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화. 신이 내린다(2)
“어딜!”
아레스가 끼어들었다.
그 탓에 오디슨은 사랑의 묘약을 던지지 못했다. 괜히 던졌다가 마르스의 손에 잡히는 순간, 다시 오시리스에게로 넘어갈 테니까.
그사이 늑대 형상을 한 괴물들 간의 대결이 끝났다.
-깨갱!
-크아아앙!
하나가 비명을 질렀고, 다른 하나가 포효했다.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그리고 그 승자는…….
-크어어엉!
세트였다.
악령은 신의 유해로 만들어진 언데드를 이기지 못했다.
-끼이잉…….
악령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그 몸이 천천히 형상을 잃고 있었다.
세트가 거구를 쏜살처럼 튕겨 달려들었다.
“크윽!”
오디슨은 한 손은 사랑의 묘약을 쥐고, 한 손으로 창을 휘둘러 세트를 막았다. 중과부적이다.
오디슨은 뒤로 물러서며 세트와 거리를 벌렸다. 세트는 으르렁대며 풀쩍풀쩍 뛰었다. 공격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오디슨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상황이 좋지 못했다.
‘사랑의 묘약을 던지는 순간, 마르스가 덤벼들 테고… 이 빌어먹을 괴물은… 제길!’
-크어어엉!
세트가 재차 덤벼들었다.
오디슨이 창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부우웅- 창이 허공을 갈랐다. 세트는 그 공격을 쉽게 피해 냈다.
-크앙!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든다.
오디슨은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저 이빨에 씹히는 순간, 싸움이 기울 거라는 걸 알았다.
“엇?”
턱!
오디슨이 깨진 돌조각을 밟았다.
발할라에 닿은 뒤 꾸준한 단련으로 인해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바보 같은 일은 없었다. 다만 아주 잠깐의 틈이 생겼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틈, 세트가 그 틈을 노리고 짓쳐들었다.
-크어어엉!
“제기랄!”
잠깐의 빈틈은 치명적이었다.
제대로 된 방어를 할 수 없었다.
“아앗!”
헬과 강글로트가 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세트가 오디슨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도움의 손길은 의외의 인물이 내밀었다.
“멈춰라, 세트! 사랑의 묘약을 확보해야 하니라!”
-크릉……!
세트가 우뚝 굳었고, 오디슨이 웃었다.
오디슨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군!”
쐐액!
창이 쩍 벌어진 세트의 입천장을 찔렀다.
푸욱!
-크어어억!
콰드득! 오디슨은 찌르는 걸로 멈추지 않고, 창을 돌려 최대한의 타격을 주었다. 세트가 비명 지르며 앞발을 휘적거렸다.
하지만…….
“네가 치는 순간, 이 묘약은 쏟아질 것이다!”
사랑의 묘약을 내민 오디슨. 연약한 병에 담긴 물약이지만, 지금은 그 어떤 방패보다도 훌륭한 물건이었다.
세트는 오시리스의 명령 탓에 사랑의 묘약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고장 난 기계처럼 머뭇머뭇하는 꼴.
오디슨은 창을 더 깊이 쑤셔 넣었다.
“흡!”
푸우우욱!
입천장을 꿰뚫고 뇌까지 닿은 창.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치명상이었지만, 세트는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 없었다. 빛을 잃어버린 회색 눈동자에는 공허하게 오디슨이 비칠 뿐이었다.
눈동자에 비친 오디슨의 얼굴에는 난색이 가득했다.
-끄어, 끄어어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죽지 않다니?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오디슨이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릴 때, 오시리스가 소리쳤다.
“아레스! 놈이 묶였도다! 지금이라면……!”
“흐흐흐. 그래! 공격이 성공했을 때, 그때야말로 제대로 된 빈틈이지!”
아레스가 히죽 웃으며 오디슨에게 덤벼들었다.
오디슨이 흠칫 몸을 떨었다. 창을 빼내자니 누런 침이 뚝뚝 떨어지는 세트의 이빨이 위협적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자니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할 상황이다.
헬이 입술을 짓씹었다.
“으윽! 이, 이까짓 덩굴……!”
