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85화 (85/208)

# 85

85화. 영웅은 도전 받는다 (2)

헤라클레스(Heracles).

신왕(神王) 제우스의 아들이자, 올림포스의 구원자이다.

영웅 중의 영웅이며, 그 위업에 대한 상으로 신의 자리에 올랐다.

영웅과 극복의 신. 영웅이 되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이 헤라클레스를 섬긴다. 신계에서의 위치도 낮지 않다.

12주신에는 못 들었지만, 12주신 중 제우스를 제외하면 헤라클레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망할. 아버지는 왜 이런 걸 나한테 시키는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발치에 쓰러진 채 입을 쩍 벌린 오디세우스를 보자니 더욱더 그랬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헤라클레스가 눈을 번뜩였다.

‘모두 이 새끼 때문이다.’

꽈드득,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신계 연맹 치안청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없는 노릇.

헤라클레스는 크게 심호흡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임팔레의 말을 떠올리자.’

헤라클레스에게서 가장 특징적인 게 뭘까?

압도적인 힘? 아니면 가끔 선보이는 재치? 뛰어난 성적 매력? 그도 아니면 식을 줄 모르는 투쟁심?

마지막이다.

힘이야 어지간한 영웅들은 모두 괴력을 가지고 있었고, 재치는 드러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 매력? 헤라클레스는 매력적이었지만, 가장 매력적인 이는 아니었다.

광증에서 비롯된 투쟁심.

그게 헤라클레스의 명성을 드높였고, 그의 인생을 망쳤다.

‘…새틴(Satin), 그래. 새틴을 떠올리자. 백 스티치로 도안을 따라 수놓고 난 뒤에…….’

아폴론의 신전에서 난동을 부린 대가로 헤라클레스는 노예 살이를 해야 했다. 10년간의 노예 살이.

그 시간 동안 헤라클레스의 주인은 리디아의 여왕인 임팔레였고, 그녀는 헤라클레스가 남자 옷을 입는 걸 허락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여자 옷을 입고 바느질과 길쌈을 10년간 했다.

그 생활이 그의 광증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남에게 보여 주기엔 부끄러운 취미인지라,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시청으로 바꾸긴 했다. 뭐, 그도 그리 자랑스러운 취미는 아니었다.

어쨌든, 헤라클레스는 지금도 화가 날 때면 속으로 바늘과 실을 떠올렸다.

“왜, 왜… 이 불한당에게 사과하는 것이냐, 헤라클레스!”

오디세우스가 버럭 소리쳤다.

헤라클레스는 덤덤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올림포스에서 공소를 취소했다.”

오디세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담당 검사가 어떤 새낀데? 엉? 그걸 왜 취소해!”

그가 으드득- 이를 갈며 따져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명명백백한 죄인을 앞에 두고, 벌을 주지 않겠다? 이제까지 한 고생은 무어란 말이던가.

헤라클레스가 후우-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윗선에서 취소하라 했다.”

“뭐? 아테나 님께서?”

오디세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 전략가인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의 총애를 받았다. 믿고 따르는 신께서 그리하셨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오디세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

중얼거리는 그에게 헤라클레스가 짧게 대꾸했다.

“그 위.”

오디세우스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아테나의 위에는 단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오, 제우스시여.”

올림포스의 신왕, 제우스.

오디세우스는 차마 더는 불평을 토할 수가 없었다.

* * *

느릅나무 부족은 뒤숭숭했다.

판도라가 볼바가 되며 일어난 불길한 징조들. 시그니료드는 그걸 걱정했고, 그녀는 전사들에게 긴장을 풀지 말라 했다.

“…제국 방향의 불길한 징조라니.”

불침번을 서던 전사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피곤이 묻어나왔다.

몇 달이나 전시 체계에 맞먹는 경계를 유지했다. 지칠 수밖에.

함께 불침번을 서던 사내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놈들, 오디슨 님께 그리 당하고 또 이 땅을 노리는 건가? 무식한 것들…….”

“제국 놈들이 자랑할 거라고는 머릿수밖에 없지 않나.”

“…그 머릿수가 제일 무섭긴 하지. 별일 없으면 좋으련만…….”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차라리 시그니료드가 징조를 잘못 읽었다고 말하길 바랐다. 짜증은 나겠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욕할 마음은 없었다.

어린 볼바가 부족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아.”

시그니료드가 눈을 떴다.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창밖을 보니, 맑은 하늘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선객이 있었다.

“아, 시그니료드 님.”

판도라였다.

볼바가 되며 아예 같은 집에서 살기 시작한 지 몇 달이나 되었건만, 여전히 판도라는 시그니료드에게 존댓말을 했다.

시그니료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판도라 언니도 이제 볼바니까, 서로 같잖아요.”

“그래도…….”

판도라가 우물쭈물했다.

