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화. 영웅은 운 없다 (1)
“…음.”
“끄으응…….”
침음과 신음이 뒤섞인 공간.
빛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안 오네. 우끼끼.”
손오공이 한탄했다. 그 말에 저팔계가 투덜댔다.
“꾸익… 사형, 이제 어쩔 거양? 여의봉 받아간 놈, 안 오잖앙!”
“흠, 난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어. 사형이 그렇게 꼼꼼하게 일을 처리할 리가 없으니까.”
저팔계에 이어 사오정까지 불평을 토했다.
손오공의 표정이 와락 찌푸려졌다.
“우끼이익! 너희들이 지금까지 버틴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너희들 쉬는 시간에 혼자 이 오행산을 떠받치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 우끼이익!”
손오공의 짜증에도 저팔계는 굴하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앙. 어쩔 거냔 말이양.”
“…망할, 이렇게 된 이상…….”
손오공이 중얼거렸다.
저팔계가 눈을 반짝였다. 어둠 속이라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뭐양, 방법이 있는 거양? 꿀꿀!”
“…팔계 사형, 또 속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는 안 속을 때도 된 거 같은데…….”
사오정의 말에 손오공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봉인을 파괴하겠다.”
봉인을?
오행산의 봉인은 석가여래의 신통력을 빌린 부적이다.
저팔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봉인을 파괴할 수 있단 말양?”
“…그게 정말이오, 큰 사형?”
헹- 손오공이 코웃음을 흘린다.
“나는 이전에도 500년이나 갇혀 있었던 베테랑이다. 이 봉인의 빈틈은 아주 잘 알지. 우끽.”
봉인의 빈틈?
저팔계와 사오정이 침을 꼴깍 삼켰다.
손오공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봉인은 최초에 붙일 때에 그 힘을 제한하는 것! 아니라면 아무리 석가여래의 신통력이라 할지라도 막아 낼 수가 없지! 무한히 증가하는 힘을 어찌 막아 낼 것이더냐!”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셋을 합쳐 힘이 100이라면, 부적이 막는 힘도 100. 그들의 모든 힘을 봉인해 버리는 것이 부적의 원리였다.
0이 된 상태에서 아무리 힘을 내려고 해도, 곱셈과 마찬가지다. 0 곱하기 수억이라 할지라도 결과는 0일 뿐이다.
근력운동을 하려는데, 근육이 없다면 어찌 근력운동을 하겠는가? 근육의 성장은 근섬유가 나뉘고 회복되며 늘어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와 비슷했다.
하지만…….
“봉인되기 전에 근두운을 빼놓았지. 그것이 바로 나의 큰 그림이었다!”
0이 아니게 되었다.
저팔계와 사오정은 입을 쩍 벌리고 감탄했다.
“손형, 저, 정말 대단행! 꿀꿀!”
“허, 과연… 사형의 심계는 끝을 알 수 없구려!”
손오공이 킥킥 웃었다.
“내가 누구더냐? 바로 제천대성 손오공 아닌가! 잘 봐라! 이 봉인의 파괴를! 흐아아아아앗!”
쿠궁, 쿠구구구구궁!
오행산이 들썩였다. 그들을 짓누르고 있던 산이 움찔거리는 감각.
저팔계와 사오정은 한껏 기대했다.
“봉인을 파괴한다! 파괴… 파괴가…….”
쿠구구구궁!
“안 되잖아? 아, 안 돼! 아아안 돼!”
슬쩍 들려 올라갔던 오행산은 이제까지와는 격이 다른 높이에서 떨어졌다. 이전의 지진들이 겨우 50센티미터 남짓의 추락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지금의 지진은 1미터 이상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저팔계와 사오정이 비명을 내질렀다.
“뀌이이익! 맙소사! 우린 인제 죽었엉!”
“으, 안 돼애! 나, 난 죽고 싶지 않소!”
콰과광!
“끄아아아!”
오행산이 세 사형제를 짓눌렀다.
오행산 주변 마을들이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집이 무너지고 논밭이 엉망이 되었다. 점점 줄어가던 마을 사람들은 마침내 마을을 완전히 포기했다. 황실에서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출입금지!]
[요괴 출몰!]
결국, 황실은 오행산을 금지(禁地)로 지정했다.
그리고 그곳은 재앙이 겹치는 곳이라 하여, 재앙 화(禍)에 재앙 화(過)를 써서 화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글을 잘 모르던 이가 재앙 화(過)를 지날 과(過)로 읽으며, 화과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연하게도, 글을 잘못 읽은 이를 놀리며 부르던 그 이름이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름이었다. 손오공의 고향의 이름과 같은 발음이었으니 말이다.