마구 몸부림쳤다. 하지만 역시나 덩굴은 끊어지지 않았다.
명계의 왕이면서도 ‘풍요’를 담당하는 이질적인 신, 오시리스. 그는 죽음의 한기를 다루는 헬에게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강글로트 역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라면 오디슨 님은 당하고, 헬께서는 저 썩은 내 나는 미라의 손에 떨어질 거야!’
헬 역시 거대한 신성을 가진 신이다.
사랑의 묘약이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긴 어려우리라. 하지만 정신을 조종하는 권능은 이질적이다.
어떤 식으로 발휘될지 모른다.
잠깐의 틈이라 할지라도 헬에게는 끔찍한 기억이 남을 수 있다.
그러던 중 강글로트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망자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었다.
“오디슨 님!”
꽥 소리쳤다.
그녀는 빛을 잃은 세트의 눈동자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익숙했다. 니플헤임에서 숱한 망자를 보며, 저런 눈동자를 지닌 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비를 베푸세요!”
작은 자비였다.
언데드가 바라는 작은 자비는 모순적인 것.
오디슨은 강글로트의 말에 앞뒤 생각지 않고 자비를 베풀었다.
그가 권능으로 지닌 자비는 단 하나뿐이었다.
“<자비의 빛>이여!”
번쩍! 빛이 있었다.
아레스가 그를 비웃었다.
“전등만도 못한 빛으로 어쩌겠다는 건가!”
하지만 아레스의 생각과 다른 일이 벌어졌다.
-크르릉… 자비… 아, 내가 바라던 자비.
세트의 눈에 빛이 돌아왔고,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죽음… 그 달콤한 자비여!
누더기 늑대가 재로 변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누런 모래바람을 닮은 영혼만이 남았다.
멍한 표정의 영혼, 세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 * *
세트는 본래 이집트 9주신 의회, 엔네아드의 일석을 차지하는 신이었다. 그는 사막과 이방인의 신으로 유목 생활을 하는 사막 민족을 지켜 주는 이였다. 하지만 특유의 방랑벽 탓일까? 가정에 소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인 네프티스가 형인 오시리스와 내통했다는 걸 알고 분노했다.
‘오시리스는 내가 왕좌를 탐낸다 생각했지만…….’
세트는 왕좌 따위 탐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형인 오시리스를 살해했지만, 이시스와 그 아들인 호루스에게 보복당해 죽었다.
죽은 이는 명계에 속했고, 오시리스는 자신의 실권이 세트 탓이라며 그를 언데드로 만들었다.
영원토록 원수의 수족이 되어 일해야 하는 끔찍한 형벌.
그리 족쇄를 달고 있던 게 대체 몇 년이던가.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세트는 몸을 떨었다.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린 감각이었다. 그가 감격하며 그 감각의 이름을 읊조렸다.
-자유… 달콤하구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세트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엉망이 된 끔찍한 몰골이지만, 자신을 해방한 자였다.
세트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맙구나, 어린 신이여. 그리고…….
그때, 아레스가 오디슨에게 덤벼들었다.
“그 약을 내놔라!”
“크윽……!”
오디슨은 당황해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늦었다.
이대로라면 약을 빼앗기고 말 터. 오디슨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제길……!’
오디슨이 인상을 구길 때, 세트가 끼어들었다.
-추악한 왕의 협력자여, 꺼져라!
“크윽? 이, 이게 무슨……!”
쾅!
아레스의 앞에 굳건한 모래 벽이 치솟았다.
권능으로 이뤄진 모래 벽은 아레스라 해도 단숨에 박살 낼 수 없었다.
세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오시리스, 저주받을 왕이여.
“크으… 세트! 명계의 왕인 짐에게 거역하고도 네 영혼이 무사할 줄 아는가! 당장 오디슨에게서 사랑의 묘약을 빼앗아라!”
세트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은 폭군이었지. 동생의 아내를 탐하는 더러운 작자. 아직도 그 버릇을 못 버렸소?
“뭐, 뭐라?”
-내 아내를 취해 아누비스를 낳았지. 역겨운 자여. 그대가 왕위를 빼앗긴 게 정말 내 탓이라 생각하는가?
