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화. 영웅은 답 없다 (4)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세력전 선발 증명에 나선 거인, 바스프는 거인족답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큰 덩치를 역이용해 싸웠다.
덩치가 있다 보니, 주먹을 작게 휘두른다 해도 빈틈이 넘쳐났다. 보통 맨주먹 싸움은 키가 큰 쪽이 유리한 편이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나 버리면 오히려 작은 쪽이 유리하다.
바스프의 주먹을 피하고 무릎을 집요하게 노려, 녀석의 발을 빼앗았다.
그 이후는 일방적인 싸움이었고, 바스프는 항복했다.
관중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한숨이에요?”
이라호드의 말에 쓴웃음 지었다.
왜 한숨이냐고? 그야 뻔하다. 승리 수당으로 받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3천만 크로나. 적은 돈은 아니다.
“이래서 언제 황금 사과를 먹어 보나 싶어서 말이지.”
부족민 셋을 구출하는데 들 황금이 3억 크로나. 실제로 그들을 구출하고 지원하려면 그 이상이 들리라.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도 이 돈이 적지 않다는 건 알지만…….”
“사람 마음이 언제나 그렇죠, 뭐.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크레네가 날 위로했다.
딱히 위로는 되지 않았다.
“난 신이니까.”
“신이라고 뭐, 특별히 보통 사람이랑 다르지도 않잖아요. 저것만 봐도 그렇지 않아요?”
이그나르의 가게 한쪽에 있는 TV를 가리키는 크레네.
TV에서는 그녀의 말처럼, 별 시답잖은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계 연맹 커뮤니티에 올라온 인기투표! 무려 올림포스 최고 미녀를 뽑는 투푠데요. 이 투표 때문에 여신들이 꽤 신경 쓰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자세한 내용, 레이프 에릭손 특파원에게 들어봅시다. 레이프 특파원?]
[네, 여기는 올림포스입니다. 최근 인기투표가 화젠데요. 그 열기를 현지에서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저기…….]
예전 내가 구해 준 바 있는 레이프 에릭손이라는 사내가 올림포스에서 행인들을 붙잡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이그나르가 흐음- 침음을 흘렸다.
“요즘 저거 가지고 말이 많더라고. 토르손, 너는 Top3 중에서 누가 제일 좋냐?”
“네? 으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형님?”
이그나르와 토르손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저것 때문에 선발 증명이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았다. 짜증 나는 일이었다. 올림포스 놈들… 하필이면 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이라호드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오디슨, 오디슨은 어떻게 생각해요? 아프로디테, 아니… 비너스, 미네르바, 유노 중에서 누가 제일 예쁜 것 같아요?”
뜬금없는 질문에 눈살을 구겼다.
셋 중 누가 제일 좋으냐는 질문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크레네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내 대답을 재촉했다.
“자애로운 헤라, 지혜로운 아테나, 그리고 예쁘기만 한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의 금발은 좀 천박해 보이지 않아요?”
“금발이 천박하다니. 뭘 암시하는 질문이죠, 크레네?”
“그냥 널리 퍼진 이야기죠, 뭐.”
크레네가 어깨를 으쓱이고, 이라호드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두 여자의 질문에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일단 비너스는 아닌 것 같군.”
“네? 왜요? 금발이 어쩌고, 그걸 믿는 건가요?”
이라호드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제국 놈들이 가장 좋아하던 여신이니까.”
“아…….”
이라호드가 탄식을 터트렸다. 이해했다는 의미가 가득 담긴 소리였다.
그리고…….
“미네르바도 마음에 들진 않지. 지휘관이랍시고, 말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놈들이 모시던 신이니.”
크레네가 눈을 반짝였다.
“자애로운 갈색 머리에 풍만하고 포근한 헤라를 가장 좋아하는군요!”
그렇게 되나?
뭐, 셋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야…….
“셋 중에서는 유노가 가장 낫군.”
“후후후, 그럴 줄 알았어요!”
크레네가 기뻐했다. 그녀와 유노는 그다지 닮지 않았지만, 크게 보자면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외모가 유노이니… 그럴 법도 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보다, 증명은 이게 끝인가? 그냥 세력전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시무룩하게 있던 이라호드가 고기 한 점을 씹어 삼키고 대꾸했다.
“아뇨, 그렇진 않아요. 바스프는 분명 강하긴 했지만… 듣자 하니 더 도전할 사람이 남은 모양이거든요. 이제 저 인기투표도 거의 끝났으니… 아마 오늘보다는 수당이 늘 거예요. 장담해요!”
관심이 몰릴수록, 수익이 늘어나는 구조니까요- 이라호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황금이 들어갈 곳은 넘쳐나고, 황금을 벌어들일 곳은 모자라니까.
안심하고 식사를 이어 가려 할 때.
[엇,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만… 올림포스 측에서 이번 투표가 조작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던 아테나 여신이 그에 투표 무효를 주장해…….]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눈살을 구기고, 이라호드를 슬쩍 보았다.
