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105화. 영웅은 없다 (3)
이라호드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 했다.
무안함을 감추고자 홀로 중얼거렸다.
“여기에도 없잖아!”
“저 미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했다.
쾅!
문을 세게 닫았다.
그 문에는 사람을 간략화한 파란색 픽토그램(그림문자)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치마는 표현되어 있지 않았다.
남자 화장실이었다.
“내 눈에 띄기만 하면…….”
발키리의 체면을 구겨 가며 화장실까지 뒤진 이라호드다.
소변기에 붙어 있던 사내들의 경악한 표정을 뒤로하고 모든 칸을 뒤졌다.
하지만 오디슨은 없었다.
“후우.”
이라호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TV만이 보는 이도 없는데 홀로 떠들 뿐.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알프헤임 태양궁전에서 의문의 폭발이 관측되었습니다. 자료화면, 함께 보시죠.]
뉴스 소리에 이라호드의 귀가 쫑긋했다.
그녀의 눈이 TV로 향한다.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는 중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오디슨과 연관된 건 아니겠지?’
TV 속 화면이 거대한 빛줄기를 비춘다.
이라호드는 속이 탔다. 시간은 이제 정말 촉박했다.
“쯧, 이건 쓰기 싫었는데…….”
핸드폰을 꺼내 GPS를 가동했다. 다른 발키리라면 목록에 수두룩한 이름이 떠올랐겠지만, 이라호드에게 떠오르는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오디슨 - Loading…….]
잠깐 기다렸다.
빠릿빠릿하던 기계지만, 가끔 신호가 잘 안 잡힐 때가 있다. 이라호드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곧이어 인상을 구겼다.
[오디슨 - 신호 없음!]
“뭐야? 고장 난 거야? 하필이면 이럴 때!”
이라호드가 발을 동동 굴렀다.
여기저기 뒤져 봐도 오디슨의 흔적은 없었다. 휴게실에서 뿅- 사라진 게 아니라면야, 자연스럽게 남아야 할 흔적도 없다.
이라호드가 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이그나르의 가게로 갔나 싶어 전화를 해 봤지만, 이그나르는 오디슨을 못 봤다 했다.
크레네 역시 오디슨을 본 적이 없단다.
‘어쩌지…….’
어쩔 줄 몰라 당황할 때, 상급 투기장을 관리하는 발키리가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대뜸 말을 꺼냈다.
“이라호드, 오디슨은?”
“아, 선배… 그게, 잠깐만 더 기다려 주세요.”
발키리가 눈살을 구겼다.
이라호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3분만 더 있으면 바로 경기 개최야. 그런데 선수가 없어지다니… 전속 발키리가 자기 담당을 잃어버린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응?”
“그, 그게… 잠깐 한숨 자겠다고 들어간 사람이 없어졌어요. GPS는 고장 났는지 먹통이구요.”
후우- 선배 발키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수로 따지자면 한참 후배지만, 귀엽다고 봐주기엔 일이 너무 꼬였다.
발키리가 툭 내뱉었다.
“몰라, 경기 시작 때까지 못 찾으면 곧장 실격패야. 명심해.”
“…실격패.”
이라호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입장이 늦어 실격패 당하면? 오디슨은 분명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리라.
‘자기가 늦은 탓인데… 후우.’
그나저나 의문이 들었다.
크레네에게 오디슨의 행방을 물은 것은 ‘임시 동맹’의 단체 대화방이다. 분명 헬도 이걸 봤으리라.
그런데 왜 아무런 말이 없는 걸까? 바쁜가?
이라호드가 고개를 저었다.
‘바쁘다고 이런 일에 안 끼어들 사람은 아닌데…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한시가 급했다.
이라호드가 선배에게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일단 잠깐만 더 기다려주세요. 5분만!”
“…칫, 5분이라니… 알았다. 후우… 관중들한테 뭐라고 해야… 앗!”