* * *
[축하합니다!]
촤르르륵!
[축하합니다!]
촤르르륵!
가짜 금화가 우수수 쏟아졌다. 연이어 그림을 맞췄고, 그 결과는 수북하게 쌓인 가짜 금화다.
이 반짝이는 것들을 보자니, 가짜라는 걸 알아도 마음이 뿌듯했다.
주변 사람들이 감탄했다.
“와… 무슨, 몇 번을 이어서 당첨이 되네?”
“슬롯머신도 무슨 기술이 있나?”
“그런가 본데?”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치켜들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라호드가 눈을 끔뻑였다.
“…뭘 어떻게 한 거예요?”
“그야, 보고 맞췄지.”
“…허, 진짜……. 이거 좀 골치 아파질지도 모르겠는데요?”
골치 아파져? 그게 무슨 소리지?
눈살을 구길 때, 크레네가 기뻐하며 내게 매달렸다.
“우와아아아! 오디슨, 대단하네요! 이 정도면 1억 크로나 넘는 거 아니에요? 슬롯머신에서 이렇게나 따는 건 처음 봐요!”
“크흠, 대단할 것까지야…….”
“에이, 대단한 거죠! 이 핑핑 도는 걸 어떻게 보고 맞춰요? 그래서 오디슨, 이 돈으로는 집을 살 거죠? 이전에 사려고 했잖아요.”
흐음, 집이라.
하계에 가면서 쓴 돈을 제외하고도, 이미 내 수중에는 억 단위의 크로나가 있었다. 거기다가 이 가짜 금화를 환전하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집, 좋지.”
“헤헤, 그러면 제가 집들이 선물로 좋은 정수기라도 하나 넣어 줄게요! 그쪽은 제 전문분야니까요. 물이 좋아야 건강한 법이에요.”
으음, 신성을 가진 내가 썩은 물을 마신다고 아픈 것도 좀 우스운데.
어쨌거나 정수기?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선물이라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대장, 이걸 진짜 보고 맞추는 게 가능한 거야?”
“우와, 오디슨 이제 부자야? 집을 사면 나도 거기서 사는 건가?”
토르손과 라드게리타도 호들갑을 떨었다.
이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흐흐.
이라호드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아직 다 같이 살 집을 구하기엔 좀 적지 않을까요?”
“으음, 확실히… 여럿 살 집을 구하기엔 좀 적은 거 같네요. 그냥 오디슨 혼자 살 집을 알아보는 게…….”
크레네가 이라호드에게 동의했다.
그런가? 나야 뭐, 그쪽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그녀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은 없다.
“황금이 부족해서 문제라면 더 따면 될 일 아닌가?”
수북하게 쌓인 가짜 금화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 하나로 또 수북하게 쌓이는 가짜 금화를 따내면 되지 않는가?
마법 물품에 가짜 금화를 넣으려 할 때에…….
“실례합니다. 길 좀 터 주십시오. 네, 네, 감사합니다~”
틱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펜리르와 비슷한 몰골을 한 드베르그였다.
검은 머리에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기고, 수염도 모양을 잡고 깎은 모습.
뺀질거리는 느낌에 눈살을 구겼다.
그가 입술을 비틀며 내게 다가왔다.
“아이고, 오디슨 님!”
님을 붙이는 말치고는 어쩐지 빈정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본래 말투가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지?”
“이건 좀 곤란합니다요.”
곤란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말인가?”
“카지노에서는 신성 사용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신성과 마법, 요술 등등 모든 신비와 온갖 기계류가 금지되어 있지요.”
눈썹을 찌푸렸다.
뺀질이 드베르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 종류의 부정행위로 딴 칩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부정행위?
얼굴을 와락 구겼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속임수였어?”
“…오디슨 님이 속임수를 썼다고? 아무것도 모르겠던데?”
“그야 권능을 우리 같은 사람이 알아챌 리가 없잖아.”
“그래도 오디슨 님인데…….”
“에이, 황금이 걸리면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야.”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눈앞의 이 드베르그가 날 사기꾼으로 모는 것인가!
덥석,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어, 어어어!”
“잘 들어라, 난쟁이.”
녀석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난 속임수 따위를 쓰지 않는다.”
“아, 아니… 신성의 발현이 속임수라고는…….”
“난!”
으르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어떤 비겁한 짓거리도 하지 않았다! 이건 내 명예를 걸고 장담할 수 있는 일이다!”
“하, 하지만……!”
“그런데도 날 사기꾼으로 모는 것인가!”
