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화. 영웅은 상속받는다 (3)
“으음…….”
자세를 잡았다.
창을 다루는 기본자세.
허리쯤에서 양손으로 창을 잡는다. 그리고 창끝은 상대의 목 언저리를 겨눈다.
“후우.”
얼굴을 겨누는 게 아니다.
머리는 생각보다 작다. 막 창을 쥔 사람들이 찌르기엔 말이다. 게다가 두개골에 창이 미끄러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목 언저리다.
대략 목젖에서 쇄골쯤. 이쪽을 겨냥하고 찌르면 머리를 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목을 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을 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상대를 위축시키기에 딱이다.
“그럼.”
내 말에 시구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앞발을 움직여 천천히 다가선다.
시구르드가 씩 웃었다.
“자세는 제대로군.”
“그쪽도.”
시구르드는 대충 서 있는 것 같지만, 빈틈이 전혀 없었다.
슬쩍 검 끝을 까닥이는 것만 해도 당장에 베일 것 같았다.
언제 달려들까? 지금? 아니면 조금 있다가?
그때, 이라호드가 끼어들었다.
“잠깐, 혼자 상대할 생각은 아니죠?”
살짝 입술을 비틀었다. 서로 이름을 밝히고 결투를 벌이려는 찰나에 끼어들다니! 내가 질 거라 생각하는 건가?
이라호드가 고개를 저었다.
“오디슨, 시구르드는 보통이 아니에요. 정말로 순수하게 잘 드는 칼 하나를 가지고 용을 잡았다는 게, 우습게 볼 게 아니라구요.”
“내가 질 거란 말인가?”
시구르드가 용을 잡아냈다지만, 나는 신성을 얻었다. 사람들의 믿음이 날 강하게 한다. 룬스톤은 쓸 수 없다지만, 여차하면…….
이라호드가 눈살을 구겼다.
“’그걸’ 쓸 생각은 아니죠?”
뜨끔했다.
슬쩍 그녀의 눈을 피했다. 이라호드가 슥- 자세를 잡으며 내게 말했다.
“영혼을 갉아먹는 기술이라는 건 위험해요. 오딘께서 ‘프레키’의 축복을 내리셨다지만, 어느샌가 오디슨의 영혼이 다 닳아 없어지면요? 적의 영혼을 덕지덕지 기운 영혼을 가지게 된다면요?”
나는 그에 대꾸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다. 만일 내 본래의 영혼이 다 사라졌을 때 나는 여전히 ‘오디슨’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내겐 어울리지 않는 고민이다.
이라호드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룬스톤 없이 ‘그걸’ 쓴다는 건, 미친 짓이에요. 이제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을 연약한 은 스푼으로 들어 올린 셈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손이 덴 거구요. 그런데 이제는 맨손으로 쥐겠다구요?”
안다. ‘광신’은 위험하다.
이제까지 내가 광신을 사용하는 데에는 룬스톤의 힘을 당겨쓴 것에 가깝다. 하지만 긴눙가가프는 룬스톤이 작동하지 않는 곳.
함부로 쓰다간 내 영혼이 그대로 잡아먹히리라.
한숨을 내쉬고 시구르드에게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소.”
“나쁘지 않다. 동료와 함께라.”
시구르드는 몇 번이나 동료, 동료, 동료- 하고 되새겼다.
그리고 말했다.
“그리운 이름이다. 그분은 전쟁의 신이시지 결투의 신이 아니시다. 이기는 방법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시구르드가 너그러운 태도로 말했다.
동료가 함께 덤비겠다 했는데도 저런 모습이라니.
저게 바로 영웅의 풍모가 아닐까? 게다가 위축되는 꼴이 아니다.
오히려 더 당당해진 모습.
그가 말했다.
“하지만 괜찮을까?”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말에 이라호드가 무게중심을 낮췄다.
이그나르가 침을 꿀꺽 삼키고 도끼를 고쳐 쥐었다. 토르손이 검을 단단히 곧추세웠다.
크레네가 지팡이를 꼭 쥐었다. 그 지팡이는 그저 걸을 때 좀 더 편하라고 대충 꺾어 만들어 준 물건이다.
…저걸 휘두르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모두의 적의를 정면에서 받으며, 시구르드가 덤벼들었다.
“너는 견딜지라도, 네 동료들은?”
