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71화 (71/208)

# 71

71화. 영웅은 구애받는다 (3)

채애앵!

투명한 막이 생겨나더니, 내 창을 가로막았다.

여자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무슨……!”

경악하는 그녀에게 나는 ‘진짜 전사’로서 한마디 했다.

“사악한 마녀가 주술을 부리는구나!”

채앵!

재차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다시 막힐 뿐.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여자의 놀란 눈망울에 심장이 찌릿 아파 왔다.

하지만 난 전사다. 기괴한 주술로 내 마음을 움직이려 한들, 전사의 마음은 창보다 꼿꼿하다.

“잠깐! 멈춰요! 당신의 창으로 이걸 뚫을 순 없어요!”

“뚫을 수 없다?”

자존심이 상했다.

전사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

제국의 철갑기사들도 그랬다.

그들은 창을 우습게 보고, 제 철갑을 믿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놈들의 매끈한 갑옷이 좁디좁은 감옥이 될 정도로 두들겼다. 팔다리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기사 놈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답답하다고 울어 댔다.

이 여자도 그렇게 만들어 주리라.

“흐으으읍!”

팔뚝 힘줄이 울룩불룩 솟는다. 쭉 잡아당긴 창을 그대로 쏘아 낸다.

검은 번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절기를 그대로 여자에게 쏟아부었다.

쩌억-!

“꺄아아악!”

여자가 비명을 내지르고, 그녀의 방어벽이 내 창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콰드드득!

후두둑, 파편이 흩날린다.

눈살을 구겼다.

“젠장할.”

터져나간 창 자루를 보며 쯧- 혀를 찼다.

베르&에타에서 경고했었다. 아누비스의 낫은 드베르그들도 놀랄 정도로 강인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근데 너무 강해. 창촉이 어떻게 버티더라도, 창 자루가 버틸지 의문이야. 강한 만큼 반동이 세서, 반발력을 줄이는 것도 할 수 없고 말이야.’

자루가 부러질지도 모른다고.

아누비스의 낫을 가공하고, 창 자루를 다는 데에 2억 크로나나 줬건만! 이토록 허망하게 부서지다니.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또 돈이 깨지겠군.”

일단 다이스에서 싸구려 창이라도 하나 사다 써야겠다.

이전 창 값 2억 크로나는 헬께서 니플헤임 방어에 힘써 준 대가라며 대신 값을 치러 주셨다. 하지만 지금 또 이번 창 자루와 같은 걸 사다 쓴다?

그런 과소비는 할 수 없다.

허리를 숙여 창촉을 들었다.

꽤 길쭉하게 만들어진 창촉은 단검으로 쓸 만했다. 그걸 단검처럼 쥐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쉴드 마법이 금이 가다니…….”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이 갔다면 다음번에는 박살 낼 수 있겠지. 그녀에게 다가서자, 여자가 물러선다.

“자, 잠깐!”

“사악한 마녀와 할 말은 없다.”

창촉을 치켜 들 때,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은 왜 날 사랑하지 않죠?”

그 말에 우뚝 굳었다.

이 여자를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그녀는 분명 매력적이다.

순박한 눈망울은 언제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슬픔이 서린 와중에 별처럼 빛났다. 그 앙증맞은 코는 어찌나 귀여운가? 앵두를 닮은 입술 역시 그렇다.

얼굴 외의 다른 부분이 못났는가? 전혀 아니다.

풍만한 가슴과 매끈한 허리, 그리고 거기에서 이어지는 부드러운 엉덩이는 탐욕을 자극했다.

심장이 찌릿 아렸다.

“흥!”

떨쳐 냈다.

이를 갈던 적도 평화 협정을 맺었다면 죽이지 않는다. 적당히 패 주는 거야, 감정을 푸는 방법일 뿐이다.

전사의 무기는 적아를 확실히 가려야 했고, 지난 원한은 금방 잊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사는 온갖 사건사고의 원인이 되리라.

그와 마찬가지다.

사랑도 지났다면 잊어야 하리라.

“당신은 분명 모두에게 사랑받을 만한 여자요. 지나치게 아름답지. 아마 신들도, 인간들도, 혹은 거인이나 드베르그도 당신을 사랑할 거요. 맹수도 당신 앞에서 이빨과 발톱을 숨길지도 모르지.”

문득, 한 여신이 떠올랐다.

“…꼭, 프레이야 같군.”

여자가 움찔 몸을 떨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아요, 저예요.”

* * *

여자는 딱-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이 풀린다.

흔한 갈색 머리가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이 되었고, 순박하던 눈매가 요염하게 바뀌었다. 앙증맞던 코는 오뚝하게 변했으며, 상큼한 앵두 같던 입술은 먹음직스러울 정도로 붉게 변했다.

