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화. 영웅은 상속받는다 (2)
영원의 전쟁터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
나는 헛숨을 터트렸다.
“허.”
다른 일행도 다르지 않았다.
“어어…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엄청나네요.”
이그나르가 겁먹은 듯 눈치를 살폈고, 토르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 광경을 보면 그럴 만도 하지.
“정말이지, 영원한 전쟁터로군.”
나는 사실 ‘영원의 전쟁터’라는 이름이 브라기가 대충 붙인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 이름에는 케닝그스러운 면모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 옆에 있던 것이 ‘도시의 시체’였다. 그냥 폐허라고 적어 놔도 되었을 법한 작명.
하지만 내가 틀렸다.
“영원히 싸우는 곳이라…….”
목소리에 그리움이 묻어나왔다.
사실, 내가 발할라에 닿길 바라며 떠올린 것이 저런 풍경이다.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요새들. 그리고 그 요새에서 쏟아져 나오는 군세. 그리고 서로의 힘과 기술을 겨루는 전사들.
영원의 전쟁터에서는 지금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뭘 얻기 위한 전쟁인지 알 수가 없다.
“그어어어……!”
“꾸에에엣!”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군세, 모두가 움직이는 시체들이었으니 말이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황금만능 발할라와 시체들의 발할라… 대체 제대로 되먹은 발할라가 없군.”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엉성하게 붙여 놓은 창 자루를 쓰다듬었다.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만든 창 자루다.
하계에서는 물푸레나무를 구하기 어려워 자작나무를 쓰기도 했다. 자작나무만 해도 좋은 나무지만, 그래도 물푸레나무보다는 한 단계 아래 등급이었다.
하지만 발할라에서는 물푸레나무로 밀대 자루를 만든다.
“황금이 좋기야 하지만, 가끔은 저런 것도 그리운데…….”
쓰게 웃었다.
다이스에서 10크로나로 살 수 있는 물푸레나무 밀대 자루가 반들반들하니 손에 감겨 왔다.
이게 얼마나 버텨 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이 강하지 않다면, 이걸로도 며칠간 싸울 수 있으리라.
창을 쥐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싸움에 지나친 흥분은 좋지 못하다.
“그럼 다들…….”
“잠깐! 저것들이랑 싸우려고?”
이그나르가 내 말을 잘랐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녀석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 물건을 구하러 온 거잖아. 그런데 저거 봐, 저놈들이 들고 있는 게 제대로 된 물건 같아?”
그 말에 재차 살펴보니 확실히…….
비척거리며 싸우는 시체들의 갑옷과 무기, 모두 엉망이다. 낡아빠진 골동품들. 저런 건 주워 봐야 써먹지도 못할 터.
오히려 다이스에서 파는 물건들이 저것보단 훨씬 튼튼하리라.
“으음, 쓰레기를 든 망자라…….”
턱을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싸워서 얻는 게 뭐지? 내 즐거움이야 있겠지만, 지금 이 무리의 대장으로서, 재미 때문에 싸우자 할 순 없었다.
이라호드가 슬쩍 끼어들었다.
“저건 망자가 아니에요.”
망자가 아니다?
그녀가 설명을 이었다.
“망자들은 영혼만 남은 영혼체. 저쪽은 영혼은 없고 사념만이 남아 싸움을 거듭하는 시체일 뿐이에요. 걸어 다니는 시체, 워킹데드, 혹은 언데드라고 하는 것들이에요.”
“음,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다 끄덕였다.
“확실히. 망자들이 여기에서 설치고 있는 걸 헬께서 아셨다면, 이쪽은 모조리 서늘한 얼음 땅이 되었겠지.”
헬께서는 그리 녹록하신 분이 아니시다. 게다가 영혼이 형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니플헤임 외의 다른 곳으로 가기도 어렵다.
찌꺼기들만 해도, 헬을 두려워하지만 니플헤임을 떠나진 못하지 않던가.
