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106화. 영웅은 없다 (4)
얼음 관으로 스스로를 둘러싼 헬.
그를 앞에 둔 오시리스는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를 어떻게 깰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하지만 오시리스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영원토록 가사 상태에 빠져 있을 순 없다.’
붕대로 감싼 손으로 얼음을 쓰다듬었다.
그 광경을 보던 아프로디테가 쯧- 혀를 찼다.
“약속은 지켰어요. 이에 대한 책임은 모두 당신이 진다는 것, 잊지 말아요. 알겠죠?”
“아아, 짐은 왕관을 쓸 자다. 책임을 미루거나 하지는 않느니라.”
“…그렇다면 믿겠어요.”
아프로디테가 다시 한 번 헬을 바라보았다.
짙은 후회가 그녀를 감쌌다. 트로이 전쟁 때처럼 그저 아름다운 여자를 바랄 거라는 예상은 틀렸다.
‘…여신을 납치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폐위된 뒤 왕위에 집착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후우-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남편, 아레스를 잡아끌었다.
“여보, 돌아가요.”
그 말에 대꾸한 것은 아레스가 아니었다.
오시리스였다. 추악한 미라가 아레스에게 웃으며 말했다.
“오디슨, 그 미천한 놈이 날뛰는 걸 보지 않고 가는가?”
“흐음… 과연 그놈이 그렇게 난동을 부릴까?”
아레스가 답하자, 오시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자를 빼앗긴 남자만큼 분노하는 이는 없지 않겠는고?”
“흐흐흐, 그도 그렇지.”
아프로디테는 두 남자의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뇌리에 지난 일들이 스쳤다. 인기투표, 그리고 투표 조작, 마지막으로 오시리스의 개입.
아프로디테가 얼굴을 굳혔다.
“여보, 당신… 설마?”
“음? 뭐가 그리 놀랍지?”
“…당신이 꾸몄군요. 인기 투표부터 모든 것! 에리스를 이용했어!”
아레스가 히죽 웃었다.
부정할 셈은 아니다. 부부 간에는 비밀이 적을 수도 좋으니.
그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디슨,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날뛰는 하룻강아지에게 벌을 내려 줄 셈이다.”
“미쳤어, 미쳤어, 정말!”
짝짝짝!
아레스의 등짝을 내려치는 아프로디테의 손은 매서웠다.
윽윽- 아레스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냥 맞고만 있진 않았다. 그도 할 말이 있었다.
“올림포스의 왕태자인 내가 당하고 있어야겠나! 그 앞뒤 분간 못하는 멧돼지 같은 놈은 내가 슬쩍 놀리기만 해도 덤벼들 터! 그에 대한 방어라면 놈을 쳐 죽여도 내 죄가 깊어지진 않겠지!”
아프로디테는 그 조악한 변명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 하는 건가? 에로스가 어릴 때도 저런 변명은 하지 않았다.
“허! 정신이 나갔어요? 들키는 순간, 끝이라구요! 끝!”
“들킨다? 우스운 일이군. 어찌 들키겠는가? 어차피 오시리스가 헬을 가졌는데!”
“하지만…….”
부부 싸움을 보던 오시리스가 껄껄 웃었다.
나일강 유역의 진흙으로 만든 이빨이 누렇게 빛났다.
“걱정하지 마시게, 여인이여. 아스가르드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한들, 아무런 걱정거리가 되지 않으니.”
“그게, 무슨! 헬은 니플헤임의 지배자예요! 명계의 여신이라구요. 그런 그녀가 없다면 아스가르드는 난장판이 될 거고,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그 난장판을 막고자 전쟁을 선포할지도 몰라요!”
무서운 미래였다.
‘연맹이 깨지고 연맹 소속 신계 간의 전쟁이 터질 거야!’
아프로디테는 제 예측이 틀리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 낙천적일 수가 없었다.
오시리스가 흐흐- 낮게 웃으며 제 계획을 떠벌렸다.
“짐이 다시 왕좌를 얻기 위해서는, 이집트 신계의 힘이 약해질 필요가 있도다. 전쟁으로 신계의 힘이 약해졌을 때, 나는 헬과 결합하여 그녀의 군세와 내 군세를 이끌고 호루스를 끌어내리리라! 부부의 연을 맺었다면, 아스가르드에서 날 어찌할 텐가!”
정신 나간 계획에 아프로디테가 입술을 짓씹었다.
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계획에 한 손 보탰다는 것이 저주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타박했다.
‘아! 아프로디테야! 아름다움에 눈먼 불쌍한 여인아! 어쩌자고 이런 끔찍한 짓을 했느냐!’
“아!”
충격에 아프로디테가 비틀거렸다.
아레스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리고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낙관적인 이야기를 뱉어 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곁에서 보며 즐기면 그만이다.”
“아레스… 신계 둘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할 말이 아니라구요.”
“글쎄.”
아레스가 어깨를 으쓱이고, 오시리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양패구상한다면, 우리에게 더 좋은 일 아닌가? 올림포스의 세력권이 차가운 북쪽 땅과 뜨거운 동쪽 땅까지 번질 테니.”
