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화. 신들리다 (1)
이시스(Isis)는 가정의 여신이며, 자애의 여신이다.
기본적으로 마음이 곱고 헌신적이라 인기 많은 신이다. 하지만 그 여린 마음이 언제나 일을 그르쳤다.
‘아.’
가슴팍을 꿰뚫은 창을 보자니, 옛 기억이 떠올랐다.
이시스는 오디슨을 노려보았다.
“감히……!”
“내 앞을 막는 자에게 내가 줄 거라곤 죽음뿐이오.”
우두둑!
“끄윽……!”
오디슨이 창을 비틀었다.
상처가 벌어졌고, 이시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덜덜 떨던 오시리스가 껄껄 웃었다.
“악녀의 최후로구나!”
그 목소리가 어이없었다.
이시스는 눈살을 구겼다. 일을 수습하러 온 자신이 당했건만, 저렇게 좋아하다니. 짜증이 치밀었다.
‘무식한 사내들이란……!’
지금 한 생각은 오시리스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시리스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아아…….’
오시리스가 세트에게 죽임당한 뒤에 일어난 일.
이시스는 호루스를 홀로 낳았다. 하지만 호루스는 명목상 아버지인 오시리스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세트는 라의 호위를 맡을 정도로 강력한 신. 막 신왕의 자리에 오른 호루스는 강력했지만, 그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두 신은 숱한 싸움을 벌였다.
무승부가 이어졌다. 이집트는 두 신의 싸움에 휩쓸려 엉망이 되었다.
싸움으로 승패가 결정되지 않자, 두 신은 여러 가지 내기를 했다.
‘댁의 신도도, 나의 신도도 모두 죽어 나가고 있으니, 이런 무식한 짓은 그만둡시다!
‘그래, 좋다. 정정당당하게 누가 왕관의 주인 될 자격이 있나 겨뤄 보자!’
목을 건 섬뜩한 내기였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바로 잠수 대결이었다.
오래도록 숨을 참는 이가 이기는 대결. 동시에 나일강에 잠수한 두 신은 한참이나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시스는 빈틈을 노려 세트에게 작살을 박아 넣었다.
‘끄아아악!’
세트는 비명 질렀고, 나일강은 붉게 물들었다.
호루스는 뒤늦게 튀어나와 껄껄 웃으며 이시스에게 세트의 목을 치라 말했다. 세트는 피를 뚝뚝 흘리며 이시스에게 애원했다.
‘동복형제 간의 정을 생각해라, 이시스! 나 역시 네 오빠가 아니더냐!’
이시스는 흔들렸지만, 세트를 풀어 주진 않았다.
세트가 다그치듯 말했다.
‘이시스! 정당한 대결에 끼어들어 비겁한 짓으로 승리를 차지하겠다고? 그리 얻은 왕관을 쓴들 누가 호루스를 믿고 따르겠는가?’
이시스는 그에 어쩔 수 없이 세트를 놓아 주었다.
호루스는 펄펄 뛰며 화를 냈다.
‘아니! 어머니, 어쩌자고 저자를 놓아주셨습니까?’
‘호루스야, 내 말을 들어보거라. 내가 만일 저자를 여기에서 죽였다면…….’
‘듣기 싫습니다! 어머니라 한들 충성의 예를 올리고 군신의 관계를 맺었다면, 법도에 따라야 합니다!’
화가 난 호루스가 이시스의 목을 쳤다.
이시스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마법으로 스스로 부활했다. 이후 모자 관계가 껄끄러워진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지금 역시 그랬다.
“겨우 이걸로 날 죽이려고? 우스운 소리!”
퍼엉!
“컥!”
푸른 덩어리가 오디슨을 후려쳤다.
오디슨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 마법에 맞고 나뒹굴었다.
헬이 깜짝 놀라 오디슨에게 달려갔다.
“오디슨!”
아프로디테 역시 깜짝 놀라 이를 갈았다.
“이시스! 이게 뭐 하는 짓이죠?”
“흥! 내가 분명 기회를 줬건만! 건방진 짓을 해? 나는 가정의 여신, 그리고 자애의 여신이다! 하지만 모든 걸 용서할 거라 생각지 마라!”
가정을 지키고 자애를 베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시스는 마법으로 그 힘을 채웠다.
“감히 대마법사의 자비를 무시하다니!”
이시스의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그녀의 몸 주위로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짙은 눈화장에 가려진 눈에서는 섬뜩한 살기가 번뜩였다.
오시리스가 덜덜 떨었다. 그가 이시스를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마법 솜씨 때문이었다.
특히나…….
‘짐의 몸은 불에 엄청나게 약하다!’
이시스는 뜨거운 사막을 닮은 불마법에 아주 능숙했다.