시그니료드가 몇 번이나 한 말을 다시 꺼냈다.

“예의 차릴 필요는 없어요. 그나저나 판도라 언니.”

시그니료드가 판도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인상에 아름다운 얼굴. 시그니료드도 예쁜 얼굴이지만, 판도라와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그 빛을 잃는다. 과연 마을 남자들이 판도라 앞에서 헤죽헤죽 웃는 이유가 있었다.

판도라가 볼을 붉혔다.

“그… 왜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요 몇 달간 표정이 안 좋았는데, 굉장히 밝은 얼굴이네요?”

“아, 그게…….”

판도라가 머뭇거릴 때, 시그니료드가 빙그레 웃었다.

“좋은 꿈을 꿨나요?”

“어? 어떻게……?”

“저도 좋은 꿈을 꿨거든요.”

판도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꿈은 약간 무서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꿈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꿈에 대해 내뱉었다.

“…붉은 늑대가…….”

“먹구름과 맞서다가.”

“아!”

판도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확실히 같은 꿈을 꾼 게 틀림없다.

확인하고자 마지막 부분을 외쳤다.

“그 먹구름이 마른번개를 치다 흩어지는 꿈!”

“네! 맞아요, 저도 그 꿈을 꿨어요.”

시그니료드가 밝게 웃었다.

볼바 둘이 같은 꿈을? 이건 두말할 것 없는 예지다.

이 소식은 곧 마을 전체로 퍼졌다. 전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으아! 그러면 전시 체제는 끝인가?”

“으으으, 오랜만에 좀 푹 자겠구먼.”

마을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시그니료드는 그간 고생한 전사들을 위해 잔치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비축된 물자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쓸 때는 써야 한다.

시끌벅적, 즐거운 잔치가 벌어지리라.

* * *

“으음…….”

즐거운 곳이 있다면, 그렇지 못한 곳도 있었다.

제국, 그중에서도 황제가 머무르는 황성. 화려한 대전에는 황제와 각계 신료들이 모인 채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넙죽 바닥에 엎드린 사내가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서 말해 보라! 그렇게 뜸을 들이고 있으니, 답답해 죽겠구나!”

“죄, 죄송합니다, 폐하! 하오나… 그, 점괘가 영…….”

“…좋지 않다?”

점성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어이가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리 좋다더니!”

“…죄송합니다, 폐하. 별의 운행은 저로서는 도저히…….”

점성술사를 타박한다고 뭐가 되겠는가?

황제는 짜증을 참고 물었다.

“그래, 그래서 뭐가 어떻게 안 좋다더냐?”

황제의 말에 점성술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걱정이 들었다. 말을 해도 될까? 아니면 그냥 숨길까?

당연한 걱정이었다.

‘…황제 앞에서 댁이 죽을 거라고 말해야 하나?’

침을 꿀꺽 삼켰다. 말실수와 동시에 다시는 말할 수 없는 몸이 되리라.

그게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혀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일지, 아니면 차가운 땅에 묻혀 썩어 가기 때문일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점성술사는 점성술사 사이에서 내려오는 비장의 기술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젊은 늑대가 늙은 늑대를 이길 것이오. 그것은 전투도 전쟁도 아니리라.”

뜬구름 잡는 소리.

황제가 눈살을 구겼다.

“뭐라? 그게 무슨 소리지?”

“쉿, 폐하. 조용히 들으소서. 저자가 미래를 읽고 있는 모양입니다.”

황비의 말에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미래를 예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안다. 괜히 입을 열었다 예지가 사라지면 결국 황제의 손해였다.

점성술사가 멍하니 허공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빛나는 투구 아래 맨눈이 번뜩이리라.”

빛나는 투구?

모두가 숨죽인 채 그 단어 하나하나를 되새겼다.

점성술사의 눈에 공포가 깃든다.

“단번에 두 군데가 꿰뚫리고, 남는 것은 차가운 땅.”

꿀꺽- 황제가 침을 삼켰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오싹했다.

점성술사 멍한 두 눈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두 눈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듯 가운데로 몰렸고, 입에서는 침이 주르륵 흘렀다.

이윽고, 점성술사의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봐라, 방금 그게… 어엇?”

황제가 깜짝 놀랐다.

털썩, 점성술사가 쓰러졌다.

“여봐라! 의사를, 의사를 불러라!”

점성술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황제와 신하 일동은 이게 허락되지 않은 미래를 읊은 탓이라 생각했다.

사실은 조금 달랐다.

‘…의사가 오면 아무런 기억도 안 난다 해야지.’

점성술사들의 비기였다.

신비로운 척하기. 이 기술을 제대로 익히면 점성술을 하나도 모르더라도 어디 가서 굶고 다니진 않는다.

점성술사는 이런 짓을 싫어했다. 그는 실력 있는 점성술사였고, 그런 사기를 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꼭 써야만 했다.