질문이 날아들었다.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시구르드가 노린 것은…….
* * *
“크레네!”
오디슨의 목소리.
크레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범처럼 달려드는 시구드르 앞에 바싹 굳어 버렸다. 그저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을 뿐.
“아……!”
“어이쿠, 그건 아니지!”
가장 약해 보이는 이부터 치겠다?
이그나르가 거구를 들이밀어 진로를 막았다. 투실투실 찌운 살이 이럴 때 도움이 됐다.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거, 전설 속의 영웅이라는 양반이 아주 슈퍼 웰던이 되셨군! 이 싱싱한 후배의 요리 솜씨 좀 보시오!”
부웅!
도끼를 휘둘렀다. 쌍도끼가 좌우에서 X자를 그리며 쇄도했다.
“덥수룩한 수염쟁이의 요리 솜씨를 보기엔, 내 입이 너무 고급이군.”
채앵!
시구르드는 대수롭지 않게 검을 휘둘렀다. 한 번에 도끼 두 자루를 모두 쳐 냈다.
이그나르가 뒤로 물러서며 히죽 웃었다.
“크! 왕자로 태어나신 분답구만! 하지만 나는 얼음땅 부족의 얼음도끼, 이그나르! 발할라 최고의 요리사라고!”
이그나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다시 떨어지는 도끼, 시구르드는 시큰둥한 태도로 그람을 휘저었다.
챙챙! 도끼가 튕겨 나가고, 이그나르가 히죽 웃었다.
노린 대로다.
“흐아아앗!”
“음? 무식하게 덤빈다 했더니, 겨우 이건가?”
밀어내려는 발차기.
시구르드는 그 공격을 뒤로 물러서 피해 냈다.
이그나르가 소리쳤다.
“토르손! 요리 나간다!”
“흐으으읍!”
시구르드가 물러선 곳에는 토르손이 있었다.
그는 이그나르의 농담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검 한 자루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시구르드는 토르손의 우상이었다.
‘내 검도 약하진 않아!’
쐐애애액! 챙!
시구르드는 그를 쉽사리 받아넘겼다.
오히려 수세를 그대로 공세로 전환해 버렸다.
“검을 너무 꽉 쥐고 있구나, 자! 봐라! 그러니 이렇게 튕겨 낼 때마다 몸이 휘청이지 않는가!”
챙챙챙!
“윽!”
시구드르의 말처럼, 토르손은 그의 공격을 받아 내며 비틀댔다.
이그나르가 틈을 노렸지만, 그람은 길었다. 함부로 덤벼들다간 얄궂게 칼의 진로를 방해하기만 할 터.
“제길!”
이그나르가 발을 굴렀다.
시구르드가 쩔쩔매는 토르손에게 말했다.
“아직은 한참이나 이르구나! 더 배우고 와라!”
그람이 토르손의 가슴팍을 노리고 횡으로 짓쳐 들어갔다.
토르손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 외침이 귓가를 때렸다.
“영감의 지팡이다, 토르손!”
생각은 하지 않았다.
토르손은 검을 피해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그나르가 놀라 소리쳤다.
“토르손! 야, 인마!”
싸움 도중에 주저앉다니! 차라리 가슴을 내어 주고 수습하는 게 더 싸게 먹히리라.
“죽어라.”
시구르드가 그람을 번쩍 치켜들었다. 바닥을 구른다고 해도 제대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리라.
그때, 오디슨이 달려들었다.
“흐아아앗!”
푸욱!
창이 텅 빈 시구르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크으……! 하찮은 술수를!”
시구르드가 그람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 칼날은 허공에 뜬 먼지를 베어 낼 뿐이었다. 오디슨은 곧장 창을 회수하며 바닥을 뒹굴었으니까.
씩 웃은 오디슨이 손을 내밀었다.
“잊지 않았군.”
“크흐… 대장이 주술사 영감의 지팡이를 훔쳤다가 종아리가 팅팅 불어터져 제대로 서지도 못한 꼴을 어찌 잊겠수? 흐흐…….”
토르손이 땀을 닦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시구르드는 그 꼴에 혀를 찼다.
“이렇게 한 번 칼날을 피했다고 한들, 어쩔 셈이지?”
오디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 번인지 아닌지, 해 봐야 아는 게 아니겠소?”
오디슨은 자세를 바꿨다.