이그나르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제기랄, 언데드라고?”
“알고 있나?”
똥 씹은 표정의 이그나르가 주억인다.
“TV에서 봤어. 언데드라는 놈들은 산 사람을 싫어해서 무조건 덮친다고…….”
“설마, 싸우기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겠지?”
멈칫, 이그나르가 몸을 떨었다.
정말로? 이 뚱땡이가 무슨……. 눈살을 구길 때, 이그나르가 짜증을 부렸다.
“싸우는 거야 상관없지! 그런데 한번 물리면 영혼까지 썩어 들어가서 언데드가 된다고! 그 꼴이 되면 부활도 안 돼! 당연히 무섭지!”
깜짝 놀랐다.
“부활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 한번 물리기만 해도, 언데드가 된다니까!”
으으- 이그나르가 두툼한 뱃살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로 저쪽으로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까악까악! 저기 저 요새에서 보물이 반짝인닥!”
메르키가 말했다. 이그나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요새는 우글거리는 시체 군세 너머에 있다.
“싸움을 피할 수는 없겠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창을 고쳐 쥐었다. 이그나르가 땀을 주르륵 흘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아으, 아… 아니, 잠깐! 보물도 좋은데… 좋은데, 그… 어떻게든 살아야 보물을 쥐고 흔들 거 아냐? 물리면 끝이라니까? 응?”
“아뇨, 그건 아니에요.”
이라호드가 딱 잘라 말했다.
아니라고? 이그나르가 잘못 안 건가?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의외의 인물을 지목했다.
“우리한테는 물의 님프가 있잖아요.”
“네? 저요?”
크레네가 깜짝 놀랐다.
* * *
까악까악.
“그래, 그게 궁금했더냐?”
까악까악.
커다란 까마귀 두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딘이 클클 웃었다.
그리고 외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앉아있는 곳은 흘리드스캴프. 세상 어디라도 볼 수 있게 해 주는 신물이었다.
회색 외눈에 비치는 장소는 긴눙가가프다.
오딘마저 무한한 어둠을 바라보자면 덜컥 겁을 먹게 된다. 두려움을 떨친다 한들, 직시하기 어렵다.
온갖 후회가 잠든 곳이니 말이다.
본래의 긴눙가가프는 저리 넓지 않았다.
“…내 업보지.”
오딘의 회한에 후긴과 무닌이 그를 달랬다.
까악까악. 그 울음소리에 오딘이 그들의 검은 깃털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기력이 쇠한 노인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 회차의 열쇠가, 멸망을 막아 낼 열쇠인지는 나도 모른다.”
오딘은 마법을 극한까지 익혔다. 시간을 되돌릴 정도로.
그리고 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졌다. 그리고 세상 모든 곳을 살필 수 있다. 그게 심지어 다른 신계의 대전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을 어쩌랴?
미래도 마찬가지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직 뇨른들만이 언뜻 살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마저도 난해하고 추상적이며 단편적인 수준으로.
확실한 미래를 알고 있는 이는 모든 차원을 뒤져도 손에 꼽을 정도리라.
오딘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지.”
그가 왕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겨우 그런 진실 앞에 꺾일 열쇠라면, 멸망을 막아 낼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야.”
투자에 관한 유명한 격언이 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딘은 투자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달걀을 아무리 모은들 바위를 깰 수는 없다. 그렇기에 오딘은 달걀 바구니에 숨어 있을 단단한 금강석을 찾아야만 했다.
수백억 개의 달걀 중에서 달걀과 똑같은 모습을 한 금강석을 어찌 찾겠는가? 간단하다.
“던져 보면 되는 거지.”
깨진다면 아쉽겠지만.
아니라면? 좀 더 세게 던져 볼 수 있다.
* * *
메르키가 감탄했다. 요 며칠 오디슨 일행을 따라다니며, 무수한 싸움을 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까악. 정말 많이 늘었구나, 오디슨.”
