집트 신계에서 내놓은 물건을 책이었다. 낙서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게 죄다 글자라고.
그쪽 글자조차도 모르는 내가 언제 그걸 익힐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펄럭이는 숄을 쓰다듬었다.
“터미널에 안 가도 되는 건 마음에 드는군.”
매의 날개옷.
세력전 상품이던 물건이 예상치 못한 일로 빨리 손에 들어왔다.
어떻게 쓰는 건지는 어깨에 걸친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깨에 걸치기엔 너무 여성스러운 디자인이다.
약간 머쓱한 기분에 숄을 풀어 허리에 묶었다. 이렇게 해도 쓸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제 날개옷도 있으니까, 자주 와.”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그리 말하니,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알겠다. 혹시나 다음에 발할라에 온다면 우리 집으로 초대하지. 궁전은 아니지만… 둘이 지내기에 부족한 곳은 아니니까.”
고귀한 헬에게 자랑하기엔 좁은 집이다.
엘류드니르에서 지내던 객실이 내 집보다 넓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부끄럽진 않았다. 그저 더 벌어서 나도 궁전이나 지어 볼까- 생각할 뿐.
헬이 고개를 끄덕이고, 슬그머니 내 옷 소매를 잡았다.
약간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흠.”
멋쩍은 눈으로 강글로트를 보니, 강글로트는 고개를 홱 돌렸다.
과연 뛰어난 집사다. 나는 피식 웃으며 헬에게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과 함께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럼, 가겠다.”
“조심해서 가!”
고개를 끄덕이고, 숄을 크게 펄럭였다.
직후, 나는 커다란 매가 되었다. 날개를 퍼덕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차가운 니플헤임의 바람을 맞으며 위그드라실 줄기를 따라 위로 날아올랐다.
이대로 쭉 올라간다면 발할라에 닿는다.
길이 쉬워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욕심이 들었다.
얼마 전부터 시그니료드와 판도라가 올리는 기도 때문이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전사시여, 그대의 용맹을 우리에게 내리소서.
-위대한 전사여, 우리의 적에게 죽음이라는 자비를 베푸소서.
“고토를 수복한다 했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시원한 바람과 하늘을 나는 기분, 그리고 느릅나무 부족의 성장이 기꺼웠다. 이대로 쭉 날아올라, 부족에 한번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계불가침이 어쩌니 저쩌니 하지만, 정체를 들키지 않고 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크게 날개를 홰쳤다.
느릅나무 부족을 향해 쏜살같이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