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111화 (111/208)

# 111

111화. 신들리다 (2)

꿈이다.

시그니료드는 그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하늘색이 기괴했기 때문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청명한 파란색이 아닌 짙은 갈색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둡지 않으니 어찌 꿈이 아니랴?

시그니료드는 불안감을 느꼈다.

‘예지몽은 언제나 불길함을 알려 왔는데! 설마 또?’

제국이 무너지고 한동안 평화가 이어져 왔다. 달콤한 평화를 맛본 시그니료드는 이 평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빌고 또 빌었다.

이 꿈이 파멸을 예지하지 않기를.

그녀의 꿈이 불길한 하늘을 비추고, 바다를 비춘다. 꿈속 바다를 본 시그니료드는 넋을 놓았다.

그 바다는 보석의 바다였다. 온갖 반짝이는 것들과 귀한 것들이 넘실넘실 파도치고 있었다.

그 바다 한가운데에는 섬이 하나 있었다.

부족민들은 그 바다 멀리에 있는 섬을 보며 기뻐하며 춤을 췄다. 느긋해 보이는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

아름답던 바다가 크게 출렁였다.

반짝이던 보석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해안가를 덮쳤다. 뾰족한 보석들이 부족민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시그니료드는 부르르 떨었다.

“헉!”

꿈에서 깨어났다.

낯익은 천장과 조잘거리는 참새들의 수다에도 그녀는 한참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불을 꼭 쥐고서 떨리는 눈동자로 제 꿈을 되새겨 보았다.

온갖 상징들로 치장된 꿈이었다.

보통 꿈이 아니다.

“당장, 당장… 부족 회의를 소집해야 해!”

침대에서 일어난 시그니료드는 다급하게 움직였다.

늘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정하게 굴던 볼바의 재촉에 부족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볼바이자 족장을 맡은 시그니료드, 그리고 볼바인 판도라. 거기다 경비대와 전사단, 정찰대의 대장들. 마지막으로 농부와 어부, 사냥꾼의 대표가 모였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시그니료드 님?”

시그니료드와 비교적 가까운 농부 대표가 말했다. 시그니료드가 주술로 파종할 씨앗에 축복을 내려 주거나 풍요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거나 하기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판도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시그니료드가 말하기 편하도록 분위기를 잡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판도라를 믿고 따르는 어부 대표가 불편한 자세를 고쳤다. 어부 대표는 바쁜 와중에 왜 불렀느냐 투덜댔던 중이었지만, 판도라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시그니료드가 농사의 풍요를 기원한다면, 판도라는 어업의 풍요를 빌었으니까.

“예지를 받았어요.”

시그니료드가 설명을 시작했다.

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전사들이 모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이 무너졌건만 또,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겁니까?”

“으으음… 주변을 주시했지만, 딱히 문제는 없었는데…….”

혹시 잘못된 예지가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모두가 그랬다. 불길한 예지는 틀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었다. 예지를 받은 당사자, 시그니료드조차도 그랬으니 오죽하랴?

사냥꾼 대표가 꿀꺽- 침을 삼키고 말했다.

“얼마 전 마을을 들른 상단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이 와중에 이상한 소리를 하지는 않을 터.

“옛 제국 땅은 지금 인세의 지옥이나 다름없다 하더군요.”

제국이 무너지고, 혼란이 찾아왔다. 국가가 무너지자 날고 긴다는 지역 유지들이 모두 한몫 단단히 챙기기 위해 나섰다. 게다가 살아남은 황족들이 문제였다.

“황자 셋이 서로 자신이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라 소리치고 다닌다는군요.”

옛 제국의 땅이 혼란스러운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죽일 듯 노리며 전쟁을 벌이자, 제국 땅은 사람 살기가 힘들어졌다.

농부들이 모두 징집되거나 혹은 반쯤 노예처럼 군량 납품에 매달리니 먹고사는 게 문제 될 지경이라고.

시그니료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갈색 하늘은 기근을 의미하는 것이었군요. 게다가…….”

출렁이는 보석의 바다는 전국시대를 맞이하여 제각기 들고 일어난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출렁임이 결국 화가 되어 부족을 덮칠 거라는 것이다.

딱딱 맞아 들어가는 예상 앞에 모인 이들의 안색이 나빠졌다.

판도라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아무도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전사들은 제국 잔당들이 밀고 들어오면 그들을 막아 낼 수 있는가 고민했다. 한쪽이 완전히 밀려 이곳까지 온다면?

해안가를 접하고 있어 도주할 수가 없었다.

경비대의 대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름 없는 전사께서 우리를 보우하시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분께서 보우하신다면야, 크게 걱정할 것은 없겠지만…….”

