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103화. 영웅은 없다 (1)
헬은 기분이 좋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는 들떠 있었다. 세력전 선발 증명 3차전. 아마 증명의 끝이 될 경기를 앞두고 오디슨을 축하하러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메시지 하나에 기분이 침몰했다.
[프레이: 네 권리를 빼앗으려던 이들을 알아냈다.]
프레이는 왕권을 담당하는 신. 하계의 왕들은 모두 프레이에게서 왕권을 내려 받았다. 그건 신계라 한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프레이가 신들의 주권을 하사한 건 아니다. 허나 영토를 다스리는 데 있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영토를 지닌 신들은 프레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헬 역시 그랬다.
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에 안 들어.’
프레이야의 오빠라는 사실에 예전처럼 적당히 하하 호호 하는 관계를 꾸려 가기 힘들었다. 게다가 혹여 오디슨이 착각이라도 한다면?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 불편하세요?”
강글로트의 물음에 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헬이 불편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그렇지. 왕권에 관련된 권능을 지닌 만큼… 프레이의 도움이라면, 찌꺼기들과 내통한 놈이 누군지 알 수 있겠지.”
“한시라도 빨리 변절자를 찾아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후우.”
강글로트가 제 바람을 내뱉었다.
니플헤임 습격 이후로 헬하임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그 중심이 되는 엘류드니르의 분위기는 흉흉한 정도를 넘어 흉악한 수준이었다.
강글로트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엉망이야.’
바로 오늘 아침에도 행정을 맡은 이들은 은근슬쩍 다른 이를 고발하는 일이 있었다.
‘저놈이 아무래도 딴 주머니를 찬 것 같습니다.’
그뿐인가? 지난밤에도 시녀 하나가 다른 시녀의 행동거지가 이상하다며 고발했다.
‘총집사님, 그 애, 아무래도 수상해요.’
최근 들어온 숱한 고자질이 모두 헛소문이었다.
오늘 아침에 들어온 행정관의 고발은 헬이 따로 맡긴 임무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들어온 것? 그 시녀가 최근 연애를 시작하며 편지를 주고받은 탓에 퍼진 헛소문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강글로트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오랫동안 헬 아래서 일해 온 강글로트는 헬의 부하들이 서로를 불신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헬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내 군단이 콩가루가 될 테니… 두고 볼 순 없지.”
쓰게 웃었다.
그를 막고자, 오디슨을 축하하러 가겠다는 일정마저도 미룬 것이다.
소리 없는 마차가 소리 없이 멈췄다.
“아! 니플헤임의 주인이시자, 모든 망자들의 위에 서신 분! 찬란한 프레이 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마차 문이 열리기 무섭게, 알프헤임의 료스알프 기사 하나가 헬에게 말했다. 헬은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인 뒤, 프레이의 궁전에 들어섰다.
알프헤임 태양 궁전은 대리석과 황금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곳이지만, 헬은 그 외관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료스알프 기사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모든 방문객이 탄성을 흘리는 곳이건만…….
“안내, 하지 않을 텐가?”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헬의 핀잔에 제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기사가 앞장섰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응접실. 이런저런 서류를 살피던 프레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헬과 강글로트를 반겼다.
“빨리 왔군.”
“중요한 일이니까.”
헬은 짧게 말하고 소파에 앉았다.
프레이가 피식 웃었다.
“그렇지. 감히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영토를 어지럽힌 일이니,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지.”
“그래서,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다며?”
“그래, 하지만 마지막 조각이 남았다.”
마지막 조각?
헬이 눈썹을 찌푸리자, 프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확실히 하자는 거야. 괜히 확실치도 않은데 말을 들었다가 괜한 사람을 잡을 수도 있지 않나?”
“으음… 그 확실하게 하는 법은?”
“그야, 내 권능을 쓰는 거지.”
프레이가 이어 말했다.
“내 권능은 크게 두 갈래지. 너도 알다시피, 태양과 왕권에 관련된 것. 맑은 날씨는 의미 없으니 집어치우고, 왕권에 대한 건… 왕권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왕권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그야, 왕권을 살펴보면 누가 네 왕권을 탐내는지 알 수 있으니까. 대신 몇 가지 제한이 있어서 미리 말해 주는 거야.”
몇 가지 제한?
헬이 고개를 갸웃했다.
“몇 가지 제한이라면?”
“일단 직접 접촉. 그리고 상대가 권능을 방어하지 않을 것.”
“…흐음.”