처음 멧돼지에게 짓밟힌 바보 같은 놈은 없었다. 여전히 바보기는 하다.
그저 약한 바보가 아닐 뿐이다.
“그어어어……!”
“정말이지 끝도 없구나! 하하하!”
저놈은 싸움에 미친 바보였다.
푸욱!
오디슨이 창을 내질렀다. 가벼운 찌르기.
하지만 그의 공격에 시체들이 픽픽 쓰러졌다.
“그어어…….”
“질긴 놈 같으니.”
퉤, 오디슨이 침을 뱉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쉴 틈 없이 공격을 쏟아부으면서도 낡은 갑옷에 가려지지 않은 부위를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까악! 하지만 저건 어쩔 테냣?’
철갑을 두른 시체가 오디슨을 향해 다가왔다.
“그르르르!”
“든든한 갑옷을 입고 있구나!”
“그아아아아!”
철갑 시체는 흐느적거리는 동작으로 커다란 망치를 휘둘렀다.
부웅!
굉음이 울렸지만, 오디슨은 쉽게 피했다.
그를 잡기에는 너무 느렸다.
“흐읍!”
다시 창을 찔렀다.
피하느라 비튼 자세에서도 찌르기는 곧은 직선이었다.
푹!
제대로 찔렀나 싶은 작은 소리였다.
메르키가 안경을 고쳐 썼다.
‘…정말 많이 늘었어.’
쨍쨍쨍!
갑옷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모조리 흘러내렸다.
“공격하면서 드러난 이음새를 툭 쳐서 갑옷을 벗겨? 대단하구낙, 대단햇!”
까악까악.
메르키가 날개를 홰치며 기뻐했다. 그가 투기장 관리인을 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성장하는 이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이것도 대리만족인가?’
까마귀가 홀로 자조할 때에도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하얀 창이 시체를 덮친다.
푸욱!
“끄르…….”
목을 꿰뚫은 창에도 시체는 비틀거릴 뿐, 쓰러지지 않았다.
창을 회수한 주인이 눈살을 구겼다.
“칫!”
오디슨처럼 설치면서 강하게 쳐 내는 역할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시체를 쓰러트린 것은 바로 이 발키리였다.
이라호드가 꽥 소리쳤다.
“크레네! 정화수!”
쓰러트린다고 한들, 마침표가 필요했다.
크레네가 주문을 외웠다.
“뷔 포시다우타, 메가 테- 온, 포 미뷔-! 플레게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닮은 주문. 일행에게는 낯선 억양이다.
크레네 스스로도 별로 반갑지 않은 주문이었다.
‘위대한 신, 포세이돈에 대해 노래하노라? 올림포스에서 망명한 내가 이런 주문을 외다니…….’
평생 갈고 닦은 주문을 망명과 동시에 갈아치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쓴웃음을 머금고 쓰는 수밖에.
주문을 완성한 크레네가 잡념을 떨치고 소리쳤다.
“물 튀어요! 조심하세요!”
모두가 피식 웃었다.
몇 번이고 들은 경고지만, 언제나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크레네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썩은 피를 덕지덕지 묻힌 상태였다.
촤아아아!
물줄기가 시체에게 쏘아졌다.
“끄어어어어……!”
치이익- 불길의 강, 플레게톤.
올림포스 지하세계에 흐르는 다섯 개의 강 중에 세 번째 강이다. 망자의 영혼은 그곳에서 뜨거운 불길로 정화된다.
“끄르륵.”
그 힘을 끌어다 쓴 덕인지, 물을 맞은 시체가 그대로 검은 핏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그걸 끝으로,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어휴…….”
크레네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물의 님프라고 해도 물을 정화하는 데는 적잖은 기력이 소모된다. 그녀는 연이은 전투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기뻤다.
‘나도 오디슨이랑 같이 싸울 수 있어.’
처절하게 싸우는 오디슨을 보는 건 괴롭다.
이렇게 같이 싸울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게 낫다. 끔찍하던 시체들도 몇 번이나 보다 보니 익숙해졌다.