이전에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넋을 놓을 지경이 되었다.

목에서 짤랑 이는 브리싱가멘이 없더라도,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까? 모두가 그녀의 화려한 모습에 정신이 팔려 전쟁을 일으키리라.

“후우.”

여자, 아니 프레이야가 한숨을 쉬었다.

오디슨이 눈을 끔뻑였다.

“…저라니, 네가 누군데 그러지?”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날붙이를 내렸다.

언뜻 보기에도 고귀해 보이는 여자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갈 수 없었다. ‘진짜 전사’라고 할지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아름다운 걸 박살 내진 않는다.

혹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그 아름다움이 지나치다면 주저한다.

지금의 오디슨이 그랬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프레이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미의 여신, 오디슨이 아무리 막 나가는 바보라고 할지라도 감히 압도적인 미(美)를 거부할 수 있을까?

“뇨르드의 딸, 프레이의 누이, 가장 아름다운 여신. 세스룸니르의 주인이자, 에인헤랴르 절반을 나누어 가진 자. 그게 바로 나예요.”

프레이야는 생각했다.

‘오디슨이 아무리 건방지다고 한들, 내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 수는 없지. 강한 남자가 좋기는 하지만…….’

강한 남자를 굴복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프레이야의 빙그레 웃었다. 세상 모두가 열광하는 그녀의 웃음 앞에서 오디슨은 그녀의 생각과 다른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신들은 모두 이런가?”

오디슨은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프레이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눈빛, 익숙하다.

이제까지 수없이 떠올려 왔던 남편과의 마지막 대화, 그때 남편이 보인 눈빛이었다. 그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남편과 같은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씁쓸하고 살짝은 흔들리는 눈빛.

“뭐, 뭐가 말이죠?”

프레이야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대하지 않던 남편의 잔재를 보았다.

프레이야는 때때로 생각했다.

‘모험심 넘치던 오드는 제 모험심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프레이야의 눈에 기대가 가득 찼다.

혹여나 오드의 환생이 아닐까? 프레이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오디슨은 그까짓 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지만, 발할라에서 본 신들은 대부분 오만하기 그지없더군. 너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들의 민낯은 추악했다. 티르는 옹졸했고, 비다르는 졸렬했으며, 너는 어리석다.”

프레이야가 기대하던 말이 아니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린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자신만만하고, 매혹적인 여신은 차마 그 불안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드의 단서가 되는 불안이었다.

문득 그 옛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살짝 색이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선명하기 그지없는 기억이다.

‘오드, 꼭 떠나야 하나요? 모험 같은 건 안 해도 되잖아요.’

프레이야는 남편 오드의 옷자락을 잡고 물었다.

그는 원래 모험심이 넘치는 신이었다. 점점 그 모험의 빈도와 기간이 늘어난다는 게 문제였다.

오드는 쓰게 웃으며 프레이야의 손을 쓰다듬었다.

‘넌 아름다워, 프레이야. 언제나 아름다워서 눈이 부실 정도지.’

‘그런데 왜 떠나는 건가요, 오드? 전 당신의 아내예요. 제 아름다움은 모두 당신을 위한 거예요.’

오드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난 무서워. 아름다운 꽃에 질릴까 봐. 세상을 봐, 하늘은 얼마나 아름답고 높은 설산은 얼마나 아름다워? 하지만 매일 그걸 보다 보니, 하늘의 아름다움을 까먹어. 설산의 험난함을 매도하지. 그게 두려워. 하지만 프레이야.’

오드가 프레이야를 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바닥을 보고 걷다 하늘을 봤을 때,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듯, 나도 널 늘 아름답게 보고 싶어. 그래서 떠나는 거야.’

프레이야는 오드를 말리지 못했다. 불안함에 그에게 따져 묻지 못했다.

더 아름다워져서 그가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생각했건만, 오드는 그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아름답다 칭송했지만, 가장 사랑하는 이의 칭찬은 듣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를 찾을 단서가 눈앞에 있었다. 남편과 같은 눈빛을 한 전사.

그의 말을 되새겼다.

“…신들의 민낯이라니…….”

더듬더듬 물었다.

오디슨은 차갑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제 정체를 밝히는 걸로 사랑 받을 거라 믿었나? 꺼져라, 프레이야! 네 음탕한 몸뚱이를 달래 줄 바보는 여기에 없다!”

“…윽.”

프레이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남편, 오드의 눈빛을 드디어 알아챘다. 그는 쓰게 웃으며 좋게 말했지만…….

결국, 프레이야에게 질린 것이다.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오만함과 멍청함, 음탕함에 떠나간 것이다.

오드는 애시르 신족, 그리고 프레이야는 바나 신족.