발키리가 흠칫 놀랐다.
이라호드는 발키리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라호드와 발키리가 동시에 무릎 꿇었다.
“오딘이시여!”
괴팍한 노인의 얼굴을 한 신.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두 여자를 보고 있었다.
이라호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투기장의 주인은 오딘이시고… 이 경기, 선발자 증명을 계획한 것도 오딘이신데… 오디슨은 대체…….’
불호령이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이 경기는 취소해야겠군.”
“네?”
이라호드는 불경한 짓이라는 것도 깜빡할 정도로 놀랐다.
경기가 취소되다니? 오디슨이 없어서? 오디슨의 실종 때문에 취소된다면, 편애니 뭐니 복잡한 이야기가 나올 게 뻔하다.
선배 발키리도 그 점을 지적했다.
“하오나, 오딘이시여! 그런 식으로 갑작스러운 취소를 하게 된다면…….”
“아아,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는 안다. 하지만…….”
TV 속 뉴스가 다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속보입니다! 요 몇 분간 죽은 이들이 니플헤임으로 가지 못한 채 악령이 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에 헬께 문의했으나, 헬께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어…….]
오딘이 미간을 좁혔다.
다른 이들이라면 실수를 저질렀겠거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헬이다. 지난 수백 년간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은 니플헤임의 지배자.
보통 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있었다.
“들어라!”
오딘의 걸걸한 목소리가 대기실을 벗어나 아스가르드 전체로 퍼져 나간다. 발할라에서도, 세스룸니르에서도, 알프헤임에서도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쟁의 신이 아스가르드의 왕으로서 명한다.
“아스가르드 전체에 비상령을 선포한다!”
왜애애애앵- 사이렌이 울었다.
묠니르 도난 이후 처음으로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그 정도로 큰일이었다.
* * *
“아누비스라는 놈이 날 데리고 왔던 곳인가?”
이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다른 곳? 모른다.
음습한 어둠이 자욱하게 눈을 가리고 있었다.
쯧! 그 개 머리를 한 놈이 사라졌다더니, 불 하나 켜 놓지 않는군. 그보다…….
“으으……!”
쓰게 웃었다.
내 품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강글로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강글로트, 나는 강글라티와 싸우고 싶진 않소만.”
“네? 그게 무슨… 어? 여기는……?”
강글로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 품에서 벗어난 그녀가 당황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소?”
“어… 오디슨 님. 여기는 사후세계의 사후세계인가요?”
“아니, 예전 내가 아누비스라는 놈에게 끌려왔던 그곳인 모양이군.”
“…두아트?”
두아트?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강글로트가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오시리스, 그 더러운 미라가 감히!”
낯선 이름을 내뱉으며 분노를 토하는 강글로트.
나는 일단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태양왕의 어명>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아누비스에게서 얻은 물건으로 공간을 가르고 도망쳤노라고.
“그래서 여기로 왔소. 하지만 헬께 안내해 달라고 빌었으나, 여긴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군. 헬께서 안 계시니 말이야. 내가 피하는 데 급급해서 그랬나 보오.”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화살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 그리고 화살이 쏟아지는 그 앞으로, 사수의 턱 밑으로 숨어드는 것.
나는 후자를 선호하나, 나도 모르게 그 권능에 겁을 먹은 게 아닐까? 수치스럽다.
부끄러움에 입을 앙다물었다.
강글로트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뇨, 아무래도 제대로 온 것 같아요.”
“제대로 왔다?”
“네. 그 더러운 미라 놈은 계속해서 헬께 구애했거든요. 게다가…….”
강글로트가 자신의 추리를 풀어 놓았다.
올림포스의 인기투표, 그리고 그에 심판이 된 오시리스.
그리고 아프로디테의 우승.
“아무래도 수상해요. 분명 미의 여신인 만큼, 아프로디테는 아름답지만… 헤라나 아테나가 아름답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결정이 너무 빨랐어요. 꼭…….”