핼쑥한 얼굴로 숨을 고르는 크레네에게 오디슨이 다가왔다.
“괜찮나, 크레네?”
걱정 섞인 눈길에 그저 싱긋 웃어 보였다.
이라호드가 저쪽에서 입술을 삐죽이는 게 다 보였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죠? 다친 사람? 이쪽으로 와요!”
크레네의 정화수는 시체를 끝장내는 것 외에도, 상처를 치료하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크레네의 얼굴이 워낙 안 좋았다.
쯧- 안쓰러움에 혀를 찬 오디슨이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크레네의 볼이 붉어졌다.
“다들 보는데…….”
“힘들면 말해라. 쉬어 가면 되니.”
그 모습을 본 이그나르가 투덜댔다.
“저, 저 나쁜 새끼. 내가 좀 쉬자고 할 때는 엄살 부리지 말라더니…….”
“후우, 후우.”
이그나르에게 반응해 줄 법한 유일한 사람, 토르손은 거친 숨을 골랐다.
두 사람은 사실, 이곳에서 싸우기엔 실력이 모자랐다. 2인 1조를 이뤄 싸웠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오디슨이 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웃었다.
“그래도 이제 거의 다 왔다.”
계속해서 싸운 보람이 있었다.
멀게만 느껴지던 요새가 이제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힐끗, 일행의 상태를 살핀 이라호드가 말했다.
“…좀 쉬고 들어가야겠어요.”
오디슨과 이라호드는 비교적 괜찮은 편이지만, 이그나르와 토르손의 상태는 영 아니었다.
이라호드가 시체의 절반, 그리고 남은 절반의 7할쯤을 오디슨이 상대했다. 이그나르와 토르손이 나머지를 처리했다.
하지만 시체를 완전히 침묵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화수가 필수였다. 사실상 시체 모두를 크레네가 끝낸 셈이었다.
그 탓인지 크레네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야겠군.”
오디슨이 제 가슴팍에 기대 색색거리는 크레네를 보고 대꾸했다. 잠깐 부축해 줬을 뿐이건만, 그사이에 지쳐 잠들었다.
주변을 살핀 오디슨이 흠- 하고 침음을 흘렸다.
“여기서 쉬어야 하나?”
“어쩌겠어요? 다른 데는 또 시체가 한가득할 텐데.”
조금 전까지 싸움이 벌어진 곳이다. 전장이었던 곳에서 쉬는 건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다. 시체 썩은 내가 짙게 남았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영원의 전쟁터에서 이보다 좋은 곳을 발견하기는 어려우리라.
잠깐이라도 싸움이 없을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오디슨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기에 온통 시체뿐인 이유도 알 만하군.’
쉬지 않고 싸워대는 시체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견딜 수 있는 이가 없었다.
평소에도 훈련장이라는 안 좋은 침실을 쓰던 오디슨이지만, 이곳보다 훈련장이 수천 배 더 아늑한 침실이었다.
“끄으… 텐트 칠까?”
“…후우. 형님은 좀 쉬세요, 제가 칠게요.”
“아니, 같이 싸웠는데 그럴 수야 있나. 같이 치자고.”
이그나르와 토르손이 텐트를 쳤다.
남자 셋이 자는 텐트와 여자 둘이 자는 텐트. 잠깐이나마 곯아떨어질 수 있는 텐트가 쳐지자, 모두의 얼굴에 피로가 뚝뚝 떨어졌다.
“망할 새끼들. 왜 그렇게 덤비는 거야?”
이그나르가 투덜댔다.
시체들은 산 자에 대한 증오가 엄청났다. 저들끼리 싸우다가도 오디슨 일행이 나타나면 곧바로 덤벼들었다.
그렇게 싸운 것만 대체 몇 번일까? 모두의 어깨가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불침번 뽑아야죠?”
이라호드가 말했다.