애시르 신족들은 언제나 그랬다. 바나 신족을 보고 음탕하고 역겹다 욕했다. 차마 가장 아름다운 프레이야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는 없었지만…….

그 아름다움에 익숙해진 남편이라면?

바나 신족은 남편 외의 애인을 두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근친혼을 자주 해 근친상간에 거부감이 없었다. 프레이야 역시 프레이와 수차례 몸을 섞기도 했다.

‘…아, 오드.’

프레이야는 멍하니 떠나는 오디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투기장으로 향했다.

오드도 그랬을까? 배신감에 떠나버린 걸까?

“그랬을까……?”

그녀는 오디슨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고양이 마차에 몸을 싣고 세스룸니르로 돌아왔다.

마차 안에 설치된 TV가 홀로 떠들어 댔다.

[오늘 재밌는 소식이 하나 있는데요. 저희 ‘싸움의 법칙’에서 단독 입수한 소식입니다!]

[어머, 그게 뭐예요?]

스노리와 괴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댔다. 스노리는 껄껄 웃으며 화면 보시죠- 하고 말을 돌렸다.

화면에 떠오른 얼굴에 프레이야가 정신을 차리고 흠칫 놀랐다.

“아.”

오디슨이었다. 뒤로 보이는 곳은 허름한 식당.

그는 뚱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나와 싸우려 하지 않는 게 결국, 이겨서 얻는 것보다 지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내게 이겼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을 더해 주겠다.]

오디슨이 말했지만, 프레이야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그가 뱉었던 날 선 비난이 떠올랐다.

부르르, 프레이야가 몸을 떨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그렇게 대놓고 비난을 쏟지 않았다.

원 역사에서는 로키가 그녀를 두고 ‘오빠와 붙어먹는 음탕한 년’이라고 매도하겠지만, 오딘이 회귀하면서 바뀐 역사다

프레이야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나를 오만하고 음탕하다고 비난한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두고 봐요, 오디슨.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게 만들고야 말 테니!’

프레이야가 의욕을 불태울 때, TV 속 오디슨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내게 승리한다면 내가 1억 크로나를 더 얹어 주지. 게다가 1대 2, 1대 3이든 상관없다. 그러니…….]

오디슨이 거만하게 씩 웃었다.

그 웃음에 프레이야는 마음을 빼앗겼다.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프레이야의 심장이 오랜만에 거세게 흔들렸다.

오디슨이 외쳤다.

[덤벼라, 겁쟁이들아! 난 도망치지 않는다!]

거친 도발이었다.

오디슨의 인터뷰가 끝나고, 스노리와 괴르가 다시 화면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 다 혀를 내둘렀다.

[정말 자신감이 대단하네요.]

[…뭐, M300R에서는 상대가 없으니까요.]

그때, 마차가 멈췄다.

프레이야는 내릴 채비를 했다.

오디슨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준비할 것들이 필요했다. 볼바의 가장 강력한 주술, 셰이드를 펼칠 생각이었다.

‘셰이드를 펼친다면, 그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프레이야는 명품을 얻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셈이다.

“…음?”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마차가 멈추면 고양이들이 달려와 문을 열어야 한다. 고양이들이 바쁘더라도, 세스룸니르에 기거하는 전사들이 프레이야를 칭송하리라.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뭐야.”

프레이야가 입술을 삐죽이고 마차 문을 열었다.

한 바탕 짜증을 부릴 셈이었다. 하지만 문밖의 풍경에 우뚝 굳었다.

즐겁고 아름다운 세스룸니르가 싸늘한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창백한 풍경 속,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신이 하나.

프레이야가 멍하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헬.”

헬이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프레이야를 바라보았다.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프레이야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헬이 서슬 퍼런 칼날처럼 웃었다.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네, 프레이야.”

프레이야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을 전해 준 여신이자, 가장 강력한 볼바다. 그리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프레이야는 최고위 발키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니플헤임의 지배자인 헬이다.

발키리의 싸움법으로는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릴 수 없을 터.

“무, 무슨 이야기를…….”

아니, 이게 아니다.

언제나 당당해야 할 미의 여신이다.

프레이야가 버럭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세스룸니르를 꽁꽁 얼게 만들다니!”

헬이 씩 웃으며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새까맣게 변색된 반지가 그녀의 흰 약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웬 도둑고양이가 내 남자한테 꼬리를 쳐서 말이지.”

크레네 사건 이후, 헬은 철저한 방어 체계를 마련했다.

크레네와 이라호드, 둘만 해도 껄끄러운데… 정실 자리를 두고 다퉈야 할 여신?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프레이야, 세상에는 건드리면 안 되는 것도 있는 거야.”

헬의 분노가 세스룸니르에 한파를 몰고 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