“허! 왕 시해자인 네놈이 없었더라면 나는 여전히 왕이었을 거다! 더는 죄를 짓지 마라! 본래 내 자리를 찾는 일에 협조한다면, 너를 되살려 주리라!”
오시리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세트는 본래 전투 계열 신이다.
오리시스 이전에 이집트 신계를 다스렸던 태양신 라. 그의 호위를 할 정도로 강력한 신. 오시리스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살해당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영혼 상태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잠깐도 오시리스에겐 억겁 같았다.
‘혼란을 불러오는 자……! 저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세트가 씩 웃었다.
-되살아나? 필요 없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은 없으니. 하지만…….
세트가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사랑의 묘약을 보았다.
-나를 주박에서 풀어 준 은혜는 갚아야겠지.
은혜라는 말에 오디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영혼인 신이 뭘 어쩌겠단 걸까? 게다가 오디슨이 생각하는 세트는 강력한 신이 아니었다. 강한 신이라면 어찌 괴물이 되어 오시리스에게 부림 받았을까? 무지에서 온 오해였다.
“도움이라면……?”
-내 신성을 모두 쏟아 그대를 도울 거요.
신성을 모두 쏟는다?
오디슨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아레스가 모래 벽을 박살 내고 튀어나왔다.
“내가 그를 두고 볼 것 같으냐! 영혼이라 한들, 내 주먹을 피할 수는 없다!”
버럭 큰소리가 석실을 울릴 때 세트가 손을 휘저었다.
그 손길은 바람을 일으켰고, 바람은 태풍이 되었다. 모래가 얽히며 그 태풍은 모래바람이 되었으며, 모래바람은 사막의 모래폭풍이 되었다.
사막을 여행하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으윽!”
오디슨이 지독한 바람에 눈을 가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세트의 목소리만이 휭휭- 바람 소리를 뚫고 쩌렁쩌렁 울렸다.
-내 최후의 권능이다! 모든 것을 망쳐 놓는 모래바람이여!
쐐애애애앵!
-은인을 가호하라!
거친 바람 소리가 모든 것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 * *
“크으…….”
모래폭풍이 사그라들었다.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인지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폭풍이었다. 서 있는지 누워 있는지 주저앉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어깨에 가득 쌓인 모래를 털어냈다. 상처에 들어간 모래가 따끔따끔 통증을 전해 줬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잔뜩이었다.
“쿨럭, 쿨럭!”
“강글로트? 무사하시오?”
“으으… 정말, 끔찍한 바람이었어요.”
강글로트가 고개를 저어 머리를 털어 냈다.
그나저나 은혜를 갚겠다더니… 이게 전부인가?
손에 단단히 들린 창을 고쳐 쥐었다. 모래에 쌓인 석실이지만, 적들은 멀쩡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조심하시오.”
“안 그래도… 어? 오디슨 님?”
“음?”
“창을 양손으로 쥐고 계시네요?”
아뿔싸.
모래바람에 휩쓸리며 사랑의 묘약을 놓쳤다.
살갗이 벗겨져 화끈거리는 등허리를 따라 전신으로 불안감이 퍼졌다.
그 묘약이 오시리스의 손에 들어갔다면?
최악의 상황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퍼어엉!
“빌어먹을 모래!”
마르스가 멀쩡하게 일어났고, 꾸드득- 소리를 내며 모래가 천천히 빠졌다. 오시리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묶여 있던 헬 역시 켈록켈록- 기침을 하며 멀쩡하다는 걸 알려 왔다.
헬께서 멀쩡하신 건 다행이지만…….
“기다리시오, 내 반려 될 여자여. 영혼만 남은 세트는 이깟 눈속임밖에 하질 못하니.”
“치잇… 오디슨, 난 상관 말고 도망쳐!”
“도망은 무슨… 그리 놔둘 것 같소? 후후후.”
오시리스가 비릿한 웃음으로 날 보다 멈칫했다.
그의 얼굴이 구겨진다. 앙상한 손가락을 뻗어 날 가리킨다.
“너, 너너……!”
“뭐지? 손가락이 길다고 과시하는 건가?”