“뒷거래가 있었던 것처럼?”
강글로트가 네- 하고 대꾸하고 말을 이었다.
“아프로디테는 이전에도 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어요. 가장 아름답다는 인정을 받으려, 심판을 매수한 일이죠. 그 탓에 일어난 전쟁이 바로 트로이 전쟁이구요. 그리고 미의 여신들은…….”
“사람을 홀리지.”
프레이야가 떠올랐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뱉던 추악한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왜 날 사랑하지 않죠?’
사람을 홀리려던 역겨운 수작이었다.
아프로디테가 어쩌고 했던 게 이런 일이었던가? 추악한 욕망으로 헬을 납치하다니.
인상을 와락 구겼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분노가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내 빌어먹을 연놈들의 멱을 따 주리라!
으드득!
“여기 어딘가에 헬께서 계신단 말인가.”
이를 악물며 말하자, 강글로트가 날 말렸다.
“잠깐! 오시리스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에요!”
“하지만 헬께서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뇨, 헬께서는 아프로디테의 정신 공격에 당하기 전에 스스로를 죽음의 한기로 감싸셨어요. 그러니 일단 물러난 뒤에 아스가르드에 이 일을 알려야 해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헬을 구하는데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린다? 어째서인지, 마뜩잖다.
내가 머뭇거리자 강글로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디슨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기가 아누비스의 거처라면… 이집트 신계의 괴물, 암무트의 둥지로 향하는 구렁텅이가 있을 거예요. 이 짙은 어둠 속에서 그런 위험을 안고 움직이는 건 자살 행위예요!”
“그게 문제던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글로트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싸우는 도중에 흘렸는지, 제 폰도… 어?”
강글로트가 입을 헤- 벌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뽀글뽀글 기묘한 모양으로 말려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벙긋거리다 말을 내뱉는다.
“그, 그게 뭐예요?! 그 빛!”
씩 웃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내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빛에 놀란 모양이었다.
뿌듯하지만, 평온을 가장하고 말했다.
“아까 프레이의 권능을 보지 않았소?”
“프레이의 권능? <태양왕의 어명> 말이에요? 하지만 여긴 태양조차 비치지 않는 지하인데……. 어떻게……?”
“그야 봤다면, 배울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그리고 배울 수 있다면 응용도 할 수 있다.
강글로트의 얼굴에 감탄이 서린다. 신성을 움직이는 기묘한 감각을 따라 하는 건 힘들었다. 프레이처럼 신성을 움직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보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빛이여.”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신성이 절로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서 떨어져 나간 빛 덩어리가 허공에 둥둥 떴다. 어둠이 빛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다.
“하… 대단하네요!”
강글로트가 감탄했다.
하지만 나는 얼굴을 구긴 채 빛 덩이를 노려보았다.
“오디슨 님?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요?”
강글로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기술에 이름을 어찌 붙여야 하나, 고민이오.”
“…이름요?”
“그래. 프레이의 기술을 흉내 냈다고는 해도 태양이 아니니… 흠. 그러면 <자비의 빛>이라고 해야겠군.”
강글로트가 멍하니 날 쳐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러설 생각은 없으신 거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말을 고르다 뱉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분의 구출을 맡기고 싶진 않군.”
강글로트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알 수 없는 소리를 뱉었다.
“…서로 너무 둔하잖아요.”
뭐가 둔하다는 거지?
어쨌든, 당장 헬께서 계실 곳을 찾아봐야겠다.
빛이 우리를 인도했다. 나는 이 반짝이는 것의 부가 기능을 알아챘다.
“목적지로 안내하는군!”
내가 짜낸 권능이지만, 나도 모르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 길이 안전한 길은 아니었다.
“엇? 치, 침입자! 침입자다!”
갈색 피부를 지닌 사내들이 꽥 소리쳤다.
아무래도 창이 나설 차례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