전사단의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안일한 태도였다. 시그니료드는 꿈속, 춤추며 기뻐하던 부족민을 떠올렸다.

위험을 눈앞에 두고도 어리석은 짓을 하는 꼴이었다.

판도라가 말했다.

“그분께서 우리를 보우하시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를 보고 실망하시지 않으실까요?”

판도라가 아는 오디슨은 그랬다.

그는 판도라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그런데 오디슨이 다 해 줄 거라 믿으며 가만히 있겠다면? 과연 오디슨이 다시 도와줄까?

판도라의 말에 모두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시그니료드는 문득 어릴 적 오디슨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아… 오빠가 바라는 것……!’

시그니료드의 뇌리에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판도라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다. 마치 오디슨이 제게 호통치는 것만 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부르르, 시그니료드가 몸을 떨었다.

“시그니료드? 괜찮아요?”

판도라가 걱정스레 물었다.

시그니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꺼냈다.

“파도는 해일이 되기 전까지는 큰 문제가 안 되죠. 그분께서 하계에 계실 적 한 말이 있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시그니료드에게 꽂혔다.

그녀가 오디슨의 친척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족장직을 시그니료드가 맡고 있음에도 감히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시그니료드가 오디슨의 표정을 따라 하며 입을 열었다.

“최선의 방어는 바로 공격, 이라고요.”

시그니료드가 말을 이었다.

“아직까지 그분에 대한 공포가 이곳까지 번지지 못했어요.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우리가 할 일은…….”

꿀꺽, 모두가 침을 삼켰다.

시그니료드가 웃으며 말했다.

“고토(古土) 수복.”

느릅나무 부족에는 이제, 고향으로 되돌아갈 힘이 있었다.

* * *

“아이참. 여왕님은 아침부터 어딜 가셨담?”

강글로트가 투덜댔다.

언제나처럼 헬을 깨우러 갔던 강글로트는 헬의 침대가 텅 비어 있는 걸 알았다. 가끔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 산책을 하거나, 일하고 계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정원에도 헬의 모습이 없었고, 집무실도 텅 빈 채였다.

‘침대를 만져 보니 온기가 없었어. 밤새 침대에 없으셨단 소린데…….’

강글로트는 문득, 자신이 향하는 곳을 떠올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혹시, 오디슨 님과 역사를 쓰신 게 아닐까?’

킥킥- 웃음 짓다 한숨 쉬었다.

“설마, 여왕님께 그런 용기가 있었다면 몇 번이나 그분을 자빠뜨렸겠지.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망상일 뿐이었다.

“크흠!”

그러는 사이, 강글로트는 오디슨이 머무는 객실 문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헬의 총집사. 경망스러운 표정을 손님께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표정과 목을 가다듬은 강글로트가 노크를 했다.

똑똑!

“오디슨 님? 기침하셨어요? 들어갈게요.”

요양하는 오디슨이다. 아침에 깨지 못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건강을 뽐내며 아침마다 높이 치솟은 이불을 볼 때면 꽤 민망하기는 하지만.

‘건강하시다면야 여왕님께 잘된 일이지.’

강글로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오늘 정도만 붕대를 갈면 끝날 거라 생각하며 챙겨 온 붕대도 함께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어머.”

쨍그랑!

오디슨의 등을 닦기 위해 챙겨온 물그릇과 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붕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응……?”

가냘픈 목소리와 함께 헬이 눈을 떴다.

상반신만이 이불 위로 치솟았지만, 어차피 상대는 강글로트였다.

헬이 눈살을 구기며 말했다.

“강글로트? 아침부터 웬 소란이냐?”

“그, 그게…….”

“시끄럽게 말이야… 응?”

강글로트를 쳐다보며 중얼거리던 헬이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강글로트가 서 있는 배경이 낯설다. 깜짝 놀란 그녀의 표정하며 그 곁의 벽이나 문이 아주 낯설다.

“…헬?”

잠에 잠긴 굵은 목소리.

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제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오디슨을 뒤늦게 눈치챘다.

헬의 머릿속으로 지난밤, 달뜬 행위가 떠올랐다.

“어, 어어어…….”

헬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강글로트가 빙그레 웃었다.

“여왕님! 드디어!”

“강글로트! 쉿! 쉿!”

헬이 강글로트의 입을 단속했다.

이전부터 오디슨을 노리고 있었다는 게 들킨다면 얼마나 체면 구겨지는 일인가! 충성스러운 집사는 오늘따라 눈치도 없이,

“아아아! 드디어! 드디어…….”

감격에 젖어 제대로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생각한 헬이 버럭 소리쳤다.

“강글로트! 당장 나가지 못하겠느… 꺅!”

하지만 그 불호령은 예상 밖의 손길에 저지되었다.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손이 슬금슬금 허리께를 쓰다듬고 있었다.