“사랑의 묘약을 어쨌지?”
아, 그쪽인가.
다행스럽게도, 저쪽에 넘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히죽 웃음 지었다.
“끝이다.”
“크아아아악! 내 계획이! 쓰레기 같은 놈! 네놈을 으스러뜨려 내 분노를 풀겠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아는 건가?
놈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아마 아스가르드의 분노를 피할 순 없으리라.
덩굴이 뻗어 나와 내 다리를 휘감았다.
창을 휘둘러 덩굴을 끊어내려 했지만…….
“엇!”
오히려 덩굴에게 창을 빼앗겼다.
헬께서도 풀어내지 못하는 덩굴을 내가 어찌 풀어내려 하던 게 욕심이었나? 제기랄.
용을 쓰며 팔다리를 당겼다.
“끄으으윽! 크읍!”
끊어지지 않는다.
빌어먹을. 이렇게 끝인가?
마르스가 불쾌한 얼굴로 날 보았다.
“…허, 이 정도로 난리를 쳤으면, 발뺌할 수도 없겠군.”
“크흐흐, 발뺌할 셈이었나? 비열하기 그지없는 병신답군.”
꽈아악!
조여 오는 덩굴이 내 뼈를 뒤틀어 지독한 고통이 번졌다. 하지만 나는 얼굴에 쓴 웃음의 가면을 벗지 않았다.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추한 꼴은 보이지 않으리라.
마르스가 이를 갈았다.
“내 손으로 네놈을 죽일 것이다! 지독한 고통의 끝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너를 덮치리라!”
마르스가 한 걸음 한 음 모래를 밟으며 다가왔다.
울룩불룩 솟은 근육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저 끔찍한 힘으로 내 팔다리를 잡아 뽑고 가죽을 벗기겠지.
파멸이 예정되었지만, 나는 웃었다.
“크흐흐! 해 볼 테면 해 봐라! 쓰레기 같은 놈!”
“아, 안 돼… 오디슨! 오디슨!”
간절하게 나를 부르는 헬.
나는 그녀에게 씩 웃어 보였다. 내가 죽는다 한들, 이 정도로 시간을 끌었으면 충분하겠지.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당당할 수 있나 보자꾸나.”
우두둑, 우두둑.
마르스가 주먹을 구겨 관절을 풀며 다가왔다.
나는 웃었다.
“후후후…….”
아, 오딘이시여.
높디높으신 분. 당신의 전사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헬을 구원하소서.
“일단은 가볍게, 네 얼굴부터 뭉개 주지!”
“아……! 오디슨!”
마르스가 주먹을 치켜들었고, 헬께서 비명을 지르셨다.
하지만 마르스는 멈추지 않았다.
“재수 없는 얼굴도 오늘로 끝이다!”
쐐애애액!
주먹이 날아들었다. 단단한 주먹은 투석기가 내던지는 바위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주먹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볼썽사납게 눈을 감는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똑똑히 바라볼 뿐이었다.
목소리가 울렸다.
“아레스! 그만!”
“큭!”
퍼억!
주먹이 얼굴에 닿을 때, 와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 뼈 몇 개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럼에도 눈을 감지 않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씩씩거리며 다시 내게 주먹질을 하려는 마르스와는 시선이 교차했다.
비너스의 목소리에도 돌아보지 않다니. 정말 화가 났나 보군.
그 선택이 운명을 갈랐다.
“아.”
비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근처에 반쯤 묻힌 병을 보았다. 반짝이는 작은 병은 사랑의 묘약 병이었다.
텅 빈 병.
곧 그 내용물을 누가 마셨는지 알아챘다.
비너스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다급한 표정이 풀린다. 멍하니 날 본다. 그 눈동자의 색이 천천히 바뀐다.
무시에서 당황으로, 그리고 호감이 차올랐고, 애정이 차올랐다.
이윽고, 비너스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가득 찼다.
“당- 장! 멈- 춰- 요!”
비너스가 날 보는 눈빛은 익숙했다. 크레네와 눈이 마주쳤을 때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비너스의 권능이 격렬하게 번졌다.
분홍빛 향기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