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화. 영웅은 의심받는다 (1)
이제는 아무도 안 찾는 산이 된 곳, 오행산.
황실 측은 오행산의 괴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군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지진에 괴성을 들은 병사들이 임무 수행을 거절하며(겁에 질린 장군이 탈영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묻혔다), 임무가 취소되었다.
그 탓에 오행산 근방 마을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주민들의 이탈 현상이 도드라져 황실에서는 골치를 썩이는 중.
하지만 오행산 지하에서는 태평한 세 사형제가 있을 따름이었다.
“왔드아아아아!”
손오공이 괴성을 내질렀다. 보통 때라면 저팔계와 사오정이 그를 욕하며 투덜댔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손오공이 털을 부르르 떨며 구름을 반겼다.
“근두운! 그리고…….”
손오공이 구름 위를 바라보고 히죽 웃었다.
단단하게 묶어 둔 물건이 사라졌다. 구름에 물건을 묶는다? 미친 소리 같지만, 근두운에는 그게 가능했다.
“우끼끽! 역시, 폼 잡으면서 태초의 공허에 던져 뒀다 한 보람이 있다니까!”
애초에 술법으로 만든 구름이다.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데 물건 정도 묶는 게 뭐가 어려울까?
손오공은 오디슨을 발견하면 그 묶은 덩어리를 던져 주라 명령을 입력해 두었다.
“캬하하하! 봤느냐, 멍청이들아! 이 사형이 여기에서 탈출할 방법을 만들었도다!”
안타깝게도, 오디슨은 손오공이 마지막으로 한 인터뷰를 보지 않았다.
그의 안배는 그저 운이 좋아 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손오공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끼끼! 수고했다!”
근두운이 터졌다.
펑! 소리와 함께 수증기로 변한 근두운이 사라졌다. 약간의 도력 누출이 사라졌고, 손오공의 온몸에 힘이 가득해졌다.
그가 흐흐- 낮게 웃었다.
“흐흐흐, 이제 곧이다, 곧!”
“꿀꿀, 사형… 그런데 대체 어떻게 불러올 생각이양?”
오디슨에게 복제한 여의봉을 전달했다 한들, 그가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저팔계와 사오정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손오공의 입을 바라보았다.
손오공이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이 몸이 누구더냐, 제천대성 손오공 아니냐! 내가 아무런 대책 없이 여의봉만 줬을 것 같냐?”
“…그럼?”
툭툭, 손오공이 제 머리를 두드렸다.
그 의문의 행동에 저팔계와 사오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를 썼다는 이야긴가? 손오공이 머리를 쓰는 일이 있던가?
그들이 눈살을 구길 때, 손오공이 말했다.
“긴고아(緊箍兒).”
그 말에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무를 마치고 투전승불의 칭호를 받은 손오공은 당장에 제 머리를 조르던 긴고아를 박살 냈다.
긴고아는 머리띠다. 긴고주(緊箍呪)라는 주문에 반응해 줄어드는 물건. 삼장법사가 혈기 넘치는 손오공을 다루기 위해 쓴 귀물(貴物)이다.
“긴고아를 같이 줬다니… 사형도 머리를 썼구낭! 꿀꿀!”
저팔계가 감탄했고, 손오공이 엣헴- 헛기침을 하며 콧대를 세웠다.
사오정이 슬쩍 불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사형. 오디슨이라는 놈이 ‘순수한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어쩌지?”
타당한 불안이었다.
저팔계가 우뚝 굳었고, 손오공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 멍청한 놈! 순수한 마음을 가졌든 아니든 상관없잖냐!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하면 그만이니 말이야!”
그 말에 사오정이 고개를 끄덕였고, 저팔계가 감탄을 내뱉었다.
손오공은 고향 집에 온 느낌으로 편히 누워 있을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니었다. 둘은 산에 깔려 버티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 올깡?”
저팔계의 말에 손오공이 씩 웃었다.