“내 마법이 저 불한당을 태워 죽이리라!”
번쩍! 그녀의 손아귀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헬은 입술을 짓씹었다. 마법사는 까다로운 족속이다. 소소한 마법이라면야 권능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권능에 비견될 마법을 펼치는 것이 바로 대마법사다.
‘신성이 지쳤어.’
아레스를 처리하는 과정에 힘을 너무 썼다.
헬은 지친 신성을 채찍질했다. 패배가 확실한 승부지만, 지더라도 싸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에서 죽음의 한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따악!
“뭣? 마법 간섭……?”
이시스의 손에서 피어오르던 불길이 사라졌다.
대마법사인 그녀의 마법에 끼어들 수 있는 인물은 아주 한정적이었다.
같은 대마법사.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튀어나올 대마법사는…….
“그만, 더 해 보겠다면… 앞서 말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걸로 알겠다.”
걸걸한 목소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시스가 눈살을 구겼고, 헬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딘!”
“가장 높으신 분이시여!”
강글로트가 넙죽 엎드려 절했다.
오딘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회색 외눈으로 이시스를 노려보았다.
이시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이건 분명, 오시리스 혼자서 꾸민 짓이에요. 이집트 신계는 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만두지. 그대를 먼저 보낸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알고 있지 않나?”
이시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가 먼저 나선 것은 그녀가 한 말 때문이었다.
“…합의는 실패했군요.”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스는 이집트 신계의 명예를 어떻게든 지켜 보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오시리스를 비롯한 이들은 연맹법으로 처벌받으리라.
* * *
사건은 연맹을 뒤흔들었다. 신계 연맹 커뮤니티가 관련 이야기로 도배될 지경이었다.
[속보) 헬 납치! 범인은 오시리스?]+999
무려 여신을 납치하려던 사건이다. 무수한 이들이 범행을 저지른 오시리스를 비난했다. 추가로 여러 가지 증언이 뒤따랐다.
[범행을 저지른 오시리스는 평소에도 헬에게 추파를 던졌다!]+311
[명협 회원의 증언, “그 새끼, 언제든 사고 칠 줄 알았다!”]+991
[여성단체, 연맹에 스토커 관련 법안을 제정할 것을 요구!]+889
대부분이 오시리스에 대한 비난이었지만, 사건을 파고들면서 온갖 사실들이 추가로 밝혀졌다.
[오시리스는 어떻게 헬을 납치할 수 있었나?]+92
[헬 납치 사건 추가 공범 확인! 아레스와 프레이!]+935
[아레스 중상, 하지만 처벌을 피할 수는 없어 보여…….]+999
무려 3개 신계가 얽힌 일이었다.
그 탓인지, 신계 연맹의 단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꽤나 있었다.
[밝으면 그림자도 짙다.]+32
[신계 연맹, 이대로 괜찮은가?]+999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인기 있는 기사들은 바로.
[아프로디테, “내 이상형은 오디슨” 파문.]+999
[아프로디테, 연맹 법원에 이혼 서류 신청! “그런 멍청이와 함께 살고 싶지 않다!”]+999
[아프로디테, 아스가르드 망명 신청?]+999
아프로디테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프로디테는 공범이긴 하지만, 이용당했다는 점과 태도를 바꿔 범죄를 저지하려 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정식 재판에는 회부되지 않았다.
약간의 피해 보상과 더불어 벌금은 내는 선에서 처리되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녀가 TV 방송 따위에서 자꾸만 오디슨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네, 한밤의 토크쇼. 오늘은 최근 사건에 휘말린 분을 모셔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올림포스 최고 미인, 그리고 뷰티비너스의 대표! 아프로디테 님입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TV 속 아프로디테는 박수 소리에 고개 숙여 인사하며 방긋방긋 웃었다.
토크쇼를 진행하는 사회자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일을 물었다. 그중에는 꽤 날카로운 질문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그, 아레스 님과 이혼을 신청하셨다고……?]
이혼설 따위 말이다.
청중이 술렁이고 아프로디테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지나친 폭력성 때문에 같이 살 수가 없더라고요. 이미 별거한 지도 상당 기간 지났고요.]
아프로디테가 아레스의 흉을 보았다.
평소에 벌어오는 건 없으면서 설거지도 안 한다거나, 화만 나면 가구를 때려 부순다거나… 개중에는 에리스에 얽힌 치부도 있었다.
모두가 쉬쉬하면서도 다 알고 있는 아레스의 애인. 그걸 무려 방송 토크쇼에서 대놓고 밝힌 것이다.
질문한 토크쇼 진행자가 당황할 정도.