창을 한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마치 작살을 던지려는 듯한 모습.
창을 찌르기보다는 찍기에 가까운 형태로 사용하는 자세다.
이 자세의 장점은 두 가지다.
“허! 거리를 벌리겠다?”
시구르드가 덤벼들었다.
이렇게 투창으로 오해하게 하는 게 첫 번째다. 조급해진 상대는 언제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흐읍!”
쐐애액!
오디슨이 창을 내리찍었다. 시구르드가 흠칫 놀라 그람을 추어올린다.
그람과 창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카아아앙!
귓가를 괴롭히는 굉음이 크게 울렸다.
“큭!”
시구르드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저것이 두 번째. 그냥 찌르는 것보다 훨씬 강한 공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덤으로…….
“흐아앗!”
“무식하기 짝이 없군!”
시구르드가 덤벼드는 오디슨에게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오디슨은 싸우는 데에 직선적인 공격만을 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퍼억!
“이런!”
“하단을 잘 살펴야지!”
오디슨이 시구르드의 오금을 걷어찼다.
내려찍는 공격은 필연적으로 위에서 시작한다. 당연히 신경이 위로 쏠릴 수밖에.
시구르드가 비틀거렸다.
쐐애애액!
그리고 하얀 것이 날아들었다.
“오디슨, 계속 공격해요!”
이라호드의 투창이었다.
시구르드가 투창을 맞받아치고자, 그람을 휘둘렀다. 하지만 발키리의 투창술은 기기묘묘했다.
창이 곰을 피해 도망치는 연어처럼 유연하게 허공을 헤엄쳤다. 그리고 재차 시구르드를 노렸다.
“발키리들은 늘 귀찮은 짓을 하지.”
시구르드가 짜증을 부릴 때, 오디슨이 달려들었다.
힘을 잔뜩 끌어올린 탓에 팽팽하게 부푼 팔에서 창이 쏘아진다.
“끝이오, 시구르드!”
번쩍!
검은 번개가 시구르드를 꿰뚫었다.
“…이건?”
시구르드가 제 가슴팍에 박힌 창을 보며 비틀거렸다.
오디슨이 대꾸하기도 전에 다른 창이 날아들었다.
푸욱!
발키리의 하얀 성창이 시구르드를 꿰뚫었다.
그가 휘청거렸다.
“허.”
“편히 쉬시오, 시구르드.”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었다.
이제는 모두에게 익숙해진 주문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뷔 포시다우타, 메가 테- 온, 포 미뷔-! 레- 테!”
망자가 플레게톤의 불꽃 강을 지나 닿게 되는 곳.
망각의 강, 레테. 정화가 끝난 영혼을 새롭게 만드는 곳이다.
모든 것을 잊고, 깨끗해지는 정화수.
“끝? 편히 쉬라고?”
시구르드는 날아드는 물줄기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람을 치켜들었다.
“그분과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오딘의 아들이여.”
그람이 불길한 빛을 내뿜었다.
빛을 잃은 시구르드의 눈동자에 검만이 선명히 비쳤다.
검의 이름, 그람의 뜻은 ‘분노’.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 * *
그람이 그람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
신검(神劍)의 첫 번째 주인은 시구르드의 아버지, 시그문드였다.
보물은 비극을 불러왔다.
‘이 검은 내 차지다!’
검을 탐낸 시게일이 뵐숭 일족을 초청해 몰살한 것이다. 시그문드는 그 와중 겨우겨우 탈출했다.
두 번째 주인은 시게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시그문드의 손에 죽었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오라, 검이여.’
시그문드는 승승장구했다. 건방져졌다.
전쟁에 나설 때마다 승리를 얻어 내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그문드는 전쟁터에서 초라한 행색의 노인을 마주쳤다.
시그문드는 노인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분노한 노인은 지팡이를 들어 신검을 내리쳤다.
시그문드는 그 행동을 비웃었으나, 검은 두 동강 났다.
그제야 그는 노인의 정체를 알았다. 신검을 잃은 시그문드는 전쟁에서 패배했고, 아내에게 유언을 남겼다.
새로이 검을 벼려낸다면, 그 이름은 그람(Gram)으로 하라.
시구르드가 외쳤다.
“가장 높으신 분, 오딘이시여!”
번- 쩍!