“내가 나름 고심 끝에 만들어 낸 긴고주 노래 파일을 포함한 긴고아다! 우끼끼! 걱정할 것 하나 없지. 타임 리미트는 머리에 착용하고 한 달. 그 정도만 기다리면 우린…….”
손오공이 아련한 눈으로 새까만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자유다, 자유.”
우끼끼- 원숭이 소리가 오행산 지하 감옥에 울려 퍼졌다.
* * *
전투가 끝났다.
상쾌함보다 시구르드가 남긴 말이 더 와 닿았다.
마지막 순간, 시구르드는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랬다고 해도 무기를 잃은 그와 새로운 무기를 얻은 나. 어느 쪽이 이길지는 뻔했다.
허나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감명 깊었다.
그리고…….
“…아니, 생각할 필요 없겠지.”
오딘께서 믿음을 배신하셨다?
언제나 패배자들이 하던 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자들은 늘 오딘을 탓했다. 어찌하여 내게 패배를 내리시냐고.
그런 걸로 해 두자.
“오디슨!”
크레네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떡해, 어떡해! 이 상처… 조금만 기다려요, 당장 치료수를…….”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는 저쪽이 우선일 것 같군.”
“아… 아직도?”
“그에게 안식을 줬으면 좋겠다, 크레네.”
내 말에 크레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흐르는 물처럼 부드러운 주문을 외웠다. 마치 영웅의 죽음을 기리는 장송곡 같았다.
물줄기가 시구르드에게 끼얹어지고, 검게 탄 그의 피부가 제 색을 되찾았다. 그리고 점점 희게 변하더니 재가 되었다.
검은 공허에 흰 재가 휘날렸다.
“편히 쉬시오, 영웅이여.”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 일행을 살폈다.
그람이 깨진 덕인지, 아물지 않던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라호드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기절은 진짜 오랜만이네요. 후우.”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이라호드.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라호드, 부탁할 게 있다.”
“일어나자마자 부탁이라니…….”
이라호드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토르손을 가리켰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굳어진 토르손의 얼굴. 그 몸은 저쪽에 누워 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토르손이 죽었어요?”
“음. 그의 영혼을 발할라로 인도해 줄 수 있을까?”
“죽은 지 얼마 안 됐다면야, 긴눙가가프에 흩어지진 않았을 거예요.”
아직은 괜찮겠지? 걱정이 들었다.
그때, 까악-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푸드득- 날개를 홰친 메르키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닥. 내가 이미 갈무리해 뒀으니 말이야.”
“…아, 감사해요, 메르키 공.”
이라호드가 인사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메르키 녀석이 안경을 추어올렸다.
“싸움에 도움을 주진 못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겸연쩍은지, 녀석은 부리로 제 깃털을 골랐다.
다행이다. 토르손이 영혼 없는 시체가 되거나, 혹은 소멸해 버렸다면 나는 평생토록 내 욕심을 원망했으리라.
이그나르도 ‘천만다행이구먼.’ 하고 비틀대며 일어났다.
“…후우, 빌어먹을. 영웅담 속 영웅이 확실히 약하진 않구만. 아구구.”
일부러 너스레를 떠는 게 틀림없다.
슬쩍 제 도끼를 보는 모습이 울적해 보였다.
다이스에서 산 싸구려 도끼라고 해도, 전에 말하기로는 발할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사서 쭉 쓰던 물건이라고. 이그나르가 발할라에 온 건 수십 년은 된 이야기다. 그 애착도 크리라.
나는 그에게 다가가 쇳조각을 내밀었다.
“…이건? 그람? 이걸 왜?”
“부러진 칼날이지만, 네가 쓰도록 해라. 그걸 도끼로 가공해서 쓴다면 하위 리그에서는 적이 없을 터.”
이그나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래도… 네 결투를 대비해서 온 거잖아? 좋은 물건을 찾아서 창 자루를 만들려고?”