이라호드가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헤, 헤헤… 아무래도 아까 그 장담은 취소할게요…….”
이전보다 더 큰 관심이 그 투표에 쏠렸다.
심지어 증명 2차전에는 빈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상대로 나온 드베르그가 투덜댔다.
“빌어먹을, 패배해도 한몫 챙길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3차전은 없을 것 같았다.
* * *
올림포스는 시장통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12주신들의 회의장이 시끌벅적하니, 가장 상석에 앉은 제우스는 못마땅할 수밖에.
그가 소리쳤다.
“그만! 그까짓 인기투표가 무어가 중요하더냐!”
버럭 천둥 같은 노호성이 떨어졌지만, 이번은 그게 먹히지 않았다.
헤라가 제우스에게 눈총을 쏘았다.
“당신, 내가 3번째라는 게 중요하지 않단 말이에요?”
“어, 으음…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제우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헤라뿐만이 아니었다. 아테나도 목청을 높였다.
“아버지! 제가 2등이라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조작입니다, 조작! 투표수가 아예 말이 안 됩니다! 투표수만 따지면 신계 연맹 소속 신들의 80%가량이 투표했단 소린데… 실제로 신계 연맹 소속 신들 중 50% 정도만이 신계 연맹 커뮤니티를 쓴단 말입니다!”
“으으음, 아테나… 내가 그런 의미로 한 소리가 아니라…….”
아테나는 제우스가 홀로 낳았다고 할 수 있는 딸이다. 그것도 제우스에게 예정된 몰락의 운명을 파괴하며 태어난 여신이다.
그녀의 탄생에 얽힌 신화는 이렇다.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난 아들이 제우스를 몰아내고 올림포스를 지배하리라.’
그런 예언이 있었다. 그에 제우스는 자신의 첫 번째 아내인 메티스를 파리로 바꾸고, 개구리로 변신한 뒤 그녀를 삼켰다.
그러나 그때 이미 메티스는 임신한 상태.
제우스는 지독한 두통을 느끼고, 그 두통을 없애고자 프로메테우스에게 상담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싫어하는 제우스에게 타격을 주고자 두통을 없앤다는 핑계로 그 머리를 쪼갰다.
그러자, 메티스가 제우스 속에서 낳은 딸, 아테나가 완전무장을 하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아테나가 선언했다.
‘스틱스강에 맹세컨대, 나는 영원히 순결을 지킬 것이오.’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난 아들이 올림포스를 지배할 것이라는 예언이 아테나에게 고스란히 전승된 탓에 마음 졸이던 제우스는 그를 크게 반겼다. 그리하여 아테나는 가장 총애받는 자식이 되었다.
“으음…….”
그런 딸을 차마 타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1위를 하고 있는 아프로디테 역시 제우스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여신이었다.
“제우스, 이 고모가 1위를 하는 게 이상하단 말이에요? 내가 제우스의 며느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모라는 걸 잊지 않으면 좋겠네요.”
“아니, 그게…….”
제우스가 땀을 뻘뻘 흘렸다.
올림포스의 족보가 원래 개족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더 복잡했다.
아프로디테는 크로노스가 제 아비인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버릴 때 바다에 빠진 정액으로 태어난 여신이다.
즉, 제우스의 아비인 크로노스의 여동생이다.
“후우.”
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와 딸과 고모가 싸우는데 끼어들어 고운 꼴을 보진 못하리라.
제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이 다툼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세 여신의 말싸움이 점점 격화됐다.
그에 아레스가 나섰다.
“자자, 다들 진정해! 투표의 공정성이 훼손된 상황이다. 여기서 티격태격한들,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지. 이 자리에서 투표를 새로 한다? 의미 없는 짓 아닌가!”
아레스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의미가 없다니? 울컥한 세 여신이 왕에 이어 왕태자까지 핍박하려 할 때, 아레스가 곧장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서 투표한들, 제각기 사정에 따라 아름다움과 상관없는 표를 던질 것 아닌가! 공정하게 하려면 올림포스와 상관없는 이에게 물어야 한다.”
어쩐 일로 옳은 소리를 하는 아레스.
모두가 그 말에 수긍했다.
아테나가 말했다.
“그러면 다른 신계에 묻자는 말인가? 그런다고 불만이 사그라들까?”
그 역시 정론이었다.
그에 아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신계에 묻되, 공정하게 심사해 줄 만큼 경험이 풍부한 이를 불러 묻는 게 어떤가?”
모두가 그 말에 집중했다.
다수결은 단순하지만, 선동될 여지가 너무 많다.
차라리 확실한 한 사람에게 묻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그 자격을 지닌다는 것인가?
아레스가 한 신을 제시했다.
“오시리스.”
이집트 신계, 엔네아드의 전대 왕인 오시리스는 숱한 미녀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명계의 왕으로 군림하며 어마어마한 재판 경력을 쌓았다.