그람에서 빛이 터져 나왔고, 오디슨이 눈을 부릅떴다.
“크으윽……! 왜?”
그는 가슴의 통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가슴팍을 만져 보니, 시뻘건 피가 축축하게 묻어났다.
왜? 오디슨의 머리가 뒤죽박죽 꼬였다.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이라호드였다.
오디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라호드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오디슨은 단 한 번도 이라호드가 패배하는 광경을 떠올리지 못했다.
움찔거리는 그녀의 몸 아래, 붉은 피가 융단처럼 깔렸다.
“…어째서?”
피를 너무 흘린 탓일까?
눈앞이 핑 돌았다.
몽롱한 와중, 오디슨은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람.”
불길한 빛을 내뿜은 마검.
그 마검의 주인은 모두 비참하게 죽었다. 하지만 그 마검이 원수를 놓친 적은 없었다.
“…분노.”
그 이름처럼, 미쳐 날뛰었다.
제 가슴팍에 난 상처는 딱 창을 찔러 넣은 곳이었다. 이라호드의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오디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주인과 상대를 동시에 죽이는 마검이라… 시체가 주인이 되면 어찌 되는 거지?”
반칙이다.
그렇게 생각한 오디슨이 꼬꾸라졌다.
쿵, 머리가 흔들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이 차갑다.
‘…죽음인가? 또? 정말이지, 아직 약해 빠졌구나.’
홀로 쓰게 웃었다.
그 귓가에 째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오디슨? 오디슨! 이라호드도? 정신 차려요!”
크레네였다.
그녀는 놀라 주문에 집중할 수 없었고, 날아든 물줄기는 정화의 힘을 잃어버렸다. 그저 맹물이 시구르드를 적셨다.
그가 그람을 들어 올렸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나는 그분처럼, 오딘처럼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흉흉한 빛을 내뿜는 그람.
“제엔장!”
이그나르는 저 검이 문제라는 걸 알아챘다. 지금 오디슨과 이라호드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제기랄! 님프 아가씨! 주문, 주문을 외우라고! 저 새끼를 없애야 해!”
이그나르가 덤벼들었다. 토르손 역시 당황을 접어두고 달려들었다.
둘 다 전사였다. 전사가 아니게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싸움의 법칙을 잊지 않았다.
‘걱정은 나중에.’
당장의 적을 쓰러트리는 게 먼저다.
“정말, 세계에 도금을 하면, 멸망의 그림자가 가려진다 여기시오? 아무리 반짝이는 황금도 빛은 아니외다.”
제정신이 아닌 듯 중얼거리는 시구르드. 하지만 그람은 그 여느 때보다 붉게 빛나고 있었다.
미친 시체가 검을 휘둘렀다.
“으윽!”
이그나르와 토르손을 한 번에 베려는 검격.
이그나르가 쌍도끼를 내밀어 막아선다. 토르손이 그를 믿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틀렸다.
서- 걱!
잘못된 선택이었다.
“뭐… 이, 미친……!”
“크, 크어억!”
그람은 도끼를 베어 내고, 이그나르의 가슴팍을 갈랐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람은 토르손의 목을 베어 냈다.
한순간에 싸움이 뒤집혔다.
“꺄아아아악!”
크레네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쓰러졌다.
“아, 아아! 아으… 뷔, 뷔 포우…….”
주문을 외우려 했지만, 시구르드가 더 빨랐다. 그는 그저 그람을 치켜들었다.
“아, 아아… 오디슨!”
크레네가 겁에 질려 주저앉았다.
그녀가 눈을 꾹 감았다. 그람이 그녀에게 떨어진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크레네의 몸이 움찔 떨렸다.
고통은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든든한 등이 있었다.
“…오디슨?”
그가 크레네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아무래도 물푸레나무로는 부, 부족하군.”
댕강.
오디슨의 창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몸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예사롭지 않았다.
크레네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악!”
시구르드가 홀로 읊조렸다.
“나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었다.”
그에 오디슨이 지친 기색을 보이며 대꾸했다.
“브륀힐트를 잊은 게 그리도 원통스럽소?”
“…브륀힐트.”
브륀힐트, 브륀힐트.
그 이름을 곱씹은 시구르드가 대답했다.
“아니, 난 그녀를 잊지 않았다. 모두 오딘께서 가호하신 덕이지.”