그에 어깨를 으쓱였다.
“비다르는 나보다 세흐림니르 고기를 많이 먹었겠지.”
만일 그가 지독한 편식을 한다고 해도, 발할라에 닿은 지 1년도 안 된 나보다는 훨씬 많이 먹었으리라.
즉, 나보다 회복력이 훨씬 좋다. 그런데 그에게 마검 그람을 들이민다?
어림없는 짓이다.
“그건 소유주의 고통을 상대에게 전해 주는 물건이다. 내가 상처 입고 비다르에게 그걸 옮긴다고 한들, 소용없겠지. 부서졌지만…….”
스윽 칼날을 쓰다듬었다.
요사스러운 붉은빛이 번뜩였다.
“힘을 잃지는 않았을 거다.”
자신과 같은 고통을 상대에게 느끼게 하는 물건.
회복력이 뛰어난 이그나르와 함께라면? 굉장한 효율을 낼 터.
나는 재차 이그나르에게 그람의 칼날을 내밀었다.
“으음…….”
이그나르는 여전히 복잡한 얼굴이었다.
왜 저러지? 내가 아는 뚱땡이는 낄낄 웃으며 받아 들었어야 하는데…….
뭔가 내게 미안한 게 있나? 슬쩍 눈살을 구겼다.
“이그나르?”
“…으응? 뭐, 뭐, 왜?”
당황하는 모습이 더 수상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너, 이제까지 나한테 싸구려 고기를 먹였나?”
이그나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화냈다.
“무슨 개소리야! 내 식당에서는 최고급 세흐림니르 고기만 쓴다고!”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그게 아니라면 이 녀석이 내게 미안할 게 뭐 있지? 이그나르가 땅이 꺼져라 한숨 쉬었다. 벅벅 머리를 긁었다.
“제기랄. 그래, 맞아. 널 좀 팔아먹은 게 있어서 그래.”
“…날 팔아먹었다고? 식당 손님에게, 그……?”
내 이야기를 마구 해 대는 건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다. 혹시 그 이상의 무언가를 했나? 날 만나게 해 주겠다며 돈을 뜯는다던가?
이그나르가 고개를 저었다.
“제기랄! 그게 그러니까…….”
놈이 답지 않게 침을 꼴깍 삼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올림포스의 아폴론이 이그나르에게 후원을 제안했다는 것. 그리고 그 후원이 꽤 독특한 형태로 이뤄졌다는 것.
가게에 최고급 칼리돈을 무상 제공하며, 나에게 잘 좀 말해 달라는 식이었다고.
이그나르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난 이걸 받기가 좀… 미안하다 이거지. 네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올림포스 쪽에서 후원을 받은 데다가…….”
녀석이 내 눈치를 살폈다.
크레네가 슬쩍 내 팔을 잡았다. 슬쩍 그녀를 보니, 크레네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고개를 저었다.
이라호드 역시 그랬다. 살짝 전전긍긍하며 언제라도 날 잡을 태세였다.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이가 없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디슨! 참아요!”
“오디슨, 이그나르가 딱히 잘못한 건 없잖아요? 올림포스 쪽에서 공짜로 그냥 준 데다가, 이제까지 오디슨에게 그쪽을 옹호하는 발언도 안 했구요.”
크레네와 이라호드가 날 말렸다.
어이가 없어 그녀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쯧- 혀를 차고, 크레네의 손을 떼어 냈다.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 오디슨… 그, 화난 거 아니었어요?”
어깨를 으쓱였다.
“화낼 이유가 딱히 없지 않나. 그자들이 칼리돈 그 멧돼지에 무슨 비열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약해서 진 것을. 나 때문에 그 돼지 사업이 망해 버렸다는 건 나름 기분 좋기야 하지만…….”
볼을 긁적였다.
“좀 미안하기도 하군.”
“…오디슨은 올림포스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요?”
