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89화 (89/208)

# 89

89화. 영웅은 들이받는다 (3)

10억을 받았다.

오디세우스는 이후 아무런 말도 않고, 페넬로페에게 넘겼던 재산을 내게 건넸다. 하지만 이라호드는 ‘캐 보면 더 나올 것’이라며 그들의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10억 크로나다.

“건배!”

시합이 끝난 지 일주일 뒤.

10억을 뜯어내고 나서야 축하연이 열렸다. 이그나르 녀석이 마련한 잔치다.

어깨를 으쓱였다.

“또 이런 잔치를 마련하다니… 돈은 괜찮나?”

분명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올 거라며 돈을 모으던 녀석인데.

이그나르가 히죽 웃었다.

“이미 돈은 마련했지. 그에 대한 감사까지 포함한 자리야.”

“감사라니?”

“네 덕이니까.”

이그나르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듣자 하니 내가 찍은 칼리돈 광고 이후 매출이 확 늘었다고 했던가?

뭐, 잘 모르겠다. 혹여 힘들다면 돈을 좀 보탤 수도 있건만. 녀석은 내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크레네가 슬쩍 내게 고기를 한 점 건넸다.

“고맙군.”

“뭘요. 그나저나, 오디슨. 그 돈으로 뭐 할 거예요?”

크레네의 질문에 모두가 나를 보았다.

10억. 거금이다.

내가 투기장에서 싸운다고 해도 20번은 싸워야 하는 거액. 그 20번도 마지막 싸움을 기준으로 잡은 것이다.

며칠 전에 경기 주선을 의뢰했지만, 여전히 답변이 없다.

…투사들이 날 꺼리는 걸 생각하면, 년 단위로 모아야 하는 금액이리라.

“흠.”

턱을 쓰다듬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부족민이었다.

“여기 음식 더 내왔어요!”

라드게리타가 생글생글 웃으며 일손을 거들고 있었다. 주방 안쪽에는 아슬라 아줌마가 있겠지.

니플헤임에서 시무룩하던 두 사람이 웃는 것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토르손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이거 네가 한 거 아니지? 네가 한 거면 엄청 맛없을 텐데.”

“뭐래! 너 먹으라고 한 거 아니거든? 오디슨! 얼른 먹어 봐!”

토르손도 많이 밝아졌다.

흐뭇하게 웃었다.

“부족민의 운명값을 좀 더 변제하고 싶은데…….”

내 말에 헬께서 흐음- 하고 침음을 흘리셨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헬께 압박을 주려던 건 아니었소.”

“…미안.”

쓰게 웃었다. 헬께서 미안하실 일이 아니다.

니플헤임의 사정을 알기 전에는 ‘왜 이렇게 늦나’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니플헤임에서 어떤 특정한 망자들을 찾는 건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크레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느긋하게 기다려요, 오디슨. 괜히 서두르다 망치는 것보단 그게 낫잖아요?”

맞는 말이다.

발할라에 연줄이 있는 망자들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쉽다고.

망자라고 모두가 시무룩해 있는 게 아니다. 생을 거머쥐기 위해 부족민을 납치하고 내게서 돈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헬께서 한숨을 푹 쉬셨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 알음알음 알아보고는 있지만…….”

니플헤임 습격 건으로 그 ‘믿을 만한 사람’들을 의심해야 했다. 분명 습격의 내통자가 있을 게 뻔하건만, 그 배신자는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

나는 오히려 이런 자잘한 배려가 고마웠다.

…헬께 선물을 할까? 슬쩍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어느샌가 다시 황금빛으로 돌아온 반지는 헬께서 해 주신 선물. 언제나 받기만 하는 기분이다.

슬쩍 한번 떠보자.

“흐음, 헬께서는 거금이 생기면 뭘 하실 것 같소?”

“나? 나는… 음. 역시, 집인가.”

헬께서 슬쩍 이라호드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크레네가 힐끔 이라호드를 보더니 맞장구쳤다.

“맞아요. 역시 집을 구하는 게 좋죠.”

두 사람 다 왜 그러지?

내가 전에 이라호드에게 신세 진 탓인가? 최근 며칠간은 이라호드가 바빠 보였기에, 이그나르의 집에서 지냈다.

이라호드가 술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집이 꼭 필요할까요? 뭐… 딱히 필요할 거 같진 않은데. 오디슨은 아무 데서나 잘 자니까요.”

“에이, 그래도 자기만의 공간은 필요한 법이잖아요.”

“그렇지. 내 궁전, 엘류드니르는 빈방이 많아서 하나쯤 내줄 수 있지만.”

세 여자가 눈빛을 교환한다.

실수를 통감했다. 불편하겠지.

돈이 생겼으니, 이제는 폐를 끼칠 수 없다.

“집이라? 집, 집…….”

헬과 크레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호드는 뚱한 표정으로 날 그저 보기만 했다. 역시 착한 발키리다.

민폐였을 텐데, 날 재촉하지 않다니.

그렇다면…….

“아예 토르손과 아슬라 아줌마, 라드게리타가 함께할 수 있을 법한 큰 집으로 알아볼까?”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볼을 긁적이고 설명했다.