다들 서로 눈치를 살폈다. 당장 쓰러져 자고 싶었다. 제비뽑기의 결과에 편한 잠자리가 달려 있었다.
그때, 메르키가 나섰다.
“이제까지 수고했으니, 오늘은 내가 특별히 불침번을 서 주마! 까악까악!”
모두 반색하는 와중, 오디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나? 혼자 불침번을 선다는 게…….”
안 그래도 지루하고 피곤한 불침번이다.
한 사람이라도 같이 있어 준다면 훨씬 나을 터.
하지만 메르키는 피식 웃었다.
“까악! 이 메르키를 걱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오디슨.”
그 말에 오디슨이 눈썹을 구겼지만, 딱히 무어라 말하진 않았다.
‘메르키는 대체 얼마나 센 거지?’
여전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오디슨이 느끼기엔 분명, 메르키가 비다르보다 셌다. 그런데 왜 그 대단한 녀석이 최하급 투기장 관리인 따위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모두 자나?”
메르키가 나지막이 말했다.
일행은 식사를 대충 마치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피곤했는지 드르렁거리는 코골이가 들려왔다.
깍깍, 메르키가 작게 웃었다.
‘…보물에는 파수꾼이 있는 법. 파수꾼을 이겨 낼 수 있겠느냐, 오디슨?’
보물의 반짝임 곁에는 분명 칼의 번뜩임도 함께 있었다.
메르키는 살짝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지더라도 영혼 정도는 거둬 주겠닥.”
도래까마귀의 원칙에 따라 직접적 도움은 줄 수 없다. 하지만 오디슨이 실패했을 경우, 일행의 영혼을 인도해 발할라로 되돌아가는 건 쉬우리라.
메르키는 하필이면 자신을 안내자로 붙인 까마귀 왕들의 생각도 그러하리라 여겼다.
“그래도, 이기면 좋겠군.”
메르키가 부리로 깃털을 골랐다.
새까만 공허 아래 깃털은 공허의 색을 띠고 있었다.
* * *
이 요새는 다른 곳들과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곳들이 정말 ‘요새’라는 느낌이라면, 이곳은 약간이나마 화려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세월의 흐름 탓인지 무너지고 깨져 화려한 느낌은 모조리 죽어 버렸지만.
“후우.”
한숨을 내쉬고,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라호드는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크레네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그나르와 토르손은 살짝 움츠러든 채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낡은 문에 손을 얹었다.
용이 새겨진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음?”
눈을 끔뻑였다. 아무것도 없다.
메르키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메르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나한테 그러냣! 여전히 여기에서는 보물의 기운이 느껴진다. 느껴져! 도래까마귀 중 반짝이는 걸 잘 찾기로 유명한 날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잘 찾아봐라.”
그렇게 말한들, 여전히 요새는 고요했다.
성 밖이 오히려 그르렁대는 시체들의 소리로 시끌벅적할 지경.
고요가 긴장을 불러왔다.
“일단 뒤져 보지.”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1층을 모조리 뒤졌다. 화려했을 입구를 지나 웅장했을 대전에 닿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넓은 식탁이 부러진 채 썩어 가는 식당을 살폈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갔지만, 휑한 풍경이 우리를 반길 뿐.
이그나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허탕 치는 거 아냐?”
“에이, 설마요… 그래도, 그…….”
토르손이 더듬더듬 말할 때, 메르키가 푸드득 날개를 홰쳤다.
“…다음 층에서는 느긋하게 굴 수 없을 것 같다.”
진지한 목소리.
뭔가 있다는 건가? 느슨해지던 긴장의 끈을 꽉 쥐었다.
그리고 3층에 닿았다. 천장이 무너져 공허가 그대로 보이는 곳이다.
단단했을 석벽은 무너지고 깨져 회색 돌가루를 흩날리고 있었고, 포근했을 침실은 이제 그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이불이었을 법한 천 조각들이 닳아 해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을씨년스러웠다.