크레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한다.”
딱 잘라 말했다.
좋냐 싫냐 묻는다면 당연히 싫은 쪽이다.
하지만…….
“그래도 모두를 적대할 생각은 없다. 크레네, 너만 해도 올림포스 출신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널 미워했나?”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요?”
첫 만남에서 크레네는 분명 내게 무례하게 굴었다.
멀쩡한 전사에게 남창 짓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는 건, 여러모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하지만 난 무작정 창을 휘두르는 놈이 아니다.
“올림포스 전체와 싸울 생각은 없다. 아폴로나 디아나가 주전파였던 것도 아니니.”
내가 싫어하는 제국놈들은 대부분 마르스를 외쳤다. 당연히 마르스가 싫을 수밖에.
그러니…….
“이그나르, 받아라. 아폴로 일은 여러모로 생각을 해 보지.”
“…그, 그래?”
이그나르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그람의 칼날을 받았다.
멍청한 놈. 그냥 웃는 게 덜 바보 같을 텐데.
고개를 저었다.
“쌍도끼를 쓰던 걸 생각하면, 양쪽 다 줘야 하나 싶지만… 손잡이 부분은 토르손에게 줄 생각이다.”
“뭐, 어차피 이걸 녹여서 도끼로 만들어야 하니… 한쪽이어도 별 상관없어. 고통을 튕기는 효율이 줄어들지 모르겠지만, 뭐!”
이그나르가 제 배를 툭툭 쳤다.
“이 쌓인 인덕이 어떻게 해 주지 않겠어? 흐흐.”
“…으음, 어쨌든 토르손에게도 고기를 좀 많이 먹여다오. 녀석도 그람을 써먹으려면 맷집이 좋아야 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껄껄 웃은 이그나르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닿았는지 내 걱정을 했다.
“그런데 대체 어쩔 셈이야? 창 자루로 쓸 물건은?”
히죽 웃고 들고 있던 쇠봉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람을 동강 낸 쇠봉이다. 이거면 충분하겠지.”
“…허, 참. 그런 게 어디에서 뚝 떨어졌대?”
그러고 보니, 이그나르는 쓰러져 이 쇠봉을 보지 못했나?
이라호드 역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글쎄, 위쪽에서 뚝 떨어지긴 했는데…….”
이그나르가 눈을 끔뻑였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이게 틀린 말은 아니다.
볼을 긁적였다.
“어쨌든, 예사 물건이 아닌 것 같으니…….”
좋은 물건이다.
붕붕- 휘둘러 보니, 묵직하긴 해도 못 견딜 수준은 아니다.
툭!
…끝에 있던 금테가 떨어졌다.
“커흠, 그냥 운이 좋아서 그람이 부서진 건가?”
불안했다. 눈살을 구긴 채 다가가 그 금테를 집어 들었다.
“후우, 다행이군. 원래 분리되는 부분이었던 모양이다.”
금테에 작게 접어 끼워 둔 메모를 보면 확실하다.
수상쩍은 메모다. 나는 그를 펼쳤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눈썹을 찡그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큰 문제가 있었다.
이그나르가 고개를 갸웃하다 물었다.
“뭐야, 왜 그래? 무슨 심각한 내용이라도 적혀 있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모르는 글자다.”
뭐라고 적혔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게 문제다.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하고 손을 내밀었다.
“…모르는 글자라구요? 줘 봐요.”
“다른 나라 말도 할 줄 아나?”
놀라 묻자,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 * *
이라호드는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저 발키리 학교 나온 여자거든요? 대충 9개 국어쯤이야 문제없어요.”
그녀의 말에 크레네가 입술을 삐죽였다.
“어차피 바벨 시스템 덕에 의사 소통에는 문제없잖아요.”
“그래도 글자를 읽는 건 배워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크레네가 입을 다물었다.
