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70화. 영웅은 구애받는다 (2)
“아, 그전에…….”
프레이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를 보필하기 위해 곁에 있던 집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턱시도와 닮은 털색을 가진 고양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지시 사항이라도?”
“내가 그래도 명색이 미의 여신이잖니.”
“명실상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집사가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 말했다.
고양이의 말에 프레이야가 후후 웃었다.
신계 연맹이 설립되면서, ‘세계 최고의 미녀’라는 말도 살짝 의미가 퇴색되었다. 각 신계에는 미의 여신들이 하나씩 있었고, 그에 필적하는 이들도 하나씩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집사 고양이는 개중 프레이야가 가장 아름답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후원 제안을 한 번 더 하는 게 좋겠지? 바로 가면 너무 경망스럽고 달아오른 것처럼 보이지 않겠어?”
집사 고양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늘 털을 빗느라 하루에 1시간 이상을 쓰는 탓에 털이 없었다면-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랬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털이 고마웠다.
‘후원을 두 번이나 제안하는 것만 해도, 꽤 달아오르신 거 아닌가?’
두툼한 털이 당황한 표정과 흐르는 땀을 숨겨 주었다.
하지만 그 당황도 곧 사라졌다. 프레이야가 빙긋 웃음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 줄래?”
웃으며 던지는 제안은 결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집사의 뇌리에 프레이야의 웃음만이 가득 찼다. 저 웃음을 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집사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그 뜻을 받들었다.
* * *
“오디슨의 복귀와 승리를 축하하며! 자, 건배!”
“건배!”
쨍! 테이블 위에서 술잔이 부딪쳐 맑은 소리를 냈다. 다른 이들의 잔에는 모두 황금빛 벌꿀주가 가득했건만, 내 잔에는 역시나 양철통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 밍밍한 술맛 나는 음료수를 또…….”
술도 아니고 물도 아닌 기괴하기 짝이 없는 액체가 가득한 작은 양철통.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이그나르가 낄낄 웃는다.
“너는 인마, 아직 술 마시려면 2년은 더 있어야 돼.”
“대장은 생일이 따뜻한 날이라 2년하고 반년 더 지나야 할걸요?”
“어, 그래? 거참 안됐군.”
큭큭, 이그나르가 웃었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녀석을 째려봤다. 분명 이라호드가 말하기를, 이그나르와 토르손은 고된 훈련을 하고 있다 했다.
토르손은 살이 꽤 빠졌지만, 이그나르는 아니다.
오히려 더 둥글둥글해졌다. 뱃살이 꼭 터질 것 같다.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으음!”
크레네가 비음을 흘렸다. 그녀는 내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눈을 반짝이는 게 입에 맞나 보다.
확실히 이그나르의 요리 솜씨는 좋다. 올림포스 출신의 입 짧은 님프도 감탄하게 하다니.
엘류드니르에서 깨작이는 그녀에게 맛이 없느냐 묻자, 크레네는 말했었다.
‘님프라서 그런지, 전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혹여 헬께서 들으실까 속닥거리던 게 선명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고기길래, 맛이 이래요?”
“크흐흐, 님프 아가씨가 맛을 볼 줄 아는구만? 오디슨 저놈 저거는 음식을 해 줘도 늘상 음… 하고 끝이란 말이지.”
“킥킥, 오디슨이 좀 무덤덤하긴 하죠. 근데…….”
크레네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오디슨? 입맛이 없어요? 혹시 술 때문에 삐쳤어요?”
술 때문에 삐치다니! 누굴 쪼잔한 놈으로 보는 건가!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술 때문에 삐친 게 아니라, 싸우고 싶어서 그럴걸요?”
“네? 낮에 싸웠잖아요!”
크레네의 말에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이기자마자 M300R 관리인한테 다음 싸움은 언제냐고 물었거든요.”
“…오디슨,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요?”
크레네가 날 달랬다.
기분이 이상했다. 크레네가 날 달랜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작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문제다. 나는 멋쩍은 웃음으로 이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이그나르나 토르손은 그렇지 않았다.
“저놈 저거 싸움 중독이야. 오늘 싸움이 뭔가 시시하다고 생각했을걸?”