직접 접촉이라는 게 약간 꺼려지긴 했지만, 손 정도라면야. 권능을 방어하지 않는다? 그래 봐야 프레이의 권능은 헬과 다른 방향이었다.
공격보다는 운영에 치중된 권능.
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밀었다.
“내통자를 찾기 위해서라면.”
“아아,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다.”
프레이가 헬의 손을 잡고 신성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헬은 내통자를 알아챌 수 있었다.
헬이 까드득, 이를 갈았다. 싸늘한 눈으로 프레이를 노려보았다.
“내가 찾던 내통자는 아스가르드의 반역자가 아니건만.”
헬이 찾던 이가 아닌 다른 내통자를 알아챘다.
헬은 매몰차게 프레이의 손을 떨쳤다.
“제정신인가, 프레이?”
“흐흐흐, 내 동생과 세스룸니르를 건드리고도 아무런 보복이 없을 거라 생각했나? 오만하기 그지없는 해골들의 여왕이여?”
“…허.”
헬이 당황스럽다는 듯 헛숨을 내쉬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헬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나와 니플헤임의 연결을 끊었다 한들, 네 신성으로 그를 유지하는 건 잠깐뿐이다. 게다가 겨우 그걸로 나를 위협할 수 있을 거라 여겼나? 응?”
쩌저적- 한기가 몰아쳤다.
프레이의 권능으로 니플헤임의 왕권을 끌어오지 못하는 헬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지닌 죽음에 대한 권리는 여전했다.
죽음의 한기가 응접실을 뒤덮었다.
강글로트가 손톱을 길게 뽑으며 으르렁댔다.
“프레이… 이 일을 무난하게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장난은 그만두시는 게 좋아요.”
“흐흐흐, 헬의 집사가 내 걱정도 해 주는구나. 하지만 걱정 말거라.”
프레이가 눈을 번뜩였다.
“나 역시, 무난하게 넘길 생각은 없으니.”
“하. 맑은 하늘 아래 얼음이 얼지 않는다 생각하는가? 어리석구나, 프레이. 네놈에게 니플헤임의 차가운 주민등록증을 발부해 주겠다!”
헬의 외침과 함께 쩌저적- 공기가 얼어붙었다.
프레이가 움찔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하얗게 서리 낀 응접실에서 그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헬이 그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얼어붙어라!”
그와 동시에 프레이의 품에 있던 휴대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헬,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라서 말이에요.
헬이 눈살을 구겼다.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강글로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프로디테?”
뷰티비너스 광고에서 듣던 목소리.
헬과 강글로트 모두 화장품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만큼 모를 수가 없었다. 두 여자의 머릿속 경고등이 붉게 번뜩였다.
아프로디테라면 분명…….
-당신의 신성, 한 부분이 약화된 상태라면, 내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겠죠.
우우우웅- 응접실에 찬란한 무지개가 떠올랐다.
그리고 헬의 동공이 떨렸다.
“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헬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헬은 생각했다.
‘미(美)를 담당하는 것들은 마음에 안 들어… 사람을 홀리니까.’
그게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에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그리고 헬은 저도 모르게 한 이름을 불렀다.
“오디슨…….”
우웅- 짧게 팔찌가 떨렸다.
오디슨이 그녀에게 선물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헬의 신성이 헬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쩌저적-!
얼음이 얼어붙는다. 헬은 차가운 얼음관으로 제 몸을 온전히 감쌌다.
그와 동시에 얼음관이 응접실에서 사라졌다.
“여왕님!”
강글로트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강글로트가 으득- 이를 악물었다.
“프레이……! 감히, 여왕님을!”
“허… 헬의 집사 주제에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프레이가 히죽 웃었다.
“내가 버릇을 고쳐 주지.”
그가 태양 빛을 끌어모아 찬란한 칼을 이뤄 냈다.
* * *
‘오디슨.’
날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곧 싸움이 시작될 터. 이번 싸움을 마치면 아마 세력전을 준비해야 하리라.
세스룸니르의 강자들과 맞붙을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당면한 시시한 싸움에 얼굴을 구겼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분명…….”
헬이셨다.
헬께서 날 부르신 건가? 그냥 꿈인가?
미간을 찌푸리고, 헬께서 선물하신 반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가 헬께 선물한 팔찌와 같은 팔찌를 쓰다듬었다.
악령이 끼잉- 하고 울었다.
그와 동시에 우우웅- 팔찌가 떨렸다.
“음?”
붉게 달아올라 떨리는 팔찌.