“으음…….”

잠에서 덜 깬 오디슨이 신음을 흘리며 본능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헬을 와락 껴안고, 그녀의 저지에도 고개를 들어 헬의 상반신을 덮쳤다. 마치 어미의 젖을 찾는 새끼 고양이처럼 눈도 뜨지 못한 채.

“아응! 오, 오디슨… 지, 지금은…….”

꼬물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광경을 보던 강글로트가 깜짝 놀랐다.

“한 시간 있다가 오겠습니다!”

황급히 그녀가 문을 닫았다.

충성스러운 집사로서 남우세스러운 광경을 볼 수는 없었다.

닫힌 문틈으로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쩜!’

강글로트가 두 손을 꼭 쥔 채 폴짝폴짝 뛰었다.

그리고 잽싸게 시녀들에게 오디슨이 머무는 객실 근처로도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주방에 일러 아침은 특식으로 준비토록 명했다.

강글로트의 그런 행동 탓에 엘류드니르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헬과 오디슨이 ‘드디어’ 연인이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헬이 알았더라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화를 냈을 일이었다.

* * *

“후우, 멈추라고 했는데도…….”

헬이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 했다. 투덜투덜, 불평을 뱉고 있지만, 안색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나는 머쓱해 어깨를 으쓱였다.

“거, 잠에 취해 실수했소.”

“…실수했소?”

움찔 몸을 떨었다.

크흠- 헛기침을 하고 정정했다.

“미안하오.”

헬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미안하오……?”

뭐지? 나는 헬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식사도 멈추고 눈을 굴리며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아!”

답을 찾았다.

“크흠, 실수였다.”

그제야 헬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화려한 만찬인 탓에 식사를 나르던 강글로트가 피식 웃었다.

“누가 우리 여왕님이 이렇게 바뀔 거라고 생각했겠어요?”

살짝 놀리는 듯한 어조에 깜짝 놀랐다.

강글로트가 헬을 놀린다니?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헬은 그저 입술을 삐죽일 뿐이었다.

“강글로트, 허튼소리 하지 마.”

“킥킥, 알았어요. 그나저나 오디슨 님?”

강글로트의 부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강글로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식은 언제 올리실 거예요?”

그 말에 사레가 걸렸다.

“켁켁!"”

그게 나 혼자는 아니었는지, 헬도 기침을 뱉으셨다.

워낙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입가를 닦아 내고 크흠- 헛기침을 흘렸다.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여유가 되면 식을 올려야지.”

“오디슨……!”

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셨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면 내가 나 몰라라 할 줄 알았나?”

“그게…….”

헬이 볼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나는 그리 책임감 없는 사내가 아니다. 옛날처럼 언제 죽을지 몰라 떠돌 때라면 결혼식이 사치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도 이제는 신이고, 헬도 대단한 신이다.

게다가 죽더라도 부활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씩 웃으며 가슴팍을 탕탕 두들겼다.

“나는 책임감 있는 사내다.”

“후후후. 다행이네요. 그런데 여유라뇨?”

강글로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일단, 시급한 일을 처리해야겠지. 결혼식을 올리는 데 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건 그렇죠. 그런데 시급한 일이라면?”

“그야, 부족민들을 발할라로 올려 보내는 것이다. 셋을 찾아 뒀다지? 나와 친한 이는 아니지만… 좌시할 수는 없지.”

아, 그러고 보니.

“선발 증명이 무효가 됐으니, 그것도 치르고… 선발전도 치르고, 게다가 민원 처리 일도……. 흠, 돈도 없군. 당장은.”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자, 하나하나 말할 때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뭐지? 뭐가 문제지?

슬쩍 눈치를 살폈다. 헬은 삐친 표정이었고, 강글로트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의아한 얼굴을 숨기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헬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그 여유라는 게 언제 찾아오는 건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쓰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워낙 벌려 놓은 일이 많으니 말이야.”

“흥!”

헬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때, 강글로트가 짝!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까, 이번 일에 대한 배상금이 상당하잖아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대부분 해결되는 게 아닐까요?”

배상금? 눈을 끔벅이자니, 강글로트가 설명한다.

“오시리스를 비롯한 불한당들이 처벌받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집트 신계에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죠. 이집트 신계와 올림포스, 그리고 아스가르드에서도 각각 보상을 준비했대요.”

아스가르드까지? 깜짝 놀랐다.

강글로트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황금과 영혼뿐만 아니라, 보물도 꽤 되니까요.”

보물? 입맛이 확 살아났다.

세 신계의 보물이라니. 얼마나 귀한 것일까?

강글로트가 크흠! 목을 가다듬고 종이를 꺼내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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