‘…황제가 죽으면 제국이 흔들릴 터. 피하는 게 최선이다.’

미래를 본 부작용으로 요양을 하겠다 하면 되리라.

점성술사는 황급히 다가오는 의사의 발소리에 눈을 꼭 감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 * *

쥐새끼 같은 오디세우스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만 끝내도록.”

그는 내게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는 걸 잊지 않았다.

허, 과연 영웅신이라는 건가? 자잘한 행동에도 품격이 서려 있었다. 제국 놈들이 믿는 신이라는 점만 빼면 훌륭한 전사의 표본이나 다름없었다.

“…끝내라고?”

오디세우스가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은 모르겠다만, 대략 파악은 됐다.

올림포스는 판도라를 걸고넘어지길 포기한 모양이다.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좋지 못한 시비라는 걸 알겠지. 신계 연맹 전체에 판도라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공표해야 할 테니까.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꼴이다.

“올림포스도 마르스 같은 바보만 모인 곳은 아니군.”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헤라클레스가 슬쩍 날 보았지만, 적대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오히려 씩 웃기까지 한다.

마음에 드는 사내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쪽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래, 백번 양보해서… 젠장할! 판도라는 그냥 넘어가자 쳐. 그럼 판도라의 항아리는? 응? 그건 그냥 절도잖아! 명명백백한 일이라고!”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심드렁할 뿐.

“주인이 됐다는데 뭘 어쩌겠나?”

“…젠장할! 난 맞기까지 했다고!”

맞은 게 그리 억울한가?

슬쩍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제대로 신성 모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는 건 어떤가? 응?”

오디세우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신성 모독에 대한 처벌은 꽤 센 편이다. 괜히 비다르가 할 말 없으니 신성 모독 운운한 게 아니었다.

오디세우스가 분한지 숱 적은 머리를 붉게 물들였다. 번쩍이는 머리 아래 두 눈이 나를 노려본다.

“…제, 제기랄! 날 사칭했잖아!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그만. 그건 형사 사건이 아니라 민사 사건이다.”

헤라클레스가 슬쩍 시계를 보았다.

나도 저 시계라는 시간을 일러 주는 물건을 보는 법은 알고 있다.

오후 2시쯤 되었나?

“…바쁜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민사… 이걸로 민사를 가 봐야…….”

오디세우스가 중얼거릴 때 헤라클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슬쩍 날 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불미스러운 일로 뵙게 되어 아쉽군요.”

나도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음, 나도 그렇소. 혹 차후에 겨뤄 볼 일이 있다면 좋겠구려.”

“하하하, 그거참 오랜만에 듣는 이야긴데요.”

꾸우욱, 맞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나나 헤라클레스나 힘을 빼지는 않았다. 어마어마한 압력에 살짝 눈살이 떨렸지만, 물러설 순 없지.

어깨를 으쓱였다.

“명성이 대단한 영웅이자, 신과 만났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소?”

“후후후, 좋습니다. 다음에 좋은 기회가 있다면야…….”

동시에 손을 뗐다.

내 손등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남았다. 대단한 힘이다.

헤라클레스가 씩 웃으며 물러섰다.

“그럼 다음에.”

나는 아직도 손등이 욱신거리는데, 저쪽은 멀쩡하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신이니 뭐니 하면서 으스대기엔 나의 부족함이 너무 잘 보인다.

비다르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설쳐 댄 걸까? 이해할 수 없다.

“잠깐, 잠깐! 민사는 접어 두자고!”

그리고 난 저놈도 이해가 안 된다.

민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좋다고 저리 히죽대는 거지?

헤라클레스가 팔짱을 끼고 오디세우스를 보았다. 못마땅한 표정. 시계를 계속 살피는 게 아무래도 바쁜 모양이다.

오디세우스가 분위기를 못 읽고 소리쳤다.

“결투! 결투다!”

“허!”

헛숨을 터트렸다.

결투라고? 방금 나한테 얻어맞은 걸 잊어버린 건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무기를 든다고 크게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건가?”

“…흥! 야만스럽긴! 결투라고는 해도 싸움 같은 야만적인 짓거리를 할 건 아니거든?”

결투라면서 싸움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역시 이놈은 바보인가?

“활 쏘기 시합이다!”

활? 좋아하지 않는 무기다.

오디세우스가 히죽 웃는다.

“설마, 그 대단한 오디슨 님께서 이 비루한 놈의 도전에 겁먹고 도망치는 건 아니시겠지?”

“…오디세우스. 괜한 일을…….”

헤라클레스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경고할 때 나는 피식 웃었다.

활 쏘기 시합으로 하면 뭐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걸까?

“허, 같잖은 소리로 날 도발하는군. 그러나…….”

“겁먹었소? 응?”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비롭다.”

도전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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