게다가 딱히 올림포스와 엮이는 점이 없다.
“…흐음, 오시리스라면…….”
“확실히. 미녀를 많이 봤을 테고, 재판관으로서 손색도 없지.”
모두가 수긍했다.
그리고 아레스가 오시리스를 초청했다. 명망 높은 신이다 보니 초청이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오시리스는 쉽게 초청되었다.
다른 신들이 수군거렸다.
“아레스가 어쩐 일이래?”
“늘 사고만 치더니…….”
알게 모르게 아레스의 평판이 좋아졌다. 아레스가 꾸미고 있는 음모가 들키지 않은 탓이었다.
만일 그게 들켰다면? 아레스의 왕태자 자리가 정말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사실, 아레스는 왕태자 자리를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정정한 아버지가 얼마나 더 왕좌를 지킬지 모른다. 내 무너진 체면을 세우는 게 훨씬 유익한 짓이지.’
아레스가 비열하게 웃었다.
* * *
그리고 오시리스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부르르! 부르르!
몰래몰래 날아드는 문자들이 가소로웠다.
‘이까짓 것들도 날 매수하려 하다니… 하찮은지고, 쯧. 어차피 아레스가 말한 대로 된다면? 이 승자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도다.’
어차피 예정된 결과건만, 어떻게든 자존심을 지키려는 여신들의 발버둥이 불쌍했다.
[헤라: 당신에게 억만금을 줄 수 있어요. 좋은 선택 하기 바라요.]
헤라는 막대한 황금을 내걸었다.
신왕의 정실이다 보니, 그녀의 권위는 높았다. 게다가 가정의 평화를 책임지는 헤라를 믿는 여성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황금 정도야 펑펑 쓸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아테나는 다른 걸 내걸었다.
[아테나: 그대가 엔네아드의 왕좌를 탐낸다는 걸 안다. 그를 위해 싸울 때 내 군략을 빌려줄 수 있다. 어느 쪽이 승리로 향하는 길인지, 잘 선택하길 빈다.]
오시리스도 혹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혹되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것은 왕좌가 아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아프로디테의 문자가 날아들었다.
아레스가 말한 그대로였다.
‘과연, 제 여자라는 것인가? 잘 알고 있구나!’
오시리스가 눈빛을 보내자, 아레스가 씩 웃었다.
그리고 아레스가 크흠- 목을 가다듬고 오시리스에게 물었다.
“숱한 미녀를 봐온 심미안과 숱한 판결을 내린 판단력에 묻소이다. 이 셋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누구요?”
오시리스가 흐음- 고민하는 척하더니, 한 여신을 지목했다.
문자가 굉장한 효과를 발휘했다.
[아프로디테: 그 어떤 여인이라도 그대의 품에 안겨 줄 수 있어요.]
오시리스의 선택은 뻔했다.
* * *
증명 3차전.
이번에 나선 상대는 이라호드가 보기에도 약해 보였다. 앞서 나섰던 거인족과 드베르그에 비하면 수준이 확 낮아졌다.
이라호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객석이 절반밖에 안 찼어.’
이라호드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오디슨이 최근 황금에 눈독 들이고 있는 탓이었다. 그 이유를 잘 아는 만큼, 이라호드도 오디슨이 황금을 잔뜩 벌었으면 했다.
그런데 객석이 절반밖에 안 찼다는 이야기를 해 줘야 할까?
오디슨은 U500을 벗어난 뒤, 늘 만원 관중 앞에서 경기를 펼쳤다.
괜히 마음 상하지 말아야 할 텐데.
이라호드가 똑똑- 노크했다.
“오디슨? 경기 시작할 시간이에요.”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꾸는 없었다.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디슨?”
여전히 답은 없었다.
잠깐 자겠다고 휴게실로 들어간 오디슨이다. 그런데 답이 없다니.
생각보다 깊이 잠든 것일까? 이라호드가 말했다.
“들어갈게요, 오디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라호드가 눈을 깜빡였다.
“어……?”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라호드가 눈을 깜빡일 때, TV 소리만이 휴게실에 울렸다.
[최근 화제가 되던 투표! 왈가왈부 말이 많던 그 투표가, 투표 형식이 아닌 심판의 판결로 결판났습니다. 심판은 올림포스와 관련이 없으면서도, 미녀를 많이 봤으며, 숱한 재판 경험을 가진 이집트 신계의 오시리스께서 맡으셨는데요? 그 결과 발표, 함께 보시죠.]
TV에 청록색 피부를 지닌 미이라 신이 나와 결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를 때, 올림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은 바로… 아프로디테이니라!]
구구절절한 기준에 따라 분류한 탓에 반발은 적었다.
물론, 헤라와 아테나는 짜증을 부렸지만.
이라호드는 그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오디슨? 대체 어딜 간 거예요! 지금 당장 안 나가면…….”
소리치며 그를 불렀으나, 오디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휘날렸다. 묘하게 후덥지근한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