그리고 썩어 가는 의자에 앉은 시체를 보았다.
“…그냥 시체인가?”
내 말에 시체가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시체다. 새까맣게 타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내가 손을 들어 지시를 내리려 했으나…….
“최근 주변에서 소란을 피우던 녀석들이군.”
시체가 말을 꺼냈다.
말하는 시체라니? 영혼이 없어 이지도 없다지 않았던가!
슬쩍 이라호드를 바라보자 그녀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오디슨, 조심해요. 보통이 아닐 것 같아요.”
이라호드가 경고했다.
시체가 이라호드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발키리는 오랜만이군.”
“진짜 보통 시체가 아닌 모양인데요……?”
이라호드가 긴장했다.
발할라에 닿지 못한 시체가 발키리를 알아보다니.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걸었다.
“…말을 할 줄 아는가?”
“그야 물론이지. 버림받은 자라고 모두 슬픔에 미쳐 날뛰는 건 아니다.”
버림받은 자?
눈살을 찌푸렸다.
“버림받은 자? 누구한테 버림받았다는 거지?”
“긴 이야기는 필요 없을 것 같군.”
스윽, 시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허리춤에 매고 있던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척 봐도 명검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이 분명하건만, 서슬 퍼런 날이 전혀 죽지 않았다.
“좋은 검이군.”
“…글쎄, 갖고 싶나?”
시체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갖고 싶냐고? 저런 검을 갖고 싶지 않은 전사가 어디에 있을까?
아쉬운 건 장검이라는 걸까? 만일 창이었더라면, 나도 토르손처럼 넋을 놓고 검을 바라보고 있었겠지.
길고 폭이 넓은 장검은 마치 뱀이 똬리를 튼 듯한 무늬가 선명했다. 그 무늬가 사람을 현혹한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그람(Gram)?”
시체가 멈칫했다.
“알고 있나?”
“…발키리를 오랜만에 본다는 듯한 말 하며, 불에 탄 모습하며… 그리고 그 검까지……. 혹, 시구르드(Sigurðr)시오?”
오딘의 피를 이었다는 뵐숭 일족은 수많은 옛 왕의 핏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내가 바로 시구르드. 동쪽 지방 사투리로는 지크프리트라고 불리는 영웅.
아버지인 시그문드의 복수를 하고자 왕국 하나를 무너뜨리고, 사악한 용 파프니르(Fáfnir)를 죽였으며, 발키리 브륀힐트와의 사랑이 엇갈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영웅이다.
전사 중의 전사.
전설 속에서나 듣던 그를 눈앞에 두자니, 심장이 떨려 왔다.
“아득한 후배가 옛 전설 속의 위대한 영웅을 뵙소!”
“…글쎄, 나는 아마 너의 전설 속 영웅이 아니리라.”
음? 그게 무슨 소리지?
의문을 풀 겨를도 없이 시구르드가 검을 들어 올렸다. 새까맣게 탄 시체의 앙상한 팔에 어울리지 않는 명검이 오싹한 번뜩임을 뿜어냈다.
“전사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고루하기 짝이 없는 결투의 시작이다. 하지만 나는 반갑게 소리쳤다.
“물푸레나무 부족의 붉은 늑대, ‘프레키’ 오디슨이외다.”
“‘프레키’? 이번에는 네가 열쇠인가. 그분도 참 무심하시지. 도대체 몇 개나 되는 세계를 공허로 쑤셔 박으셔야 만족하신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다.
하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구르드가 제대로 된 자세를 잡았다는 것이니.
“시그문드의 아들이자 아비이며, 파프니르의 목을 베어 낸 자이며,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은 자. 시구르드다.”
그람이 요사스럽게 서슬을 뽐낸다.
나도 창을 고쳐 쥐고, 몸을 낮춰 자세를 잡았다.
시구르드가 말했다.
“한번 겨뤄 보자꾸나. 젊은 전사여.”
검은 공허 아래.
구름 한 점이 바라보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