나는 문득, 드베르그 장인 조합의 조합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사령금은 사령금끼리도 공명하지만, 세트끼리 더 강하게 공명하거든. 세트는 주(主)와 종(從)으로 나뉘고, 종의 이상이 주에 전달되는 정도지만… 대충 보아하니, 이미 종의 반지를 끼고 있구만? 원래 커플끼리 맞출 땐 주종 두 세트를 만든 뒤, 각각 하나씩 나눠 서로의 이상을…….
내 팔찌는 주의 팔찌. 그리고 헬께 건넨 것은 종의 팔찌다.
주인이니 종이니 말이 이상하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하기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게 이상 현상을 보인다는 것은…….
“…헬께 무슨 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는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곧 있을 싸움을 준비하라 한다. 하지만 난 그 속삭임을 무시했다.
세력전? 증명?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은혜를 갚는 것만큼 중요할까? 아무리 잘 싸우면 뭣하랴.
은혜도 모르는 놈에게 명예는 없다.
“가 봐야겠군.”
지금 나간다고 하면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이 생기리라.
이라호드가 말릴 테고, 터미널에서 또 발키리와 티격태격하여야 한다.
게다가 헬께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알 게 무엇인가?
“…아누비스.”
그는 분명 제 자신을 길을 여는 자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아누비스의 낫은 허공을 베어 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낫을 이용해 발할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갈 수도 있으리.”
우드득- 내 안의 광신이 영혼을 한입 베어 무는 걸 느꼈다.
“크으으……!”
지독한 고통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지만, 이를 악물어 참아 냈다.
사라지지 않는 고통 속에서 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허공을 천천히 내리그었다.
“큭! 아누비스의 낫이여, 나를 헬께 안내하라.”
콰드득, 콰드드득!
허공을 가르는 검은색 창날.
그 창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검은 상처가 남았다. 허공에 둥둥 뜬 검은 상처는 내가 베어 내려갈수록 점점 깊어졌다.
상처가 벌어진다.
제대로 됐을까? 걱정이지만, 발을 내디뎠다.
제대로 됐다. 걱정은 씹어 삼키고 스스로 확신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으음?”
차가운 바람을 떠올렸으나, 나를 반긴 건 번뜩이는 햇살이었다.
눈부신 햇살 앞에 눈살을 구겼다. 당황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누, 누구냐아!”
“정체를 밝혀라!”
철컹철컹, 쇳소리.
익숙한 소리다. 갑옷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에 나는 꾹 감았던 눈을 떴다.
부옇게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화려한 궁전 앞에 귀가 긴 놈들이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곳의 정체를 알아챘다.
“…알프헤임.”
프레이의 땅이다. 프레이, 그리고 프레이야.
그 남매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내가 여기에 온 거지?
눈살을 찌푸리고, 눈앞의 병사에게 물었다.
“헬께서는… 궁전 안에 계시는가?”
알프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당황이 묻어나는 표정, 그 표정은 내가 이제껏 전쟁을 벌이면서 몇 번이나 본 것이었다.
무언가 계획이 틀어졌다는 얼굴. 눈썹을 찌푸리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고, 살짝 입술을 씹는 바로 그 얼굴이다.
그리고 소리치려 할 때, 내가 피식 웃었다.
“‘침입자’라고 외치려고? 안됐지만, 들켰다.”
푸욱!
병사의 표정에 당황 외에도 절망이 서렸다.
그 목을 파고 들어간 창 때문일까? 녀석은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며 피를 토했다.
“크어, 크어억……!”
“무, 무, 무슨!”
옆에 있던 놈은 눈치가 좀 느리군.
“당황하기보다는 사람을 모아 막을 생각을 하라.”
스걱!
찔렀던 창을 그대로 휘둘렀다.
목 한쪽을 찢어 버리며 창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피가 튀었다.
“커억!”
궁전을 지키던 병사 둘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영혼의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놈들의 영혼을 삼킨 덕이리라.
“후우, 좀 낫군. 그런데…….”
뭔가 장치가 있었나? 우르르 알프들이 몰려나왔다.
서둘러 경비를 처리한 이유가 없군.
“침입자다! 놈이 프룀과 우디를 죽였어!”
“막아! 궁전에 발 들이지 못하게 하라!”
허-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날 막아 보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우우웅- 룬스톤이 울었다.
〈늑대가죽을 쓰고 늑대가 되어,〉
《양 떼는 그를 해치지 못하노라.》
나는 약자를 짓뭉개며,
〈제국을 깨부수어 조각낸 사내.〉
《숫자는 그에게 문제가 아니오.》
나는 홀로 다수를 포위한다.
내 앞을 막는 자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