“대장은 뭐… 부족에 있을 때도 싱겁게 끝난 싸움 다음에는 한 며칠간 혼자 뚱해 있었어요.”
두 녀석의 말에 크레네가 눈을 끔뻑였다.
“그, 니플헤임에 있는 부족민 때문이 아니었어요?”
“…아직 오디슨을 잘 모르시네.”
어째서인지 이라호드가 으스대며 말했다.
크레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연신 밍밍한 벌꿀주맛 음료수를 들이켰다.
“쯧…….”
입맛만 버렸다.
내가 지독한 싸움광이라 욕구불만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내 영혼이 다른 영혼을 갈구하며 허덕이기 때문일까?
사실 둘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나는 허기졌다.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 허기졌다.
료나디와의 싸움을 기대했으나, 그건 식전 수프 같은 느낌이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구이가 나오기 전 입맛을 돋우는 것.
하지만 만복감을 줘야 할 고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 관리인 자식.”
짜증을 부렸다.
승리를 거머쥐고 다음 싸움을 요구했을 때, 깐죽거리는 드베르그는 난색을 보였다.
‘싸움? 바로 또? 으음,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도전자가 없어서 문제라면 승급을 시켜 달라 말했다. 드베르그는 고개를 저었다.
‘승급하기엔 승점이 모자라.’
이기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나와 싸우지 않으려는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괴물이라도 상관없다 했건만…….”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드베르그 관리인은 이마에 땀을 주륵 흘리며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
‘그게, 요즘 괴물들이 상태가 영 안 좋아. 구제역인지 콜레라인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요즘 상태가 영 아니야.’
구제역은 분명 발굽 달린 동물이 걸리는 병이다. 부족에서도 소와 양을 키웠기에 안다. 콜레라는 뭔지 잘 모르겠지만, 전염병이겠지.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이 전염병에 골골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젠장, 작게 욕을 뱉었다. 이라호드가 날 달랬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싸움을 안 할 때 푹 쉬고, 훈련해야 싸움이 느는 법이잖아요.”
“글쎄… 실전이 최고의 훈련이라 배웠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죠.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오디슨 수준이 이제 M300R에서도 안 먹힐 수준인데. 그리고 요즘 괴물들 상태가 좀 안 좋은 건 사실이에요.”
그게 사실이라고?
눈을 끔뻑였다. 이그나르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듣자 하니 죄다 좀 안 좋다더라고. 거래하는 정육점에서도 상태가 괜찮은 녀석들만 도축하다 보니, 물건값을 많이 달라 하더라.”
“아, 나도 뉴스에서 봤어요. 그 뭐더라? 달이 문제라던가?”
토르손마저 아는 척을 했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어 내는 거지?
그에 관해 묻자,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TV.”
그 빌어먹을 놈의 마법 물품은 빠지질 않는군.
슬쩍 가게 한쪽에 있는 티브이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서는…….
[늪지머니 조아요.]
내가 나오고 있었다.
젠장할. 머리를 벅벅 긁다가 우뚝 멈췄다.
뇌리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흠, 티브이라.”
음? TV가 왜요? 오디슨도 이제 문명을 즐겨 볼 생각이에요? 그 훈련장에서도 좀 나와요. 인기가 그런 곳에 살다니, 좀 이상하잖아요.”
이라호드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훈련장이 뭐가 어때서 그런가? 집을 구하는 것보다 훨씬 싸다. 집이라는 게 원체 비싸야 말이지.
어쨌거나 나는 내가 떠올린 계획을 실천할 셈이었다.
“누구 하나 초대해도 될까?”
내 말에 모두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이라호드에게 한 사람을 불러 달라고 했다.
이라호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짜요? 저 그 사람 너무 오버해서 싫은데…….”
사실 나도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내 계획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 * *
만찬은 밤늦게 끝났다.
하루 장사를 완전히 접고 먹고 논 것이니 만큼, 이그나르에게 약간 미안했다. 하지만 이그나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네 덕에 우리 가게에 손님이 얼마나 늘었는데? 게다가 손님들이 네 승전 축하 파티 때문에 쉬었다고 하면, 얼마나 물어볼지 생각 안 해 봤어?’
뭘 묻느냐는 질문에 이그나르는 비릿한 미소만 띨 뿐,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음흉한 뚱땡이 같으니.