“이그나르의 가족들이 오면 함께 지내기 불편할 테니. 그리고 내가 구해 둔 집이 두 사람 살기엔 좀 작지 않나?”

“아! 정말? 같이 살면 좋을 것 같네!”

라드게리타가 내 말을 듣고 기뻐했다.

예전처럼 한마을에 사는 기분이 물씬 풍기리라.

헬께서 말을 꺼내셨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여자는 예민하니까…….”

“그렇죠. 라드게리타 양은 한참 때니까,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게…….”

“오디슨,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역시 집은…….”

헬과 크레네, 이라호드가 반대했다.

뭐지? 내가 모르는 여자만의 사정 같은 게 있나?

라드게리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예전에도 거의 같이 산 거나 다름없으니까.”

세 여자가 움찔했다.

흠. 여자라는 점을 생각해서 배려가 필요한가? 그런 거라면 문제없다.

나는 씩 웃으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난 눈치가 빠르니 걱정할 필요 없다.”

토르손이 중얼거린다.

“눈치 안 빠른 거 같은데.”

“뭐라고?”

눈썹을 찌푸리고 녀석을 노려봤다.

토르손이 시선을 피하고 벌꿀주를 홀짝였다. 한번 죽었다 살아난 녀석이다. 그 이후로 약간 기어오르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대장의 위엄을 제대로 세워야…….

턱!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돈이 생겼으면 빚부터 갚아야지?”

반갑지 못한 목소리.

펜리르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검은 안경을 낀 채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난 빚이 있었다.

10억을 몽땅 쏟아부어서 돈을 갚고 나면?

앞으로 광대 짓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군.”

가장 급히 해야 할 건 돈을 갚는 일이었다.

* * *

펜리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긴 기분은 내야지. 9억 크로나만 받을게. 어떠냐? 그거면 4명이 살 집은 못 구해도, 혼자 살기엔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을걸?”

툭툭, 펜리르가 오디슨의 어깨를 쳤다.

그리고 슬쩍 눈빛으로 헬에게 말한다.

‘어때?’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펜리르는 헬이 기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리고 있다.

그 옆에 있는 님프, 크레네처럼 대놓고 웃진 못했지만.

“다행이네요, 오디슨!”

“…으음, 그런가?”

“1억 크로나면 토르손과 둘이 살 집 정도는 살 수 있잖아요?”

“그래도, 기왕이면 단칸방에서 산다는 크레네, 너도 같이 살았으면 했는데…….”

오디슨의 한마디에 크레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헬의 입꼬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떨렸다.

펜리르가 낄낄 웃었다.

“그래도 9억을 갚으면 이제 빚은 얼마 안 남지 않나? 3억 크로나 좀 넘게 남나. 아니, 차라리 4억 크로나에 가깝겠군.”

“흐음… 펜리르.”

오디슨이 슥 펜리르를 올려보았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펜리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음?”

오디슨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지만 8억 크로나로 참아주시오.”

“어, 어어… 아니,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 없어!”

펜리르가 놀라 허둥댔다. 그렇게나 저 님프를 데리고 살고 싶은 건가?

살짝 골치가 아파졌다. 헬을 보자니 그녀가 고개를 살짝살짝 흔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안.’

펜리르는 쓰게 웃었다.

미래의 매형에게 너무 매정하게 굴 수는 없었다.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같이 살지 못하게 하는 게 나으리라.

“그 정도쯤이야 뭐… 늦게 받아도 되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더 돈을 빌릴 필요가 없을 테니.”

“돈을 더 빌려? 그렇게나…….”

오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개자식들을 박살 내려면 하계로 내려가는 돈이 필요하지 않겠소?”

펜리르는 그제야 오디슨의 눈이 TV에 고정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TV 하단에는 푸른 띠가 둘러져 있었고, 그 푸른 띠 위로 뉴스 메시지가 흘러갔다.

펜리르의 얼굴이 굳었다.

[속보) 제국, 덴 마스크 지방에 선전포고!]

실수였다.

* * *

들떠 있던 기분이 차갑게 식었다.

펜리르가 나타나서? 아니다.

제국 놈들이 기어코 우리 민족을 그 땅에서 지워 내려 하는 탓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을 집어 들었다.

“…대장.”

토르손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다녀오겠다.”

“대장, 나도 같이……!”

고개를 저었다.

“저긴 내 신성이 비롯된 곳이다. 나라면 몰라도 넌 안 된다.”

하계불가침이 어쩌고 하면 걸릴 테니 말이다.

이라호드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왜 그러지?”

“…오디슨, 분명 신성 보호가 하계불가침법에 우선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상황이 달라졌다?

눈살을 찌푸리자, 이라호드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저쪽에 있는 볼바가 오디슨의 유일한 볼바였죠. 직접적인 신성 상실 위험이었다구요.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요.”

“뭐가 그리 다르지? 볼바가 둘이 되었다는 것? 그래 봐야 저쪽을 지켜야 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이라호드가 말을 고를 때, 헬께서 입을 여셨다.

“오디슨, 너는 너무 거물이 됐어.”

거물이 되었다고?