바벨 시스템이란, 신계 연맹 전체에 깔린 신비다. 어떤 의지를 담아 말을 내뱉으면 그 의미가 선명하게 전달되는 특유의 마법 혹은 권능.
모두가 크레네의 주문을 못 알아듣는 건 그저 ‘주문’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그 뜻을 전하고자 한다면 모두 알아들을 터.
크레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면 바보 같은 짓을 했네. 간판을 룬 문자가 아니라, 헬라어로 새겼으니…….’
목욕탕이 망한 데는 그런 것도 분명 영향을 끼쳤으리라.
크레네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질 때, 이라호드는 메모를 읽어 내려갔다.
유려한 필체로 적힌 한자. 9개 국어를 한다고 자랑했지만, 제대로 읽기에는 너무 휘갈겨 쓴 글자였다.
이라호드가 땀을 주르륵 흘렸다.
큰소리를 떵떵 쳐놓고, 메모를 못 읽어서? 아니다.
‘한자? 금테? 그리고… 그람도 깨트릴 쇠봉?’
그녀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니, 사람이 아니다.
오디슨이 오- 하고 감탄을 흘렸다.
“분명 금으로 된 것 같은데, 어찌 이렇게 쭉쭉 늘어나는 거지? 머리띠로 써도 되겠군.”
오디슨이 신기해하며 머리에 그걸 쓰려는 순간, 이라호드가 꽥 소리쳤다.
“오디슨! 그만!”
“으응? 무슨…….”
“그 망할 원숭이 같으니…….”
까득! 이를 간 이라호드가 오디슨의 손에서 금테를 빼앗았다. 그리고 메모와 함께 휙 던져 버렸다.
새까만 공허에 반짝이는 금테가 날았다.
“금인데…….”
오디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라호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디슨의 어깨를 딱 잡고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라호드……?”
오디슨이 당황했다.
이라호드가 말했다.
“오디슨, 잘 들어요.”
“으음, 알겠다. 말해라.”
습습후- 심호흡을 한 이라호드가 말했다.
“지금 오디슨이 손에 든 쇠봉은, 긴눙가가프에서 얻은 게 맞죠?”
“…무슨 소리냐? 내가 이걸 들고 온 것도 아니건만.”
이라호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하늘에서 떨어졌나요?”
“음… 그렇지?”
“아니에요.”
이라호드가 딱 잘라 말했다.
오디슨이 눈을 끔벅였다.
그녀는 힘을 주어 한 글자 한 글자 딱딱 끊어 말했다.
“그건 시구르드의 성에 있던 커튼 봉이에요.”
“…커튼 봉? 아니, 이건…….”
“아뇨, 그건 커튼 봉이에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커튼 봉이에요.”
오디슨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라호드가 확실히 말했다.
“커튼 봉이라구요! 알겠죠?!”
“어, 어어…….”
이라호드의 박력 앞에, 오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디슨을 장물 취급 혐의로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색도 새로 칠해야겠어.’
만일 신계 연맹에서 오디슨이 복제 여의봉을 손에 넣은 걸 알아챈다면?
별다른 보상도 없이 복제 여의봉을 회수할 게 틀림없다.
‘그러면 다행이지. 손오공과 어떤 연결점이 있었나 의심받을지도 몰라.’
그럼 비다르와의 결투는? 승률이 희박해지리라.
발키리답지 않은 태도다. 하지만 발키리다운 태도다.
담당하는 전사를 위하는 발키리, 이라호드는 진실에서 눈을 돌렸다.
‘…제발, 안 들키기를……!’
이라호드가 간절히 빌었다.
허공을 날던 금테, 긴고아를 감싼 메모는 맞바람에 펄럭였다. 그리고 이윽고 금테와 떨어져 홀로 휘적휘적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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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팔계와 사오정은 손오공의 무식함을 너무 얕봤다. 그들은 저런 식으로 멍청하게 긴고아를 씌울 생각이라고는 짐작지 못했다.
그리고 결투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