약간은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오디슨이 눈살을 구겼다.
“분명, 그 엇갈린 사랑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소?”
죽음이 목전에 있건만, 궁금증이 앞섰다.
오디슨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이야기나 해 주시오.”
“오, 오, 오디슨……!”
크레네가 덜덜 떨며 오디슨을 붙잡았지만,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어떻게 가슴팍의 상처를 치료해도 눈앞의 이 영웅을 이길 순 없노라고.
시구르드가 대꾸했다.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네 전설 속의 영웅이 아닐 거라고.”
시구르드는 그때를 떠올렸다.
브륀힐트와 결혼을 약속하고, 성으로 돌아왔을 때를.
시구르드를 짝사랑하던 공주, 구드룬을 위해 왕비가 기억을 지우는 마법 약을 그에게 먹였다.
본래라면 구드룬과 결혼하고 브륀힐트와 엇갈려 비극이 되었어야 하는 이야기에 편집자가 끼어들었다.
초라한 행색의 노인. 그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걸린 사악한 마법을 지워 주마.’
마법이 풀렸다.
분노한 시구르드는 그람을 휘둘러 왕족을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았다.
사랑을 이뤘다.
브륀힐트와 결혼한 그는 영웅 중의 영웅이 되어, 브륀힐트와 함께 발할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그는 승승장구했다.
마지막 그날이 오기 전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그것뿐이다.”
“그분이라면…….”
오디슨이 인상을 구겼다.
시구르드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전쟁은 언제나 사람을 배신하기 마련이지.”
“…오딘은 그럴 분이 아니오.”
글쎄- 시구르드가 고개를 저었다.
어찌하여 바깥의 시체들이 슬픔에 잠겨 있겠는가?
이해하지 못하리라. 아직 이 전사는 배신당하지 않았다.
가장 믿었던 자의 배신만큼 슬픈 것은 없다.
“잊지 마라. 그분은 중요한 순간에 무기를 반 토막 내는 분이시니.”
그람의 첫 번째 주인, 시그문드가 그러했다.
시구르드는 오디슨을 끝장내고자 그람을 치켜들었다. 오디슨은 분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창은 이미 부러졌다.
그람이 피처럼 불길한 붉은빛을 번뜩였다.
“잘 가거라, 이번 열쇠여. 그리고 다시 말하건대, 그분을 믿지 마라.”
오디슨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메르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무리였나. 으응?”
그때, 메르키가 흠칫 떨었다. 눈이 부셨다.
그는 반짝거리는 광채를 보았다.
보물의 빛이었고, 이제까지 그가 보지 못한 찬란한 빛이었다.
그람이 내뿜는 빛이 별빛이라면, 지금 보이는 빛은 태양과도 같았다.
메르키가 중얼거렸다.
“…내가 봤던 빛이… 그람이 아니라고?”
시구르드가 말했다.
“끝이다.”
그람이 오디슨의 목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쇳덩어리가 떨어졌다.
“뭐?”
시구르드가 흠칫 놀라 그람을 회수하려 했지만, 늦었다.
쇳덩어리가 그람과 부딪혔다.
쩌엉!
불꽃이 튀고, 붉은 쇳조각이 흩날렸다.
“아…….”
그람이 두 동강 났다.
시구르드가 넋을 놓았다.
아버지가 느꼈을 감정이 이랬을까?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지팡이로 신검을 반 토막 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당황과 당혹이 그를 지나치고, 분노가 남았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하하하! 하하하핫!”
꿀꺽, 오디슨이 침을 삼켰다.
운명을 느꼈다. 건틀릿을 처음 봤을 때 이러했다.
그는 홀린 듯 쇳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으윽.”
굵기는 대충 손목 정도. 쥐고 휘두르기에 딱 적당한 물건이었다.
오디슨은 이를 위해 긴눙가가프에 왔노라- 생각했다.
웃음을 멈춘 시구르드가 툭 내뱉었다.
“…불합리하군.”
“그럴지도 모르지.”
오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깨달은 것을 툭 내뱉었다.
“아직은 오딘께서 날 보우하시나 보오.”
오해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오디슨이 쇠봉을 휘둘렀다.
빠- 각!
시구르드의 머리가 뭉개졌다.
주르륵, 쓰러지는 시구르드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잊지 마라.”
그 말은 오디슨의 심장 깊숙이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