“그러니 행동거지를 조심하란 말이오? 그럴 수는 없소. 저기에는-”

“후우, 오디슨.”

헬께서 한숨 쉬셨다. 그녀가 말을 잇는다.

“지금 네 신성이 온전히 저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눈살을 찌푸릴 때 이라호드가 말했다.

“오디슨은 ‘붉은 마왕’이라는 신앙을 얻었죠. 그리고 그 신앙은 제국과 왕국까지 널리 퍼진 상황이에요. 저쪽에 있는 볼바들이…….”

이라호드가 말을 삼켰다.

하지만 그녀가 하려 했던 말이 뭔지는 알았다.

“볼바들이 죽어도?”

“…오디슨의 신성은 깨지지 않아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라호드가 이어 말한다.

“변질될 따름이겠죠.”

“변질된다? 그 말은…….”

“붉은 마왕의 신성만이 남게 된단 거예요.”

눈을 꾹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날 선하다 믿는 이들이 사라져도, 날 악하다 믿는 이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개입할 수 없다, 이 말인가?”

“…네.”

허- 헛숨을 터트렸다.

내 소중한 이들을 모조리 다 잃고, 내가 남은들 뭐하랴?

나는 토르손의 술잔을 뺏어 들이켰다.

“후우.”

화끈한 열기가 속에서 차올랐다.

“느릅나무 부족이 전멸할지라도, 나는 남아 있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지킬 것을 잃은 전사는 남아 있을 수 없다.

내 부족, 물푸레나무 부족을 잃은 나는 사실 전사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전사라기보다는 복수귀에 가까웠다.

미쳐 날뛰며 오딘께 바친 2만의 제국민? 그들을 몰살한다 한들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그들에게 부족 공격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난 그들을 학살했다.

그게 전사인가?

“전사의 의무를 저버린 나는, 내가 아니다.”

단단하게 다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뀔 수 없는 다짐이었다.

오디슨이라는 사람의 뿌리가 바로 이 다짐이다.

삼촌과의 싸움이 그러했다.

가족보다 승리를 선택하고, 사람보다 괴물을 선택한 것도 모두 전사이기 때문이었다.

“이거 놔라, 이라호드.”

그녀의 손을 쳐냈다.

이라호드가 꽥 소리친다.

“오디슨! 이번에 하계불가침법을 어기면, 큰 벌이 떨어질 거예요! 그사이에 또 문제가 터지면 어쩔 건데요? 오디슨의 신성이……!”

신성, 신성, 신성! 지겨운 소리다.

버럭 고함쳤다.

“신성? 그까짓 거, 없어도 그만이다!”

이라호드가 숨을 삼켰다.

우스운 이야기다. 신성을 가진 신이, 신성을 잃지 않으려 신성의 힘을 쓰지 못한다니. 바보 같은 소리 아닌가?

내가 갈 길은 명확하다.

하지만 이라호드에게 거친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쓰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문제가 안 터지게 하면 되지 않겠나?”

“…어떻게요?”

아주 쉬운 일이다.

까드득, 이를 갈며 창으로 티브이를 가리켰다.

“저놈을 죽인다.”

티브이 속에서는 황제가 엉망이 된 꼴로 꽥꽥 고함치고 있었다.

[야만인들이 우리 땅에 지진을 가져왔다! 그 결과가 어떻더냐!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었다! 댐이 터지고 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내 아들, 황태자가 죽었다! 제국의 미래가 죽었다! 그에 우리는 이 땅의 야만인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제국의 미래가 죽었다고?

바보 같은 놈. 제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런 짓거리를 하면 안 된다.

모두가 아는 걸, 저 바보만이 몰랐다.

“나는 제국을 죽일 거다.”

죽은 제국이 느릅나무 부족을 공격할 수 있을 리가.

나는 학자는 아니지만, 사람의 습성은 안다. 놈들이 우리 땅을 탐내는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울타리 안쪽이 가득 찬 탓이지.”

가까운 곳에 빼앗을 땅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 주마.

주인 잃은 넓고 거대한 땅을.

* * *

“운명의 수레바퀴는 어디로 향하는가?”

오딘이 물었다.

세 자매가 답했다.

“지옥의 곁.”

“…그렇다면 그곳에서 그의 역할은 무엇인가?”

“지옥의 반려.”

오딘이 피식 웃었다.

‘내 친아들들보다 날 더 닮은 녀석이라니.’

오딘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높으신 분, 전쟁을 일으키는 자,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 마법의 끝에 도달한 자 등등. 나열하기엔 너무나 많은 이름들.

개중에서 오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이름이 몇 개 있다.

‘지옥을 내린 자.’

미치광이 전쟁 신으로서는 최고의 찬사다. 난장판을 만들어 현세에 지옥을 내렸다는 의미니까. 그리고 다른 의미도 있다.

헬에게 니플헤임의 권리를 내린 것이 오딘이다.

“지옥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지옥의 남편이라.”

예로부터 남편의 의무는 뻔했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 요즘 와서는 문제가 될 발언이지만.

그렇다면 지옥은 뭘 먹어야 배가 찰까?

오딘은 그 답을 알았다.

“죽음.”

아주 간단한 답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