아프로디테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말이 틀리진 않다. 하지만 너무 좁은 시각이다.
그 전쟁의 와중에 소실될 영혼이 한둘일까? 게다가 그 전쟁통에 사라질 황금이 한두 푼일까?
살점이 썩어 들어간 사슴을 얻는다고 한들, 멀쩡한 것은 그저 뼈대뿐이리라.
‘아니, 그 뼈마저 삭아 있을지도 모르지.’
아프로디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래 아레스는 이런 남자였다.
‘이런 점에 끌리긴 했지만… 이번 일은 지나쳤어. 절대 들켜서는 안 돼.’
오시리스가 헬을 품는다면, 헬은 차마 그 일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하리라.
여인의 부끄러움을 이용하는 추악한 짓거리지만, 아프로디테의 팔은 역시나 안쪽으로 굽었다.
그녀가 품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오시리스. 받아요.”
“음? 이게 무엇인고?”
후우, 아프로디테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의 묘약이에요. 에로스의 권능으로 만들어 낸 거죠. 그걸 마시게 하고 처음으로 당신을 보게 하세요. 그러면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을 테니.”
“허, 허허허! 아주 기특한지고! 차후 짐이 왕좌를 다시 찾는다면 그대에게 충분한 보답을 하겠다!”
“보답은 됐으니, 뒤처리를 확실히 하세요. 그러면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싸늘한 눈으로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레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저 눈을 할 때의 아프로디테는 잔소리를 쏟아 내는 댐과 같았다.
‘제길, 돌아가면 몇 시간이나 잔소리를 듣겠군!’
아레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프로디테가 그의 팔짱을 꼈다. 사랑이 느껴져야 정상이건만, 아레스는 연행되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어깨가 늘어진다.
아프로디테가 재촉했다.
“우리는 어서 올림포스로 돌아가요. 그리고 할 이야기가 좀 있죠?”
“…제길.”
아레스가 한숨을 쉬고, 제가 타고 다니는 전차로 향하려는 찰나.
소음이 울렸다.
“마, 막아!”
“끄아아아아악!”
비명이 들려왔다.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굳었고, 아레스의 눈살이 좁혀졌으며, 오시리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쾅! 문이 박살 나듯 열렸다.
“여왕님!”
찢어지는 목소리.
그와 동시에 굵은 목소리가 허- 하고 헛숨을 내쉬었다.
“여기 비겁한 것들이 죄다 모여 있구나.”
오디슨이 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씩 웃었다.
빛 덩이의 인도에 그들에게 도착했다.
* * *
“오- 디- 슨!”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낯익은 얼굴이었다. 마르스. 올림포스의 병신(兵神)이 날 불렀다.
입꼬리를 쭉 당겨 웃음을 만들었다.
“누군가 했더니, 제국 절반을 제 손으로 날린 미치광이 아닌가?”
느긋하게 말했지만,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저쪽에 있는 세 신 모두 보통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신성 앞에 무릎이 파르르 떨린다.
오딘… 까지는 아니고, 토르나 펜리르를 볼 때의 저릿한 감각이 고스란히 날 찔러온다. 토르나 펜리르가 이제껏 나를 굉장히 배려했구나.
새삼 그들에게 고맙다.
“이 개자식이……!”
마르스가 나서려 하자, 그 곁에 있던 미녀가 나섰다.
곱슬거리는 금발을 백옥 같은 피부 위로 늘어뜨린 그녀는 눈썹을 팔(八)자로 구부린 채, 마르스의 팔을 붙잡았다.
마르스가 버럭 화를 낸다.
“이거 놔! 내 본신의 힘이라면 저놈을 아주 곤죽으로…….”
“여보! 미쳤어요?”
여보? 그렇다면 저 여자가 바로 비너스인가?
과연, 미의 여신이라 할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난 전사다. 결단코 미녀에 홀려 내가 할 일을 잊지 않는다.
비너스가 마르스에게 속삭인다.
“지금 당신, 오디슨과 싸우느라 벌을 받는 중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그런 와중에 이 자리에서 오디슨을 친다고요? 발뺌할 수 없는 죄라구요!”
“허……! 제기랄.”
마르스가 욕을 뱉으면서도 기세를 가라앉혔다.
쯧쯧, 꽉 잡혀 사는 모양이군. 올림포스 부부 신에게서 눈을 뗐다.
그리고 바라본 것은,
“헬이시여, 제가 구하러 왔습니다!”
헬이었다.
스스로를 얼음에 가두신 모습에 가슴이 쓰라렸다.
분노가 치솟았다.
눈동자를 굴려 붕대를 칭칭 감은 괴물을 보았다.
피부는 말라비틀어졌고,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닮은 놈이다.
역겹다.
“…네가 그 오시리스인가 하는 놈팡인가?”
“고얀! 감히 짐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쳐들다니!”
짐?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미치광이 괴물이 도리깨를 고쳐 쥐며 히죽 웃었다.
“내 아들, 아누비스를 죽인 대역죄인!”
그 개 대가리의 아비라고?
슬쩍 강글로트를 보자, 그녀가 설명했다.
“아누비스는 세트라는 신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 신의 부인과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래요.”