이라호드가 툭 내뱉었다.
“그 사람을 불러서 한 말은 좀 너무 갔어요.”
마지막에 초대한 사람에 대한 이야긴가? 그 남자는 잔뜩 취해서 걱정하지 말라며 제 가슴팍을 퉁퉁 치고 비틀대며 돌아갔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덤비지 않는 겁쟁이들 탓이지.”
“뭐… 답답한 건 알겠지만요. 사실 투기장 측에서도 골머리 좀 썩을걸요? 제일 인기 있는 투사인데, 위로 올리자니 실적이 너무 적고… 또 싸움을 더 붙이자니, 도전자가 없고.”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투기장을 세세하게 등급 나눠 놓은 이유가 무엇인가? 치열한 싸움을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닌가?
내가 강해졌으면 더 높은 곳으로 올려야 하는 게 맞다.
내 말에 이라호드가 쓰게 웃었다.
“뒤틀린 이야기죠. 비행 면허를 따야 비행할 수 있다는 것처럼요. 사실 날 줄 아는 사람에게 면허를 주는 게 맞잖아요? 그런데 반대가 됐죠.”
와 닿지 않는 비유다.
난 날 줄 모르니까. 대화가 끊어졌다.
가로등이 내리쬐는 공원, 찌륵찌륵- 이름 모를 풀벌레가 울었다.
“후우, 밤공기가 시원하네요.”
이라호드가 으읏- 하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바래다 줄 필요는 없는데.”
“도크알프한테 습격당한 거 잊었어요?”
“…뭐,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는다.”
이라호드가 고개를 저었다.
“오디슨이 당하는 게 문제라기보다는 사실, 오디슨이 당하고 난 뒤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서 문제예요. 당하고 그냥 가만있을 거예요?”
고개를 저었다.
“한 대 맞았으면 두 대 때려 주는 게 전사의 예의지.”
킥킥, 이라호드가 웃었다.
“사실… 저도 그게 나쁘다곤 생각 안 해요. 통쾌하잖아요.”
“그럼?”
“뭐, 위에서 시킨 거죠. 오디슨 좀 잘 챙겨라! -하고 말이에요.”
아아- 공직자의 설움이란. 이라호드가 술 냄새를 물씬 풍기며 한탄했다.
볼을 긁적였다. 그녀를 달래 주려 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말은 없었다.
내가 발키리였던 적은 없으니까, 발키리의 고충을 알 리가 없었다.
공원도 이제 거의 끝나 간다.
이 공원을 지나면 곧장 투기장이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이라호드가 입을 열었다.
“저, 오디슨.”
이라호드가 날 불렀다. 그녀를 바라보니, 술 탓인지 볼이 살짝 붉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다 말한다.
“훈련장에서 지내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메르키 놈은 까악까악 잔소리해 대지, 가구를 들여놓을 수 없어 팔다리를 뻗고 잔 게 언제 이야긴지 잘 기억도 안 난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먼지가 꽤 많은 곳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목이 컬컬하다.
그래도…….
“참아야지.”
부족민들을 위해.
이번에 받은 승리 수당은 컸다. 거의 3천만 크로나. 그런데 아슬라 아줌마와 라드게리타를 곧장 부를 수 없었다.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나처럼 훈련장에서 재울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적어도 천만에서 이천만 정도만 더 모아서 부르면 되리라.
“…좀 더 편한 데서 지내는 건 어때요, 예를 들면…….”
이라호드가 말을 멈췄다.
더 편한 곳? 고개를 갸웃했다.
이라호드가 달아오른 볼에 손부채질 했다.
“후우, 술을 마셔서 좀 덥네요.”
“그 더위가 그립군.”
“킥킥… 그렇다고 해도 안 돼요. 좀 더 참으라구요. 발키리 앞에서 발할라 법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죠?”
이라호드의 말에 입술을 이죽였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자리했다. 공원은 오싹할 만치 고요했다.
이라호드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혹시 오디슨이 괜찮다면, 우리 ㅈ…….”
“말이 씨가 된다더니… 또 습격인가?”
이라호드의 말을 끊고 툭 내뱉었다.
풀벌레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채다.