그는 떨떠름하게 웃으면서도 부드럽게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가만히 놔두면 방송이 끝날 때까지 아레스 흉을 볼 것 같았다.
[음,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것 같은데요. 혹시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그건…….]
아프로디테가 볼을 붉힐 때, 픽- TV가 꺼졌다.
리모컨을 쥔 사내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의 묘약은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가?”
붕대를 칭칭 감은 오디슨이었다.
병원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휴식도 하루 이틀이 달콤하지, 3일이 넘어가니 지루해 죽을 것만 같았다.
‘…훈련하면 또 뭐라 할 테고……. 바람이나 좀 쐴까?’
훈련하면 상처가 벌어져 붕대에 피가 스민다. 그러면 아침에 붕대를 갈 때에 잔소리를 듣게 될 터. 잔소리를 떠올린 오디슨이 고개를 저었다.
외투를 걸쳤다.
끼이익-
두꺼운 문이 열리고, 돌벽과 일렁이는 횃불이 그를 반겼다.
그는 지난 싸움 이후 헬의 배려로 엘류드니르에 묵고 있었다.
* * *
어디로 가지? 가끔 바람을 쐴 때 가던 내부 정원으로 가야겠다.
내부 정원은 성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바람을 쐬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성의 중간쯤에 매달린 형태로 만들어진 내부 정원은 니플헤임에 어울리지 않게 파릇파릇한 식물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발걸음을 옮겼다.
“음?”
이 밤중에 선객이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몸,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나는 그게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헬.”
나지막한 말에 그녀가 돌아보았다.
날 본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부드럽게 휘었다. 은은한 달빛에 비친 그 미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멍하니 그녀를 볼 때, 헬께서 말씀하셨다.
“오디슨, 안 자고… 왜?”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크흠, 그게… 하루 종일 누워 지내다 보니, 잠이 안 와서 말이오.”
“그래? 나도 잠이 안 와서.”
“곁으로 가도 되겠소?”
헬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가 벤치에 앉았다.
달콤한 체향에 무슨 소리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쏴아아아- 시원한 바람에 정원이 휘청거렸다.
“그…….”
헬께서 입을 여셨다.
나는 그녀를 힐끗 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헬께서 말씀하신다.
“고마워.”
피식 웃었다.
“아니, 당연한 일이오.”
“…그런가?”
“헬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 갚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내 대꾸에 헬께서는 어딘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셨다.
다시 또 적막이 감돌았다.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까 고민하다,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속마음을 내보이지 못해 망설였는가? 나는 그런 겁쟁이가 아니었다. 진심을 내보이고 거절당하면야 그냥 끝이다.
툭 내뱉었다.
“헬이시여.”
“응?”
“아무래도 난 그대를 사랑하는 모양이오.”
덤덤하게 뱉은 말에 헬께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하신 건가? 슬쩍 보았더니, 입을 벙긋거리고 계셨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벙긋하시니, 꼭 금붕어 같았다.
“뭐, 뭐, 뭐라?”
더듬거리시며 말씀하시는 게 우스워 피식 웃었다.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거요?”
“아, 아니… 그게…….”
“거절하지 않는 거요?”
어어어- 하고 말씀하시던 헬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씩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잡아 내 곁으로 당겼다.
당황한 눈동자에 눈을 맞추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헬께서 눈을 꼭 감았다.
입술이 맞닿았다.
“아.”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살짝 닿은 입술이 떨어졌다.
헬의 얼굴은 달아오른 쇳덩이보다 뜨거워 보였다. 그분께서는 고개를 푹 숙이시고 부끄러워하셨다.
나는 그저 그 모습이 귀여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턱에 손을 대고 얼굴을 끌어 올렸다.
눈물이 맺힌 듯 글썽이는 갈색 눈동자. 헬께서 입술을 우물거리다 말씀하셨다.
“또?”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겹쳤다. 이번에는 꽤 진득한 입맞춤이었다.
부드러운 입술을 느끼고 혀를 밀어 넣었다. 깜짝 놀라 떠는 몸을 느끼며 부드럽게 입안을 헤집었다.
“하아.”
멍한 표정의 헬을 보자니, 불끈불끈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헬의 손을 잡은 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분을 이끌었다.
헬께서는 멍하니 내 뒤를 따르셨다.
“어…….”
헬께서 정신을 차리셨을 때는 이미 내 침대 위였다.
그분의 드레스에 손을 얹고…….
“자,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오?”
“그, 그게… 크레네는?”
“음? 크레네? 크레네가 왜?”
“어… 나, 나랑 결혼하면 크레네는……?”
어깨를 으쓱였다.
“결혼이야 두 번 하면 되는 것을.”
아, 세 번인가?
뭐 어떤가. 여러 번 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