멱살을 쥔 채 들자 드베르그가 버둥댄다.
그리고 녀석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친다.
“여, 여기는 로키스 패밀리 소유의 호텔입니다! 로, 로키 님께서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버럭 소리치는 말에 얼굴을 구겼다.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을 슬쩍 풀었다.
로키? 예전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으음…….”
미간을 좁혔다.
로키에게 무언가를 받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펜리르는 내 빚을 이자 없이 처리해 준 데다가… 헬.
헬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 차마 로키의 사람을 강하게 몰아세울 수가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드베르그가 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명예도 거신 분이 로키라는 말에 곧장 이러시니 참… 의심이 안 가는군요.”
주변에 들으라는 듯 소리치는 드베르그.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아드득, 이를 악물었다.
이 빌어먹을 작자가, 로키를 믿고서? 분노가 들끓었다.
드베르그가 히죽대며 말한다.
“어쨌거나, 이 칩들은 모두 회수하겠습니다.”
드베르그의 말에도 나는 차마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헬께 입은 은혜가 없었다면, 저놈은 지금쯤 다진 고기가 되어 있으리라. 전사를 모함하는 저 쓰레기 같은 난쟁이를 단매에 쳐 죽이고 싶었으나…….
“저희 로키스 패밀리는 언제나 공정한 게임을 응원합니다!”
주변에 소리치는 녀석이 들먹이는 로키스 패밀리가 마음에 걸렸다.
주변 사람들이 화를 식히는 날 보며 저들끼리 속닥거린다.
이대로 두는 게 맞을까? 날 모욕한 이를?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요, 브로!”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묵직한 무게감이 내 어깨를 감쌌다.
힐끗 보니, 새까만 안경이 눈에 띄었다.
“펜리르?”
“네가 그 구멍을 발견했다며? 그 덕에 아스가르드 가디언 소집령이 떨어졌지 뭐야. 오늘은 여기에서 지내고… 음? 뭐야? 여기 분위기 왜 이래?”
펜리르의 중얼거림에 드베르그 놈이 크흠-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것이…….”
“잘됐군.”
내가 그 말을 끊었다.
그리고 펜리르의 어깨에 팔을 얹고 말했다.
“펜리르, 옆에서 지켜보시오.”
“뭘 말이야?”
“내가 신성을 쓰는지 안 쓰는지. 그 어떤 종류의 부정행위를 하는지 아닌지 말이오.”
“응?”
펜리르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히죽 웃었다.
“덤으로 신을 모함한 이에 대한 처벌도 알려 주면 좋겠군.”
드베르그가 땀을 주르륵 흘렸다.
주변에서 다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펜리르라면… 로키의 아들이니까, 공정하게 보겠지?”
“…권능 같은 거 안 쓴 게 아닐까?”
“역시! 난 오디슨 님을 믿었어!”
하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가짜 금화 하나를 슬롯머신에 집어넣었다.
드베르그가 소리친다.
“저, 저기! 오, 오디슨 님?! 제가 한 말은 그…….”
하지만 나는 삑삑삑- 단추를 눌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까와 좀 달랐다.
“…뭐지? 왜 축하를 안 하는 거지?”
눈살을 구길 때, 커다란 나팔 소리가 났다.
빰빠바- 밤!
그리고 폭죽이 펑펑 터졌다.
색종이가 어지럽게 쏟아져 내린다. 나는 눈을 끔뻑였다.
“…내가 진 건가?”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주변의 경악스러운 표정도, 내가 당당하게 말한 데 비해 초라한 결과를 내놔서 그런 건가?
아니, 그림은 다 맞는데?
“…혹시 7이 셋이면 지는 건가?”
마법 상자에 뜬 글자를 보았다.
내가 모르는 글자다. 외국의 글자인가?
[7]/[7]/[7]
[JACKPOT]
눈알을 굴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당당하게 소리쳤건만, 이 무슨 망신인가!
“꺄아아악!”
크레네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곧장 나를 덮쳤다.
“오디슨! 잭팟이에요! 잭팟!”
“그, 잭팟? 아까도 그 이야길 하던데? 그게 그냥 이기는 걸 말하는 게… 으읍?”
크레네가 덥석 내 입을 막았다.
물론, 그녀의 입으로 말이다. 그 광경에 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악!
나는 도대체가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펜리르가 허- 하고 헛숨을 내쉬었다.
“…잭팟이라는 게 원래 내고 싶을 때 딱 맞춰서 낼 수 있는 건가?”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축하한다. 이제 빚쟁이에서 벗어났군? 좀 아쉬운데.”
멸망의 늑대가 입맛을 다셨다.
나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