칫-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 로브를 걸친 여자가 있었다. 펑퍼짐한 로브로도 감출 수 없는 아름다운 곡선이 눈을 사로잡는다.
이라호드가 눈살을 와락 구겼다.
“…암살자?”
그에 로브를 입은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암살이라니, 그런 야만스러운 짓을.”
툭 내뱉는 목소리가 마치 쟁반 위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만 같았다.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린데……?”
“흐응, 한밤중에 데이트를 방해해서 좀 미안한데…….”
로브를 걸친 여자가 후드를 젖혔다.
찬란하다. 이 밤중에 갑자기 태양이 떠오른다 해도 저만큼 빛날까? 그녀는 존재 자체로 아름다웠고, 심장을 뒤흔드는 매력을 풍겼다.
은은하게 웃는 얼굴을 볼 때 정신이 멍해졌다.
여자가 말한다.
“오디슨, 내가 좀 빌려도 될까? 아무래도 발키리는 좀 불편해서 말이야.”
“오디슨을……?”
이라호드가 더듬더듬 말했다.
로브를 입은 여자가 빙긋 웃으며 부탁했다.
“자리를 좀 피해 줄래?”
이라호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알았어요.”
“정말 착한 아이구나.”
“헤, 헤헤…….”
여자의 칭찬에 이라호드는 웃음을 흘리고 그대로 공원을 떠났다.
여자가 날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요요한 빛을 흘리며 내게 다가왔다.
풍만한 가슴이 내 가슴팍에 닿아 뭉클하게 무너진다.
꿀꺽, 침을 삼켰다. 쿵쾅, 심장박동이 거세진다.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오디슨, 당신은 착한 아이죠? 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녀가 내 심장을 칼로 찌른다 할지라도, 나는 웃으며 받아들이리라.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에 빠졌다.
어릴 적 내가 키우려던 다람쥐, 라타토스크(내가 붙인 이름이다)보다 수천 배는 사랑스러운 여자다. 라타토스크는 결국 뭐가 문제였는지 시름시름 앓다 죽어 버렸지만, 이 여자는 그렇지 않으리라.
왜냐면, 내가 그녀를 가두는 게 아니니까.
“내 제의를 거절해서 얼마나 슬펐는지 알아요?”
제의? 무슨 말이지?
그녀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지자, 심장이 철렁했다.
뭐가 됐든 무조건 내가 잘못한 일이다.
그녀를 달래려 입을 열려 할 때, 그녀가 내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지금 별다른 말은 필요 없어요. 그저 하나만 물을게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묻는다면 나는 뭐라도 대답해 줄 수 있다.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 것이 되어 줄래요?”
그 말에 나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우리에 갇히는 다람쥐는 내가 되리라.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에 갇힌다면?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에 코를 박고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
여자를 와락 껴안으려 할 때, 그녀가 슬쩍 나를 밀쳤다.
그리고 킥킥 웃음을 흘렸다.
“대뜸 그런 식이라니… 당신은 진짜 남자네요.”
진짜, 남자? 우뚝 굳었다.
당연한 소리다. 남자에는 진짜 가짜가 없으니까.
아닌가? 토냐르를 생각하면 가짜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아… 이런 말은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나요?”
“…아니, 네가 하는 말이라면 모두 옳다…….”
여자에게 말하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후후후- 웃음을 흘렸다.
“그렇죠, 제 말은 언제나 옳아요.”
“물론…….”
“당신은 진짜 전사예요. 언제나, 늘. 나를 위해 무기를 드는 나만의 전사.”
진짜 전사. 그 말이 내 마음에 쿡 박혔다.
그 뒤에 따르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진짜 전사라는 단어가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 단어가 내게 법칙을 만든다. 내가 들어갈 틀을 만든다. 단어가 나를 정의한다.
머리가 맑아졌다.
“그러니… 응?”
툭, 그녀를 밀쳤다.
당황한 눈동자다.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야 한다.
“진짜, 전사.”
“…물론이죠. 당신은 진짜 전사예요. 그리고 진짜 전사는…….”
그래, 진짜 전사는…….
“마음을 가지고 노는 짓거리에 당하지 않지.”
“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쐐액! 나는 그녀의 가슴팍에 창을 내질렀다.