“…그런 건 비밀 아닌가?”
떨떠름하게 묻자, 강글로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죠.”
그 말이 뇌리에 콕 박혔다.
미치광이 괴물이 나를 삿대질한다.
“네놈은 영원토록 지옥 불에 구워지리라!”
대수롭지 않은 저주다.
전쟁터에서는 저것보다 훨씬 독한 말이 일상적으로 튀어나온다.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비는 괴물이고, 아들은 개 대가리라. 아무래도 혈통이 그리 좋은 거 같지는 않은데.”
“이, 이놈이……!”
덤비나? 창을 고쳐 쥐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마르스가 그를 말렸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재수 없는 놈이다.
“저 천둥벌거숭이를 우리 손을 더럽혀 가며 징치할 필요가 있겠소?”
“음? 그게 무슨 소리지?”
“보시오, 저 멍청한 놈과 우리가 손을 섞는다면… 저놈의 신성만 배불리 채워 주는 일이 될 거 아니오? 워낙 격의 차이가 심해야 말이지.”
격의 차이라.
그러고 보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아쉬우면서도 미약한 안심이 들었다.
“…안심?”
입술을 짓씹었다.
강한 신들을 두고 있자니 이 빌어먹을 몸뚱이가 겁먹은 것인가?
콱 세게 깨문 입술에서 쇠 맛이 났다. 투쟁심이 들끓는다.
마르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렇게 하면 되겠지.”
그가 뒷짐 지며 소리쳤다.
“올림포스의 왕태자, 나 아레스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 외침에 너른 석실이 부르르 떨렸다.
권능인가? 흠칫 몸을 떨고 눈을 가늘게 떴다.
보고 피한다. 그게 목표였다. 잘될지는 모르겠다.
침을 꿀꺽 삼켰다.
“…프레이보다 몇 배는 강하군, 젠장.”
입안에서 욕을 뇌까렸다.
하지만 내 얼굴은 내 뜻과 상관없이 히죽대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던 등줄기를 따라 짜릿한 흥분이 치달렸다.
강자와 싸우는 것. 그것만큼 짜릿한 일이 또 있을까?
“나의 동맹, 두아트의 지배자 오시리스가 불한당에서 습격받았도다! 동맹의 우의(友誼)를 맺었으니, 감히 두고 볼 수 없도다!”
헛웃음을 흘렸다.
“허… 우의 같은 소리를 하다니.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은가?”
마르스는 적아를 가리지 않고 싸움만을 반복하는 미치광이로 유명하다. 그가 관여한 전쟁은 모두 어마어마한 피가 흘러야 끝이 났다.
놈은 분명 내 지적을 들었다. 그러니 관자놀이에 혈관이 불뚝 튀어나왔겠지. 하지만 날 노려보면서도 주문을 끝까지 완성했다.
“오라, 엘리시움의 영웅들이여! 내 앞의 불한당을 처형하라!”
영웅? 젠장할.
헤라클레스 같은 놈이 튀어나오는 것인가?
신계 연맹 치안청에서 만난 헤라클레스를 떠올렸다. 보통이 아니었다.
그와 맞붙는다면, 그 승률은?
“…반반, 아니 내가 지겠군.”
입술을 깨물었다.
튀어나올 영웅만이 문제일까? 아니, 오시리스와 마르스, 비너스가 더 큰 문제였다.
셋의 신성을 합치면? 내 신성의 100배는 우습게 넘지 않을까?
싸움은 좋지만, 지금 싸움이 중요한 게 아니다. 뭣이 중한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강글로트가 내 망토를 잡아당겼다.
“…오디슨 님.”
“걱정 마시오. 헬을 구하는 데 정신을 쏟을 테니.”
작게 덧붙였다.
“그러니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시오.”
그와 동시에 흰 차원문이 생겨났다. 어마어마한 기운이 풍긴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을 피하면 지는 것만 같아 눈살을 좁히면서도 그에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번- 쩍!
“윽!”
제기랄. 저건 무리다.
흰 차원문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마르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하하! 엘리시움의 영웅들을 이길 수 있겠느냐! 어디 발버둥 쳐 보아라!”
빌어먹을 놈. 병신이라는 놈이 직접 덤비지 않고 수하를 부리다니!
창을 고쳐 쥐고, 이를 악물었다. 따끔함을 참고 눈을 떴다.
“…음?”
뭐지?
나만이 아니라 모두의 표정이 물음표를 그렸다.
흰빛이 사그라든 자리에 기골이 장대한 영웅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마르스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허공에 종이 한 장이 날았다.
“이건?”
손을 뻗어 그 종이를 잡았다.
…모르는 문자다. 강글로트에게 그 종이를 넘겼다.
강글로트가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음… 엘리시움의 영웅들은… 모두 아레스, 당신의 명을 거절하오. 추신. 나는… 당신과 동격이니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시오. 헤라클레스, 엘리시움 관리자백.”
강글로트의 낭독이 끝났다.
드넓은 석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마르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고, 비너스가 고개를 돌렸다. 오시리스가 마르스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대를 도울 영웅은 없군, 마르스.”
마르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